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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시 66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시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 · 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기타/시 2020.04.27

끝 너머

끝 너머 조성기 (소설가, 교수) 사람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끝을 끝내게 하시고, 실패를 실패케 하시고, 절망을 절망케 하시고, 사망을 사망케 하신 후 비로소 시작을 하십니다. 끝 너머에 시작이 있음을 바라보는 것이 새 출발입니다. 절망 너머에 소망이 있음을 바라보는 것이 희망입니다. 고통 너머에 환희가 있음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입니다. 죽음 너머에 부활의 생명이 있음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람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큰 실패와 어려움을 겪게 될 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시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났다 싶을 때 절망해 버립니다. 하..

기타/시 2020.03.16

그들이 처음 왔을 때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그 다음엔 사회주의자들을 숙청했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들을 숙청했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마르틴 뉘밀러 목사,

기타/시 2020.03.13

엄마가 많이 아파요

엄마가 많이 아파요 015B, 윤종신 엄마가 많이 아파요 그렇게 예민하신 데 우리를 보고 웃네요 이모가 오니 우네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땐 엄마랑 결혼 한댔죠 근데 엄마가 아픈데 아무것 해줄 수 없죠 엄마도 꿈이 많았죠 한 땐 예쁘고 젊었죠 우리가 뺏어 버렸죠 엄만 후회가 없대요 엄마는 아직 몰라요 시간이 이제 없단 걸 말해줄 수가 없어서 우린 거짓 희망만 주네요 언젠간 잘해 줘야지 그렇게 미뤄만 두다가 이렇게 헤어질 시간이 빨리 올 줄 몰랐죠 엄마 이제 나는 나는 어쩌죠 하루하루 빠르게 나빠져 가는 모습 나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차라리 잠을 주무시다가 편히 가시기만 바라죠 엄마가 좋아한 분당에서 다시 살게 해주고 싶었어 엄마가 고쳐달라 부탁한 카메라도 고쳐줄께 하느님 불쌍한 우리 엄마 한번만 살려주..

기타/시 2019.07.01

비상

비상 - 채정은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있지 그렇지만 나는 제자리로 오지 못했어.되돌아 나오는 길을 모르니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걱정에 온통 내 자신을 가둬두었지. 이젠 이런 내모습 나조차 불안해보여.어디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 싶어 감당할 수 없어서 버려둔 그 모든건 나를 기다리지 않고 떠났지. 그렇게 많은 걸 잃었지만 후회는 없어.그래서 더 멀리 갈 수 있다면 상처 받는 것보단 혼자를 택한거지.고독이 꼭 나쁜것은 아니야. 외로움은 나에게 누구도 말하지 않을 소중한걸 깨닫게 했으니까 이젠 세상에 나갈 수 있어.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줄거야. 그토록 오랫..

기타/시 2019.06.22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오 탁 번 고려대학교 정문에는 문패가 없다 서울대학교나 연세대학교 정문에는 커다란 동판 문패가 구릿빛 찬란하게 붙어있어서 누구나 그 대학의 이름을 쉽게 알 수 있지만 고려대학교 정문에는 문패가 없으니 이 대학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것 참 이상하다 이름도 없는 대학의 이름을 모두다 안다는 듯 아무도 이 대학의 이름을 물어본 사람도 없다 입학원서 들고 처음 찾아오는 고등학생들도 여기가 고려대학교 맞습니까 물어보지 않는다 매일 교문을 드나드는 수천 명의 학생들도 정문에 문패가 없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얼씨구절씨구 고려대학생 노릇 잘만 한다 그것 참 이상하다 개교한 지 일백 년이 다 되는 대학교 정문에 동판으로 만든 문패 하나 없다니? 그런데 정말로 더 이상한 일은 문패가 없다는 사실을 아..

기타/시 2019.06.05

메아 쿨파

메아 쿨파 - 심보선 너의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구나 너는 오늘 아침 기도를 올렸구나 지하철 건너편에 앉은 사람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조는 척하면서 얼굴에 매달린 새 한마리씩 죽이고 있을 때 너는 오늘 밤 기도를 올리려나 침대 머리맡엔 십자가도 없는데 너는 오늘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고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너는 운명이라는 신의 손목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려나 열두개의 언덕으로 몸을 감싸고 태초의 봄에 펼쳐진 벌판 엄마와 아이 둘뿐인 그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너는 간절한 기도를 올리려나 차가운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면 너의 얼굴은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처럼 한없이 그윽해지려나 너의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구나 너는 하루 종일 기도를 올렸구나 * 메아 쿨파 * -나..

기타/시 2019.03.28

피 ㅡ 심보선 오늘날 피를 제외하고는 따스함이 없다 피를 제외하고는 붉음도 없다 피가 의미 없는 물이라고 말하지 마라 마지막 절규가 터지기 전까지 피는 이 세계의 유일한 장미 장미를 손에서 놓지 마라 예전에 우리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여전히 같은 가사와 같은 선율 노래를 가장 잘 부르던 이들은 다 죽었다 노래를 멈추지 마라 지금까지 손이 나와 동행했다 어두운 골목에서 나를 이끌고 다리 난간에서 나를 버텨주었던 손 나는 손을 신뢰했다 사랑하는 이의 입에 밥을 떠먹였기에 내 몸 중에 가장 자주 피를 흘렸기에 장미를 손에서 놓지 마라 노래를 멈추지 마라 갓 지은 밥에서 피냄새가 나는지 맡아봐라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 하나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태양이 아닌 것 그러나 태양이라고 믿는 것 그쪽을 향해 걸어가라 마..

기타/시 2019.03.28

그 쇳물 쓰지 마라.

그 쇳물 쓰지 마라.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것이며철근도 만들지 말것이며가로등도 만들지 말것이며못을 만들지도 말것이며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살았을적 얼굴 찰흙으로 빚고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정성으로 다듬어정문 앞에 세워 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내새끼 얼굴 한번 만져 보자. 하게. * 댓글 시인으로 유명한 제페토 시인의 시입니다.2010년 한 철강업체에서 일하던 20대 청년이 섭씨 1,600도가 넘는 쇳물이 담긴 전기로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끔찍한 사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기타/시 201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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