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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믿음 본문

설교/히브리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

이창무 2018.12.02 14:13

2018 히브리서 제 11 강


세상을 이기는 믿음


말씀/ 히브리서 11:23-40

요절/ 히브리서 11: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우리가 잘 아는 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 후속편이 있다고 합니다. 또 다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가 열렸습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이기겠다고 다짐한 토끼는 각성제까지 복용하고 시합에 임했습니다. 토끼는 중간에 자지 않고 열심히 뛰었습니다. 토끼가 자랑스럽게 결승전을 통과하고 한 시간 뒤에야 거북이가 들어왔습니다. 이를 본 토끼가 승리를 외치려는 찰나 심판관이었던 호랑이가 이렇게 선언했다고 합니다. “토끼는 약물복용을 했으므로 실격패! 거북이 승” 이 이야기를 통해 승패는 선수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승리한 인생인가 패배한 인생인가’도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판단 기준이 전부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인생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최후의 판정을 내리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승리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태어날 당시 이스라엘은 지극히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히브리인이 아들을 낳으면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가족들은 모여서 두 손을 모아 기도했습니다. “딸 딸 딸”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모세의 엄마는 아들을 낳고 말았습니다. 이때 모세의 부모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이는 모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 부모 눈에 아름답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그런 이유라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자기 자식을 숨겼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이 단순히 모세가 아기 때부터 얼짱이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세의 부모는 믿음의 눈으로 아이에게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 소중한 아이를 살리려면 무시무시한 왕의 명령을 어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바로가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삶과 죽음, 구원과 심판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더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의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은 말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4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생모는 유모가 되어 모세를 키웠습니다. 덕분에 모세는 영유아시기에 조기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한편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의 특권도 누렸습니다. 애굽 국립대학 교수들에게 개인 지도를 받았습니다. 장군들에게서 군대통솔법과 무술을 배웠습니다. 고시를 안 봐도 낙하산 타고 고위직 공무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금수저를 너머 다이아몬드 수저를 입에 물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는 남모르는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 것인가?' 이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고 애굽의 왕자로 자라난 그에게는 피할 수 없는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기자 회견을 열었습니다. 왕자의 모든 특권을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입니까? 하루 종일 돌을 나르고 흙을 이겨야 하고, 조금만 잘못하면 욕을 먹고 채찍질을 당해야 노예 백성이었습니다. 이 길을 스스로 선택하다니요! 이 결단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금수저를 흙수저로 바꾸겠다는 아주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모세의 나이 40세로 이미 장성한 때였습니다. 결코 한 순간의 감상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결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런 결단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애굽에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이 잠시 죄악의 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멀리서 볼 때 궁전은 온갖 화려한 것이 가득한 곳처럼 보입니다. 그 곳에 사는 자들도 고귀하고 품격 높은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 내부는 권력을 잡기 위한 싸움과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였습니다. 수많은 왕들이 최측근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왕들도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면 부인과 친자식까지도 숙청해 버렸습니다. 또한 많은 것들이 죄의 낙에 불과했습니다. 쾌락을 위하여 술을 마시고, 각종 음란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순간적인 쾌락은 있을지 몰라도, 허무하고 아무 열매가 없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고난이 있지만 고난 속에 크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고난과 잠시 죄악의 낙’ 중에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았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은 것은 그리스도가 받는 수모에 비유됩니다. 모세의 삶은 예수님의 삶의 예고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권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가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죄악된 인간들과 함께 하기 위해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더럽고 누추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해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모진 고통을 겪으시고 죽으셨습니다. 모세가 받은 고난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치 있고 의미 있고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모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때에 하나님께서 상 주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시 강력한 제국이었던 애굽의 모든 보화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에 비하면 별 볼일 없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까? 계산기를 두들겨 보니까 답이 딱 나왔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은 반짝 상한가를 찍었다가 이내 상장 폐지될 작전주였습니다. 여기에 인생을 투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반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은 엄청난 초특급 우량주였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잠깐이지만 그 이후 영원한 하나님의 상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어느 날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을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민족애가 발동하여 애굽 사람을 때려 죽였습니다. 이 일을 바로가 알게 되어 모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광야 생활이 40년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왕자 생활은 지나간 옛 추억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광야에서 양 똥이나 치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의 삶은 실패한 것 같고, 후퇴한 것 같았습니다. 왕자 자리를 버리고 목숨을 걸고 동족을 구하려 한 결과가 이런 것인가? 생각할 때 서글퍼졌습니다. 하나님과 자기의 진심을 몰라준 사람들에 대한 원망에 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울화가 치밀어 계속 술을 마시다가 알코올중독자가 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주권을 믿고 믿음으로 인내하였습니다. 모세에게 왕궁에서의 40년은 지도자로써의 인간적 기초를 쌓는 과정이었습니다. 광야에서의 40년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로 쓰임 받기 위해 교만과 혈기를 없애는 과정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긴 시간을 믿음으로 잘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 결과 이후 40년 동안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필요한 겸손과 온유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은 뒤에 그 사진을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작업하는 것을 후보정(後補整)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포토샵으로 했는데 요즘에는 스마트폰 앱으로 간단히 후보정할 수 있습니다. 후보정하고 나면 잡티가 사라지고 얼굴이 갸름해지고 눈이 커집니다. 저는 히브리서에서 모세에 관한 부분을 읽으면서 저자가 후보정을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족을 위해 애굽 병사 하나를 몰래 쳐 죽인 사건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으로 의미부여가 되었습니다. 분명히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것인데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은 믿음으로 해석되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왜 이런 식으로 서술했을까요? 너무 미화시키는 것 아닐까요?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이 꽃피운 결과의 관점에서 앞의 일들을 새롭게 돌아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파리가 두 개 밖에 없는 떡잎을 보면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라서 나팔꽃이 될 것을 안다면 얼마든지 나팔꽃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하는 믿음의 결단도 그렇습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을만한 무슨 대단한 결단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전 처음으로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서 친구에게 너도 성경 공부를 해 보라고 권유합니다. 사귀자고 접근해 오는 형제를 믿음으로 뿌리칩니다. 사실은 그 형제가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가 더 클 수도 있습니다. 떡잎처럼 연약하고 작은 믿음일지라도 믿음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자라서 언젠가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날이 옵니다. 그때가 되면 주님께서 친히 후보정을 해 주십니다. 잡티를 제거해 주십니다. 다만 믿음을 크게 보시고 인정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거칠고 힘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모세를 통해 주님께서 북돋으려 하신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 믿음은 거절할 것을 거절하고 선택할 것을 선택하는 믿음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죄의 낙을 즐길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을 것이냐?' 둘 중 하나를 거절하고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희생과 조롱과 핍박을 받는 고난의 삶을 살든지, 세상의 죄악의 낙을 택하든지 둘 중 하나를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부터 17까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아버지의 사랑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이 우리를 즐겁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 뿐이고 곧 사라지고 허무감만 남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행복합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더 알고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고 성령님을 더 많이 체험하는 삶이 신앙의 참된 상급입니다. 고난 속에서 예수님 형상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상입니다. 우리가 잠시 죄의 낙, 세상 낙을 누리기를 거절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진정한 상급이신 예수님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8절과 29절은 믿음으로 이룬 출애굽의 역사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출애굽 전날 모세는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애굽 땅에서 장자를 죽일 때 어린양의 피가 뿌려진 집을 넘어가리라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장자를 멸하는 자가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출애굽한 이스라엘 앞에 시퍼런 홍해 바다가 놓였습니다. 뒤에는 바로가 특별 병거 600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모아서 바퀴에 먼지를 내뿜으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때 모세가 지팡이를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큰 동풍이 밤새도록 불어와 바닷물이 물러가고 물은 좌우에 벽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노예가 되더라도 살기 위해서 뒤로 돌아가야 할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좌우의 물 벽을 볼 때 200만의 백성이 다 지날 때까지 그대로 있을지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모두 아무 탈 없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애굽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으니 우리도 할 수 있다.’ 하면서 시험하다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30절과 31절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있었던 믿음의 역사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고자 할 때, 처음으로 정복해야 할 대상은 여리고성이었습니다. 성을 공략하려면 공성장치나 투석기와 같은 첨단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땅굴이나 트로이 목마와 같은 기묘한 작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6일 동안을 매일 1바퀴씩 성을 돌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7일째는 7바퀴를 돌고 난후 함께 큰 소리를 외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약속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하신 그대로 성을 돌았습니다. 속으로야 '내가 뭐 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해서 되겠어?' 이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하셨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닥치고 순종한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원래 라합의 직업은 여리고 성에서 술을 파는 마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들었을 때 그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참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동족 편에 서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습니다. 이 행위는 여리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적행위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라합은 순종하지 않던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않으므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더 나아가 메시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스런 인물이 되었습니다(마1:5).


출애굽과 여리고성 정복 사건을 통해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우리의 생각의 틀을 깨고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붙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앞에 인생의 시퍼런 홍해가 있습니까?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있습니까? 이럴 때 우리 생각의 틀 속에서만 바라보면 사방이 꽉 막혀 길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짜증이 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고속도로가 꽉 막혀 있어도 갓길은 열려 있듯이, 우리 인생길이 꽉 막힌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여시는 갓길이 있습니다. 여기서 갓길이란 하나님(God)의 길이란 뜻입니다. 고속도로 갓길은 가서는 안 되는 길이지만 하나님의 길, 갓길은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가야할 길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월등한 무기입니까? 대규모 물량 공세입니까? 천재적인 작전입니까? 이런 것은 우리의 무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무기는 믿음과 순종입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저자는 이제까지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라합까지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행한 역사를 열거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고, 또 더 많이 남아있지만 이런 식으로 다 열거하다가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총괄적으로 기록합니다. 이를 믿음으로 이룬 외적인 승리와 내적인 승리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이룬 외적인 승리입니다(32-35a). 32절에 언급된 믿음의 용사들은 대부분 사사들입니다.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 타작 하던 두려움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큰 용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고 도전했습니다. 그때 300명의 정예부대로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미디안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바락은 여선지자 드보라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두려움에 떨던 마마 보이였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을 때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날 때부터 천하 장사였던 삼손은 불여우 같은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겨 눈이 멀었습니다. 하지만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블레셋 진영을 무너뜨렸습니다.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요 서자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라의 위기의 때에 믿음으로 민족을 구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히브리서 저자는 사람의 이름도 생략한 채 믿음의 사람들이 이룬 역사에 대해서만 열거합니다. 33-35a을 보십시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부족하고 연약한 보통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은 패배자로 인생을 마칠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어진 운명과 조건들을 극복하고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둘째, 믿음으로 이룬 내적인 승리입니다(35b-40). 35b~38절을 보십시오. 선지자 예레미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이유로 지도자들에게 잡혀 진흙 구덩이 속에 던져졌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톱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언자 우리야는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사명을 감당했고, 엘리야와 엘리사는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집을 버리고 광야나 동굴이나 지하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은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그들은 이런 박해와 환난, 심지어는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런 극한의 고통 속해서도 그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서 나는 것입니까? 35b절을 보십시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고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더 좋은 부활을 위해 자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을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정의했습니다. 38a절을 보십시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원어로 이 구절을 보면 ‘세상이 이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라는 뜻입니다. 광야와 동굴과 토굴에 유리했던 그들의 삶이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그러면 왕궁 정도라면 그들에게 어울릴까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 사람들에게 세상 어디도 살기 적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이 땅이 참된 거처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구차하게 고난을 피해 살려 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은 본향,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이 그들의 참 소망이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런 소망을 두지 않은 사람을 세상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돈으로도 명예로도 권력으로도 쾌락으로도 그들을 넘어지게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박해와 환난, 아픔과 죽음도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39,40절을 보십시오. 믿음의 선진들은 각자의 다양한 인생길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곧 그들이 간절히 바라고 기다렸던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더 좋은 것 곧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됐습니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은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신약의 신자들은 오신 메시아를 믿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구약의 선진들의 믿음과 신약의 우리의 믿음이 합하여 온전함을 이르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지난 가을 수양회 때 제가 속한 팀에서는 운동 시합을 했습니다. 마지막 경기가 릴레이, 계주였습니다. 릴레이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주자가 마지막 주자입니다. 마지막 주자가 넘어져 버리면 앞 선 주자들의 모든 수고가 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 반면 마지막 주자가 열심히 달려서 골인 점에 들어오면 앞선 주자들이 기쁨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달려 나가 부둥켜안고 등을 두드려 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마지막 주자들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골인 지점을 멀리서 희미하게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맡은 구간을 책임지고 끝까지 달렸습니다. 넘어져도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서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기드온, 삼손, 바락, 입다, 다윗,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그 외에도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산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바통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우리 앞에는 우리의 상급 그 자체가 되시는 우리의 사모하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끄시고 연약할 때 새 힘주시고 지칠 때 위로하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우리 위에는 이 모든 순례의 길을 계획하시고 완성하실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완주할 수 있습니다. 이 길에서의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마침내 신앙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한 자리에 우리의 이름도 올리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는 이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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