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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본문

설교/히브리서

믿음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이창무 2018.11.25 20:14

2018년 히브리서 제 10 강


믿음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말씀 / 히브리서 11:1 - 22

요절 /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영국 런던에 가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 불리는 유명한 성공회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의 독특한 점은 성당 내부에 무덤이 있다는 점입니다. 복도 바닥 아래에 시신을 안치하고 그 위에 비석을 덮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비석을 절대로 밟지 않고 빙 돌아서 다닌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아무나 묻힐 수가 없습니다. 주로 왕족이거나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만 묻힐 수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여기 묻힌 사람은 올해 3월에 사망한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신앙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고 불리는 장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앞으로 2주간 배우게 될 히브리서 11장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영웅들이 이곳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지만,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영웅들의 살아있는 믿음으로 인해 생명이 약동하는 곳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사람들은 세상에서 명성을 떨쳤거나 위대한 업적을 쌓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히브리서 11장 말씀공부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용사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0장 39절에서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제 11장에서 이 믿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은 믿음의 정의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바라는 것은 미래적인 것인데 그것을 현재의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다시 한 번 부연 설명한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보이지 않던 것을 믿음의 안경을 쓰게 되면 볼 수 있게 됩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믿음은 먼저 바라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지금 수험생들은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입학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졸업을 앞 둔 대학생들은 안정적이고 보수가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다시 건강을 되찾는 것이 소원입니다. 한 목자님은 좀 더 넓은 집에서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바라는 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라는 대로 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바라는 것은 결국 실체가 없는 허상이 아닐까요? 그냥 신기루 같은 것 아닐까요?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마치 현재 내가 이미 손에 쥐고 있는 실체처럼 여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믿음이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혹시 정신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 바라는 것들이 만약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라면 믿음이나 긍정의 심리학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바라는 것들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이루어질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확률 게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은 정신 승리도 아니고 긍정의 심리학도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약속하신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래 전 안티 크리스천이었던 시절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고 하지. 그런데 나는 바로 그 무를 창조한 사람이다. 그래서 내 이름이 ‘창무’인거야." 이런 헛소리를 하고도 벼락을 맞지 않고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는 것이 정말이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정확한 말입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말씀으로 보이는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곧 현실이 됩니다. 현실이 되는 시점이 지금 당장일 수도 있고 십 년 후일수도 있고 백년 후일수도 있습니다. 그 시점이 언제이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치 현재 그것을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보는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은행에서 지급을 보증한 보증 수표가 현금과 똑같이 쓰이는 것과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 말고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또 다른 현실 속에서 사는 사람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인간에게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감 이렇게 다섯 개의 감각이 있습니다. 이 오감으로 세상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이것 말고도 여섯 번째 감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식스 센스라고 말합니다. 이 여섯 번째 감각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현실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섯 개의 감각만으로 현실을 경험하는데 믿음의 사람은 여섯 개의 감각으로 현실을 경험합니다. 누가 더 현실을 풍성하고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당연히 믿음이란 육감을 가진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 믿음을 비현실적이거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은 크나큰 오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형제가 믿음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말을 최근에 들었습니다. 그 형제의 어려운 형편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믿음과 현실은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이 가장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도리어 믿음 없이 보이는 현실만을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이 더 비현실적인 사람입니다. 진정한 현실주의자가 누구입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현실에 눈을 뜬 사람, 바로 그 사람입니다.


실제 이런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살았다고 인증 도장을 찍어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구약 성경에는 믿음으로 살았던 여러 선배님들이 등장합니다. 믿음은 교과서로만 배우면 이론에 그치고 맙니다. 믿음이 우리 삶이 되려면 우리 앞서 가신 선배님들이 어떻게 믿음의 삶을 살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 많은 선배들 중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고심 끝에 엄선한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첫번째 그룹에 아벨과 에녹과 노아가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전부 아담의 범죄 이후 아브라함이 부르심이 받기 전까지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을까요? 아벨의 제물은 고기였고 가인의 제물은 곡식이었기 때문일까요? 하나님도 고기를 더 좋아하시나요? 그런 것이 아니라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아무런 기대도 없이 때우는 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는 식으로 오만불손한 자세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또한 믿음의 눈으로 보니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눈앞에서 계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에게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벨은 시기심에 눈이 먼 가인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아벨은 살아 있을 때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죽음으로 후손들에게 믿음과 의에 관한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벨과 여러 면에 대조되는 사람이 에녹입니다. 5절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아벨과 달리 삼백년이 넘도록 오래 살았습니다. 아예 죽음을 경험하질 않았습니다. 살아생전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창세기에는 이 증거를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녹이 가졌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은 너무 기본적인 믿음이 아닐까요? 게다가 상을 바라다니 좀 유치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상황이 좋을 때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직후에는 북 치고 꽹과리를 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물과 식량이 다 떨어지고 길이 험해지자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무려 삼백년이 넘도록 살았습니다. 그 사이에 좋은 날만 있었겠습니까? 궂은 날, 힘든 날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오락가락하지 않고 일관되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 하나 없는 시대에 홀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에녹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산 사람을 반드시 축복하시고 상급을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대로 에녹은 엘리야와 함께 인류 역사에 단 두 명만이 누려 본 죽음의 면제라는 큰 상급을 받았습니다.


다음 사람은 노아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가 살던 시대는 땅 위에 거하는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시대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장차 홍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노아는 말씀대로 장래에 반드시 임할 심판을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설계도대로 방주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가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산꼭대기 위에서 열심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를 만들면서 노아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홍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이 방주로 들어오라고 외쳤습니다. 이때 그들이 노아를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헛소리 하는 노망 난 늙은이, 미치광이, 또라이 취급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를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노아의 삶이 의와 죄를 판단하는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아벨, 에녹, 노아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이들의 공통점이 고독입니다. 아벨은 홀로 믿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가인은 친형이지만 아벨을 죽일 정도로 미워했습니다. 에녹은 외롭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얼마나 하루하루 고독과 싸우며 고생을 많이 했으면 하나님께서 죽음을 면제시켜주셨겠습니까? 노아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홀로 방주 짓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는 그래도 가문이나 민족이 믿음의 대열에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적진 한 가운데 혼자 떨어진 공수 부대원처럼 외롭게 믿음의 길을 갔습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인정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믿음의 삶을 사는데 겪는 어려가지 고충을 공감해 주고 이해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때로는 뼈 속까지 고독이 사무쳐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떻게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었을까요? 이 세 사람의 이야기 속에는 유난히 '증거를 얻었으니' '증언하심이라' '증거를 받았느니라'와 같이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누가 증언하고 증거를 주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주목해 보고 계셨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것 같았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나를 기쁘게 했다.' '너는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인정하셨습니다. 믿음의 인생을 산 그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기 때문에 서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넘치도록 보상해 주셨기 때문에 억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센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는 믿음 때문에 고독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이 크게 외로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조금만 센터를 떠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정반대가 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곳에서 혼자 믿음으로 살려니 얼마나 외롭습니까?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문제를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 끙끙댈 때가 많습니다. 저는 엘지에서 인사부에서 근무했었습니다. 인사부의 특성 상 회사 내의 정보를 많이 모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정보는 주로 술자리 아니면 주말의 레저 활동을 함께 하면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믿음으로 산다고 이 두 가지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은 다 아는데 저만 모르고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이러다가 무능한 직원으로 낙인 찍혀 승진 길도 다 막히는 것이 아닌가? 염려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사람의 인정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인정을 구할 것인가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이때 두 눈 딱 감고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기로 결단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니까 염려도 사라지고 자유로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침 임원들의 인사를 맡을 실무자가 필요했는데 가장 중요한 요건이 기밀 유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장님은 제가 술자리도 안 가고 직원들이랑 놀러가지도 않기 때문에 가장 비밀을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지목을 하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인사부의 핵심 요직인 임원 인사를 맡게 되었고 동기들 중에 가장 먼저 대리로 진급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에 수반되는 고독을 극복하지 못하면 세상과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에 동화되고 맙니다. 고독을 극복하려면 길은 단 하나, 힘써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는 것뿐입니다. 세상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음의 선진들 중에서 두 번째 그룹에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인물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를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땅에서 영주권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무엇으로 먹고 살 수 있는지도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너무나 막연하고 위험 부담이 커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아무런 보장도 없는 가나안 땅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이를 볼 때 믿음은 모험을 동반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예측 가능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믿음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과감하게 한 발을 떼어놓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들어온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9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삼 대가 함께 장막생활을 했습니다. 이 땅이 약속의 땅인데 왜 아브라함은 장막 생활을 했을까요? 믿음이 있다면 도리어 땅을 많이 사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이에 대해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0)" 이 성은 16절에 나오는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가리킵니다. 가나안이 아무리 약속의 땅이라도 여전히 땅에 속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아브라함이 들어갈 본향집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간절히 사모하는 본향집은 하늘 나라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어딜 가나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집 문제보다 아브라함에게 더 절실한 문제는 자녀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은 아내인 사라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을 임신했을 때 사라의 나이가 89세였습니다. 그 나이에 어떻게 자녀를 출산할 수 있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그 결과 죽은 자와 같았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하늘의 허다한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을 얻게 해 줄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보다 이삭을 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다면 불순종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기꺼이 번제로 드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삭은 약속으로 받은 아들이기 때문에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도 폐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 스스로 폐기시키실 수 있을까?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생각하되 믿음에 기초해서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답은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이삭이 번제단 위에서 죽게 된다면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이삭을 살리실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의 기초 위에서 깊이 생각한 아브라함은 믿음의 최고봉이라는 부활 신앙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무리 믿음의 최고봉에 이르렀다 해도 자기 대에서 끝났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성취를 이룰 때까지 대를 이어서 계승되어야만 했습니다. 시작하는 것도 어려운 일지만 계승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큰 부를 쌓은 부자라 하더라도 길어야 삼대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이 후손들에게 계승될 수 있었을까요? 이것 역시 믿음의 역사였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후손들이 한심하게만 보이고 소망을 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믿음으로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약속을 믿고 축복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장차 이루어질 출애굽 사건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사람과 상황만 보면 이런 유언을 남기기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대로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저는 올해 모두 13개 센터를 돌며 순회 교육을 받았습니다. 각 센터에서 많은 목자님들, 사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하였습니다. 그때 가장 높은 빈도수로 접하게 된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이 다섯 사람들의 이름이었습니다. 한 센터에서는 사라가 너무 많아서 큰 사라, 작은 사라,  영 사라, 그냥 사라 등등으로 식별할 정도였습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흠모하는 인물이 된 것입니까? 거대한 제국의 왕과 왕비였습니까? 아니면 무슨 탁월한 업적을 인류 역사에 남겼습니까?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들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로서 이를 시작하고 이루고 계승하는 역사 가운데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게 평가하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높게 평가하셨습니까? 1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우셨으면 자신의 이름으로 삼으셨겠습니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허물과 약점과 실수가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집안의 장기는 아내를 누이라 속이기, 자식 하나만 편애하기 등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것은 보지 않으셨습니다. 만 가지가 부족하더라도 한 가지 믿음만을 보셨습니다. 그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위해 하늘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을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영원한 본향은 예수님이 자기 피로 들어가신 하늘 지성소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영원한 아버지의 집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나그네 길을 마친 후에는 영광스런 그 성에 들어갈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좋은 선물을 상으로 주십니다. 돈이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외모가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실력이 딸려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면 안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믿음이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나그네 길을 마친 후 영광에 들어가게 합니다. 믿음이 승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기도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않고 믿음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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