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성탄절

아기께 경배하세

이창무 2017. 12. 2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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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성탄 제 2 강


아기께 경배하세


말씀 / 마태복음 2:1-12

요절 / 마태복음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미국에서 해마다 열리는 패션 컨퍼런스(Passion Conference)라는 대회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영어 Passion은 열정이라는 뜻도 있고 고난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대회는 죄인을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을 향한 열정을 넘치게 하자는 취지로 미국 대학생들이 수천 명 이상 모이는 행사로서 우리의 학생 수양회와 비슷합니다. 제가 우연히 이 대회 녹화 영상을 보다가 크게 감동 받은 적이 있습니다. 수천 명이 야외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비가 억수 같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이들이 열심히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노래를 부르던 찬양 인도자가 가사에 깊이 감명을 받았는지 갑자기 무대 위에서 엎드려버렸습니다. 대충 엎드린 것이 아니라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바짝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누가 신호를 준 것도 아닌데 동시에 그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땅바닥에 엎드렸습니다. 물론 바닥은 비와 흙이 뒤엉켜 진흙투성이이었습니다. 모두가 진흙탕에 얼굴을 파묻은 것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엎드려 있다가 하나 둘 씩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진흙 범벅이 된 얼굴에 빗물이 흐르면서 조금씩 얼굴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때까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가장 순수한 기쁨의 표정이 그 모두의 얼굴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머리카락과 옷은 엉망진창인데 그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저는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알 수 없는 예배자의 기쁨임을 발견했습니다. 천국이 왜 천국일까 생각해 보니 이런 예배의 기쁨이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성탄이 기쁜 성탄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 역시 우리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곁다리고 부가적인 것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이 비추는 그 길을 따라가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께 합당한 경배와 예물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 1998년 우리나라가 IMF의 구제 금융을 받던 시절이 기억나십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기업이 넘어지고 거리에 실직자가 넘쳐났습니다.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IMF 때에'라고 하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 때가 어떤 시절이었는지 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 '헤롯 왕 때에'라고만 하면 암울한 느낌이 확 몰려왔습니다. 헤롯은 원래 유대인이 아닌 이두매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의 왕이 될 자격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로비를 해서 겨우겨우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자격지심 때문일까요? 그는 삼촌과 장모, 심지어 아내와 두 아들까지 죽일 정도로 의심이 많았고 성품이 잔인했습니다. 헤롯왕의 공포 정치, 부패 정치의 어두운 그림자가 시대를 덮고 있던 그 때에 예수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던 대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은 말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이제 남은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이 이 빛에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바로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었습니다. 동방은 다니엘의 주 활동 무대였던 바벨론과 페르시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박사는 오늘날의 Doctor나 Ph. D와는 조금 다릅니다. 영어로 보면 Magi로서 고대의 점성술사를 가리킵니다. 동방 박사들은 별을 연구하면서 미래를 예측하던 당대의 지성인들이며 학자요 고위 관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예루살렘을 방문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2)" 여기서 유대인의 왕이란 일반적인 왕을 아니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특별한 왕 곧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이 어떻게 메시아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요? 참 신기한 일입니다. 추측컨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을 통해서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그 지역에도 널리 퍼졌던 것 같습니다. 이방인들 중에서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사상에 깊이 매료된 이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들 중에 동방 박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밤마다 별을 관찰하면서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징조를 기다려왔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별 볼 일이 안 생기자 포기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끈질기게 계속 별을 관찰했습니다. 어느 날 마침내 그들은 메시아의 별을 발견했습니다. 별을 보자 심장이 ‘쿵쾅 쿵쾅’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 즉시 박사들은 두 달 동안 장기 휴가를 내었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사막을 지나 멀고 먼 유대 땅까지 왔습니다. 박사들은 왜 이렇게 자기 시간과 비용을 들여 고생고생하며 여기에 왔을까요? 동료들보다 하루라도 빨리 이것으로 논문을 써서 발표하기 위해셨을까요? 아니면 유대인의 왕에게서 잘 보여서 연구 용역 계약을 따내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박사들은 어떤 현실적인 유익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께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경배 그 자체가 이유이며 목적이었습니다. 온 인류의 구세주요 통치자로 오신 분에게 합당한 경의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찬 박사들은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유대 땅까지 오긴 했지만 메시아가 구체적으로 어디서 태어나셨는지는 몰랐습니다. 왕이니까 당연히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셨으리라 믿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다녔습니다. 이들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온 예루살렘 곳곳에 쫙 퍼졌습니다. 이후 예루살렘에게서 어떤 반응을 예상되십니까? '드디어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야가 오셨다 할렐루야'하면서 기뻐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3절에 보면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소동했다는 말은 당혹스럽고 곤란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헤롯왕이 그러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나만 왕이어야 하는데 다른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반응은 좀 의외입니다. 기다리던 메시아가 드디어 오셨다는데 왜 마음이 시끄러울까요? 기다린다고 말만 했었지 진심으로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이제 겨우 헤롯에게 적응했는데 무슨 또 새로운 왕이야?’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동방 박사들과는 달리 그들은 메시아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동방 박사들처럼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가끔 외국에 업무상 해외 출장을 가기도 합니다. 또 그냥 관광 목적으로 해외로 나가기도 합니다. 이때 공항 출입국 심사장에 가면 심사관이 체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어옵니다. 여기서 '경배를 드리러 왔습니다.'라고 어떻게 되겠습니까? 심사관이 상당히 당황할 것 같습니다. 자칫하면 입국 허가 스탬프를 안 찍어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유로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경배'는 현대인들에게 참 낯선 단어입니다. 진정한 경배를 경험해 본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자기의 시간과 물질을 쏟아 부어 경배를 드려본 사람은 더더욱 찾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경배가 낯설게 느껴질까요? 그 이유는 이 시대에는 각자가 다 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왕인데,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데 다른 누군가에게 경배 드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에게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마음에 큰 소동을 일으키는 소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한 명의 헤롯왕이 있었다면 지금은 백 명이 모인 곳에 백 명의 헤롯왕이 있는 셈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에 심각한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경배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경배의 자리가 텅 비어있기 때문에 공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빈 자리에 하나님 대신에 사람을 놓기도 하고 돈을 놓기도 하고 어떤 이념을 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참된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는 큰 실망과 허탈감 밖에 남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만이 모든 인생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배는 의무이지만 사실은 의무 그 이상입니다. 예배는 그 자체로 은혜이며 특권입니다. 나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을 만난 것, 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엄청난 복을 받은 것입니다. 경배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께 나아가 예배드릴 때 우리 안에 무슨 일들이 일어납니까? 우리 영혼이 만족합니다. 거기에 예배의 기쁨이 있습니다. 삶의 모든 질서가 제 위치를 찾아가는 상쾌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배 받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의 예배를 통해서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헤롯왕은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평소 사사건건 서로 대립하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전하! 유대 베들레헴이옵니다." 그 근거는 미가서 5장 2절 말씀이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입니다. '떡집'이라니! 듣기만 해도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실제로 베들레헴은 인구 천 명이 채 안 되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선지자 미가는 이곳이 작지 않다고 할까요? 문재인 대통령의 생가는 거제도 명진리에 있다고 합니다. 아주 조용한 어촌 마을이었는데 대통령 당선 이후 찾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이를 견디다 못한 집주인이 입구에 큰 트랙터 한 대를 세워 진입을 막고 있다고 합니다. 베들레헴이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이유도 비슷합니다. 이곳에서 아주 큰 인물이 탄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곳에서 나실 예수님을 한 다스리는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스린다고 하니까 벌써부터 반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지 않으십니까? 오랫동안 헤롯과 같은 통치자에게 시달려 온 사람은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통치는 헤롯과 전혀 다릅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예수님은 통치자이시되 목자인 통치자입니다. 군림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섬기시는 통치자입니다. 헤롯처럼 폭력과 권위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온유로 다스리십니다. 이 예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그 나라의 백성들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 예수님의 통치를 기꺼이 영접하고 순종하는 사람들 안에 은혜와 진리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EBS에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어떤 개 주인의 사연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보통 이 개는 사람을 문다든지 계속 짖기만 한다든지 아주 문제가 많은 개입니다. 매회 ‘강형욱’이라는 애완견 조련사가 직접 가서 원인을 진단하고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개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개 주인이 문제였습니다. 똑같은 개인데 강형욱 씨가 다루면 그렇게 세상 착하고 온순해질 수가 없습니다. 결론은 세상에 나쁜 개는 없고 나쁜 주인만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비슷합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누가 다스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의 감시와 처벌을 받던 장발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죄수요 좀도둑이었고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미리엘 주교를 통해 용서를 경험한 장발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구보다 모범적인 시장님이 되고 긍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헤롯 같은 나쁜 통치자가 넘쳐납니다. 만약 이런 통치자들이 줄줄이 계속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암울한 일입니까? 하지만 인류 역사에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를 다스리시되 목자처럼 다스리실 분이 오셨습니다. 사랑의 왕이 태어나셨습니다. 이 성탄의 소식은 우리에게 그 어떤 소식보다 기쁜 소식입니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을지 몰라도 나쁜 사람은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예수님의 은혜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면 얼마든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스림 안에서 거칠고 반항적인 사람이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슬픔 많던 사람이 기쁨이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 중심에 좌정하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 예수님의 다스리심 속에서 우리가 자유와 행복,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가서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꼭 알려주게. 그래야 나도 가서 경배하지 않겠는가?" 이 헤롯의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딱 봐도 사기이고 음모라는 각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지만 평생 밤하늘의 별들만 쳐다보고 살았던 순진한 박사들은 이 말을 철석같이 믿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나중에 천사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위험에 빠트릴 뻔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검푸른 하늘 위에 메시아의 별이 다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별은 레이저 포인터의 빨간 불빛처럼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을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별을 움직이셔서 온 우주에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셨습니다. 그날 밤 지구의 북반부에 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별이 메시아의 별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오직 오랫동안 별을 연구하며 진리의 별, 구원의 별을 기다리던 동방 박사들만이 그 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별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다시 만났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10절에 보면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표현했습니다. 기뻐했다는 말이 무려 두 번이나 연달아 나옵니다. Double Joy, 곱빼기의 기쁨이었습니다. 이 기쁨은 오직 별을 찾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었습니다.


페르시아 땅에 살던 박사들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유대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까지 찾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 건초더미 속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가 박사들을 예수님께로 정확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는 별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가서 말씀이었습니다. 별은 일반 계시를, 미가서 말씀은 특별 계시를 각각 대표합니다. 일반 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과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내시는 진리를 가리킵니다. 특별 계시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과 인간의 역사 속에 진리의 별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 참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 별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이 별을 통해서 예수님께 어느 정도 가까운 지점까지 나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은 별을 통해 예루살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계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특별 계시인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미가서 말씀을 통해 박사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정확하게는 유대 베들레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점성술사라고 하면 사악한 이교도들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점성술을 역이용하셔서 동방 박사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셨습니다. 참 기이하고도 신비한 역사입니다. 물론 점성술은 진리의 체계는 아닙니다. 무수한 오류가 그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도 진리의 흔적을 일부 남겨 놓으셨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일지라도 그 흔적을 따라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페르시아의 점성술사들이 어떻게 메시아를 경배하러 베들레헴까지 찾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연 만물과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진리의 별을 비추고 계십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맹자 사상에 푹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교에 와서 성경 공부를 시작하면서 깜작 놀랐습니다. 맹자에서 본 내용과 비슷한 것이 성경 속에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맹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늘이 장차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그 뼈마디가 부러질 듯한 고통을 주며, 그의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를 궁핍보다 더한 공핍의 상태로 만들며,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뜻대로 되지 않도록 어지럽히십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을 움직여 타고난 작고 못난 성정을 인내로 담금질하게 함으로써 그가 수행할 수 없던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하도록 그 역량을 키워주려 함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말이 맹자의 말이 아니라 설교라고 해도 그냥 다 믿을 것 같지 않습니까? 영문학자 C.S.루이스는 고전 연구를 하다가 기독교가 진리임을 깨닫고 회심했습니다. 저명한 프랑스의 문화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본래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런데 각 문명의 제사 제도를 연구하다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심을 깨닫고 회심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누가 전도한 것이 아니라 학문을 연구하다가 그 속에서 진리의 별을 발견하고 회심한 경우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학문과 문화를 볼 때 양면성을 모두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학문과 문화에는 죄에 의해 오염된 부분이 존재합니다.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을 거스르는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 안에 하나님께서 심으신 진리의 별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진리의 별에 의해서 예수님 앞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조건 세상 학문과 문화에 권위를 부여할 이유도 없지만, 또 무조건 세상 학문과 문화는 죄악시 하면서 외면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를 잘 활용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진리에 전혀 무관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맞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리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직 돈이 되는 것, 예를 들어 비트코인 같은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더라도 동방 박사들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진리의 별을 찾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캠퍼스 가운데도 어디엔가 있습니다.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캠퍼스에 더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만나러 캠퍼스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나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별을 찾아 근처까지 왔더라도 마지막 매듭이 안 풀려 답답해 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인 특별 계시인 성경 말씀입니다. 앞서 예를 든 C.S.루이스나 르네 지라르도 결국 성경을 통해서 거듭나고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점이 성경 선생의 역할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우리가 캠퍼스 지성인들의 목자로서 현재 학문과 문화의 흐름에 대한 기본 소양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대화가 어느 정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 동방 박사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줌으로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다 함께 읽겠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이 구절을 보고 박사들이 경배 드리러 왔으니 경배를 드렸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경배 드릴 마음이 있었어도 막상 아기와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나면 변심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탄생한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이 비루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동방 박사들이 외적인 조건, 소위 말하는 ‘뽀대’를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별이 나를 속이다니! 별이 나한테 사기를 쳤어."하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가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참된 것은 겉모습의 화려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왕궁의 화려함 뒤에 숨은 지저분한 탐욕과 온갖 권모술수에 이미 질릴 대로 질려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겸손히 낮은 곳으로 오신 이 분, 어떤 허세도 없이 소박하게 태어나신 이분이야말로 온 인류를 구할 바로 그분이라도 확신이 더욱 강하게 밀려왔습니다. 주저함 없이 박사들은 엎드려 아기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또 준비해 온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 귀한 예물들을 드림으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야말로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경배의 자리에 음악이 빠질 수 없었습니다. 즉석에서 박사 중창단이 결성되었습니다. 비록 무반주 아카펠라였지만 그 어떤 노래보다 아름다운 노래가 온 집 안에 가득 찼습니다. "참 반가운 성도여 다 이리와서 베들레헴성 안에 가 봅시다 저 구유에 누이신 아기를 보고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구주 나셨네"


사람들은 성탄절 하면 무엇을 떠올립니까? 대개 공휴일, 밤새도록 즐기며 노는 날, 산타크로스, 캐럴 송, 크리스마스 선물, 가수들의 콘서트, 연인과의 데이트 등등을 떠올릴 것입니다. 공통점은 어떻게 하면 나를 즐겁게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재밌게 보내면 기쁜 성탄이고 재미없으면 우울한 성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성탄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고 타락입니다. 성탄절은 나를 즐겁게 하는 날이 아니라 예수님께 경배 드리는 날입니다. 내가 무슨 선물을 받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예수님께 어떤 예물을 드릴 것인가가 중요한 날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성탄절을 그렇게 보낸다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는 성탄의 의미와 본질을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성탄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찬송과 존귀와 경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되 목자처럼 겸손과 사랑과 섬김으로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진리의 별들이 가리키고 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산타가 훔쳐간 성탄의 주인공 자리에 아기 예수님을 다시 모셔드리도록 합시다. 우리가 이 예수님께 경배 드리는 가운데 얄팍한 순간의 즐거움이 아닌 경배의 기쁨으로 충만한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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