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이창무 2015. 4. 3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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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성탄말씀  제 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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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 누가복음 2:1-20

▣ 요절 / 누가복음 2:10,11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제가 나이가 사십대가 넘어간 후부터 전에 없던 일들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 나이 또래 대학교 친구나 선후배들을 오랜 만에 매스컴에서 다시 보게 되는 일이 종종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명 변호사가 되어서 TV에 자주 등장합니다. 한 친구는 책을 한 권 썼는데 베스트셀러가 되어 대박이 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국립대 교수요 시민운동가가 되어 정기적으로 신문에 컬럼을 쓰고 있습니다. 아는 얼굴이 매스컴에 나오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속이 쓰리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학창 시절에는 평범한 우리들 중 하나였는데 저 높은 곳에 계신 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저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거야' 이런 근거 없는 말로 스스로 위로해 보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12월이 되면 저의 쓰린 속을 말끔히 치유해 주는 특효약을 하나님께서 제게 보내주십니다. 그 특효약은 바로 구유 위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이었습니다. 제가 이 예수님을 보면 쓰린 속이 진정될 뿐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감사와 기쁨이 생겨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하나님은 이 귀한 선물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오늘 듣게 될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통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평화와 위로가 충만히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이란 북쪽 동네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태어난 곳은 유대 베들레헴이란 남쪽 동네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원정 출산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당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로마를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기원전 1세기 로마는 1차와 2차 삼두정을 거치면서 잦은 내란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이 혼란을 종식시키면서 로마 제국의 최초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로마 원로원은 그에게 지존자, 존엄자라는 뜻을 가진 아구스도란 호칭을 헌정했습니다. 시민들은 황제가 로마를 내란으로부터 건져냈다 하여 그를 구주(소테르)라고 불렀습니다. 

아구스도 황제는 재위 기간 중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쳤습니다. 로마 제국의 영토는 서쪽으로 이베리아 반도, 동쪽으로 시리아, 남쪽으로 이집트, 북쪽으로 도나우강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더 이상 로마 제국에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내란과 외침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구스도의 시대를 가리켜 팍스 로마나 즉 로마에 의한 평화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팍스 로마나를 지탱하려면 막강한 군대와 이를 지탱시켜 줄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아구스도 황제는 더 많은 세금을 확실히 거두어들이기 위해 제국 전역에 인구 조사를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인 갈릴리 나사렛에 살던 요셉과 만삭인 마리아에게도 이 명령은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다윗 가문 사람이었기 때문에 본적지인 유대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나사렛부터 베들레헴까지는 약 150 Km 거리로 닷새에서 열흘 정도 여행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몸이 무거운 마리아의 형편을 생각해 볼 때 아마도 이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요셉은 베들레헴으로 가는 도중에 무슨 생각을 하며 갔을까요? 만삭인 아내에게 장거리 여행을 강요한 로마의 철권통치에 치를 떨지 않았을까요? 쥐꼬리만 한 수입으로 겨우 겨우 살고 있는 일개 목수에게 꼬박꼬박 인두세를 뜯어가려는 제국이 너무나 밉지 않았을까요? 또 그렇다고 해도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자신의 처지와 현실이 무척 서글펐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요셉이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 숨은 놀라운 진실이 무엇입니까? 열쇠는 미가서 5장 2절에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메시야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예고한 말씀입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을 향해 떠나야 했던 것은 일차적으로 황제 아구스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 일은 미가서의 예언을 성취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황제 아구스도는 더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도구로 쓰임 받았을 뿐입니다. 물론 아구스도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아구스도의 가혹한 인구조사는 비판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의 권력자들이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으로 행한 모든 일들을 쓰셔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이바지하도록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어떤 권력자보다 위에 계시면서 온 세상 만물을 자기 뜻대로 통치하시는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도 요셉이 겪은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세상 살다 보면 힘 센 사람들에 의해 이리 저리 휘둘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새 대통령이 뽑혔습니다. 좋든 싫든 모든 국민들은 앞으로 5년 동안 새 대통령의 통치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회사에 가면 직속 상사가 왕입니다. 상사는 날마다 야근시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주말에도 부릅니다. 피곤하고 쉬고 싶어도 부르면 가야 합니다. 대학원생은 교수님 눈 밖에 나면 끝장입니다. 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이런 저런 일들을 꾸밉니다. 힘없는 사람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치사하고 서럽고 원통한 일을 겪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자는 이런 힘 있는 권세자들이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속에서 보이는 권세자보다 더 위에 계신 보이지 않으신 권세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권세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행한 모든 일들은, 그것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요 과정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때로는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모든 일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전진해 가고 있습니다. 

1993년 10월 18일 저는 6주간 신병 훈련을 마치고 배치 받은 자대로 향하는 군용 트럭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도 우리가 가는 부대가 어디인지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인솔자가 갑자기 밖을 보라고 했습니다. 38선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전방을 향해 가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다들 한숨을 쉬며 얼굴빛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평안했습니다. 왜냐하면 군대가 내 운명을 결정하지만 그 군대는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붙들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자대에 도착해 내무반 벽을 향해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무반 책꽂이에 어디서 많이 보던 책자들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열권의 일용할 양식 책자였습니다. 지금 종로 센터에 '이 스펄젼'이라는 스텝 목자님이 계십니다. 이 양식 책자들은 이 분이 그 내무반에서 제가 오기 일주일 전에 전역하면서 남겨 두신 것들이었습니다. 스펄젼 목자님은 내무반 고참들에게 목자가 군대에서 신앙 생활하기 위해 어떤 편의를 봐주어야 하는가를 완벽하게 훈련시켜 놓고 가셨습니다. 그 덕에 저는 이등병 때부터 수요예배, 주일오전예배, 주일저녁예배를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군에 입대하면서 제가 서원 기도했던 딱 바로 그 기도 제목대로였습니다. 저는 이때 한 가지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기 때문에 너무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기 때문에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기 때문에 사람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베들레헴에 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눈이 열려 모든 권세들 위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은 아구스도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품격에 잘 어울리도록 역사상 가장 위엄 있고 화려하게 모습으로 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마침 해산할 기한이 다 찼습니다. 요셉은 산통이 시작된 마리아를 부축하며 여기 저기 여관 문을 두드렸습니다. "빈 방 있습니까? 빈 방 있습니까?" 그러나 돌아 온 말은 '없어요' 짧고 퉁명스러운 대답뿐이었습니다. 곧 아기가 나오려고 한다고 통사정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기 방을 양보해 주려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추운 시절을 겪느라 당시 민심도 꽁꽁 얼어붙었던 모양입니다. 만약 여관 주인에게 크게 웃돈을 얹어 준다면 어떻게 방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얄팍한 호주머니에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진통 주기는 조금씩 빨라져 갔습니다. 신음 소리는 점점 커져 갔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요셉에게 마침내 한 여관 주인이 다가왔습니다. 주인이 안내한 곳은 낡고 허름한 마구간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았습니다. 

아기를 누인 곳은 구유였습니다. 구유라고 하면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짐승들이 먹이를 먹는 밥그릇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지금 태어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아마도 이마트 지하 주차장에서 승합차 뒷좌석에 태어나시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우리 중에 주차장에서 태어나신 분계십니까? 대부분 산부인과의 분만실에서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적어도 조산원이나 따뜻한 방안에서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님은 냄새 나는 마구간에서 짐승들의 밥그릇 위에서 이 세상과 처음 마주하셨습니다.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원하기만 하시면 예수님이 얼마든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요즘 부유층 사람들은 자녀가 미국 시민권을 얻게 하려고 미국으로 원정 출산을 하러 갑니다.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억대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도 원정출산을 했는데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가장 존귀하신 분이 가장 비천한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무에게서도 관심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밀리고 밀리고 밀려서 결국 마구간까지 밀려나셨습니다. 본체가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는 것으로도 엄청난 자기 비하입니다. 그런데 사람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에, 가장 힘없고 연약한 사람이 가는 그 자리로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런 누추한 곳으로 보내셨을까요? 그 이유가 히브리서 4장 15절, 16절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개역한글)" 여기서 체휼이란 단어는 '몸으로 겪었기에 공감하다' 또는 '함께 체험하여 불쌍히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직접 몸으로 겪어 보셨기 때문에 우리와 공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듯이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 속에 들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연약함이 무엇인지 잘 아십니다. 인생의 슬픔이 무엇인지 잘 아십니다. 아픔이 무엇인지를 잘 아십니다. 바닥까지 내려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몸으로 직접 경험해 보셨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초등학교 4학년인 제 둘째 딸이 아빠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무슨 말이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사는 게 힘들어요!" 정말 사는 것이 힘듭니다. 어른에게도 아이에게도 힘듭니다. 학생은 공부가 힘들고 시험도 힘듭니다. 엄마는 아이 키우고 교육시키는 것이 힘듭니다. 학사 목자님들은 업무가 힘들고 늘 피곤합니다. 늘 돈에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해 보입니다. 소감은 안 써지고 양은 오늘도 펑크를 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 사정을 과연 잘 알고 계실까요? 하나님이 계신 저 하늘 위는 아무 문제가 없는 낙원이라 구질구질한 이 땅의 사정은 잘 모르실 것만 같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연약함을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이미 답을 주셨습니다. 말구유 위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높고 높은 하늘에서 내려와 이 문제투성이인 세상 한 가운데로 들어오신 분이십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아픔과 서러움을 온 몸으로 이해하시기 위해 말구유 위에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의 모든 속사정까지 다 아십니다. 이 예수님 밖에 내 마음을 알아 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 내 영의 깊은 간구 마음의 소원을 / 주 밖에 나의 마음 뉘 알아주리요 / 내 마음 위로 하사 평온케 하시네(찬송가292장)"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사정이 있으십니까? 그 문제를 들고 말구유에 태어나신 주님이 계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거기서 때를 따라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이 초라한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위로는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과연 이 아기가 장차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메시야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천사로부터 전해들은 목자들의 마음속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던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베들레헴 주변의 들판에서 밤늦도록 목자들이 양 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목자는 사회적으로 천대 받던 직업이었습니다. 못 배운 사람들이 주로 선택하게 되는 직업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공사판 일용직 잡부와 비슷합니다. 천사는 목자들을 찾아가 메시야가 탄생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아울러 메시야의 표적이 무엇인지도 알려 주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이 때 천군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송하였습니다.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것도 보통 왕이 아니라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아주 특별한 왕, 위대한 왕입니다. 정말 그런 왕이 태어났다면 누구에게 이 소식이 가장 먼저 전해져야 할까요? 당시 왕족과 귀족들, 제사장들에게 먼저 전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비천한 신분의 목자들이라니요! 게다가 장차 왕이 될 인물이 탄생했다면 분명 고귀한 집에서 화려한 요람 안에 뉘여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라니요! 이 말도 잘 믿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천사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천사들의 말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기뻐하며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간증집들을 보면 대부분 사람들이 부러워할만 한 성공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역경을 이겨낸 그분들의 삶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천사들은 합창하였습니다. 또 비천한 목자들이 구주 탄생의 소식을 가장 먼저 듣기에 합당한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작고 비천해 보이는 것이 저 하늘에서는 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은 때로는 어리석고 약해 보이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바로 십자가가 이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대표합니다. 지극히 어리석고 연약해 보이는 십자가의 방식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구원이 십자가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방식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부터 말구유의 방식으로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천사는 구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실 역사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오죽하면 노벨 평화상이란 것을 만들어 평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사람이 있다면 그 공로를 치하하도록 했겠습니까? 

그런데 아구스도는 세계사적으로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를 이룩한 대단한 인물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우리들이 쓰는 달력의 8월달이 이 사람의 이름을 딴 August 입니다. 그러나 아구스도가 이룩한 평화는 가짜 평화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평화는 힘에 의한 평화, 군대에 의한 평화, 물리력에 의한 평화였기 때문입니다. 부글부글 거리는 분노와 미움을 강력한 힘으로 꾹꾹 억누르는 덕분에 얻어진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이 힘이 약해지고 나면 하루아침에 혼란과 갈등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불안한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일컬어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단 하나의 패권 국가로 어떤 나라도 감히 미국에 맞짱을 뜰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유일하게 미국에 큰소리치는 나라는 북한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에서 가장 불안감에 시달리는 나라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코네티컷에서 또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이들 20명을 포함하여 무려 27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이런 총기난사 사건은 처음이 아닙니다. 미국 사회는 분노의 시한폭탄이 주기적으로 터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번 이런 유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총기를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불안한 미국인들은 총을 가지고 있어야만 내 집은 내가 지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얻어진 평화는 결코 참된 평화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참된 평화는 마음에서부터 미움과 분노가 사라질 때 옵니다. 참된 평화는 깨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될 때 찾아옵니다. 참된 평화는 모든 원수 되었던 것들이 화해하고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집니다. 참된 평화는 죄 때문에 가로막힌 담이 허물어질 때 옵니다. 그런데 화해가 이루어지려면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죄의 대가를 지불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평화를 바라지만 평화가 쉽지 않은 것은 아무도 희생하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1서 2장 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막힌 담을 허물고 화목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 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 몸을 입으신 것은 화목 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모든 미움과 분노의 죄와 저주를 자기 몸 안에 다 채우시고 자기 몸 안에서 소멸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는 곳마다 화해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미움이 사라지고 분노가 가라앉습니다. 예수님은 천하의 가이사 아구스도도 할 수 없던 진정 한 평화를 이 땅에 가져 오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 팍스 크리스투스, 그리스도에 의한 평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말구유의 방식으로 이 땅을 살아가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말구유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 평화를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말구유의 방식은 주님이 가신 길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아구스도의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방식이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방식들이 아닙니다. 

말구유의 방식은 약할 때 강해지며 낮아질 때 높아지고 섬길 때 위대하게 된다는 원리입니다. 여기에는 신비한 역설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말구유의 방식으로 로마 제국을, 약함으로 강함을 정복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이루는 방식도 말구유의 방식입니다. 겸손하게 양들에게 다가가서 섬기고 인내하고 희생함으로 이루어 온 역사입니다. 결코 나이나 학번이나 사회적 타이틀로 찍어 누른다고 되는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 전체가 이를 증명합니다. 교회가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섬길 때 그 교회는 살아 있었고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구스도의 보좌 근처를 기웃거렸던 시대에는 반드시 타락하고 부패했습니다. 말구유는 능력입니다. 말구유는 영광입니다. 말구유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아구스도의 방식이 아니라 말구유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세상에 평화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TV나 신문을 보면 내년에 경제가 더 어려워질 것 같다는 소식, 미국 총기 난사 사건 소식, 아동 성범죄 사건 소식 등등 나쁜 소식이 압도적입니다. 간혹 내년에 징검다리 휴일이 많고 추석은 5일 연휴가 된다는 그럭저럭 기쁜 소식도 있습니다. 북한이 위성 발사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북한에게는 좋은 소식이나 나로호 발사에 연이어 실패한 우리에게는 씁쓸한 소식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온 백성에 미칠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 온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요절 말씀을 다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란 '너희를 위해 구주가 나셨다'입니다. 

앞에서 아구스도를 소개할 때 당시 로마 시민들을 그를 구주라고 불렀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 구주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아구스도입니까? 아구스도는 로마 명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무리 애써봐도 백성들의 어려움을 깊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아구스도가 이룩한 로마의 평화는 힘에 의한 평화였기 때문에 오래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군사력이 약해지자마자 로마는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분명 아구스도는 로마인들에게는 뛰어난 정치가이고 행정가였습니다. 하지만 온 세상의 구주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능히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놓으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천하의 아구스도든 그 누구든 우리 주님과 어떻게 감히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영광, 땅에는 평화를 가져 오신 예수님은 온 세상 만민들의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구주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겸손의 왕이 오셨습니다. 평화의 왕이 오셨습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축하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들판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처럼 이제 우리들도 베들레헴 마구간 말구유 위에 나신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기뻐하며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2012.12.23.,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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