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성탄절

은혜를 입었느니라

이창무 2015. 4. 3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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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성탄말 씀  제 1 강

▣ 말씀 / 누가복음 1:26-38

▣ 요절 / 누가복음 1:30,31





                             은혜를 입었느니라





크리스마스하면 “선물”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여러분은 이번 성탄절에 어떤 선물을 받고 싶으십니까? 지난 주 옥션에서 “내 생의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이벤트를 하면서 고객들에게 “크리스마스에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입니까” 하는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2009.12.12일자 한국재경신문) 그 결과에 따르면 3 위는 노트북 컴퓨터, 2 위는 백화점 상품권, 1 위는 아이폰이라고 합니다. 실은 저도 아이폰을 한번 써 보고 싶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꽤 좋은 선물이 될 수는 있어도 “내 생의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너무 부족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최고의 선물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인지를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이며 이를 어떤 자세로 감당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여기서 여섯째 달은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한 지 여섯째 달을 말합니다. 가브리엘은 이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천사들 중에 하나입니다. 천사 미가엘이 하늘 군대의 사령관이라면, 가브리엘은 중요한 소식을 전하는 전령의 역할을 맡은 천사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성탄의 소식을 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천사 가브리엘은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은 어떤 곳입니까? 이사야서 9장 1절에 보면 ‘이방의 갈릴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방의 갈릴리’라는 말은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때부터 마카비 왕조까지 약 650 년 동안 갈릴리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 의해 지배 받았기 때문에 생겨 난 말입니다. 갈릴리 지역은 사투리가 심했고 유대 지역과 풍습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갈릴리 촌놈’이라고 멸시하고 차별하였습니다. 나사렛은 또 어떠합니까?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한 적이 있습니다.(요1:46) 그 순수한 청년 나다나엘이 이렇게 심하게 말할 정도로 나사렛은 당시 아주 하찮게 여겨지던 마을이었습니다. 서울로 치면 제기동 같은 곳이었습니다. 한 목자님의 표현에 따르면 갈릴리 나사렛은 네비게이션을 찍어 봐도 지도에 안 나올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필이면 이 곳을 선택하셨을까요? 왜 유대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택하지 않으시고, 시골 촌 구석에 있는 갈릴리 나사렛을 택하셨을까요? 이는 이사야서 9장 1절에 나와 있는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멸시받던 갈릴리와 나사렛은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자라시고 주로 사역하신 곳으로 쓰임 받아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갈릴리 분식, 갈릴리 횟집, 나사렛 병원, 나사렛 어린이집 등 갈릴리와 나사렛 간판을 단 곳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이번 겨울 UBF 유럽 지부장 수양회도 이스라엘 갈릴리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무시 받고 천대 받으며 살아 왔다고 슬퍼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나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낮고 천한 자들을 들어 쓰셔서 그들로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하나님의 이 역사 방법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전 1:27-29, 표준새번역)


이제 천사는 범위를 더 좁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하여 법적으로는 요셉의 아내였지만, 아직 동거하기 전이었으므로 처녀였습니다. 왜 천사는 다윗의 자손과 정혼한 처녀를 찾아갔을까요? 이는 다윗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삼하7:12)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사야서 7장 14절에 예언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라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메시야의 모친은 남자와 동거한 일이 없는 처녀이어야 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갈릴리에 거주하면서 다윗 가문 출신과 정혼한 처녀에게서 태어나리라는 세 가지 예언이 모두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마리아였을까요? 옆 동네 사는 ‘에스더’라든지 아래 동네 ‘리브가’는 안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마리아’가 성모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이모저모로 찾아보려고 애를 써 보았습니다. 마리아가 당시 어떤 여인들보다도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았으리라는 주장도 있고, 심지어 카톨릭에서는 공식 교리로 마리아 무죄설과 무염수태설(마리아가 원죄가 없고 자범죄도 범하지 않았다는 이론) 을 채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리아의 이전 삶에 대해서 별 다른 말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마리아가 48절에서 스스로를 비천한 여인이라고 고백한 사실만을 발견합니다. 저는 마리아가 분명 경건한 삶을 살았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리아가 선택 받은 이유나 조건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해 준 첫 인사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마리아는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어떨 때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까? 우리는 “감동 받았다”는 말을 대신하여 “은혜 받았다”는 표현을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감에 감동받았다’ 해도 될 것을 ‘소감에 은혜 받았다’고 말합니다. 은혜의 기준이 주관적입니다. 내 감정과 정서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때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에서 흘러 나와 자격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나 호의를 말합니다. 은혜는 내 주관적인 상태에 관계없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은혜를 받은 자여’가 ‘Highly Favored”로 되어 있습니다. 즉 마리아가 하나님께 특별한 호의를 입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은혜를 받은 자의 첫번 째 반응은 감동보다는 대개 놀라움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은혜는 인간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전혀 기대하거나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역시 이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 선택 받을 만한 어떤 조건이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비천한 여인이었지만,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엄청나고 놀라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받게 될 은혜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은혜의 내용은 처녀 마리아가 임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성문화가 개방된 현대라고 할지라도 미혼모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결코 따뜻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율법 사회인 당시에 처녀가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은 돌에 맞아 생명이 위태롭게 될 지 모르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결혼한 사모님이 임신을 하면 참 은혜가 됩니다. 클릭 수에 비해 댓글 인심이 좀 야박한 안암골 홈페이지에서조차 2세 출생 소식에는 댓글들이 줄줄이 달립니다. 그러나 처녀가 잉태를 하다니요? 이것은 은혜가 아니라 재앙이 아니겠습니까? 천사가 마리아에게 ‘재앙이 임한 자여 두려워할지어다’라고 해야 앞뒤가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고 천사의 말도 끝까지 들어 봐야 합니다. 마리아가 낳게 될 아들이 어떤 아들인지를 알게 되다면 왜 이것이 마리아에게 임한 큰 은혜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장차 낳게 될 아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큰 자가 되십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그가 큰 자가 되고” 어떤 사람이 큰 자입니까? 키가 180이 넘는 사람 즉 루저가 아닌 사람이 큰 자일까요? 큰 자라고 하면 위대한 인물 줄여서 위인을 말합니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아브라함 링컨 이런 분들을 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위인이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첫째는 탁월한 업적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비범한 능력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고매한 성품을 갖추어야 합니다. 세 가지 모두 다 갖추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대개 두 가지 정도 만족하고 한 가지는 낙제점만 면하면 위인으로 인정해 줍니다. 예수님을 이 기준에 의거해서 살펴보면 예수님은 그 누구와도 감히 비교를 허락하지 않는 지극히 위대한 분이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업적이 많이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업적을 꼽으라면 바로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 역사를 완성하신 일입니다.(요19:30) 세상에 경제 문제, 정치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죄 문제와 죽음의 문제였습니다. 도를 닦고 수양을 해도 죄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고, 불로초를 찾아 헤매도 죽음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었던 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사 죽음 권세를 파하심으로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에 이보다 큰 업적을 남기신 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한 예수님은 능력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범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고(요6:11), 폭풍을 잠잠케 하시며(막4:39), 물 위를 걸으시며(마14:25), 병자들을 고치시며,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죽은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요11:43). 또한 권세 있는 말씀의 종이셨으며, 시골 무지랭이 어부들을 데려다가 열두 사도로 빚으신 탁월한 제자 양성가셨습니다. 이렇게 큰 업적과 능력을 보인 사람은 좀 교만해질 만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없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셨습니다(마11:29). 섬김을 받기보다는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10:45) 양들을 위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고자 하셨습니다(요12:24). 그분의 품 안에 이기적인 세리(막2:14)도 더러운 사마리아 여인(요4장)도 모두 품으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가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무릎을 꿇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을 한 없이 존경하고 미치도록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번 성탄절이 위대하신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예수님의 업적과 능력과 성품을 찬양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이, The Most High, 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삼위 일체 하나님 중 한 위로 계시는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모든 인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간이 되신 분이 아니십니다. 혹은 처음에는 사람이었다가 후에 신성을 획득한 분도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만세 전에, 이 세상이 있기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영광 속에 계셨습니다(요1:1). 천지 창조 때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역하시며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광 속에 계시던 그 분이 이제 사람이 되셔서 마리아의 태를 통해 이 땅에 오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영원한 통치자이십니다. 32절 하반절과 33절을 보십시오.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예수님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야곱의 집을 다스리십니다. ‘야곱의 집’이란 야곱의 열 두 아들로부터 출발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신약에 와서는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이 땅 위에 존재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 교회의 주가 되십니다. 어떤 공동체이든지 누가 다스리느냐에 따라 구성원들의 행불행이 좌우됩니다. 한 집안의 가장이 날마다 술 마시고 들어와 부인과 아이들에게 행패를 부린다면 그 집안 식구들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대통령을 잘못 뽑아 놓으면 국민들이 생고생을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이게 다 노무현 탓'이라는 말이 유행하며 대통령으로서 별로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이제 새 대통령이 들어섰지만 국민들이 실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요즘 누리꾼 중에 자기 블로그에 '이명박 퇴임 시계'라는 것을 붙여 놓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통령이 퇴임할 때까지 몇 시간, 몇 분, 몇 초가 남았는지까지 세어 가면서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것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현 대통령이 물러난 후 들어 올 새 지도자가 국민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을까요? 장담하건대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못 살겠다 갈아보자' 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다스려줄 왕, 영원히 왕이 되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시어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다스리시되 다윗과 같이 다스려 주십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왕은 다윗 말고도 초대 왕 사울, 가장 번영을 구가했던 솔로몬 등 여러 명의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다윗의 왕위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의 통치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말해 줍니다. 에스겔서 34장 23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다윗 왕의 통치의 특징은 다스리되 목자처럼 다스렸다는 것에 있습니다. 다윗 왕은 백성들을 인자와 성실로, 공평과 정의로 다스렸습니다. 이 다윗 왕의 통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 깊숙이 각인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의 한계는 그 역시 부패한 본성을 타고 난 인간이었으며 결국 죽고 말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사후 가뭄에 콩 나듯이 가끔씩 괜찮은 왕이 서긴 했지만 대부분 왕들은 다윗과는 정반대로 양을 잡아 먹는 늑대같은 왕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 1,000년 동안 다윗처럼 목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나타나 쇠하지도 망하지도 않는 영원한 나라를 세워주기를 꿈꾸며 고대해 왔습니다. 천 년 동안 사무친 이 메시아 대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처럼 사랑과 공의로 그 분의 몸된 교회를 다스리고 돌봐 주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영원토록 무궁합니다. 결코 망할 것 같지 않았던 로마 제국도 망하였고, 해가 지지 않는다던 대영 제국도 이제는 석양을 바라보며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중동 산유국들과 미국을 제외한 주요 나라 장관들이 비밀리에 만나서 원유의 결제 통화를 달러화가 아닌 유로화나 위안화로 바꾸는 방안에 대해 논의를 했다고 합니다.(2009.10.6일자 영국 인디펜던스지) 소련 붕괴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의 위치를 유지해 오던 미국의 위상도 이제는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는 이처럼 흥망성쇠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우리 아파트 상가에 입주해 있던 교회가 얼마 전에 망해서 문을 닫았다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우리 눈에 보이는 개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교회를 말합니다. 중세에는 카톨릭의 교권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 교회가 죽은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종교 개혁자들을 세워 교회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중국이 공산화되었을 때 그 곳에서 교회는 뿌리 채 뽑혀 나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중국 지하교회에는 대한민국 전체 인구수보다 더 많은 신자들(약 1억 명 추산)이 은밀하게 그러나 우리보다 더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2009.11.25일자 복음신문) 요즘은 포스트모더니즘, 뉴에이지 사상, 반기독교 정서 등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의 할아버지가 온다 해도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우주적인 교회는 결코 쇠하거나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흔들 자가 없고 영원토록 무궁할 것입니다. (히12:28)


이런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다니 마리아에게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자식이 큰 인물이 되면 부모가 영광을 받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뜨자 그의 어머니 박미희씨가 김연아를 만든 일등공신으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대가 눈치 없이 입학한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김연아는 고려대가 낳았습니다” 이렇게 광고를 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습니다. (2009.3.31일자 조선일보) 마리아는 지나치게 영광을 받아 거의 신격화하는 것이 문제일 정도입니다. 우리도 마리아를 사모하여 곽 마리아, 이 마리아, 서 마리아, 양 마리아 등등 마리아가 참으로 많습니다. 갈릴리 두메산골에서 요셉과의 결혼 외엔 아무 꿈도 없었던 평범한 시골 처녀 마리아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성모로 쓰임 받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쓰임 받는 다는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입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일생 하나님을 거역하고 또 자기 하나 감당할 수 없던 우리를 부르셔서 구원하실 뿐 아니라 고귀한 하나님 역사를 섬기게 하신 것- 이는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을 ‘걸려들었다’하는 이상한 말로 표현합니다. 김 모세 목자님이 전화를 하시거나 자기 이름을 부르면 '이번엔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하시나' 하며 뜨끔 뜨끔 놀랍니다. 이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은혜로 여기지 않고 일로, 노동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제일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며 일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 문).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쓰임 받고자 하지 않으면 원치 않게 다시 죄악된 옛 생활로 돌아가게 됩니다. 게임이나 하고 웹 서핑하다가 정욕에 빠져들게 되고 젊음과 시간을 낭비하며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는데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은 희생이요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우리 영혼의 축복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영원한 상급과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보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억만금하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명인의 삶을 살게 된 것을 큰 은혜로 알고 감사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센터 청소를 하는 것부터 캠퍼스에 나가 피싱을 하는 것, 양들을 일대일로 섬기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한 없이 부족하고 허물 많은 우리를 목자로 부르시며 동역자 삼으시고 함께 이 거룩한 구원역사를 이루어 나가자고 하십니다.“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비천한 우리를 들어 거룩한 구속역사에 쓰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예나 지금이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 아무리 황 우석 박사가 도전해 본다고 해도 될 일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비슷한 질문에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사가랴처럼 벙어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역시 마리아는 하나님께 특별한 호의를 입은 사람이 틀림 없습니다. 이에 대한 천사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내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마리아의 수태는 남자의 개입이 전혀 없이 오직 성령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사람 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마리아의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이미 임신 6개월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말했듯이 돌멩이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마3:9)께서 처녀로 잉태케 하는 일을 왜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걸려 넘어집니다. 고등 교육을 받은 교양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현대인들이 동정녀 탄생에서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는 이사야서 말씀을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알마(almah,המלע)”라는 단어가 “처녀”란 뜻과 “젊은 여자”란 뜻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면 그럴 듯해 보이지만 이 주장은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실 징조로 일어날 사건을 예고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징조가 되려면 어떤 특별한 사건이어야 합니다. 늘상 있는 일을 징조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젊은 여자가 아들을 낳는 일이 특별한 일입니까? 이것은 징조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일이 징조가 되고 특별한 싸인(Sign)이 되기 위해서는 해당 본문은 반드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로 번역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건일 뿐 아니라 반드시 이뤄져야 할 필연적인 사건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으셨다면 어떤 문제가 생겨날까요? 놀랍게도 동정녀 탄생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려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속죄 제물은 반드시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셨다면, 예수님은 결코 아담의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흠 있는 양이 되고 십자가의 희생 제사도 효력을 잃게 됩니다. 여전히 우리의 죄 문제는 그대로 남게 되고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반드시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을 통해 태어나셔야만 했습니다. 또한 동정녀 탄생은 부활과도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무효로 만들고 나면 도대체 무엇이 남습니까?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을 믿음으로 고백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신앙 고백은 복음이 세워지는 주춧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 주일마다 사도 신경을 통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전할 소식을 다 전했습니다. 이제 마리아의 반응을 나올 차례였습니다. 과연 마리아에게서 어떤 대답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저보다도 제가 잘 아는 영블레싱 자매님을 추천해 드릴께요. 아주 훌륭한 자매에요.” “일단 요셉하고 핸드폰으로 한 통화만 해 보구요” “기도해 보고 결정할래요” 등등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 마리아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에 즉각 순종했습니다. 이 순종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순종에 따르는 아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요셉의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마리아를 사랑하는 요셉일지라도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을 쉽게 믿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가슴에 주홍 글씨를 새긴 여인이 되어 사회로부터 받을 싸늘한 냉대와 멸시는 또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습니다. 자세한 것까지는 몰라도 평범한 인생을 살기는 다 물 건너 갔다는 것도 직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시므온이 예언(눅2:35)한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칼이 마음을 찌르듯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것저것 따지거나 고르지 않고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면서 전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마리아가 크고 작은 아픔이 있는 줄 알면서도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마리아가 주의 여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은 주인의 어떤 말에도 그대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도, 꿈도, 미래도 인생 전체가 다 주님께 속한 주님의 소유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이 나오기까지 마리아에게는 주의 여종이라는 정체성과 요셉의 약혼녀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내면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 편에 설 것인가 요셉 편에 설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도 한 사람 안에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학사 목자님은 집에서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직장에서는 직원이고 센터에서는 목자로 살아 갑니다. 때로는 여러 정체성이 서로 뒤엉켜 충돌을 일으키는 때가 생깁니다. 김 해현 목자님은 좋은 아빠가 되려면 제기역에서 내려야 했는데, 철도대의 목자가 되려고 제기역을 그냥 지나쳐서 의왕역까지 가야 했습니다.(2009년 추수감사절 특강)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는 이런 아픔이 따릅니다. 마리아는 결국 주의 여종이라는 정체성을 요셉의 약혼녀라는 정체성보다 앞에 세웠습니다. 이를 마음으로 영접하고 순종을 결단하였습니다. 이는 아픔을 감당하는 위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와 이번 주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세계관’ 특강을 통해 현대인의 문제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대인의 문제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수 많은 내가 있는데 그 중에 어떻게 정체성의 우선순위를 세워야 할지 가치 판단의 기준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과는 방황과 혼돈 그리고 허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정체성과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종입니다. 성경은 다른 어떤 정체성보다도 하나님의 종이라는 정체성을 최우선에 놓아야 한다고 마리아의 예를 통해서 분명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치관이 혼란한 이 시대 가운데서 주의 종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조금 아픔이 따른다 할지라도 순종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축복된 인생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크신 분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신 영원한 왕이십니다. 이 귀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립니다. 이번 성탄에 우리를 통해 이 하나님의 선물이 캠퍼스 양 무리들에게 증거되고 전달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09.12.13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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