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성탄절

한 아기

이창무 2015. 4. 3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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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성탄말씀 제 3강


한 아기


말씀: 이사야 9:1-7

요절: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어릴 때 성탄절이 되면 아버지는 성탄절 선물로 롯데제과에서 나온 ‘종합 선물 세트’를 사가지고 집에 들어 오셨습니다. 상자를 열면 안에는 사탕, 과자, 초콜렛, 연양갱 등등 평소 제가 먹고 싶어 했던 것들이 모두 다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저는 일주일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성탄절 선물로 우리에게 한 아기를 주셨습니다. 한 아기 안에는 우리가 갈망하던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평화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물을 받은 자는 영원토록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아기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종합 선물 세트라 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한 아기 속에 담긴 놀라운 영적 보화들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고통 받고 멸시를 당하는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에 분배되었던 땅 곧 갈릴리 땅에 거주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갈릴리 사람들이 받은 고통과 멸시가 어떠합니까? 열왕기하 15장 29절에 보면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쳐들어 와 갈릴리를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고 간 사건이 나옵니다. 이때가 기원전 722년으로 20여만 명의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정든 고향을 등지고 낯선 앗수르 땅으로 강제 이주를 해야 했습니다. 이후로 갈릴리 땅은 기원전 80년 마카비 왕조가 세워지기 전까지 무려 642년 동안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등등 여러 이방 민족들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의 종노릇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같은 동족인 남쪽의 유대 사람들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온갖 무시와 차별과 멸시를 당했습니다. 입사 시험에서 이력서의 본적지 란에 ‘갈릴리’라고 적혀 있으면 아예 서류 심사부터 통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영화에 나오는 조폭들은 다 갈릴리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런 고통과 멸시를 당하는 그들의 내면은 어떠했습니까? 2절에 보면 그들의 상태를 흑암에 행하는 것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흑암이란 보통 어두움이 아니라 짙은 어두움, 빛이 조금도 없어 칠흑같이 깜깜한 상태를 말합니다. 저는 구 센터 1.5층 형제 화장실에서 흑암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안에서 큰일을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 밖에서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불을 끄고 가버렸습니다. 그러자 곧 흑암이 임해서 화장지가 어디 있는지 문고리가 어디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서 흑암이란 희망이 전혀 없는, 공허하고 허무하며, 진리가 없고 삶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인간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또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 잡힌 상태, 삶의 생기와 활력을 잃은 상태, 운명의 노예가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상태를 말해 주는 정확한 묘사입니다. 필립 얀시가 지은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얀시는 한 때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염치가 없다. 번잡하고 무질서한 생활,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마음, 미움과 죄책감과 갈등으로 뒤범벅인 내 안, 제대로 굴러가는 것 하나 없고,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것 같은 하루, 한 달, 일 년, 그리고 … 그 속에서 나는 과연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일까?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절망의 바닥에 가면 우리는 이런 질문과 탄식을 만나게 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제 저를 버리셨습니까? 이제 저를 외면하십니까?”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게 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갈릴리 땅은 왜 고통 받고 멸시를 당하게 되었습니까? 어쩌다 보니 운이 나빠서 인생이 꼬였을까요? 아닙니다. 시편 107편 10,11절은 말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또 열왕기하 15:28절은 갈릴리 땅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여로보암의 죄란 바로 우상 숭배의 죄를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며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겸손케 하시고 고통 중에 절박한 심령으로 구원자를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사야는 새로운 희망을 선포합니다. 1절과 2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흑암을 몰아내시고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닙니다.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곧 인생 역전이 일어납니다. 징계가 끝나고 후에는 반드시 회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땅에 떨어졌던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높임을 받습니다. 내면에 머무르던 어두움과 죽음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싹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이런 인생 역전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갑자기 갈릴리 땅으로 행정수도라도 이전하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하다못해 신도시라도 개발되어서 부동산 값이 폭등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이곳에 큰 빛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큰 빛은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장 4절은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큰 빛은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큰 빛은 촛불이나 랜턴 같은 작은 빛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태양과 같은 큰 빛입니다. 일찍이 ‘생활의 발견’이란 수필집으로 유명했던 임어당 선생이 말년에 예수님을 만나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태양이 떴다. 이제 촛불을 끄자.” 큰 빛은 흑암을 완전히 다 몰아낼 수 있는 빛입니다. 우리의 내면과 삶을 실제적으로 변화시켜 줄 수 있는 빛입니다. 또한 큰 빛은 진리의 빛입니다. 큰 빛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밝히 드러내어 주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길을 비추어 줍니다.


그런데 이 큰 빛이  넓은 세상 중에서 멸시 당하고 천대 받던 갈릴리 땅에 가장 먼저 비취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지는 유대 베들레헴이지만 성장하시고 주로 사역하신 곳은 바로 갈릴리입니다. 갈릴리에 가면 예수님이 거니시던 호수도 있고, 산상수훈 말씀을 전하시던 언덕이 있고, 제자들에게 ‘네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던 헬몬산도 있습니다. 미국의 릴라 모리스 여사란 분이 지은 찬송가 134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릴리 오신 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 나 그 때에 확실히 맹인이 눈을 뜨는 것 보았네. 그 갈릴리 오신 이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하였네.” 갈릴리는 이렇게 우리에게 꿈속에서라도 가보고 싶은 특별한 땅입니다. 여기에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실제 갈릴리에는 특별히 볼만한 풍광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갈릴리는 오직 예수님 때문에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제기동은 안암 센터 때문에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제기동은 우리 목자님들 덕분에 평균 학력이 많이 높아졌습니다. 또 목자님들 덕분에 전세값이 유지되어 지역 경제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기동이 영화롭게 된 까닭은 이곳에서 훈련 받은 200여명의 선교사들이 전 세계로 파송되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지의 이방양들이 우리 선교사님이 뒹굴고 뛰놀고 성장하셨다는 그 제기동, 그 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 무척이나 궁금해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인생 역전을 꿈꿉니다. 그래서 로또를 삽니다. 빚을 내어서라도 주식 투자를 합니다. 제 고등학교 한 선생님은 저희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내가 보기에 너희들 인생 역전하는 길은 오직 돈 많고 명 짧은 여자를 만나는 길 뿐이니라” 그러나 문제는 그런 여자는 나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인생이 구리구리하고 암울한 이유가 뭐라고 보는 것입니까? 대부분 돈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놈의 돈이 웬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부동산 대박으로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큰 빛 되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진짜로 인생 역전하려면 큰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큰 빛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삶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실 때 우리는 어떤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밝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유윤희 사모님을 뵐 때마다 늘 감동을 받습니다. 사모님은 우리 중에 힘들기로 하면 누구보다도 힘들어야 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이분과 요회 동역을 할 때 보았던 그 밝은 미소를 아직도 잃지 않고 계십니다. 또한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기도하시고 찬송하시고 전도하십니다. 이는 이분의 마음 속에 큰 빛 되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큰 빛 예수님을 보내셔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 보니 북한 땅이 자꾸 생각이 납니다. 지리적으로도 북쪽인데다가 고통과 멸시를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10월 KBS 스페셜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토끼풀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매는 23살의 북한 여인과의 인터뷰를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뼈에 가죽만 붙은 앙상한 모습으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옥수수 밭에서 굶어 죽은 이 여인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 져 더 큰 충격과 안타까움을 주었습니다. 할리우드에서는 ‘007 어나더데이’부터 최근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솔트’에 이르기까지 북한을 공공의 적으로 그리는 영화가 많이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북한 땅은 실제로 흑암 가운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력 생산량이 부족해서 밤에 전등을 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위성 사진을 보면 남쪽은 환한데 북쪽은 깜깜합니다. 오직 한 점이 밝게 빛나는데 그곳은 평양이라고 합니다. 원래 북한 지역은 한국 교회의 중심지였습니다. 해방 전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 같은 김일성 정권이 들어선 이후 공공연히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낮추시고 온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소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저 흑암과 죽음의 땅에 큰 빛되신 예수님이 임하시면 그 땅은 살아나고 변화될 것입니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옛 적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고 21세기 제사장 나라로서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 유대 사람들처럼 북한 사람들을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평화 통일과 제사장 나라라는 기도 제목을 붙들고 간절히 중보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큰 빛이 임하면 우리 삶은 어떻게 변화될까요? 3절부터 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첫째로 큰 빛이 임하면 창성하게 됩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창성하게 된다는 말은 영토가 확장되고 국력이 성장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큰 빛을 받은 자에게 복을 주셔서 그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게 하십니다.


둘째로 큰 빛이 오면 즐거움이 임합니다. 본문에서는 즐거움을 설명하려고 두 가지 예를 듭니다. 먼저는 추수하는 즐거움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월급 타는 즐거움에 해당할까요? 제가 회사를 운영해 보니 거래처로부터 수금하는 즐거움이 아주 짜릿했습니다. 또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입니다. 이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나누는 줄거움을 말합니다. AFC 축구 시합에서 내가 역전 결승골을 넣을 때의 즐거움에 비견할 수 있을까요? 제자수양회 게임 시간에 우리 조가 일등을 해서 1등 상품을 서로 나눌 때의 즐거움과 비슷합니다. 흑암에 행하며 사망의 그늘에 거할 때는 인생의 낙이 없었습니다. 항상 얼굴이 굳어져 있고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빛이 임하면 얼굴이 밝아지고 인생이 Joyful해 집니다. 이 즐거움은 원수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은 7년 간 미디안으로부터 압제를 당했습니다. 죽어라 농사를 지어 놓으면 추수 때마다 미디안이 쳐들어와 다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사사 기드온이 삼백 용사와 함께 횃불을 들고 승리했습니다. 그러자 원수의 멍에와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가 사라졌습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전쟁할 필요가 없어져서 전투화와 군복을 다 불에 태워 없애 버립니다. 더 이상 입대 영장도 나오지 않고, 예비군 훈련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미디안과 같은 원수가 누구입니까? 바로 사단과 죄와 죽음의 권세입니다. 이 권세들이 우리를 위에서부터 찍어 누르고 있었습니다. 세상 무엇보다 무거운 것이 죄의 멍에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죄에 넘어질 때마다 “너 또 죄 졌지” 하면서 정죄와 송사의 채찍으로 내리쳤습니다. 우리는 정결한 삶을 살고 싶은데 보이지 않는 원수의 막대기가 자꾸만 우리를 내리쳐 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므로 우리에게서 무거운 죄의 멍에를 벗기시고 쉼을 주셨습니다. 큰 빛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단의 권세를 파하시고 죄와 죽음으로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마음 속에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참된 평화가 임했습니다. 이 기쁨은 특급의 기쁨이요 광복의 기쁨입니다. 이럴 때에는 덩실 덩실 춤이라고 추고 싶어 집니다. 왜냐하면 이날은 우리가 어두움을 벗고 큰 빛을 본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일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게 됩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나라를 창성하게 하고, 전쟁을 그치게 하고 평화를 이루는 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알렉산더 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전쟁 영웅들을 연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모습은 예상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 일은 작고 연약한 한 사내 아기의 탄생으로부터 임합니다. 그런데 이 아기는 보통 아기가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어깨에 정사를 메고 태어납니다. 정사란 government로서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한 아기는 우리를 다스릴 왕으로 태어납니다. 북이스라엘이 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거하게 되었습니까?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고, 여로보암과 같은 엉터리 왕들에 다스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처음에는 무언가 큰일을 할 것 같은 기대를 한 몸에 받습니다. 그러나 모두 임기 중반이 되기 전에 크고 작은 일들로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줍니다. 일이 잘못 되면 다 대통령 탓을 하게 되고 마침내 레임덕에 빠져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를 보면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우리에게는 참된 왕, 완전한 통치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완전하고 참된 왕으로 우리를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한 아기로 오신 이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기묘한 모사, Wonderful Counselor입니다. 한 가정을 다스리거나 한 모임을 운영해 나가는데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모임이 크면 클수록 더욱 많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물며 한 나라를 다스리는데 얼마나 많은 지혜가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 기묘한 지혜를 가지신 Wonderful Counselor, 놀라우신 상담자이십니다. 최근 들어 상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덕분에 심리학과의 대입 커트라인이 수직상승 중이라고 합니다. 또 요즘 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전문가의 조언과 상담이 꼭 필요하다고 하는데 우리 중에 장승근 목자님이 바로 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왜 이렇게 요즘 사람들이 카운셀링을 원하게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우리 삶이 그만큼 복잡해졌기 때문입니다. 컴퓨터 뒤에 엉켜 있는 전선줄처럼 복잡다단한 현실에서 명쾌한 삶의 지혜를 얻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이 지혜를 얼마나 갈구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있습니다. 이베이에는 매년 월가의 전설적인 투자자인 워렌 버핏과의 점심 식사라는 경매 상품이 올라 옵니다. 단순히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워렌 버핏이 남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은 비장의 투자 기법을 알려 준다고 합니다. 올해 263만불에 낙찰이 되어 누구인지는 모르나 밥 한끼에 30억을 내고 워렌 버핏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카운셀링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대개 상담자는 푹신한 소파에 앉혀 놓고 이야기를 내내 들어 주다가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몇 마디 말을 해 주고는 상담을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카운셀링은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여 우리를 지으신 분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신적인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가시면서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보혜사라는 말이 바로 카운셀러라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 Mighty God 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원수와의 싸움에서 이길 힘과 용맹을 가지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통치자에게는 지혜가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는 통치자는 백성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최근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을 겪으면서 과연 우리 군이 북한군보다 더 강한지 상당히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게 전시작전권이 없어서 반격을 하려 해도 미군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 정도로 우리 통치자에게는 힘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불안해하고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 있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원수가 나타나도 안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호하시면 그 어떤 사단 마귀의 권세라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영존하시는 아버지, Everlasting Father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계신데 예수님이 아버지라니 무슨 의미일까요? 그러나 여기서 아버지란 존재로서 아버지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아버지와 같은 분이란 뜻입니다. 우리에게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요 친밀한 분이십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아버지라는 의미가 잘 와 닫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어느 초등학생 2학년 여학생의 시가 있습니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 줘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내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서 좋다, 나랑 놀아 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아빠가 냉장고만도 못합니다. 미친 존재감이 아니라 아예 존재감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의미가 잘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결함이 많은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친밀하면서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완전한 아버지이십니다. 또 아무리 육신의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늙고 우리 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분으로서 늘 한결같이 영원토록 좋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넷째, 평강의 왕, Prince of Peace 입니다. 영어로 하면 평강 공주가 아니라 평강 왕자인데 왜 왕으로 번역했을까요? 이는 영어의 Prince가 왕자라는 의미도 있지만 권세자, 영주 혹은 군주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권세자는 보통 문제가 생기면 이를 어떤 식으로 해결합니까? 경찰이나 군대를 보내서 물리적으로 해결을 합니다. 재개발 지역 건물 세입자들이 안 나가겠다고 저항을 하니까 경찰 특공대를 보냈다가 용산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문명국가라는 미국도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야수의 얼굴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폭력이나 무력이 아닌 사랑과 대화와 긍휼과 포용으로 다스리십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해서 내어 주시는 방법, 곧 십자가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예수님께서 통치자로 오셔서 다스리시는 그 나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 나라는 무궁하며 영원합니다. 세상 나라는 모두 다 개국과 성장, 전성기, 그리고 쇠퇴 후 멸망이라는 싸인 그래프를 그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무한대로 성장하고 무한대로 강하여지는 지수 함수 그래프를 그립니다. 예수님의 나라, 그분의 몸 된 교회는 결코 망하거나 쇠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그 나라는 정의와 공의가 보존된 나라입니다. 지난 해 의외의 베스트셀러 한 권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마이클 센델이 지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딱딱한 인문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3년 안에 10억 만들기’ 이런 책들에 열광하다가 왜 갑자기 이 책에 필이 꽂혔을까요? 이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에 대해 목말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 목마름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목마름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 그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골고루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살맛 나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상 이런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가 세워질 것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습니까? 그 보증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심으로 이루시기 때문에 이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많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열심을 내시는데 누가 막아서며 안 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지혜가 필요한 자에게는 기묘한 모사가 되시고, 능력이 필요한 자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시고, 아버지가 필요한 자에게는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시며, 평강이 필요한 자에게는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지난  2010년에도 한 아기로 탄생하신 예수님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힘과 능력을 주시고,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며 하늘의 평화로 채워 주셨습니다.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이 예수님으로 인해 더욱 소망이 넘치고 기쁨과 찬송이 우리 심령에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2010.12.26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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