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서평

서평 : ‘교회 3.0’을 읽고

이창무 2015. 5. 1.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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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교회 3.0’을 읽고

 

2014. 12. 16

 

들어가는 말 

이번에 서평하려는 책은 ‘닐 콜’이 쓰고 안정임의 번역으로 스텝스톤 출판사를 통해 2012년 10월 4일에 출간된 ‘교회 3.0’이다. 저자 닐 콜은 미국에서 교회 개척자로 사역 중이다. 본인 스스로 세운 ‘어웨이커닝’이라는 교회가 있으며, 교회 배가 운동을 벌이는 ‘교회 배가 협회’를 설립하여 이끌고 있기도 하다. 여러 책을 저술하였는데 현재 한국에는 ‘오가닉 처치’, ‘삶을 변화시키는 소그룹’이라는 책이 번역 출간되어 있다. 저자가 미국에서 이 책을 낸 때가 2010년인데 2년만에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다면 이례적으로 빠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의 다루고 있는 내용이 한국의 현실에서도 반향이 있을 만한 내용들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저자처럼 유기적 교회 운동을 벌이는 사람 중에 프랭크 바이올라라는 분이 있는데 그의 책은 이미 몇 권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닐 콜의 저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오가닉 처치’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었다면 좀 더 내용을 파악하는 일에 용이했으리라고 보지만 이 책만으로도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먼저 책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후에 새롭게 배운 점, 아쉬운 점, 적용할 점 등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교회 3.0은 무엇인가? 

 

머리말 

저자는 머리말 ‘이 책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서 교회의 모습을 재치있게도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버전 네이밍 방식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1. 교회 1.0은 단순하고 가족적이지만 ‘닫혀 있는’ 초대교회다. 313년 콘스탄티노플 황제가 기독교를 승인하면서, 기독교는 주류로 올라서면서 ‘교회 2.0’이 탄생했다.

2. 교회 2.0은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조직화’, ‘제도화’된 교회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조직 체계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2.1에서 2.2 버전 정도로의 미미한 변화에 불과했다.

3. 교회 3.0은 본질이 아니면 무엇이든 ‘해체할 수 있는’ 유기적 교회다. 교회 3.0은 모든 면에서 교회 시스템을 향상시켜, 초대교회를 능가하는 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저자는 믿는다.

이 책의 목적은 이 시대 교회들을 교회 3.0으로 업그레이드하여 단순하고, 재생력 강하고, 관계 중심적인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의 제목도 바로 여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책은 크게 세 part으로 나뉘어져 있다.

PART 1 

part 1 ‘세상은 변하는데 교회는 잠자고 있다’에서 저자는 세상의 변화를 추적해 가면서 이 변화가 교회에 던지는 도전 과제가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1장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에서는 지역 교회에서 지구촌 교회로 변화할 필요를 제기한다. 복음의 핵심은 물론이고, 구원받고 성화되는 과정 모두 ‘변화’를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복음의 진리와 변화하는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도, 우리 앞에 펼쳐진 기회를 붙잡기 위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21세기는 1세기의 자매 시대라고 부릴 정도로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1세기에 하나님 나라가 빠르게 확장된 것처럼, 21세기는 그와 같은 위대한 복음 전파의 기회가 있다.

2장 ‘세상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에서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변화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종의 철학체계라기보다는 모더니즘에 대한 ‘감정적 반응’으로, 어떤 면에서는 문화적 반응이다. 모더니즘에서 현실적 만족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 좌절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보다는 ‘무엇이 아닌가?’에 더 가까운 사상이다. 발상 자체가 무엇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감정적 반작용이기에 ‘가치’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는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가?’를 열거해 보자.

1) 일보다는 관계 중심: 모더니즘에서는 과업의 성취가 인생의 최우선과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에서는 일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더 중시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언제나 인간관계를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된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2) 탁월성보다는 진실성: 이 시대는 탁월함보다는 진정성을 더 가치있게 여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람들에게 가장 큰 칭찬은 ‘진실한 사람’이고, 반면 모욕은 ‘가식적’이라는 말이다. 날조된 진정성의 어둠에서 하나님 나라는 밝은 빛을 발한다.

3) 논리보다는 체험: 모더니즘은 이성적 사고에 기초한다. 따라서 모든 문제를 올바른 방정식에 대입하고 올바른 명제를 제시해서 논리적으로 풀어 나가야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중요한 것일수록 직접 체험해 보고 싶어한다. 모더니즘 교회들이 믿음, 도덕적 생활, 친교 순으로 우선순위를 삼았다면, 이제는 친교가 먼저 오고 그 다음이 도덕적 삶이며 마지막이 믿음이다

4) 해답보다는 신비: 모더니즘은 해답을 좋아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해답에 목을 매지 않는다. 오히려 똑 부러지는 해답보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더 매력적으로 여긴다. 새로운 시대의 교회는 신비와 역설과 시(詩)를 담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해야 한다.

5) 획일성보다는 다양성: 모더니즘 시대에도 다양성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적극 수용한다. 문화의 다양성이 풍부하게 표출되는 교회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다양성이 드러나는 교회는 매력적이다.

6) 목적지보다는 여정: 모더니즘 사상에서는 제품을 완성하는 것이 사업을 하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제품과 목표 달성만큼이나 창의적인 과정에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한번 받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회성 패키지 선물로 여겼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이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PART 2

이제 저자는 part 2 ‘유기적 교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3.0 시대의 교회 모델인 유기적 교회를 설명한다. 전체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이 part 2가 아닌가 한다.

3장 ‘교회의 목표는 무엇인가?’에서 모으는 교회의 대안으로 보내는 교회를 제시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곳이 아니다. 사명을 수행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그 사명에 ‘동참’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사명은 교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Missio Dei)에 참여할 뿐이다. 보내는 교회는 교회 성장에서 나온 신조어가 아니다. 보내는 교회는 사회 정의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보내는 교회의 신학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대사이기에 모든 제자가 삶의 전 영역에서 그분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많은 교회가 예수님을 ‘의해’ 일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일한다. 교인 수나 건물 크기가 아니라, 교인들 가운데 예수님의 임재가 얼마나 드러나는지, 세상에 얼마만큼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에 따라 교회를 평가한다면, 우리의 전도는 훨씬 더 강력하고 역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4장 ‘교회 성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서는 저자의 사역을 대표하는 교회 배가 운동에 관하여 설명한다. 교회 배가 운동의 유전자(DNA, DNA란 하나님의 진리(Divine truth), 관계 강화(Nurturing relationships), 전도 사명(Apostolic mission)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말)는 신학자, 책, 학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의 씨앗은 은사와 재능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예수님(엡4:9~11)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시작된다. 교회 배가의 추진력은 하나님 나라 자체에 존재한다. 하나님 나라 확장이 우리 각자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방법을 고민할 게 아니라 그 일을 못 하게 막는 장애 요소를 치워 버려야 한다. 교회 배가와 증식을 방해하는 세 가지 일관된 장애물이 있다. 건물, 예산, 유명 목사다. 건물은 비용보다도, 사람들이 외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 궁극적으로 건물에 헌신하게 한다는 것이 최대 단점이다. 또 교회 핵심 지도자들이 모든 일을 지휘해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배가가 어려워진다. 걸출한 목회자에게 의존하면 평신도는 무력하게 되고, 교회 요직에 있는 소수 지도자만 칭송을 받는다. 배가운동에서 지도자는 자신의 목표와 비전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목표와 비전을 발견하며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역할만 해야 한다.

5장 ‘교회 형태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1)’에서는 네트워크 형태의 교회 형태를 제시한다. 저자는 무조건적으로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로 ‘초대교회’를 꼽지 않는다. 예루살렘 교회는 단일 문화권의 대형 지역 교회를 보여준다. 이 교회가 보여준 능력과 사랑, 부흥은 전설적이었지만 교회는 정체되다가 쇠퇴했다. 너무 일찍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져서, 상하구조의 지도자 계층이 생긴 게 원인이라고 본다. 안디옥 교회는 선교하는 다문화 회중 교회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선교에 주력하는 교회의 다른 본보기로 다문화와 선교 중심의 지역 네트워크를 보여준다. 한편 로마교회는 대도시에 세운 유기적 교회의 네트워크이다. 에베소 교회는 신약의 가장 훌륭한 형태의 교회라고 생각하는데, 단기간에 한 지역을 복음화하되 평신도 중심의 배가운동이 이루어졌다(롬16:5). 이 교회는 골로새나 라오게아와 같은 네트워크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저자가 보는 이상적 교회는 안디옥 교회이다. 현재 서양 교회들이 직면한 문제나 구조나 전략이나 운영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교회 안에 생명력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형태를 바꾸는 출발점은 구조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교회의 유전자를 주입한 건강하고 헌신된 제자들을 세우는 일이다.

6장 ‘교회 형태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2)’는 교회 형태의 두 번째 대안으로 중앙집권화 형태 대신 분권화된 교회를 제시한다. 유기적 가정교회와는 셀 교회는 다르다. 셀 교회는 문어처럼 환경에 민감해서 기독교에 우호적인 환경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반면 유기적 가정교회는 불가사리처럼 적대적인 환경에서 오히려 더 번성한다. 불가사리는 지도자 없는 조직의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분권화된 교회 형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통제력 부족으로 일어나는 지도력과 가르침의 상실과 규범의 약화를 우려한다. 그래서 책임의식을 분명히 심어주는 신앙의 보호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로 짐을 나눠 질 때 더 책임의식이 강화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런 체계는 한 사람의 감시자 대신 서로가 서로를 점검한다. 철저하고 정직하게 각자의 삶을 나누는 것이 한 사람, 혹은 한 팀이 모든 사람을 감시하는 체제보다 더 효과적이다.

7장 ‘대규모 집회도 여는가?’에서는 목적에 맞게 다양한 크기의 모임 형태를 제시한다.

① 생명의 기본단위 2~3명: 성경에서는 효과적인 친교와 사역을 위한 숫자로 2~3명을 제시한다.

② 지도자팀 4~7명: 이 집단은 다른 집단을 도와주는 ‘보조기능’에 적합하다.

③ 가족집단 12~15명: 이 정도의 집단은 여러 가지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양성을 갖추었다는 점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라는 장점이 있다.

④ 훈련집단 25~80명: 크리스토퍼 앨런은 구성원들이 독창적이고 전문적으로 과업을 해낼 수 있는 최적의 크기는 25~80명이라고 본다

⑤ 관계네트워크 100~150명: 집단이 무언가를 하는 데 필요한 최대 단위는 150으로, 영국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150이라는 숫자를 한 인간이 진정한 인간 관계, 즉 상대가 누구이며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를 아는 정도보다 더 깊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의 숫자로 본다.

⑥ 일시적 대중집회 200~500명: 150명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 두세 개가 모이면 되는 집단 크기다. 이런 집단은 소수의 적극적인 사람들이 다수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들을 지휘하고, 일방적 의사 전달만 이뤄진다. 간헐적인 대규모 모임은 매우 신나고 도움이 되지만, 대규모 집단이 사회를 바꾼 전례가 없다. 진정한 사회 변혁은 서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소규모 집단에서 이루어진다.

PART 3 

part 3에서는 유기적 교회의 실제적 문제들을 다룬다. 기존 2.0 교회에서 행해지던 여러 사역들이 3.0 교회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제시해 준다.

8장 ‘전도는 어떻게 하는가?’에서 촉매 운동의 전도 개념을 도입한다. 전도 운동, 복음화 운동을 촉진하는 촉매에는 여섯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좋은 촉매는 단순하다. 그러므로 전도 사명은 단순하고 의미심장할 수록 좋다. 좋은 촉매는 작고 소박하다. 그러므로 전도는 소그룹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좋은 촉매는 놀랍고 신기하다. 전도 계획 역시 놀라워야 한다. 좋은 촉매는 의미심장하다. 의미심장한 기반은 단 하나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좋은 촉매는 ‘달라붙는’ 특징이 있다. 전도는 전염력이 있고 확산되는 특징이 있다. 좋은 촉매는 관계로 퍼져 나간다. 그러므로 관계를 중심으로 전도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9장 ‘세례와 성찬식은 어떻게 하는가?’에서는 기존 교회와는 다른 성례전을 제안하고 있다. 세례는 예수님의 전도의 천재성을 드러낸다. 단순한 과정, 소박한 형태,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와 죽음과 부활이라는 놀라움과 의미있는 기반, 세례자의 기억과 인생에 달라붙는 힘, 퍼지는 능력까지 잘 보여준다. 저자는 신앙을 고백하는 즉시 세례를 베풀 것과 평신도의 세례권을 인정한다. 성찬은 복음의 핵심을 상징하는 의식이며, 날마다 대하는 평범한 식사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신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성찬 의식을 자주 행하도록 할 것을 권하고 역시 평신도의 의한 성찬 집행을 적극 긍정한다.

10장 ‘주일학교는 어떻게 하는가?’는 교실보다는 가정으로 교육의 장을 옮길 것을 제안한다. 전통 교회의 주일학교 교육은 체험보다는 지식을 얻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좋은 성품과 실제적 그리스도인의 삶은 머리로도 배우지만, 대개는 생활에서 체험으로 배우는 것이다. 저자는 아이들을 기독교의 안전지대에 살도록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험과 희생을 각오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진리대로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생활의 진국을 맛보게 했다. 그때 아이들은 복음의 능력을 머리로 믿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확신했다. 수많은 사람이 실제로 변화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교육, ‘실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체험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11장 ‘이단 문제는 어떻게 하는가?’에서는 유식한 교인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단 문제는 결국 사람들이 믿는 교리를 어떤 식으로 가려내느냐의 문제로 귀착된다. 어떻게 교리를 가려내야 할까? 다양성을 인정하며 하나 되는 방법 중에 ‘권총실험’이 있다. 누군가 당신 머리에 권총을 대고 ‘이 교리를 부인하지 않으면 쏴 죽이겠다’라고 할 때 ‘총을 쏘시오’라고 대답이 나오면, 그것이 권총교리다. 즉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교리를 뜻한다. 그러나 교회에는 권총 교리가 아닌 교리들도 있다. 아무리 그것을 확신있게 가르친다 해도, 권총 교리가 아닌 교리들도 형제자매를 배척하거나 공격해선 안 된다. 이단에 대한 진짜 해결책은 강대상의 교육받은 목사가 아니라 교인석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주는 것인데, 기존 교회는 그것을 도외시했다. 성경을 성도의 손에 맡기는 것이 실제로는 이단을 막는 최선책이다.

12장 ‘재정은 어떻게 하는가?’에서는 십일조보다 온전한 헌신을 더욱 강조해야 함을 역설한다. 교회에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이유는 목사와 교역자를 ‘고용’하고, 교회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면 교회에서 십일조와 헌금을 걷지 않는다면 어떻게 교회를 운영하느냐고 묻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께 전폭적으로 순복해서 전 생애를 바치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렇게 헌신하는 사람만 교회에 있다면 헌금 이야기는 꺼낼 필요 조차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으셨다. 주님은 천국의 부요함을 소유한 분이었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한 자로 와서 우리로 그 부요함을 얻게 하셨다. 10%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니 ‘우리도 똑같이 하는게 마땅하지 않겠는가!’라고 저자는 반문한다.

 

 

장점들  

이제까지 이 책의 주요 내용들을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이 책이 지닌 장점들은 무엇일까?

첫째,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가 교회에 던져주는 도전을 잘 읽어내고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위에서 책 내용 요약 부분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저자 나름대로 분석한 부분을 길게 언급한 까닭은 이 책에서 저자의 탁월함을 가장 강하게 느낀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포스트 모더니즘을 언급했던 신앙 서적 혹은 신학 서적들에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매우 부정적인 입장에서 본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데이비드 웰스의 일련의 실종 시리즈에서 웰스는 기독교를 타락시킨 주범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을 들고 있다. 그러나 나는 웰스의 말에 일면 수긍하면서도 성경을 통해 접한 일세기 교회의 상황과 현재의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상황과 어떤 유사성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상황이 반드시 선교에 부정적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같은 나의 느낌과 생각과 공감대를 이루는 닐 콜의 견해를 접하고 나니 참 반갑다. 더구나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안티 테제로서만 존재한다는 설명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렌즈를 제공해 주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저항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포스트 모더니즘 현상을 선교의 기회이자 장으로 흡수하려고 하는 저자의 방향성은 신선하면서도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여겨졌다.

둘째는 3.0 교회의 모델을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새로운 교회 운동에 관한 주장들을 적지 않게 접해 보았다. 이런 주장들은 대부분 1 세기 교회의 모습에 집중하였다. 기독교가 공인 받기 이전 교회가 어떻게 로마 그리스 세계 가운데서 폭발적인 선교를 경험했는지를 자세히 기술하면서 이 같은 1세기 교회 모습을 현대에 다시 적용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내가 몇 번 접한 적이 있는 프랭크 바이올라의 책이 그러했고, 로버트 뱅크스와 같은 신약학자의 책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이 가지는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분명 1세기와 21세기의 상황은 유사성이 있으면서 다른 점도 많이 있다. 시간의 흐름을 과거로 돌릴 수는 없다. 21세기에는 21세기에 맞는 방향과 전략이 나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새로운 교회 모델을 제시하는 주장들은 이 점에 있어서 구체성을 상실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정 교회, 유기적 교회… 등등 다 좋은데 구체적으로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거나 스케치 수준으로 넘어가기 일수였다. 그러나 저자는 이 부분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구체적이다. 이런 부부분은 특히 part 3에서 두드러진다. 거기에서 저자는 교회 교육, 성례, 전도, 헌금 등 매우 실제적인 분야에 있어서 3.0 교회의 구체적인 사례와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저자가 지금까지 교회 배가 협회나 본인이 세운 어웨이크닝 교회의 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이와 같은 주장들이 검증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어찌되었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만약 저자의 교회 3.0 프로젝트에 공감하고 그런 교회를 세워나가고자 하는 교회 개척자가 있다면 이 책은 여러 모로 실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셋째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고 일관된 자세로 변화를 주문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기성 교회, 조직화된 교회와는 다른 교회 모델을 제시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미 크고 작은 움직임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 들 가운데는 스스로 일관성을 갖지 못하고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하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셀 교회 운동이 대표적이 아닐까 한다. 지구촌 교회를 비롯하여 이름은 달리하지만 순 모임으로 표현되는 사랑의 교회, 온누리 교회 등등이 있었다. 이런 교회들에서 나름대로 기성 교회와는 다른 변화된 모습을 시도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운동들은 변화를 하되 기성 교회의 틀을 전면적으로 쇄신하려는 지점에까지 나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기성 교회의 틀 안에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이루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모순에 봉착하게 되는 때가 많았다. 사랑의 교회 순장들이 결국 새 담임 목사의 전횡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요즘 특히 더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니 저자 닐 콜은 머리말에서 밝히듯이 2.2나 2.5, 심지어 2.9에도 만족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닐 콜은 3.0 교회를 열기를 원한다. 교회의 목적과 형태와 사역 모든 면에서 일관된 원리를 가지고 갱신된 교회, 새로운 교회 운동을 펼쳐 나가길 원한다. 이런 점에서 2.0 교회를 적당히 보수하려고 했던 다른 운동과 차별성을 보인다. 그런 운동들이 결국에는 2.0 교회 조직 내로 흡수되어 존재감이 미미해지면서 사라졌던 것과는 달리 닐 콜의 유기적 교회 운동은 실제 현상 속에서도 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이 때문에 기성 교회 관계자들로부터 이단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써야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평판에 개의치 않고 뚝심 있게 자신의 운동을 펼쳐 나가고 있다. 그 원동력은 저자가 가진 만만치 않은 성경 이해와 신학적 사고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아쉬운 점들 

그러나 동시에 저자의 견해에 아쉬운 부분,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첫째는 지나치게 과격하게 나간 점들이 보인다는 점이다. 저자의 견해들에는 공감 가는 부분이 대부분이지만 일부에서는 오버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예를 들자면 세례 부분은 동의하기가 어렵다. 저자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 그 즉시 세례를 베풀 것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세례 사건이 주로 이렇게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사도 행전에서 세례를 베푼 사건들은 한 사람이 거듭남의 표지가 분명할 때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상황에서 즉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하지 않고 거듭남의 표지도 없이 세례를 베풀게 될 위험성이 다분하다. 이미 군대에서 받는 세례가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내 동생은 전혀 내적 신앙 고백이 없이 다만 세례 후 얻어 먹을 식사를 위해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런 종류의 세례를 남발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초대 교회는 엄정한 검증 과정을 거쳐 세례를 시행했을 것이다. 알렌 크라이더의 ‘회심의 변질’이라는 책에 보면 이 내용이 잘 나와 있다. 크라이더 역시 유기적 교회를 지향하는 인물이지만 아마 그라면 세례의 즉각적인 시행에는 반대를 했을 것이다. 세례자 교육을 단지 교역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생각이라고 본다. 세례에 앞서 믿음의 본질과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교리 교육을 해야 할 필요성을 오히려 유기적 교회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해야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식이 바르게 구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례의 문제 외에도 교회 교육의 장을 주일 학교에서 가정으로 이동시키자는 주장 역시 무조건 오케이 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이상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가정에서 자녀 신앙 교육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되겠는가? 또한 부모가 비신자인 경우에 전도 받아 온 청소년이 있다면 그는 누구에게서 양육을 받아야 하는가? 물론 현재보다 부모의 역할을 강조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에게 모든 책임을 맡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전체적으로 구체적인 적용 부분에 들어가서는 약간은 이상주의로 흘러간 느낌이 든다. 또는 기존 2.0 교회와 차별성을 두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떄문에 기존 교회 모델에 있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다가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물론 저자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앞으로 유기적 교회 운동의 결과를 좀 더 두고 보면서 검증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둘째는 다른 유사한 흐름과 운동과의 연계성을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유기적 교회 운동은 저자 혼자만 펼치고 있는 운동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프랭크 바이올라, 로버트 뱅크스 등도 있고 그 외에도 여기 저기서 우후죽순처럼 제기되고 있는 내용이다. 더 나아가서는 한스 큉의 교회론까지도 내용이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국내에서도 가정 교회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으며 신대원장이시자 신약학자이신 홍인규 교수님도 여기에 적극 참여하고 계시다. 이렇게 여기 저기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펼쳐 지고 있는 다양한 흐름 들 속에는 분명 저자 닐 콜이 제시하고 있는 교회 3.0 모델과 유사하거나 일치하는 흐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거의 이런 흐름들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프랭크 바이올라를 잠시 언급한 것이 전부이다. 마치 닐 콜 자신의 독보적인 운동인양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이다. 책 뒤에 있는 미주에 나타난 참고 문헌들을 보면 다른 신학자 혹은 목회자들의 책들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유기적 교회 운동의 흐름을 함께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좀 더 소개하면서 자신과의 일치점 혹은 상이점을 들려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차피 운동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함께 하고 연합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운동을 펼쳐 나간다면 더 큰 힘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적용점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앞으로 섬기고자 하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다.

첫째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긍정적인 면을 적극 수용하여 이를 동력으로 삼은 교회의 모습이다. 모더니즘 그 자체가 기독교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모더니즘과 기독교를 혼돈한다. 모더니즘에서 벗어나면 큰 일 날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일전에 박찬호 교수님의 수업 시간에도 유사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포스트 모더니즘 속에 나타난 이 시대 사람들의 깊은 갈망을 성경적 교회의 모습과 접목시킬 수 있다면 이것은 새로운 목회 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예배의 모습에서도 , 설교의 내용에서도, 교회의 형태와 운영에 있어서도, 시대와 변화의 흐름을 수용한 새로운 모습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일까? 물론 교회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이다.

둘째는 교회 사이즈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실 그 동안 무조건 많이 오면 좋다. 다 오면 좋다는 식의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냐에 따라 최적의 사이즈가 있다는 말이 깨우침을 주었다. 특히 저자 닐 콜은 두 세 명으로 된 그룹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모든 역사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정 교회 운동에서는 12명 정도로 된 가족 같은 공동체를 중요시한다. 물론 이 같은 공동체도 중요하지만 일 대 일 혹은 일 대 이 정도로 되면 아주 작은 그룹이야말로 제자 훈련을 하기에 최적의 숫자가 아닐까 싶다. 나는 지금까지 신대원에 재학하면서 이런 그룹을 매 학기마다 6 ~ 7 개 정도 이끌어 왔다. 매주 한 번씩 만나서 성경을 공부하고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몸과 마음이 고달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 보니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내가 제대로 목회 경험을 쌓을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 삼 년 동안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서 변화하는 삶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교만하기 짝이 없던 한 직업 군인은 많이 낮아지고 겸손해 졌다. 약속을 자주 어겨 힘들게 했던 사람은 이제 좀 신실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나는 12명의 가족 같은 공동체 혹은 70-80명 되는 공동체를 섬겨 본 적은 없다. 이 책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해서 각각 크기가 다른 공동체를 어떻게 섬겨야 할 지 힌트를 얻고 졸업 후 실제 목회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셋째, 조금은 더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는 자극을 받았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꿈꾸던 교회가 그렇게 큰 방향에서 볼 때 틀리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기성 교회와 공동체와는 좀 다른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방향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닐 콜의 책을 통해 이미 나보다 앞서 이런 고민을 했고 같은 꿈을 꾸었고 그것을 또한 실천에 옮겨 본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2.0 교회의 위기 징후들은 곳곳에서 느껴진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런 위기 징후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신 까닭은 그런 위기를 극복할 대안적 교회를 만들어 보라는 소명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분권화된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교회, 그런 성도들을 낳고 키우는 목회자, 건물에 매이지 않는 교회, 고비용 구조를 탈피한 교회, 모든 성도 간에 진실된 관계가 살아 있는 교회, 그런 교회가 내가 꿈꾸는 교회이다. 그런 교회를 꿈꾸며 나아가는 과정 속에 이 책 한 권이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준 듯 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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