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서평

서평 사사기 룻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창무 2015. 5. 1.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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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사사기 룻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사기 룻기는 무엇을 말하는가’는 이미 고인이 되신 최낙재 목사님이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인도했던 교안의 내용을 2012년에 성약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다. 성약 출판사는 김홍전 목사님의 설교집을 몇 권 사서 읽으면서 익숙해진 출판사이다. 김홍전 목사님은 성령에 대해서 성신이라고 표현하고, 설교 대신 강설이라는 말을 쓰시는 점이 인상에 남아 있다. 이 책의 저자이신 최낙재 목사님은 김홍전 목사님께서 세우신 독립개신교회인 강변교회의 목회를 계승하신 분으로 알고 있다. 잠시 동안 총신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신 적이 있으시다고 하는데 백석 신대원에도 그 때 일을 추억하는 교수님이 몇 분 계신 것 같다. 김홍전 목사님이나 최낙재 목사님이나 개혁주의 노선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목회와 설교를 하셨던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최낙재 목사님의 성경 공부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어떤 내용으로 전개되었을지 궁금했다. 우리가 평소 접하던 성경 공부와는 많이 다를까? 아니면 유사할까? 사사기와 룻기를 어떤 신학적 관점에서 보실까?


이 책의 구성은 사사기와 룻기를 장의 순서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중간 중간에 생략된 부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다루고 있다. 특별히 중간에 몇 번 해당 본문의 주제의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사사기나 룻기 이외의 본문을 취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역시 사사기나 룻기의 주제와 연장 선상에 있기 때문에 그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항상 앞 부분에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을 학생들과 질의 응답하면서 복습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또한 마지막에는 기도문이 실려 있는데 이와 같은 마지막에 기도문을 넣는 것은 김홍전 목사님의 강설에서도 종종 보이던 모습인 것 같다. 강설이 아니라 성경 공부이기 때문에 좀더 부드럽고 상대방과의 소통을 지향하려는 흔적이 엿보인다. 비교적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과제가 사사기, 룻기에 대한 하우 주석이었기 때문에 그에 비하면 엄청나게 쉬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성경 공부 대상이 어린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전체적으로 대부분의 내용이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설이다. 조금 자세한 해설 성경이나 스터디 성경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따라서 이 페이퍼에서 이러한 본문 해설을 다 다룬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본문 자체에 대한 해설보다는 본문을 이해하고 하고 해석하는 저자의 틀에 더 집중을 해 보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사기나 룻의 본문을 이 책의 저자는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파헤쳐 볼까 한다. 그래서 책의 모든 내용을 다 다루기 보다는 저자의 관점이 나타난 부분을 위주로 책의 순서에 따라 요약한 후에 이 책을 통해 배운 점, 혹은 아쉬운 점이나 의문점 등을 정리하는 선에서 페이퍼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제 1 강 여호수아 사후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연전 연승하던 여호수아 시대와는 달리 한 편에서는 이기기도 하고 한 편에서는 지기도 하고 또 완전히 승리하지 못하고 그냥 살려 두기도 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이 일이 앞으로 이스라엘에 올무가 되고 덫이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제 2 강 여호수아 이후 세 세대 사람들이 사방 대적에게 괴로움을 받은 이유’에서는 이 책에서 유일하게 앞 강에 대한 대화식 복습 부분이 없는 강의이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강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의 대적들에게 괴로움을 받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하면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를 버렸다는 말은 여호와 섬기기를 중단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겨야 하는데 그들이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들이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된 이유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은혜를 망각하게 되면 곧 바로 타락이 시작된다. 


‘제 3 강  사사 시대의 특징’은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해서 청종치 않음으로 규정한다. 청종한다는 말은 귀로 듣는 행위뿐만 아니라 그 뜻을 새겨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청종할 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호와의 도를 청종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사도 청종치 않았다. 사사가 가르친 여호와의 도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사사의 생존 시에는 말을 따르는 듯 하다가 사사가 죽고 나면 사사의 가르침을 모두 잊어 버리고 다시 죄악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과연 모든 사사가 여호와의 도를 백성들에게 가르쳤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물론 그렇게 모범적으로 여호와의 도를 가르친 사사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반부에 나오는 사사들은 그렇지 않은 사사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제 4 강 구원자, 옷니엘 사사’는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낸 옷니엘 사사에 대한 해설이다. 저자는 옷니엘의 기사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라는 구절에 주목한다. 사사는 어떤 사람이냐 할 때 결국 구원자라고 생각해도 된다.


‘제 5 강 에훗 사사’는 모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 에훗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훗의 특징은 전략을 치밀하게 잘 짰다는 점이다. 더불어 용기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모압의 18년 지배에서 벗어나 80년 간 평화를 누리게 된다.


‘제 6 강 에훗의 전략과 그리스도께서 행한 일’은 에훗의 전략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의 의미를 연관시켜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지혜가 있으셔서 적의 괴수인 사탄을 먼저 결박하시고 그의 수하에 있는 악한 영들인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평안을 주셨다. 예수님은 힘 있는 장수이므로 악한 영들이 떨며 물러갈 수 밖에 없다.


‘제 7 강 드보라와 바락과 야엘’은 가나안왕 야빈으로부터 여선지자 드보라이 사사가 되어 바락과 함께 이스라엘을 구원한 이야기이다. 바락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과 사람인 드보라를 의지하는 마음이 반반이라 승리는 하지만 그 영광은 여인인 야엘에게로 돌아가고 만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그들의 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상 이변을 일으키셔서 친히 가나안 철병거를 무력화시키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제 8 강과 9 강 기드온 사사’는 미디안의 압박으로부터 사사 기드온이 대승을 거두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이야기이다. 내용이 길기 때문에 두 강의에 걸쳐 한 사사 기드온을 소개하고 있다. 기드온 이야기에서 저자가 보는 핵심은 3만 2천명의 군사 중에서 모두 돌려 보내고 단 삼백 명만을 남기고 전쟁을 수행하도록 하나님이 하셨다는 점에 있다. 3만 2천명도 적군에 비하면 적은 수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미디안 대군을 이기는 것은 사람의 수가 많은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니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백성들로 깨닫도록 하사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이 전쟁에서 누구도 자기의 힘으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제 10 강 승전 후 에브라임 사람들과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의 그릇된 마음씨’는 승전 후 에브라임 사람들이 자신들을 왜 부르지 않았느냐며 생트집을 잡는 사건과 적을 추격하는 군대에 음식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 받았으나 이를 거절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본문에서 저자는 특히 에브라임 사람들의 생트집에 대한 기드온의 반응에 대해 주목한다. 기드온은 자신을 한 없이 낮추고 에브라임 사람들을 높여 주었다. 덕분에 큰 충돌 없이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는 기드온이 이 전쟁의 승리가 자기로부터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제 11 강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의 극악무도한 권력욕’에서는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하여 모략을 꾸미고 형제들을 학살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특별히 신학적 관점을 드러내기 보다는 다음 강의를 위한 도입부 역할을 하는 강의이다.


‘제 12 강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은 요담의 우화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저자는 요담이 큰 진리를 담은 우화를 지을 수 있던 비결이 아버지 기드온으로부터 받은 사상적 영향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기드온은 물론 왕으로 추대 받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는 실질적으로 거의 왕과 동일한 지위와 권력을 누렸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기드온의 사상적 영향을 오히려 직접적으로 받은 사람은 아비멜렉이 아닐까 싶다. 또한 저자는 우화에 담긴 교훈을 그리스도에게로 가져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오셨다는 말씀을 상기시킨다.


‘제 13 강 요담의 우화의 정신과 율법의 대강령’에서 저자는 다시 한 번 요담의 우화를 다룬다. 저자는 요담의 우화를 사사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모티프로 보고 있는 듯 하다. 이 우화 하나에 지난 강의부터 시작해서 14강까지를 할애하고 있다. 약간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구성이기도 하다. 과연 요담의 우화가 사사기에서 이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동의하기가 좀 어렵다. 어찌되었든 이번 강의를 본문은 사사기가 아니다. 마태복음 22:34-40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은 두 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부분이다. 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정신이 바로 요담 우화에 담긴 뜻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런 정신이 기독교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제 14 강 통치자의 통치 원리’는 다니엘서 4장을 본문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떤 통치 원리에 따라 다스리시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통치 원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통치 원리는 죄를 짓지 않고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고 불쌍히 여겨서 가난한 자도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세상 나라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통치 원리를 따르지 않아서 망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와 같은 통치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에 영원하다.


‘제 15 강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는 신구약의 여러 본문들을 오가며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해설하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는 의롭고 평화롭고 기쁨이 있는 나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은 나라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는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아서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에 숨겨 두고 기뻐하면서 돌아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이것을 살 정도라고 하셨다. 최고의 성공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제 16 강 왕과 사사가 다른 점’은 돌라와 야일이 사사가 되어 통치하던 시대를 다루고 있다. 이 시대는 어떤 외적의 침입이 있어서 사사가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한 시대가 아니다. 사사들이 백성들의 소소한 일들을 잘 재판하여 주고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스스로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가르치는 방법으로 사사직을 수행하였다. 이 두 사사는 이렇게 하여 큰 재앙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역을 감당한 셈이 된다.


‘제 17 강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심’은 블레셋 사람과 암몬 사람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인해서 마음에 근심하셨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해 예전과 다른 반응을 보이신 점에 주목한다. 전에는 부르짖으면 사사를 보내사 구원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이 의지하는 바알 신에게 가서 구원을 청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이 같이 말씀하심은 그들의 죄를 심각하게 여기도록 깨닫게 하심이고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쳤다.


‘제 18 강 입다의 말과 믿음과 행동’은 암몬 왕과 대결하는 입다 사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입다의 특징은 전쟁을 벌이기 전에 먼저 외교적 방법으로 암몬 왕을 굴복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입다에게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셨던 은혜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믿음이 있었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내가 잃어버리지 않고 꼭 가지고 있겠다는 태도를 믿음으로 정의한다.


‘제 19 강 입다의 큰 헌상’는 입다의 서원과 실행 부분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될 수 있는 강의라고 생각한다. 입다의 서원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번제에 대한 해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저자는 번제의 원래 뜻이 전체를 드린다는 뜻이기 때문에 사람을 번제로 드린다고 할 때는 짐승처럼 태워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이라고 해석한다. 심지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반면 입다는 번제의 의미를 바로 알았고 그래서 자기를 맞으러 나온 딸을 오늘날의 수녀처럼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온 인생을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했다고 본다. 애곡하고 고통스러워한 이유는 입다의 딸이 결혼을 하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저자의 해석은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당혹감을 상단 부분 해소시켜 준다는 점에서 좋다. 하지만 과연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르게 해석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점을 갖게 만든다. 아브라함이 번제의 의미를 오해했다는 말도 어떤 근거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저자는 입다를 사사기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사로 보는 입장인 듯 하다.


‘제 20 강 에브라임의 교만’는 지난 번 기드온 사사 시대처럼 에브라임 지파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냐며 뒤늦게 끼어들어 불평을 하자 입다가 그들을 응징하여 무려 4만 2천명을 죽인 사건을 다룬다. 저자는 이 사건을 에브라임의 교만에 대한 입다의 정당한 응징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왜 지난 번 기드온 시대 때 에브라임이 교만하여 불평했던 일에 대해 기드온이 응징하지 않은 일을 긍정적으로 보았는지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저자는 이번에는 입다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하는 등 극단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근거가 너무 약하다고 여겨진다.


‘제 21 강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오셔서 삼손의 출생을 알려 주심’은 삼손의 출생에 관한 기사이다. 이 강의에서 저자는 놀랍게도 다른 내용보다도 삼손의 출생을 알려주기 위해 찾아 온 하나님의 사자에 대해 집요하게 추적한다. 삼손의 부모가 처음에는 그저 천사인 줄 알았지만 잠시 후 그 사자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동일한 표현은 없지만 저자는 이 천사가 그리스도의 구약적 현현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제 22 강 삼손이 딤나의 여자를 아내로 삼으려고 한 목적’은 삼손이 딤나에 있는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하다가 이것이 빌미가 되어 블레셋 사람들을 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삼손이 딤나의 여자와 결혼하려고 했던 목적에 대해 저자는 삼손이 사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블레셋을 칠 빌미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벌인 일로 보고 있다. 또한 과거의 사사들처럼 왜 지파들을 소집하여 전쟁을 벌이지 않았느냐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의 상태가 영적으로 더 어두워졌기 때문에 혼자서 수백을 감당할 수 있는 삼손과 같은 스타일이 필요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후자의 견해에서는 흔쾌히 동의가 되지만 전자의 견해 즉 삼손이 딤나 여인을 취하려고 했던 목적이 사사로서의 정체성 때문인지는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제 23 강 삼손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사랑함’은 삼손이 유다 지파의 배반으로 순순히 블레셋의 포로가 되었다가 오히려 나귀 턱뼈로 수많은 블레셋 군인들을 쳐죽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삼손이 블레셋의 포로가 된 것 역시 앞에 강의에서 마찬가지로 삼손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삼손이 유다 지파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배신을 응징하지 않고 용납하였으며 자신의 힘을 절제하였다고 보고 있다. 저자가 삼손을 매우 긍정적인 인물로 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제 24 강 삼손은 크게 실패하고 패배함’은 삼손이 들릴라에게 속아 넘어가 머리털을 다 잃고 힘도 잃어 포로로 끌려 간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삼손의 힘이 머리털에 마술적으로 담겨 있었던 것이 아니라 머리털은 나실인의 서약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삼손이 나실인 서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힘을 거두어 가신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잘 간수하도록 권면한다.


‘제 25 강 자기 사명을 잘 완수한 하나님의 사자 삼손’은 블레셋의 신전에서 기둥을 무너뜨려 많은 블레셋인을 죽인 삼손의 최후를 다루고 있다. 삼손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본래 사사의 정체성을 회복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을 돌려 주시고 이 큰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삼손의 행동 동기를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찾기 보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일으킨 자기 희생적인 거사로 본다.


‘제 26 강 왜 앞으로 이스라엘에 왕이 필요한가’는 미가의 집에 우상을 만들고 레위인이 가족 제사장이 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에피소드야말로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모습을 다 보여주고 있다. 자기들이 원하면 우상을 겁 없이 만들고 레위인이라는 사람도 돈만 준다면 어디든 간다. 신대원장님이 자주 쓰시는 표현처럼 레위인이 종교행상인이 된 셈이다. 이와 같이 갈수록 심각해져 가는 영적인 어두움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사사가 가진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사는 일시적으로 소임을 맡을 뿐만 아니라 권위가 약해서 전 이스라엘 지파를 다 통솔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은 사정이 앞으로 왕의 등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제 27 강 이스라엘 백성이 훨씬 더 어두워지고 미련하게 되어 우상 숭배에 빠짐’은 단 지파가 미가의 집에서 레위인 제사장을 데려가고 라이스를 빼앗아 정착지로 삼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단 지파가 미가의 집에서 레위인 제사장과 함께 에봇을 가져 감으로 말미암아 단 지파 역시 우상 숭배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일의 진행이 옳고 그름이나 하나님의 법에 의거하지 않고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의해 진행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후에 단 지파는 어떤 이민족에게 사로 잡혀 가서 더 이상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지 않게 된다. 왕이 없이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둠과 미련함이 더욱 더 깊어가는 모습을 여기에서 잘 볼 수 있다.


‘제 28 강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은 하루밤 머물 곳을 찾고 있던 레위인의 첩을 기브아 사람들이 강간 살해한 끔찍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고 삶으로 모범을 보여야 할 레위인이 첩을 둔 것부터 이 시대의 타락상을 시사해 주고 있다. 게다가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기브아 사람들은 나그네를 영접하고 대접하라는 율법의 가르침을 무시할 뿐 아니라 손님을 욕보이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악행을 벌인다. 더욱 더 잘못된 것은 그런 악행을 범한 자들을 색출하여 벌하려 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장면에서는 가해자나 피해자 할 것 없이 모두 하나님의 법에서 멀리 떠나 타락한 모습을 보여 준다. 앞 강의에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라는 종교적 타락을 주로 보여주었다면 여기서부터는 그들의 사회적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다.


‘제 29 강 이스라엘 백성이 기브아 거민을 곧바로 징계하지 못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아 거민들을 징벌하지 않는 베냐민 지파를 치기 위해 모였으나 두 번 연속으로 실패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강의에서 저자는 특별히 왜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가 하나님께 나아가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두 번은 승리하지 못했는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연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을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원치 않으시는가’에 대해서 먼저 물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전쟁을 기정 사실로 두고 누가 싸우러 올라가야 하는가 하는 지엽적인 문제만을 물었기 때문이며, 또한 베냐민 지파를 그들의 한 형제로 보지 않고 적으로만 간주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세 번째 물을 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사실로 보건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싸우려 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그 이유에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제 30 강 교회 내에서 형제 중 한 사람이 죄를 짓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앞 강의의 내용을 다시 갈라디아서 6장 1절에 기초해서 반추해 보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교회 내 형제 중의 범죄한 사람이 있을 경우 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첫째로 온유한 심령으로 형제를 바로 잡고, 둘째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이 권면에 따라 사사기로 돌아가 보면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를 다룬 사건은 온유한 심령의 예라고 볼 수 있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권면은 바로 앞 강의에서 두 번의 전투가 실패한 사건이 역시 교훈해 주는 바라고 말할 수 있다.


‘제 31 강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회개하는 심정을 일으켜 주심으로 다시금 용서를 받고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음’은 베냐민 지파가 전쟁 결과 거의 멸절할 위험에 처하자 다른 지파들이 비상 대책을 강구하여 길르앗과 실로의 처녀들을 납치하여 육백명 남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아내로 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려다가 그만 도를 지나쳐서 한 지파의 멸절이라는 위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에 대해 뒤늦게 수습을 하려다가 또 다시 무리수를 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땅에서 지혜와 절제가 사라져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간신히 베냐민 지파가 회복되기는 하였으나 그 과정이 결코 아름답지는 않았다.


‘제 32 강 사사 시대의 특징’은 사사기 전체를 총정리 하는 강의이다. 사사 시대의 특징은 한 마디로 하면 왕이 없으므로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사사 시대는 모세의 율법을 따르지 않고 많은 죄악에 빠졌던 시대였다는 점이다. 만약 사사 시대에 사사라는 구원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손쉽게 이방 민족들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할 때 얼마나 인간 사회가 막장으로 치달을 수 있는가를 사사기는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와 긍휼의 역사를 사사기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 33 강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믿음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은 사사기를 마치고 룻기의 서두를 다루고 있다. 나오미가 기근을 피해 모압 땅으로 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후 고향 땅에 기근이 그쳤다는 말을 듣고 돌아가는 장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나오미가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모습을 두고 회개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나는 과연 나오미의 고백이 회개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이것이 나오미의 회개라면 자신이 범한 구체적인 죄에 대한 고백이 아울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오미의 고백 속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이나 참회는 없다. 다만 자신의 비극적 처지에 대한 슬픔이 주를 이루고 거기에 이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나는 개인적으로 회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 정도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나오미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한 것은 고향 땅에 보이신 하나님의 헤세드 때문이다.


‘제 34 강 하나님께서 은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보호하심’은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온 룻이 우연한 기회에 보아스에게 큰 호의를 입게 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룻은 나오미를 따라 오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딱한 처지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한 룻과 나오미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보아스의 날개 아래서 보호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또한 보아스는 룻이 보인 헤세드로 인해 감동을 받고 다시 자신의 헤세드로 보답을 하고자 한다.


‘제 35 강 기업을 무름’은 나오미의 지도 하에 룻이 보아스에게 청혼을 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나오미가 룻과 보아스의 결혼을 추진하는 목적은 기업을 잇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에서 기업이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중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신앙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소중한 기업을 잇기 위해 형사취수제가 있고 나오미는 친척인 보아스를 통해 기업을 회복하려고 했다. 이 강의에서 조금 아쉬운 것은 룻이 보아스에게 청혼하는 장면에 나타날 수 있는 해석 상의 난점들을 다루어 주고 갔으면 했는데 그런 부분들이 없다는 점이다.


‘제 36 강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구할 때 하나님께서 복 주심’은 보아스보다 기업 무름에 있어서 순위가 앞 선 사람이 기업 무르기를 포기함에 따라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가 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이를 통해서 결과적으로 여자인 나오미와 룻에 의해서 이 집의 기업이 회복되었음에 주목한다. 이는 성경이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유력한 증거임을 역설하고 구속 역사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제 37 강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고 호소할 때 귀 기울여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심’은 나오미가 룻이 보아스와 낳은 아들을 양자로 삼아 기업을 회복하고 축복을 받고 기뻐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룻기의 마지막 장의 분위기는 첫 장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에게 얼마나 큰 은혜와 자비를 베푸셨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룻의 마지막이 족보로 끝이 나며 다윗 왕의 계보로 이어진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앞에서 사사기의 결론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이 없으므로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명제가 제시된 것을 보았다. 이제 어둡고 타락한 시대였던 사사 시대에 하나님께서 은혜의 역사, 긍휼의 역사를 계속해 나가시면서 결국 한 없이 연약하고 작은 자였던 룻을 통해 다윗 왕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점을 대조적으로 룻기는 보여주고 있다.


‘제 38 강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의 구속자가 되심’은 보아스가 구속자(고엘)이 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룻기를 통해 모든 믿는 자의 구속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논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파산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우리들을 사랑하사 스스로 대속의 십자가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이을 상속자로 삼아 주셨다. 룻기의 마지막이 나오미의 기쁨으로 끝이 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 우리의 구속자에 관한 소식은 그래서 기쁜 소식 곧 복음이라고 불린다.


지금까지 책의 내용들을 각 강의별로 간단히 요약해 보았다. 이제 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이 책의 저자가 사사기 룻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저자는 구약의 본문을 신약의 그리스도와 연관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저자는 성경 신학의 관점에서 성경 읽기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시도들은 아예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을 주제로 한 강의 전체를 할당하기도 하고 강의 내에서 한 두 단락 정도로 간략히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구약 본문을 신약의 그리스도와 연결시킬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알레고리적 해석이나 자의적인 갖다 붙이기가 될 수 있는데 저자의 경우는 그러한 무리수가 전혀 보이지 않고 매우 자연스럽다. 그래서 오히려 이러한 시도를 좀 더 많이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몇 몇 주제에 국한시켜서 전개한 것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이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나 골즈워디 같은 신학자(설교학자)들이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큰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이미 한국에서도 최낙재 목사님과 같은 분께서 그와 같은 성경신학적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 읽기를 하고 계셨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로 저자의 관점이 인물에 대한 이상화 혹은 영웅화로 치우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거북스럽게 다가온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예를 들자면 기드온, 입다, 삼손의 대한 해석 부분이 특히 더 그러하다. 기드온은 비록 왕좌에 대한 제의를 거부했지만 사실상 왕의 자리에 앉았던 인물이라고 본다. 또한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회의하고 의심하면서 눈에 보이는 증거를 찾았던 인물이다. 입다의 서원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으며, 또한 동족인 에브라임 지파를 학살한 것은 분명히 비극적인 일이었다. 또한 삼손의 경우는 나실인의 서약을 차례 차례로 깨면서 사실상 실패한 사사라고 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저자의 경우는 이 세 명의 사사들을 매우 긍정적으로만 그리고 있다. 기드온의 경우 후반부 삶은 아예 언급이 제외되어 있으며 입다의 서원은 무리한 해석을 시도한다. 삼손은 나실인의 서약을 스스로 깨뜨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배제하고 결과적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쳤다는 사실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렇게 인물에 대한 이상화, 영웅화를 하다보니 사사기 전반적으로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부각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뒷부분에서 미가의 집 사건과 기브아 거민들의 사건이 갑작스럽게 추락한 사건처럼 보이게 된다. 이 책의 저자가 앞에서 성경신학적 성경읽기를 시도했다고 했지만 그 성경신학적 성경읽기를 끝까지 철저하게 추구하지는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인물을 통한 모범론적 교훈을 도출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셋째로 본문의 앞뒤로 혹은 본문과 책 전체와의 연계성을 제시하는 면이 적어서 아쉽게 느껴진다. 이 책은 주일 예배 전 성경 공부 시간에 행해졌던 강의를 녹취한 것을 바탕으로 했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매 강의가 바로 앞의 강의 혹은 바로 뒤의 강의와는 연관성을 잘 맺고 있지만 책 전체의 일관된 흐름이나 맥락은 크게 고려되어 있지 않은 모습이다. 예를 들자면 사사기의 경우 나선형 하강 곡선을 그리는데 이런 흐름이 잘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 또한 룻기의 경우도 헤세드가 어떻게 파급효과를 내면서 점점 더 강화되어 가는지에 대한 역동성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 즉 한 권의 책으로서 전체적인 역동성과 흐름이 미약하다는 약점이 있다. 물론 이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 이 책이 저술된 배경을 놓고 보면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점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책 한 권만으로는 ‘사사기 룻기는 무엇을 말하는가’가 전체적으로 다 제시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본문을 개별적으로 다룬 강의 앞 부분에 서론적 강의를 추가하고 마지막 부분에 정리하면서 맥을 잡아주는 강의를 한 번씩 더 추가했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각 강의에서 반복되면서 점점 상승하는 개념들을 일관성 있게 제시해 주었다면 좀 더 깊은 인상을 남기는 책이 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남는 부분은 사실은 저자의 서문에 실린 예전에 주일 예배 드리기 전에 성경 공부하던 한국 교회의 전통이 점점 사라지는 모습에 대한 저자의 아쉬움이었다. 적어도 나는 이와 같은 한국 교회의 전통을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는 세대의 사람이다. 그래서 처음 서문을 읽을 때 그 시대 성경 공부를 과연 어떻게 했을까 하는 질문이 생겨났다. 이 책은 이와 같은 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나도 목회를 시작하게 되면 ‘이와 같은 성경 공부를 부활시켜 볼까’하는 의욕이 생겨났다. 그렇게 한다면 교회에 출석한 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 무지하고 그래서 사사기의 백성들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교인들을 양산하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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