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양성

제 7 강 예수님의 주 되심을 믿는 믿음

이창무 2016. 11. 2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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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양성 제 7 강 (#213장)

말씀 / 마가복음 11:1-12:37                                        

요절 / 마가복음 11:3

 예수님의 주 되심을 믿는 믿음

 #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 축복의 은혜를 기대한다. 뭔가 해주기를 기대한다. 허물 많은 나를 감당해 주시는 예수님은 친숙하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려 오셨다. 그러나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영적 질서를 생각해야 한다. 죄가 시작된 것은 에덴 동산에서 영적 질서가 깨짐으로써 시작되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데서 죄가 시작되었다.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질서, 참 경배 대상의 되신 주인되신 예수님을 알아가자.

1. 예수님은 자신의 예루살렘 입성을 제자들에게 어떻게 준비시키셨습니까(11:1-7)?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심을 보여주십니까? 

(막 11:1-7)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 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고 한다. 이스라엘 왕들은 권위보다는 섬김을 강조한다고 한다. 솔로몬도 그랬다. 예수님이 나귀 타고 가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상징한다. 예수님도 나귀 타고 입성하신다. 

# 이 때를 위해 나귀를 따로 기르지 않았는데 어떻게 입성하겠는가? 제자들은 보내, 맞으면 마을에 가서 나귀를 데려오라고 했다. 아무도 타지 않는 나귀를 풀어오라고 했고, 주인이 만약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했다. 예수님이 거기에 갔다 온 것처럼 주인과 나귀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시듯 말씀하신다.

# 여기서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시공간을 초월한 전지성을 보이셨다. 성경 곳곳에 예수님의 전지성이 나타나 있다. 바리새인들이 악한 생각을 아셨다. 베드로와 물고기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시 139: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다 아신다.

# 두 번째로 뭘 배우는가?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남의 나귀 새끼를 끌고 있는가? 예수님이 주인이시다. 사실 우리는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주권이 발동하면 당연하게 끌고 오실 수 있다. 예수님은 만유에 대한 주권을 갖고 계신다.

# 주권적으로 하실 때가 있다. 우리의 부르심이 그렇다. 주권적으로 쓰신다. 사도 바울도 주권적으로 끌고 와서 일꾼이 되게 하셨다. 

# 우리는 청지기이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섬기로 오신 종으로 자신을 얘기하시다가, 11장에 오면 만유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어떤 점에서 주인이 되시는가? 자녀들에 대한 사실 꿈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주님의 것이다. 주님이 쓰시고자 하면 풀어주어야 한다. 주님이 쓰시고자 하면 주님께 드려야 한다. 잠깐 관리하도록 내게 주신 것이니, 관리하도록 하신 것이니, 주님께서 쓰신다면 언제든지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건강도 그렇다. 일시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하여 욕심을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면 필요할 때 바로 바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 또 어떤 예수님을 배우는가?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겸손의 왕되신 예수님을 배우게 된다.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 모든 것의 주권자이시지만 겸손히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 나귀를 타면 뒤뚱 거린다, 뒤뚱거리면 부담이 없다. (계 5: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예수님으로부터 모든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이 나온다.

# 우리는 섬기는 종일 뿐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자기 중심적, 자기 몰입적으로 생각하고 신앙을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은 축복해주시지만, 내가 나귀 주인처럼 주가 쓰시겠다면 자기 계획과 꿈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2.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환영했습니까(8-10)?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크게 환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막 11:8-10)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 예수님을 보면, 나귀를 타고 뒤뚱뒤뚱 오니까 사람들이 부담없이 자기 옷을 펴서 섬겼다. 예수님은 능력이나 인격이 왕으로 증명되신 분이시다. 그런데 부담이 없는 왕이시다. 예수님을 섬기는데 부담이 없다.

# 예수님은 다윗의 진정한 메시야 왕국을 회복할 왕이시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고 환호했다. 

#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삶의 신뢰도가 어떠한가? 예수님을 보고 불안해 하는가? 예수님께 잘못 걸려 들었다고 생각하는가? 손해의식을 느끼는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모든 문제로부터 구원자가 되신다.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다가갈 수 있는 분이시다.


3.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어떻게 저주하셨습니까(12-14)?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20)?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제자들은 어떻게 이런 권세를 덧입을 수 있습니까(22,23)? 

(막 11:12-14)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막 11:20-23)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다. 열매가 혹시 있을까 기대하셨는데 없으니까 저주하셨다. 무화과 때가 아닌데 열매가 있을 수가 없다. 왜 그런데 열매를 찾는가?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주권은 이해 영역이 아니다.

# 예수님이 저주하시면 저주 받는다.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무에게 말씀하셔도 나무에게 역사한다. 예수님이 말씀의 권세자이시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 두 번째 예수님께서 성전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성전을 들어갔다 나오시면 느낀 것을 무화과 나무에게 저주하시면서, 제자들이 듣게 하셨다. 일부러 듣게 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이를 보고 뭔가 깨닫게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예루살렘 지도자들, 종교지도자들을 경계하시도록 하는 복선을 깔고 저주하신 것이다. 성전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이야기 하신 것이다. 이 후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게 하셨다.

# 제자들이 어떻게 이런 권세를 덧입는가? 의심하지 않고 믿을 때 덧입는다.

4. 예수님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막 11:27-33) 『[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31]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으신 분이시다. 성소의 주권자가 되신 분이시다. 누구의 허락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시다. 

# 종교 지도자들이 무슨 권위로 말하는지 묻었는데, 이는 따질 수 없다.

# 예수님은 주권자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주권에 엎드려 경배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 예배도 주님이 주인으로 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성전에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저주하셨다. 교회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예수님을 예배해야 한다.

#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가 이루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세와 능력을 위임 받은 분이시다는 것을 알고 섬겨야 한다. 

5.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임을 증거하셨습니까(12:6)? 하나님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으신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세우셨습니까(10)? (벧전 2:4-7) 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9)? 

(막 12:1-10)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벧전 2:4-7)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 예수님은 구원주가 되시기도 하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예수님은 심판의 주시다.

# 포도원에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셨는데 다 죽였다. 이 비유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예배하라고 하는 것을 다 부인하고, 자기 것으로 취하고자 하는 탐심과 정욕을 보게 된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자 했다. 하나님의 주권을 자기들이 갖고자 했다.

# 그런데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구속의 모둥이톨이 되게 하셨다. 예수님이 구속 역사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보배로운 산돌이라고 했다. 구속 역사의 시작과 중심으로 삼으셨다. 

#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지만, 그를 믿지 않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예수님이 심판의 기준이 되신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시고, 모든 권세를 위임 받아서 심판하실 분이시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할 분은 예수님이시다. 이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시다. 


 6. 서기관들은 다윗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어떻게 가르쳤습니까(35)? 그러나 다윗 자신은 그리스도를 누구라 불렀습니까(36,37)? 

(막 12:35-37)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서기관들은 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 대하여 시비를 걸으신다. 왜?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한 다윗이 말한 것을 근거로 두셨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지만 동시에 다윗은 그분을 주라고 고백했다. 왜 주라고 하셨을까?

# 이것은 예수님은 선재성을 말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윗 이전에 계신 분이시다. 서기관들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인성만 강조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 이전의 선재성을 가지신 분이시다. 인간 만물 창조 이전에 계신 분이신다. 만물이 있기 전에 계신 신성을 갖고 계신 주님이시다.


 7.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셨지만 어떤 분으로 믿고 따라야 합니까? 

#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갖고 계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믿음으로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절대 주권자이시다. 이 주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한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적으로 생각될 분이 아니시다. 

#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할까? 순종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 그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예수님이 나에게 복주는 분으로만 여기지 말고 절대 순종할 분으로 믿고 따라야 한다. 믿음과 순종으로 그 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그분께서 믿음과 능력을 나타내신다. 절대 순종하면 손해보는 것 같지만, 아니다. 절대 순종하면 큰 믿음 안에서 성장한다.

# 또 믿고 의지할 대상, 찬양의 대상은 예수님이시다. 그 분을 찬양하고 믿고 의지해야 한다. 

# 세상에는 이런 주 저런 주가 많은데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아니다. 예수님 만이 만물이나 교회, 이 세상의 주권자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묵상하고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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