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왕기상하

이리 저리 일을 볼 동안에 그가 없어졌나이다

이창무 2015. 12. 30.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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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저리 일을 볼 동안에 그가 없어졌나이다


말씀 : 열왕기상 20:35-43

요절 : 열왕기상 20:40 "종이 이리 저리 일을 볼 동안에 그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열왕기상 20장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그렇게 유명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이야기 중 하나로는 꼽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0장 끝에는 이스라엘의 왕 아합을 꾸짖으려는 비범한 계획을 세운 한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아람과의 전쟁 중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합 왕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대승을 거두도록 해 주셨습니다. 아합 왕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매우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왜 그에게 승리를 주셨을까요? 이는 아람 왕 벤하닷이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다 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벤하닷의 말은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로 거주하는 산에서는 힘을 쓸지 몰라도 골짜기로 내려오면 맥을 못추는 그런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골목대장일 뿐, 큰 물에 나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여호와 하나님은 산의 신일뿐 아니라 골짜기의 신도 되시며 온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욕 보인 벤하닷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아람 군대가 치셨습니다. 그 결과 벤하닷은 아합 왕의 포로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때 아합 왕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당연히 벤하닷을 죽이고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벤하닷을 살려주고 고국으로 고스란히 돌려 보내주었습니다. 아합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아합이 본래 성품이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합왕이 벤하닷을 돌려 준 이유는 벤하닷과 거래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벤하닷은 두 가지를 아합에게 제안했습니다. 첫째는 그 동안 아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들을 모두 다 돌려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둘째는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 한 복판에 아합 왕의 이름을 딴 '아합 스트리트'를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실리와 명예를 모두 다 얻을 수 있는 제안이었습니다. 특히 아합 스트리트가 세워진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을 것입니다. 결국 아합이 이 거래를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잃었고 이스라엘에게 잠재적인 위험의 불씨를 남겨 놓고 말았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이때 선지자 무리 중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는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계획을 짰습니다. 전쟁터에 돌아온 하인처럼 옷을 입고 왕에게 가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첫 단계는 자신을 실제로 전쟁터에서 돌아 온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는 동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니 자신으로 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동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반응입니다. 무작정 나를 치라고 하니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만 선뜻 따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료 선지자는 결국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앞서서 이상한 이야기 중 하나라고 한 까닭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어서 이 선지자는 또다른 사람에게 나를 치라고 말하고 이번에는 부탁대로 이 사람이 선지자를 쳐서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제서야 선지자는 왕에게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몸에 상처를 입은 선지자는 눈을 가려 변장을 하고 왕에게 가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저는 이제 막 전쟁터에서 돌아왔는데 왕께 들려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군사가 저에게 사람을 하나 데려와서는 목숨을 걸고 그자를 지키라고 제게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일이 생기면서 제가 다른 일에 정신을 판 사이에 그 사람이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왕은 분노했습니다. "네가 말한 그대로 너의 그 부주의가 곧 너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왕은 이렇게 판결을 했습니다. 그러자 선지자는 수건을 벗고 자신이 누구인지 왕에게 보였습니다. 그후 하나님이 죽이고자 작정하셨던 벤하닷을 놓아준 사건을 가리키며 왕을 꾸짖었습니다. 왕은 눈 앞에 이익을 정신이 팔려 정작 중요한 일을 놓쳐 버린 어리석은 짓을 한 셈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했듯이, 아합 왕은 불순종의 대가를 자신의 목숨으로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제가 오늘 별 유명하지 않은 이 본문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서로의 얼굴을 때리도록 권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종으로 분장한 이 선지자가 말하는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포로가 어떻게 달아났는지를 아합 왕에게 설명하는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종이 이리 저리 일을 볼 동안에 그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이 이야기 속에서 종은 여기저기 온갖 장소에 왔다 갔다 하느라고 무척 바빴습니다. 종은 주의가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종에게 부여된 임무에 집중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던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할 수 없었습니다. 아합왕의 말대로 종은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했습니다. 아합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으로서 적국에 빼앗겼던 성읍을 되찾아 오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적국의 수도 한 가운데 이스라엘 왕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긴다면 국격이 엄청나게 높아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합왕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하고 주의 위엄을 나타내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을 돌아볼다가 가장 중요한 일을 잃어버린 것이 아합왕의 뼈아픈 실책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시대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본문이 아닐까 합니다. 현대인들의 삶은 과거에 비해 무척이나 분주해졌습니다. 세상이 변화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서 이것을 따라잡기에도 벅찹니다. 또한 생활이 너무 복잡해져서 뭘 한 가지 하려고 알아보고 신경써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요즘 세간에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가 화제입니다. 역대 케이블 티브이 드라마 시청률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다른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지는 않았는데 1988이라는 숫자에 꽃혀서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88학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면서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그 시대의 삶이 지금보다 훨씬 더 느리게 진행되었고 단순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불과 27년 전인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확실히 지금보다 단순하고 느린 삶이었습니다. 고3 수험생들이 나오는데 수시로 친구들이랑 만나 수다도 떨면서 놀기도 잘 놉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학력고사 준비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 다니느라 바쁩니다. 입시 제도도 얼마나 복잡한지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 근로자들의 근무 시간은 OECD 가입국 중 멕시코와 더불어 1,2위를 다툽니다. 독일의 1.6배 더 많이 일한다고 합니다. 거의 매일 같이 야근을 하고 주말 출근도 다반사입니다. 오죽하면 지난 대선 때 한 대선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겠습니까? 맞벌이 시대에 엄마들도 일하느라 바쁘고 또 자녀들 신경쓰고 챙겨야 할 것이 많아 바쁩니다.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공부하고 과제하고 알바하고 스펙을 쌓느라 바쁩니다. 이런 시대에 바쁘지 않으면 도리어 불안합니다. 지금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시간 좀 있나요?'라는 말에 일이 없어도 바쁜 척을 해야 내 존재감이 있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본문 이야기 속의 종처럼 이리 저리 볼 일이 많고 또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에 위험 요인은 없을까요? 


본문의 종은 그리고 이런 말도 합니다. "그가 없어졌나이다" 이리 저리 일을 보는 사이에 반드시 지켰어야 할 그가 없어졌습니다. 여러 가지 일에 신경 쓰느라 그가 없어지는지도 몰랐습니다. 종은 그를 잃어버렸기 때무에 자기의 생명도 잃어버릴 판이었습니다. 이 종은 얼마나 어리석은 종입니까? 내일은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2015년 우리는 얼마나 바쁜 삶을 살았습니까? 얼마나 정신이 없었습니까? 제가 아는 한 목자님은 올해 몇 건의 프로젝트를 맡아 거의 날마다 한 밤중에 퇴근해서 새벽에 집을 나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게다가 야간 대학원에 입학해서 강의를 듣고 과제도 내고 시험도 쳐야 했습니다. 또 둘째 아이까지 태어났습니다. 회사에 사표를 냈다가 한 번 반려되었는데 이번 연말에 다시 또 사표를 내었습니다. 이 분을 보면서 예전 생각이 났습니다. 저도 한때 아이티 벤처 기업의 개발팀장을 하면서 밀려드는 업무에 치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또 고려대학교 MBA 과정에도 다니게 되어 업무를 하다 말고 강의를 들으러 가고 주말에 레포트를 쓰고 시험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틈틈히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아빠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양과 일대일할 시간을 내기 어려워서 주로 주일 새벽 여섯시에 말씀 공부를 했습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날 문득 제 마음에 이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없어졌나이다" 회사나 학교나 가정에서 자기 역할을 꾸역꾸역 감당하고는 있었지만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없어진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내 생명보다 소중하신 분, 내가 반드시 지켜야 그 분이 내 안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내 영혼은 텅 빈 것처럼 공허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저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매주 소감 한 편을 깊이 있게 쓰겠다고 결단을 했습니다. 그 전에는 메시지 프린트를 보고 대충 베껴서 급하게 소감을 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본문 말씀만 놓고 씨름하고 묵상하겠다는 방향을 잡고 토요일 책상 앞에 꼼짝 않고 앉아서 낑낑거리며 소감을 썼습니다. 동역자가 모처럼 토요일에 아이들이랑 어디 좀 놀러가지 하루 종일 처박혀서 뭐하냐고 핍박을 하기도 했지만 꾿꾿이 소감만 썼습니다. 막상 그렇게 쓴 소감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히 깊이가 있거나 은혜가 넘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씨름하고 기도하면서 쓴 소감이기 때문에 평범해 보이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저에게는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돌이켜 볼 때 이 결심이 제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 중에 하나였습니다. 제 스스로 말씀의 맛을 느끼고 터득해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잃어버렸던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영적인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업무나 학업이 펑크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회사에서 인정도 받고 매학기 장학금을 받고 MBA 과정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아합 왕이 했던 말 중에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라는 말이 참 뼈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바쁘다는 것을 이유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누구의 탓을 할 수 없습니다. 직장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시험 때문에, 이런 핑계를 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저런 일을 볼 동안에 그가 없어진 것은 내가 스스로 결정한 일입니다. 덜 중요한 일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일을 놓쳐 버린 것은 내가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 때문도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바쁜 것도 문제이지만 그보다는 내가 남들보다 더 잘 나가고 더 성공하고 인정 받고 싶은 욕망이 진짜 문제인지 모릅니다. 남의 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할까봐 조심스럽지만 제가 경험해 봤기 때문에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내가 마음을 먹고 한 편의 소감을 깊이 있게 쓰고자 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소감을 쓰고 안 쓰고는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말씀 공부 전에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서 못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도 말씀 공부 직전에 소감을 쓰려고 하지 말고 미리 써 놓으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2016년 새해에도 올해 못지 않게 많이 바쁜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나중에 2016년 연말에 그래도 2015년엔 여유가 있었다는 회상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한 해 영적인 투쟁을 위한 목표를 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내다 보면 이리 저리 바쁜 일들에 치여 이루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너무 많은 목표를 세워 분주해 지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중요한 것 한 가지 꼭 지켜야 할 것 한 가지를 정해 아무리 신경 쓸 것이 많아도 이것 한 가지 만큼은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 아닐까 합니다. 그 한 가지는 각자에게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 매주 소감 한 편을 깊이 있게 쓰겠다는 것을 잡는 것도 아주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 부부가 서로 상대방이 소감을 잘 쓸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시간과 장소를 배려해 준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새해 이 일 저 일을 돌보느라 그분 예수님 한 분을 잃어 버리는 일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2016년을 여는 이 때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말씀을 신실하게 의지하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하면서 새해를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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