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왕기상하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이창무 2018. 9. 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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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가을 개강 특강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말씀 / 열왕기하 6:24-7:20

요절 / 열왕기하 7:9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현재 베트남에서 영웅이 된 한국인이 있습니다. 다 아시는 대로 바로 박항서 감독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감독을 할 때는 대단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베트남에서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키가 작아서 키 작은 베트남 선수들을 잘 이해하고 도울 것 같아서 뽑았다고 합니다. 결과는 대박이었습니다. 베트남 축구 대표팀은 아시아에서 항상 하위권을 맴도는 약체팀이었습니다. 그러나 박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부터 AFC U-23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더니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4강에 올랐습니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에서 2002년 한국에서 히딩크 감독의 위세를 능가하는 '쌀딩크'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 감독은 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기도한다고 합니다. 경기를 앞두고는 부르짖어 기도하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중보 기도를 부탁할 정도입니다. 박항서 감독 덕분에 요즘 베트남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는 소식입니다. 키도 작고 스타플레이어 출신도 아니고 프로리그에서 퇴출된 늙은 감독이 베트남 축구를 구원한 영웅이 된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사마리아 성을 구원하시는데 쓰신 사람들에게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그들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북이스라엘 그 중에서도 수도 사마리아성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호람이었습니다. 여호람 왕은 아버지 아합의 뒤를 따라 우상을 숭배하던 악한 왕이었습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가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하여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어느날 기습적으로 아람 왕 벤하닷이 군대를 이끌고 올라와 사마리아를 에워쌌습니다. 아람의 전략은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여 모든 물자의 반입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항복을 받아내고자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 안에서 식량은 바닥나고, 물가가 폭등하였습니다. 나귀는 유대인들이 평소 입에 대지도 않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 머리 하나의 가격이 노동자의 일 년 평균 연봉에 해당하는 은 팔십 세겔을 호가하였습니다. 비둘기 똥이라고 불리던 콩이 0.5 리터에 백만 원에 팔렸습니다. 살인적인 물가입니다. 이런 국가적인 위기 가운데 이스라엘 왕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27절에서 간곡하게 도움을 청하는 여인에게 왕이 한 말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는데 낸들 어찌 하랴'하는 말입니다. 정말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왕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여인이 왕에게 도움을 청한 데에는 끔찍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옆집 아줌마와 서로 자기 아들을 삶아 먹기로 했는데 먼저 내 아들을 삶아 먹고 나니 옆집이 오리발을 내밀고 있으니 이를 해결해달라는 청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참담한 일입니까? 이스라엘이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까? 신명기 28장에 보면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면 네 몸의 소생의 살을 먹을 것이라 경고하고 있습니다. 근본 원인은 이스라엘이 이 경고를 무시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우상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바알이 누구입니까? 풍요의 신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바알을 숭배한 결과는 극도의 굶주림이었습니다. 바알은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헛된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아람 군대를 보내 이런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이스라엘 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간구해야 했습니다. 30절을 보면 왕은 자기 옷을 찢고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습니다. 이를 볼 때 왕은 회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31절을 보십시오. "왕이 이르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왕은 나라가 이렇게 된 모든 책임을 선지자 엘리사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왕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회개했다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을 것입니다. 다시 보니 왕이 옷을 찢은 이유는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엘리사에게 열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엘리사의 집에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아니, 장로들이 왕궁에 있지 않고 엘리사의 집에 있을까요? 이미 자포자기한 왕에게 장로들이 무슨 기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댈 곳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뿐이었습니다. 엘리사의 집에서 국난 극복 대책 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왕의 사자가 엘리사를 체포하러 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아들이 내 머리를 베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엘리사는 왕을 가리켜 '살인한 자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살인한 자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여럿 살해한 여호람의 아버지 아합 왕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왕은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는 말이었습니다.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재앙을 내리실 뿐 아니라 구원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왕은 구원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절망에 빠져 헤어 나올 힘이 없었습니다. 해결책도 없었고 그렇다고 적에게 항복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었습니다. 7장 1절을 보십시오.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엘리사는 내일이면 성 안의 식량 문제가 해결되고 물가가 안정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구체적인 방법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무조건 신뢰할만한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구원의 복음이었습니다. 이때 어떻게 답해야 하겠습니까? 길게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간단하게 '아멘'하고 답하면 됩니다. 그런데 왕이 신임하는 한 장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이 말은 사방이 아람군대로 포위되어 있는데 어떻게 단 하루 만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의문을 표시한 것일까요? 단순히 그 정도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창을 내어 음식을 성 안에 쏟아 부으셔도 해결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허풍으로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이고 심히 모독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조상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를 지나며 식량이 다 떨어졌을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실제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창을 내사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이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십년 간 부족함이 없이 먹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하루 만에 사마리아성의 기근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불신을 넘어 하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더구나 백성들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할 지도자인 장관에게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 책임이 더 무겁습니다. 이에 엘리사가 장관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성 안의 식량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내일 장관은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의미를 알면 참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왕과 장관이 했던 말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표현을 바꾼다면 그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안 도와주시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이건 다 그 녀석 때문이에요. 두고 보라고요. 그 녀석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하나님은 내 인생에 계속 실패만 주셨다고요. 이제 하나님께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없어요." "세상이 두 쪽이 나도 이번 일은 아무런 해결책이 없어요. 다 끝이라고요. 끝! 하나님이 도와주시려고 했으면 진작 도와주셨겠지 일이 여기까지 오게 하셨겠냐고요?" 적어도 한두 번쯤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거나 아니면 우리 입에서 나온 말 아닙니까? 주로 인생에서 위기를 만났을 때 나오는 말들입니다. 이런 위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닥쳐옵니다. 그리고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갑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해결책이 보이질 않습니다. 여기서 끝장이 나는가 싶어 불안합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길 두려워합니다. 자기 책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허물과 죄를 고백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책임을 덮기 위해 두 방향으로 화살을 돌립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시킵니다. 그 다음에는 누군가 한 사람을 지목해서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 지경이 된 것은 다 저 인간 때문이다." 부모님 탓, 동역자 탓, 목자님 탓을 하기도 합니다. 그 후에 자포자기합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는 말로 멋지게 포장하기도 합니다. 누군가 어떤 시도를 하려고 하면 냉소적으로 대응합니다. "흥!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쓸데없이 에너지나 낭비하지 말지 그래." 다른 사람의 희망을 꺾어놓아야만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도자가 이런 사람이라면 더 심각합니다. 그 공동체는 최악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속의 엘리사는 달랐습니다. 엘리사는 위기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집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절망적인 때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울입니다. 바울이 탔던 배가 큰 파도에 파선을 당했습니다. 모두 삶의 희망을 포기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이 홀로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노라"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하고 바울의 말이라면 선장부터 백부장까지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결국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만나게 될 때 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하나님, 지금도 만물을 주관하고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허물과 죄악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여 주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주위에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체험할게 될 것입니다. 공식적인 포지션이 어떠하든지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결국 이런 믿음의 사람을 의지하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위기를 만날 때 먼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기초해서 믿음의 말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누구를 쓰셔서 사마리아 성을 구원하셨을까요? 위대한 영웅이 깜짝 등장하는 것 아닐까요? 3절을 보십시오. 새로운 등장인물은 다름 아닌 나병환자 네 사람이었습니다. 영웅이 아니라 나병환자라니 실망스러운가요? 그러나 아직 실망하긴 이릅니다. 이들은 부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성문 어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천하게 여김 받던 나병환자에게까지 먹거리가 돌아올 리 없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굶어 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이판사판 아람에 항복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해질 무렵 아람 진영에 도착한 네 사람의 눈앞에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진 안에는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6절을 보십시오.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아람 군대는 진영 남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큰 군대가 진격해 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고용한 용병들의 기습 공격으로 판단하고 '걸음아 나 살려라'하면서 줄행랑을 쳐버렸습니다. 사실 아람 진영으로 가까이 다가 온 사람들은 나병환자 네 사람 밖에는 없었습니다. 이들이 발자국 소리가 그렇게 컸을까요? 한 발을 떼면 탱크 소리가 나고 또 한 발을 떼면 장갑차 소리라도 났을까요?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로 하여금 집단 환청을 듣게 하셨습니다. 패닉 상태에 빠진 아람은 모든 무기와 식량, 귀중품까지 그대로 남겨둔 채 몸뚱이만 도망쳐 버렸습니다. 나병환자들은 간만에 이국적인 아람 스타일의 뷔페식으로 배가 터지도록 먹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빈 장막 여기저기를 털어서 많은 재물을 취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생 역전, 대박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이야기가 끝이 난다면 이 일은 어떤 불우한 인생들에게 임한 큰 행운의 스토리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닙니다. 여기서부터 더 중요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자기 몫의 은금을 정신없이 챙기던 나병환자들이 갑자기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왜 안 됩니까?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대박 나서 부자되었다는 소식입니까? 아름다운 소식이란 하나님께서 사마리아 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큰 일을 행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병환자 네 사람만을 구원하시려고 이런 일을 행하셨겠습니까? 네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먼저 알게 된 사람들로서 이 소식을 전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계속 침묵한다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만 같았습니다. 성 안 사람들은 그 시각에도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까놓고 말해서 그들은 이 네 사람을 그 동안 사람 취급하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근처에 보이기만 하면 당장 멀리 가라며 돌멩이를 집어 던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받았던 마음의 상처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복수를 하고자 했다면 모른 척하고 은금을 챙겨 멀리 떠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성읍 문지기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렸습니다. 성문으로 향하는 나병환자 네 사람의 발은 썩어 문드러져 있었습니다.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 몇 개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흉측해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발은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무가치하다 여김 받았던 그들이지만 이제는 삶과 죽음을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위기 속에서 지체 높은 왕이나 왕의 장관은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사마리아 성을 구원하실 때 나병환자 네 사람에게 결정적인 역할을 맡기셨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조건이 뛰어난 사람만을 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도리어 지극히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머리 좋은 빌립이 아니라 엉뚱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작은 시도를 했던 안드레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을 고린도전서 1장 27절부터 29절까지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공부했을 때 몇몇 목자님들이 의외로 7장 8절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8절은 나병환자들이 이 장막 저 장막 다니며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 구절에서 은혜를 받으셨을까요? 곰곰이 짚어보니 나병환자들이 위대한 성인이나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발견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평균 이하의 삶을 살던 비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침묵하지 않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 것, 그 작은 행동 하나로 사마리아성 구원 역사의 키맨(key-man)으로 쓰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해 줍니다. 우리도 영웅은 아닙니다. 한 나라 또는 한 도시를 구할만한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영향력이 큰 지위에 올라가 있지도 않습니다. 이 지구 위에 거주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죄사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목마른 영혼에 생명수를 채워주셨습니다. 은이나 금보다 더 귀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특별할 것 없는 나에게 왜 이런 특별한 복을 내려주셨을까요? 우리가 그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습니다. 나만 구원 받고 천국 가라고 주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땅히 아직 이 아름다운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 가서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나병환자 네 사람과 거의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사마리아성은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하셨고 우리의 구원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 아름다운 소식을 가서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침묵하지 말고 말하면 됩니다. 그때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발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전한 그 아름다운 소식이 죽어가던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 받게 된 것도 그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침묵하지 않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은혜의 빚을 다른 사람에게 갚을 때입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하나님이 이루신 이 구원의 놀라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가을 학기 캠퍼스에 우리를 통해 아름다운 소식이 구석구석 전달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1절과 12절에는 나병환자들로부터 온 소식을 들은 왕의 반응이 나옵니다. 왕은 나병환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람 군대의 매복 작전이 틀림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를 볼 때 왕이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은 다 있는데 단 한 가지 믿음이 없었습니다. 구원의 소식이 도착했지만 믿음 없는 왕 때문에 마지막 기회마저 날아갈 버릴  뻔했습니다. 그러나 정탐이라도 해 보자는 신하의 간언 덕분에 나병환자 네 사람의 말이 모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성 안의 모든 백성들이 물밀듯이 아람 진영을 향해 몰려나갔습니다. 마음껏 진영 안의 물건들을 가져온 결과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적이 가지고 있던 물자로 성 안의 굶주림 문제를 해결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삼손이 사자의 몸에서 꿀을 얻은 것에 비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왕의 장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7절을 보십시오.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가 말한 대로라" 장관은 성문 앞에서 하나님께서 사마리아성을 구원하신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밟혀 죽음으로 그 구원을 조금도 누리질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조롱한 자의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이 일이 불의의 사고인지 백성들의 복수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일 역시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현재 사마리아 성이 처했던 상황과 거의 흡사한 처지에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베네수엘라입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다고 합니다. 병원에 의약품이 없어 치료를 못하고 있습니다. 살인적인 물가 폭등으로 대통령의 한 달 월급으로 통조림 한 캔을 살 수 있을 정도입니다. 화폐 개혁을 단행했지만 새로운 화폐를 찍어낼 종이가 없어서 인쇄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구스타보 목자님이 고군분투하고 계십니다. 이분은 베네수엘라의 엘리사 같습니다. 이 어려움 속에서도 경찰과 시위대를 향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극복될 수 있을까요? 정치가들에겐 답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전능하십니다. 구스타보 목자님의 믿음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드리는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한테레사 선교사님에게도 기적이 필요합니다. 제 어머니께서 췌장암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병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압니다. 우리의 중보 기도가 더욱 절실합니다. 오랜 수험 생활에 지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박반석 목자님의 합격 소식에 이어 며칠 전 신성진 목자님의 최종 합격 소식도 있었습니다. 수험생들은 올해 좋은 징조가 있으니 끝까지 힘내시길 기도합니다. 요한복음 11장 40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주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길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가을 학기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누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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