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왕기상하

열심을 넘어 전심으로

이창무 2015. 4. 30.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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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열왕기하 공부 제 5 강 


열심을 넘어 전심으로


말씀/ 열왕기하 8-10장 

요절/ 열왕기하 10:30,31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작년 12월 10일 고려대 경영학과 주현우 학생이 정경대 후문에 붙인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우리 사회를 한 때 후끈 달군 적이 있습니다. 이후에 전국에 있는 대학들과 심지어 고등학교에까지 안녕하지 못하다는 응답을 적은 대자보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었습니다. 여기서 안녕이란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평안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평안하냐?'라는 인사말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이 질문에 예후는 '어찌 평안이 있으랴'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죄악이 온전히 제거되었을 때만이 참된 평안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열심을 넘어 전심으로 드리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평안을 온전히 누리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8장 1절을 보십시오.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살려 준 적이 있는 수넴 여인에게 거주지를 옮기도록 권고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기근이 이 땅에 칠 년 동안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말대로 칠 년 동안 블레셋 땅으로 피신했다가 기근이 끝나자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향에 돌아와 보니 기막힌 일이 벌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인이 떠나며 남겨 두었던 집과 전토가 어느새 왕의 소유로 귀속되어 있었습니다. 집과 전토를 되찾지 않고서는 여인은 당장 앞으로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수넴 여인은 이 일을 탄원하려고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러면 왕이 여인의 탄원을 받아 들여 집과 전토를 돌려 줄 가능성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당시 전제 군주 사회에서 왕이 한 번 꿀꺽 삼킨 땅을 도로 내놓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왕은 집과 전토를 전부 되돌려 주었을 뿐 아니라 요구하지도 않았던 그 땅의 소출까지 모두 돌려주었습니다. 어떻게 여인은 왕으로부터 이런 큰 호의를 입을 수 있었을까요? 이는 여인이 도착하기 직전에 마침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왕에게 엘리사가 한 여인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린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절묘한 타이밍을 보십시오. 여인의 청원을 듣기도 전에 왕의 마음은 이미 다 녹아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결코 우연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넴 여인을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수넴 여인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가까이 하고 선대한 일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귀하게 여기시고 여인을 환란 중에서 평강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반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을 가까이 하다가 평강을 잃어버린 인물도 있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오랜만에 남쪽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다윗 왕가가 지속되었던 남유다는 북이스라엘과는 달리 비교적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잘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유다에서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왕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을 때부터였습니다. 여호람은 북 이스라엘 아합의 집을 그대로 본받아 바알 숭배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쩌다가 순수했던 유다마저 이렇게 오염되고 타락하고 말았습니까? 이는 여호람이 아합의 딸인 아달랴와 정략결혼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 입장에서는 적대적인 주변 국가들을 혼자 힘으로 상대하기가 늘 힘에 부쳤습니다. 이때 북이스라엘 아합 왕가와 혼인 관계를 맺어 놓으면 든든한 동맹이 될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을 하였습니다. 유다는 이 달콤한 잔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잔은 독이 든 잔이었습니다. 아달랴는 남편 여호람과 아들 아하시야를 뒤에서 조종하였습니다. 우상숭배라는 치명적인 독이 유다 온 땅에 퍼트렸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질듯이 아프셨을까요? 그나마 희망을 걸었던 큰아들마저 못된 여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을 때 아버지의 마음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이런 큰 악을 행한 유다는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종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유다의 멸망을 유보하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유다가 정신을 차리도록 주변 나라들을 통해 징계하셨습니다. 동쪽에서는 에돔이, 서쪽에서는 립나가 배반하였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나날이 더욱 강성해지는 아람의 세력은 남과 북 모두에게 크나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제 유다 왕국에서조차 다윗과 솔로몬왕 시대의 평화는 머나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본문 속에 수넴 여인은 망할 듯 망할 듯 하면서도 망하지 않고 결국 평안을 얻었습니다. 반면에 유다 왕조는 잘 해보려고 하는데 잘 안 되고 결국 평화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원인은 단순합니다. 수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가까이 했기 때문이고 유다 왕조는 하나님의 원수인 아합 가문을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가 우리 삶에 평안이 임하느냐 아니면 평안이 떠나가는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돌이켜 보면 저의 과거는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나날들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 속에서 제 마음도 함께 이리저리 요동치며 불안해하고 버거웠습니다. 한때는 자살까지 심각하게 고려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평화롭습니다. 정말입니다. 직장 동료가 저에게 '호수'라는 별명을 지어준 적이 있습니다. 돌을 아무리 던져도 가라앉기만 할 뿐 항상 평온하다고 이런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제 인생에서 두 명의 하나님의 사람과의 만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첫째는 제게 성경을 가르쳐 주신 목자님과의 만남입니다. 목자님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어떻게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사랑을 알아 내면에 참 평강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둘째는 믿음의 결혼을 통한 제 동역자와의 만남입니다. 만약 제가 이세벨이나 아달랴 같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각만 해도 너무너무 끔찍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의와 빛의 자녀인 우리는 불법과 어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잘못된 만남이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세벨이긴 한데 돈이 많고 얼굴도 예쁜 이세벨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안 됩니다.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유다 왕조가 여기서 틈을 보였다가 온 나라에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우리 센타의 사랑스런 2세들도 우리가 먼저 체험한 하나님 주신 이 평안을 함께 누려야 하지 않겠나!’하는 마음이 절실해졌습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도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악한 동무들로부터 2세들을 보호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두 번째로 2세들이 부모님의 신앙을 존경하고 부모님들로부터 겸손히 배우며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세 번째로 2세들이 모두 장차 믿음의 결혼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기도 제목을 가지고 계속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 기도대로 다 이루어져서 우리 2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간절히 소원합니다. 


9잘 1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는 제자 중 하나를 불러 길르앗 라못에 있는 예후 장군을 만나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라는 밀명을 주었습니다. 이때 예후는 아람 군대 앞에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앞서 8장 7절부터 15절까지 보면 엘리사가 아람 사람 하사엘에게 그가 주군인 벤하닷을 배반하고 아람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보면 여기서 왜 갑자기 엘리사가 정치에 개입해서 킹메이커 노릇을 하는지 의아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19장 15, 16절을 보면 이 일이 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명하셨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 일을 엘리사의 몫으로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엘리사는 때가 되자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전격적으로 아합이 속한 오므리 왕조를 폐하고 예후 왕조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예후를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을까요? 그 이유가 7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 예후는 아합의 집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합왕 때에 그의 집에 대한 무서운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 후로 오랫 동안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악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죄악의 밤은 더욱 깊어져 갔습니다. 이제 아합 왕가가 북이스라엘 뿐 아니라 남유다까지 급속도로 타락시키는 모습을 하나님은 더 이상 지켜보실 수 만은 없으셨습니다.


당시 아합의 아들 요람왕은 아람 왕 하사엘과 전투 중에 부상을 입어 이스르엘에서 요양 중이었습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도 요람 왕을 병문안하러 이곳에 와 있었습니다. 예후는 반란 소식이 알려지기 전에 일을 처리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이스르엘을 향해 병거를 몰았습니다. 이 모습이 망대 위의 파수꾼의 눈에 포착되었습니다. 요람 왕은 이를 보고 받고 두 번씩이나 전령을 보내 물었습니다. "평안하냐?" 예후가 매번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물러나라" 답답했던 요람왕은 병든 몸을 이끌고 나가 예후를 보고 직접 물었습니다. "평안하냐?" 이에 대한 예후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그제야 요람은 '반역이로다!'를 외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예후가 쏜 화살에 심장을 관통 당한 요람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왕의 시체는 근처에 있던 나봇의 포도원 자리에 버려졌습니다. 이로써 나봇이 흘린 피를 갚으시겠다고 하셨던 여호와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합 왕가와 사돈 지간인 유다 왕 아하시야도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희대의 악녀 이세벨은 끝까지 고고한 척했지만 결국 창문 밖으로 던져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이세벨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내려 했지만 이미 몸뚱이가 개들에게 먹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열왕기상 21장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라 하셨던 여호와의 말씀 그대로 1 cm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성취였습니다. 


여기서 요람왕과 예후는 평안이란 말을 서로 다른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요람왕이 예후에게 무려 세 차례나 물었던 '평안하냐?'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말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느냐는 말입니다. 요람왕의 관심사는 오직 전쟁의 승패에 있었습니다. 요람에게 평안이란 전쟁에서 승리하여 적들을 굴복시킨 상태를 의미하였습니다. 이기면 평안이고 지면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후가 생각했던 평안은 요람과는 달랐습니다. 예후는 요람에게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로 대표되는 죄악이 이스라엘에 이렇게 만연해 있는데 어떻게 평안할 수 있느냐며 반문합니다. 예후에게 평안은 이스라엘 가운데 죄악이 뿌리 뽑힌 상태를 의미하였습니다. 설사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죄악이 뿌리 뽑히지 않고서는 평안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람보다 더 무서운 적이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평안함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인사할 때도 ‘안녕하십니까?’라고 서로 평안을 묻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이 무엇입니까? 큰 사건 사고가 없으면 평안입니까? 일이 술술 잘 풀려 가면 평안입니까? 경쟁 사회 속에서 승리하는 것이 평안입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다 요람의 평안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진짜 평안이 있습니다. 진짜 평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맺는 것이 평안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죄악들이 제거되어야 평안이 있습니다. 별 탈 없이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고 무조건 평안하다고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우리 안에 죄들이 제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면 어떻게 평안이 있겠습니까? 남몰래 정욕의 죄를 즐기면서 아직 들키지 않았다고 평안할 수 있습니까? 이미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해 있는데 아프지도 않고 사고가 없다고 평안할 수 있습니까? 참된 평안을 누리려면 우리 속에 있는 아합과 이세벨의 요소들, 탐욕과 음란의 죄들, 우상숭배를 과감하게 찍어 내야 합니다. 죄와의 싸움에서는 인정사정을 봐주지 말아야 합니다. 나중으로 미뤄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청교도의 황태자', '영국의 칼빈'이라고 부르는 존 오웬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일생 5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는데 그중에 가장 유명한 책이 '죄죽이기'라는 책입니다. 책 전체가 다 죽이는 이야기입니다. 8장의 제목은 '죄를 죽이는 아홉 가지 방법'입니다. 그 8장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죄의 정욕의 위험은 사람의 일생 동안 평화와 힘을 빼앗아갈 수 있다는 데 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그분 앞에서 동행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은 은혜 언약의 위대한 약속의 핵심이다. 바로 이와 같은 평화와 힘을 통해서 우리 영혼은 삶을 얻는다. 만약 그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화평 가운데서 우리가 그 분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힘을 상실한다면 그런 삶은 우리에게 더 이상 무의미하다. 정욕을 죽이지 못할 때 그 정욕은 영혼에게 이처럼 평화와 힘을 빼앗아간다." 우리가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죽입니다. 죽기 살기로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싸우는 척만 하지 말고 실제로 죄를 죽여야 합니다. 죄가 죽을 때까지 끝까지 추적해서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안에 하나님의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죽이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 열심을 내어 마침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주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10장을 보십시오. 9장에서는 아합의 아들 요람왕과 아합의 사위 아하시야왕와 아합의 아내 이세벨 등 아합 가문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예후는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사마리아 성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아합의 아들들 70명을 타겟으로 삼았습니다. 예후는 사마리아 성의 장로들에게 덤빌 테면 한 번 덤벼 보라는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장로들은 스스로 아합의 아들들의 머리를 베어 예후에게 가져다 바쳤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땅에서 아합의 집에 속한 모든 자들이 박멸되었습니다. 아하시야의 형제들 42명이 아무 것도 모른 채 외갓집에 대동단결 문안 인사하러 왔다가 예후에게 딱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들 역시 한 명도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바알의 제사장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예후에게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웅크리고 있어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예후는 꾀를 내어 바알을 위하는 큰 대회를 열겠다는 거짓 광고를 내었습니다. 이를 보고 참석한 바알의 제사장들을 예후는 이번에도 남김없이 죽여 버렸습니다. 바알을 섬기던 신당은 다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는 변소를 만들었습니다. 


예후는 어떤 사람일까요? 이스라엘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일까요? 아니면 주군을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반역자일까요? 전략과 실행 능력이 탁월한 군인일까요? 아니면 잔인한 학살자일까요? 예후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평가나 내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평가는 ‘성경이 어떻게 평가를 내리고 있느냐’입니다. 30절과 3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예후가 여호나답을 만났을 때 한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예후는 하나님의 향한 열심에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그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대단한 열심을 내어 아합의 집을 깨끗하게 청소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자들을 심판한 예후의 열심에 대해 매우 흡족하게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로 말미암아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후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 제단을 없애지는 않았습니다. 왜 예후가 아합의 집을 제거하는 일에는 열심을 내었지만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는 일에는 냉담했을까요? 아합의 집을 제거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입입니다. 동시에 예후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이전 왕조의 관련자들이 모조리 제거되면 새 왕조에 반기를 들 구심점이 사라집니다.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도 잡는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예후는 사력을 다해 이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반면에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왕권이 약화될 수도 있는 길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이 만든 단을 없애버리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남유다로 계속 왕래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난 유다가 더 좋아'하면서 이스라엘을 떠나는 백성들이 생길지도 몰랐습니다. 하나님만 좋고 나한테는 별로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후는 이를 외면했습니다. 만약 예후가 금송아지 제단까지 제거했다면 그의 후손들이 상당히 장기간 동안 집권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후가 부분적인 순종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위를 예후 가문에 단 사대까지만 허락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땅에서 일부 영토를 잘라내시어 아람왕 하사엘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예후는 28년 집권 기간 내내 끊이지 않는 하사엘의 공격에 시달렸습니다. 예후는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자들을 뿌리 뽑는 종교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인정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개혁이 불완전한 반쪽 자리 개혁에 그쳤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직 온전한 평화를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열심은 있으나 전심은 없는 한계적인 신앙은 예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Win-Win 게임을 벌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Win 나도 Win, 그런 일에는 열심을 냅니다. Feel이 꽂히면 한국 사람만큼 열정적인 사람도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한국 사람만큼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드뭅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하나님도 예후의 열심을 인정하셨듯이 한국 교회의 열심을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Win, 나는 Lose 일 것 같은 일에는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무관심합니다. 인생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갈까 싶거나 Feel이 꽂히지 않으면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잘 순종을 안 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는데 내가 좋아하는 구절에만 밑줄을 칩니다. 소감을 쓸 때도 부담이 되는 말씀은 어플리케이션을 안 쓰고 넘어갑니다. 그래도 발표만 하면 박수는 받습니다. 헌신을 합니다. 결단도 합니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 정해놓은 한계선이 있습니다. 그 이상은 결코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한계선을 그어 놓고 부분적으로 순종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도 예후에게 ‘너는 딱 4대만 왕노릇 해라’하셨듯이 한계를 두어 축복하십니다. 더 축복하고 싶으셔도 전심이 없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90년대 한국 교회에 기독교 세계관 운동 붐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각 대학에 계신 크리스천 교수님들이 열심히 이 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이 운동은 우리나라에 복음적인 기독교 대학을 세워 기독교 세계관을 사회 곳곳에 펼쳐내자는 운동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기금이 쏟아져 들어와서 설립 직전에까지 갔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대학 설립이 무산되어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열심이 있던 교수님들에게 지금 재직 중인 서울대, 포항공대, 고려대 등의 교수직을 버리고 옮겨 오라고 했을 때 아무도 그만 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도에 우리 센터에서 파송한 장 디모데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작년 우리 여름수양회 때 주제 강의를 전해 주셨습니다. 이 분은 주변에서 수학 천재로 불리는 분입니다. 미국 워싱톤에 유학생 선교사로 나가셔서 교수 목자가 되었고 아이도 셋을 낳고 큰 집도 장만했습니다. 세계선교도 하고 미국에서 대학교수도 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인도에 동역자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으시고 인도 IIT 대학에 지원하여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그 덕에 월급은 1/3로 줄었고 날씨와 아파트 등 모든 것이 열악해졌습니다. 지금 디모데 선교사님은 날마다 아침마다 장막을 돌며 인도 형제들을 깨워 기도 모임에 데리고 나가고 계신다고 합니다. 이 한 분이 전심으로 드린 헌신으로 말미암아 힘들었던 인도 역사가 큰 힘을 얻고 성령의 그릇이 이루어져 가고 있다고 합니다. 열심을 너머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장디모데 선교사님이야말로 이 시대 진정한 축복의 통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만 Win 나는 Lose 인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Win하시면 나도 언제나 Win 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내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인 순종은 부분적인 평화를 가져 옵니다. 전심으로 순종할 때 온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새해가 우리 마음을 통째로 갈아엎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겨 참된 평화를 누리는 복된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4.2.2,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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