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창무 2015. 6. 21.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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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말씀 / 요한복음 12:1-26

요절 /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지난 주 엘리자베스 엘리엇 여사가 88세를 일기로 소천하셨습니다. 엘리엇 여사의 남편 짐 엘리엇은 남미 에콰도르에서 마지막 '식인 부족'인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28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때 타임지는 이 사건을 10 페이지에 걸쳐 다루었는데 기사의 제목은 ‘이것이 무슨 낭비인가’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롯 유다가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게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짐 엘리엇의 일기장에 이런 글귀가 남아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엘리엇 여사는 남편의 뒤를 이어 아우카 부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녀의 용서와 헌신에 감동을 받은 원주민 모두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되었던 남편과 향유를 부은 마리아와 같았던 아내, 엘리엇 부부는 역사 상 가장 아름다운 부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한 일의 밀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죽으심의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소원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때는 유월절 엿새 전이었습니다. 이 유월절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예정된 유월절이었습니다. 이미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은 시작되었습니다. 남은 숫자는 고작 여섯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외에 아무도 이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철없는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크냐를 놓고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서는 그의 생환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물론 나사로를 살려주신 예수님이 주빈이셨고 제자들도 함께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 남매가 예수님을 섬기는 방식이 각각 달랐습니다. 마르다는 늘 그렇듯이 부지런히 일을 했습니다. 요즘 뜨고 있다는 백종원 쉐프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과 말벗이 되어드렸습니다. 곁에 있던 제자들이 나사로에게 물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납니까?” “궁금하면 오백 원 주세요.” 이렇게 흥겨운 잔치집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빠지는 법이 없던 막내 마리아가 아까부터 보이질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찾아보려고 하는 마침 그때에 마리아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마리아의 손에는 조그만 향유 옥합이 하나 들려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마리아가 당시 접대 풍습에 따라 저 향유를 예수님 위에 한두 방울 떨어뜨리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리아는 뚜껑을 열더니 순전한 나드 한 근을 모두 다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었습니다. 


당시 나드 삼백 그램 한 근의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 정도였습니다. 노동자 일년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지금 시세로 삼천만원 정도 되는 거금이었습니다. 부모도 없는 마리아가 이 정도를 모으기가 어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가고 싶은 스타벅스도 안 가고 자판기 커피 뽑아 마시고 여전히 구닥다리 2G폰 쓰면서 한 푼 두 푼 모은 마리아의 결혼 자금이었습니다. 이 향유는 마리아의 꿈과 미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향유를 몽땅 통째로 예수님의 발에 부어버렸습니다. 순식간에 온 방 안에 짙은 향유 냄새가 가득하여 음식 냄새를 압도해 버렸습니다. 마리아의 돌발 행동에 왁자지껄하던 잔치 집에 홀연히 적막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곧바로 마리아가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길고 고운 생머리가 치렁거렸습니다. 평소 ‘난 소중하니까’를 외치며 로레알 샴푸로 관리해 오던 그 소중한 머리카락이었습니다. 무릎 꿇은 마리아는 그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정성스레 닦아 드렸습니다. 사람들의 놀란 눈은 더 커지고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습니다.


도대체 마리아가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이는 분명 예수님이 오라비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오라비가 살아 돌아왔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부모 없는 삼남매를 아버지처럼 돌보아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려 감사하고 경배 드리는 일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마리아가 굳이 이렇게 파격적인 방법으로 감사를 표시해야 했을까? 아무래도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길 법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마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각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가롯 유다의 시각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얼굴을 찌푸린 채 유다가 마리아를 째려보며 말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주변 사람들도 유다의 말에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부을거면 바닥에 비닐이라도 깔고 부을 것이지 아깝구만. 아까워.” “아니 사람이 무슨 대책을 세워놓고 일을 저질러야지. 앞으로 마리아는 시집가기 힘들겠어.” 겉으로 보면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 가득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누가 감히 유다의 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의견을 정면으로 부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음흉한 속셈이 있었습니다. 평소 유다는 돈궤를 맡고 있었는데 그 중 일부를 인 마이 포켓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돈으로 바꾸어 헌금을 했으면 한 몫 챙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게 되어 안타까울 따름이었습니다. 유다의 말을 듣은 마리아는 자기의 진심을 몰라주는 것 같아 설움이 북받쳐 눈물이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어떤 시각으로 보셨습니까?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마리아를 막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향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에 쓰려고 간직해 두었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향유는 시신에 발라 부패와 악취를 방지하는 쓰임새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리 알고 오래 전부터 향유를 준비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가능했을까요?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던 마리아가 주의 죽으심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면 마리아도 전혀 몰랐지만 예수님께서 그녀의 헌신을 기뻐 받으시고 이를 자신의 죽으심과 결부시켜 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마리아가 미리 알았느냐 몰랐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마리아가 쏟아 부은 값비싼 향유로 경배 받으시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결코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제 엿새 후 마리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실 분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죽음으로 마리아를 구원하시고 그녀에게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주실 분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이 예수님은 애써서 모은 값비싼 향유보다도,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가 걸린 머리털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유다의 말처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도 물론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주님을 경배하고 기리는 일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는 꼭 필요한 일을 가장 적절한 때에 행했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쏟은 향유는 마루 바닥 틈 사이로 흘러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한 방울도 빠짐없이 하나님 나라에 간직되었습니다. 이로서 유다의 말에 상처 받았던 마리아는 위로를 얻었습니다. 더불어 이 마리아의 헌신은 십자가의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 고독하셨던 예수님께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향유를 부은 마리아 사건은 사람들을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로 나눕니다. 첫째는 ‘마리아가 쓸 데 없는 짓을 했다’ ‘마리아는 바보다’ ‘마리아는 광신자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상식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교양인들입니다. 때로는 가롯 유다처럼 가난한 자들을 먼저 구제해야 한다는 휴머니스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믿어도 좀 적당히 믿지 너무 광신적으로 믿지 마라’고 합니다. 예배나 선교에 쓸 돈이 있으면 차라리 그 돈으로 사회 복지 사업을 하고 구제에 힘쓰라고 충고합니다. 그들의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둘째는 ‘마리아는 마땅히 할 일을 했다’ ‘마리아를 본 받고 싶다’ ‘마리아처럼 헌신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럽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생명을 바쳐 주님을 섬긴 순교자들을 흠모합니다. 복음의 불모지에 나아가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의 삶이 가장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이들은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 되신 주님께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이라고 고백합니다. 내 헌신은 늘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그 차이는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느냐 모르느냐는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주님을 향한 헌신과 사랑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대책 없는 광신이라고 비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죽으심이 바로 내 죄 때문이고 주의 못 박히심이 바로 내 허물 때문임을 아는 사람은 마리아의 헌신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주님은 나의 전부 나의 모든 것이 되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목자님들 중에서는 ‘제 정신이냐?’ ‘미친 것 아니냐?’는 말을 한두 번 이상 안 들어 본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때 대학을 졸업 후 알바하면서 그 물질을 양들을 섬기는 풀타임 자매 목자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너는 연애도 안 하고 돈도 안 모으고 어떻게 결혼하려고 하느냐?’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습니다. 좋은 대학 나와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 있는 사람이 어느날 모든 것을 버려두고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선교지로 훌쩍 떠나는 일도 무척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한송이 선교사님도 교사를 하시다가 어느날 그렇게 나이지리아 선교사로 떠나셨습니다. 이 나라는 보코하람이라는 극렬 이슬람 테러 단체가 활동하고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곳입니다. 최근 편지를 읽어 보니 자주 전기도 안 들어오고 물도 끊어진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땀띠로 무척 고생한다는 말에 마음이 짠했습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이분은 정말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같은 편지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언젠가 세계 선교 보고 대회에서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아프리카에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필요합니다’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내가 그곳에서 빛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십자가의 예수님은 한송이 선교사님에게 생명의 빛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한송이 선교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선교 일선에서 아낌없이 남김없이 후회없이 자신을 주님께 드려 헌신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지금 내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일년치 연봉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은 분이십니까? 아니면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아까운 분이십니까? 주님의 영광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내 자존심이 더 중요합니까? 주님은 내 인생을 다 쏟아부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작은 시간이라도 드리기에 아까운 분이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와 거기에 담긴 그 사랑을 깨닫는 만큼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만큼 사랑하고 헌신하지 못하고 있다면 마리아가 알았던 만큼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캠브리지 세븐의 한 사람으로 콩고 선교사로 헌신했던 찰스 스터드가 남긴 말을 기억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분께 드리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앞에서 너무 큰 희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를 드러나기 위해 하는 어떤 헌신, 어떤 희생도 낭비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와 그 한량없는 사랑을 마리아만큼 아니 마리아 이상으로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그분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를 우리 삶으로 온전히 드러내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유대의 최대명절인 유월절을 보내기 위해서 예루살렘 올라온 수많은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서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종려나무는 유다 마카비 시대 이후로 유대인의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나무였습니다. 그들이 이런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든 것은 자신들의 민족의 왕으로서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이 기대하고 외치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구원의 왕, 겸손의 왕으로 오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의 외침 속에 당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에서 이보다 더 화려한 순간은 없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아니나 다를까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들의 방문을 받은 제자들은 아주 의기양양했습니다. “드디어 우리 스승의 명성이 해외까지 퍼졌구나” 인간적으로 예수님도 기뻐하실 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호하고 외국인들까지 찾아오니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여기서 깃발만 꽂으면 대권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영광은 대권을 차지하는 영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의 죽으심이 영광이 될 수 있습니까? 


24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009년 5월에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에서 고려시대 연꽃 씨앗이 700여 년 만에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 씨앗을 물에 담근지 5일 만에 싹이 나기 시작하였고, 다음 해 7월 7일 드디어 7개의 연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이 연꽃에 ‘아라홍련’이라는 이름을 붙여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씨앗은 단지 심기어지지 않았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700년 이상의 길고긴 세월 동안 한 알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가진 가능성이 얼마나 클까요? 보통 하나의 밀알에게서 100-125개의 열매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을 그대로 다시 심어서 수확하는 일을 5년 정도만 해도 100-125억개의 밀알이 나옵니다. 이는 우리 예배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40년 동안 삼시세끼 밥을 해먹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한 알의 밀은 사실 별 볼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죽어서 싹을 틔우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면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한 알의 밀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낮고 천한 마굿간 구유 위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든 밑바닥 사람들을 친구삼고 그들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떨어진 것만도 위대한 겸손이며 자기 비움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죽어야겠다고 하십니다. 무서운 채찍에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대못에 박혀, 물과 피를 다 쏟고, 돌아가십니다. 그분의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닙니다. 인생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저주와 심판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땅에 뭍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인류구속역사에 밑거름이 되는 죽음입니다. 이로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습니다. 떨어져 죽는 길은 많은 생명을 살리는 승리의 길입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영광의 길입니다. 여기에 십자가가 영광이 되는 비밀이 있습니다.


누구나 이 예수님처럼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죽어야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본문이 말하는 ‘죽는다’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실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어떻게 죽는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그 밀알이 땅에 완전히 묻혀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렇게 땅에 묻히면 밀알은 분해되기 시작합니다. 이때 나온 열과 영양분을 공급 받은 배아는 아래로 뿌리가 내려고 위로는 싹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밀알이 완전히 분해되어 없어질 때쯤이면 그 싹은 스스로 양분을 취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처음 땅에 묻힌 밀알은 이미 그 존재가 사라졌습니다. 밑동을 파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처음 밀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밀알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입니까? 밀알은 없어진 것 같지만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4개월 후 그 자리에 열린 수많은 열매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은 죽어서 더 큰 100배의 열매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밀알의 진리를 그 누구보다 제자들이 마음에 새기길 원하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무척 들뜬 상태였습니다. 곧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왕위에 오르면 나도 한 몫 챙기고 영광스럽게 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마땅한 대가를 치루어야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25, 26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는 제자라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어버리고 도리어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보존한다는 이 역설의 진리를 영접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죽는 사람이요 남을 행복하게 하려고 자기를 버리는 사람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독일의 유명한 화가인 알프레드 뒤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뒤러는 그림공부를 위해 한 친구와 함께 도시로 나왔습니다. 두 사람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림공부를 했는데, 두 가지 일을 모두 수행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뒤러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친구여,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겠네. 자네는 그림공부에만 전념하게. 그리고 자네의 공부가 끝나면 그때부터 자네가 내 그림공부를 도와주게” 그리고 그 친구는 노동현장에서 돈을 벌어 뒤러의 그림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수년이 지난 후 뒤러가 공부를 마치고 친구가 있는 집에 왔을 때 뒤러는 혼자서 울면서 기도하는 친구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내 친구 뒤러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미 제 손은 노동으로 굳어져버려서 저는 더 이상 화가가 될 수 없습니다.” 친구의 기도하는 모습에 가슴이 떨렸던 뒤러는 급히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친구의 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기도하는 손’입니다. 뒤러가  훌륭한 화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얻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자 할 때 거기 그들의 자기 비움이 있어야하고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고 싶으면 예수님과 같이 땅에 묻혀 사람들 사이에 망각의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자기 몸을 새 생명 탄생을 위한 양분이요 밑거름으로 주어야합니다.  


우리가 기도 모임에서 종종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 모임에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이번에 요런 문제가 있었는데 새롭게 저런 것을 한 번 시도해 보면 좋겠어요.” 좋은 아이디어들, 건설적인 제안들이 많이 나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또 그대로만 되면 이상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무엇을 하기로 결정하고 “그럼 이 부분을 좀 맡아서 섬겨주실 분 계십니까?”라고 물으면 그때부터는 갑자기 조용해질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늘 사람이 없다고들 합니다. 모두 열매를 원하지만 하지만 정작 열매 맺기 위해 죽으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나 말고 네가 죽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저런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만약 비판만 해서 세상이 좋아질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벌써 낙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열매가 없다고 비판하기는 좋아하지만 정작 열매 맺기 위해 죽으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나도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고 양이 많은 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많이 맺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열매 맺기 위해 죽으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열매 맺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데 ‘힘들다’ ‘괴롭다’ ‘이러다 망할 지도 모른다’ 하면서 자꾸 피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자기 생명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여전히 한 알 그대로 있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살면 천년이 두 번 지나도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인생에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말 그래도 썩어서 그냥 사라지고 마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진짜 낭비하는 인생이란 바로 이런 인생입니다. 


진짜 남는 인생은 한 알의 밀이 되어 죽는 인생입니다. 나의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주님께 모두 쏟아 붓는 인생입니다. 주님을 위해 잃어버리면 주님이 풍성한 열매를 주십니다. 죽으면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역설입니다. 그러나 한 치도 오차가 없는 가장 확실한 진리입니다. 예수님께 몸소 자신의 죽으심으로 보증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아서 한 알의 밀의 비밀을 깨닫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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