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내가 세상의 빛이로라

이창무 2015. 6. 8.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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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의 빛이로라


말씀 / 요한복음 9:1-7

요절 /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렘브란트라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빛의 화가’라고 부릅니다. 렘브란트는 모든 그림 속에서 빛을 표현하고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렘브란트가 빛을 그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놀랍게도 어둠입니다. 왜냐하면 어둠이 깊은 곳일수록 빛이 더욱 찬란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요한복음의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어두운 인생을 살아 온 맹인 거지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 맹인을 고쳐주심으로 자신이 세상의 빛이 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 주변의 현실 역시 어둡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빛 되신 주님은 더욱 밝은 빛을 발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빛을 받아 생명의 빛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였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소리를 쳤습니다. “와! 이 빨간 장미꽃 좀 봐. 세상에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또 다른 제자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제기동은 어떻게 10년이 지나도 하나도 변한 게 없네. 안 그래?” 하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각자 스마트폰에서 원빈과 이나영의 결혼 소식을 검색하느라 바빠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거기에는 거지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짙은 색의 선글라스를 끼워져 있었고 입에는 하모니카를 물고 있었습니다. 하모니카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 가락은 구슬프기 그지없었습니다. “울게 놔두오 내 슬픈 운명 / 한숨 짓네 나 자유 위해 / 고통의 끈을 끊어 주소서 / 내 이 큰 고통 다 끊어 주소서 / 자비를 내려 다 끊어 주소서(뮤지컬 ‘파리넬리’ 중에서 ‘울게 하소서’)” 선천성 맹인이었던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5월의 장미꽃이 얼마나 빨갛고 예쁜지 볼 수 없었습니다. 하늘이 얼마나 푸르고 구름은 얼마나 하얀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자기를 낳아 준 엄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의 삶 전부는 온통 컴컴한 어둠이라는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오늘날 태어났다면 마사지사라도 했겠지만 당시로서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당시의 의학 기술로 이 맹인이 다시 눈을 뜨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맹인이 보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만이 아니었습니다. 맹인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고통을 받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내 인생에 도대체 무슨 의미와 목적이 있는지 전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희망 없는 인생이지만 목구멍에 밥 한 술이라도 넘기기 위해 오늘도 늘 가던 그 자리에 나와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을 느낀 맹인 거지는 노래를 멈추고 예수님 일행을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이보시오. 한 푼만 도와주시오. 한 푼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희희낙락했던 제자들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습니다. 제자들은 각자 자기 주머니 속을 뒤져 봤지만 나오는 것은 교통 카드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총무를 맡고 있던 가롯 유다가 몇 푼을 꺼내 깡통에 넣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이 푼돈이 도대체 이 맹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었습니다. 세상을 위해 선한 일을 해 보겠다고 푸른 꿈을 가슴에 품고 제자 생활을 시작했건만 정작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손발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이 주변의 모든 빛을 다 빨아들이듯이 이 맹인 거지의 깊은 어두움이 제자들을 끌어당기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제자들은 주로 ‘오늘 저녁에 뭘 먹을까’를 가지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맹인 거지가 처한 현실을 목격한 제자들은 심각한 철학적 신학적 고민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고민이 무엇이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에게 질병이나 장애가 생긴 것은 모두 죄 때문이다’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의 경우는 자기 죄 때문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했습니다. 왜냐하면 날 때부터 맹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어머니 태 속에 있을 때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가르치는 랍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아가 죄를 지어봐야 무슨 죄를 얼마나 지을 수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입덧을 유발시켜서 엄마를 힘들게 한 죄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봐도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모의 죄 때문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맹인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왜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대한 징벌을 다 뒤집어써야 합니까? 왜 나만 이런 죄 많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야 했는지 납득이 가지도 않습니다. 이런 경우 동양에서는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틀이 있습니다. 바로 전생을 끌어오면 됩니다. 요즘 모두가 부러워하는 기막힌 행운을 붙잡은 사람을 향해 이렇게 들 말합니다. “아마도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틀림없구먼.” 그러면 이 맹인 거지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그 쌓인 업보 때문에 맹인으로 태어났을까요? 이런 해석은 나름 그럴 듯하지만 슬프고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전생을 들먹이는 것은 제자들의 선택 문항 속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왜 이런 모순되고 부조리한 일을 허락하셨는지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답해 죽겠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먼저 이 사람의 죄도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라고 부정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불행이 죄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는 어떤 질병도 장애도 죽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는 메르스 바이러스가 있고 암이 있고 세월호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 사이에 인간의 범죄가 있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질병과 장애와 죽음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병과 장애와 죽음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우리가 낙원을 잃어버렸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우리 몸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병 들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삶의 불행과 고통은 죄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무섭고 파괴적인가를 깨닫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원리를 가지고 각 개인의 삶에 적용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한 사람의 불행이 죄의 결과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인간을 질병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징계하시는 사례들을 종종 보여줍니다. 웃시야 왕은 인생 말년에 몹시 교만해져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직접 하려는 월권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웃시야를 치셔서 나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침상 채 들려 온 중풍병자 역시 예수님께서 그에게 먼저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을 볼 때 죄가 원인이 되어 중풍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모든 질병이나 인간적인 불행이 다 누군가의 특정한 죄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욥기를 보십시오. 욥은 기왓장으로 온 몸을 득득 긁어댈 정도 지독한 피부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욥의 세 친구들이 와서 네가 죄가 있어서 이런 병에 걸렸으니 빨리 네 죄를 이실직고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 친구들에게 너희가 틀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욥에게도 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만 말씀하하실 뿐 이유를 설명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끝내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이유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원인과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원인을 알아야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세월호 유족들이 지금 간절히 원하는 바도 물질적인 보상보다 철저한 진상 규명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원인을 알고 책임을 규명하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인과 이유를 다 파악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세상에는 우리가 아무리 묻고 또 물어도 그 답을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왜 죄 없는 사람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번영을 누리는가?’입니다. 이는 욥이 던진 질문입니다. 또한 시편 기자는 수도 없이 이와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선지자들 역시 같은 질문을 합니다. 우리도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우리가 너무 깊숙하게 빠져들다 보면 그 질문 자체가 함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답이 없는 질문이 우리를 과거의 사건에만 얽매여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온통 불행과 고통이 가득 찬 인간의 어두운 현실에 우리 마음을 가두어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선하신 분이신가 전능하신 분이신가에 대한 의문에 사로잡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교훈 역시 ‘네가 어떻게 창조주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려 하느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다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하던 아내가 심각한 정신 질환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는 날마다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야 했습니다. 연구를 하면서 동시에 아내를 간호하고 아들을 거의 혼자서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24년 동안 아내의 온갖 폭언과 기행을 참아 주었지만 결국 아내는 집을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아내는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풀러 신학교의 한 강연에서 이런 자신의 삶을 담담히 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이런 질문에 답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전 이런 질문에 뭐라 답변해야 좋을지 전혀 모릅니다. 제가 기독교 신학자로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정답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기독교를 설명으로 폄하시킬 뿐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답이 없이 사는 방법을 배우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정말 훌륭한 일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저의 주장이 최소한 제가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제 인생이 왜 무진장 흥미로운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답이 없는 인생을 오늘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믿으며 살아야하겠습니까? 3절 하반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 어떤 환경 속에서 태어났든 아무 목적도 없이 그냥 내던져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고귀한 목적을 부여받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새번역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불량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학생 목자님은 키만 10 센티만 더 컸으면 완벽했는데 키가 작아서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내 피부는 왜 이렇게 까무잡잡할까를 가지고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피부가 노화가 더디 온다는 말이 있어 위로를 얻고 있습니다. 한 성형외과의 광고 카피 중에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 원장님 날 만드셨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으면 이런 말까지 생겨났겠습니까? 정말 이 세상에 크고 작은 핸디캡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핸디캡 때문에 우울해지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핸디캡을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가장 유쾌한 사람 중 하나가 닉 부이지치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는 팔 다리가 없어 몸통에 머리만 붙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하나님이 전능하시니까 자신에게 팔다리가 생기게 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믿고 신발까지 사놓았습니다. 그러나 팔다리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회의가 생겼고, 삶에 대한 절망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중 27살 된 어느날 문득 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90세까지 살다가 죽은 다음 하나님 앞에 섰는데 하나님께서는 서늘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팔다리가 없었으면 27살부터 큰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네가 팔다리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너는 90년이나 살았지만 겨우 믿음 하나 지키고 끝났구나!’ 그 후로 닉은 하나님께서 그의 장애를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는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찾아낸 것이 바로 ‘희망 전도사’였습니다. 그는 지금도 전세계를 다니며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큰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 비하면 얼마나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도 얼마든지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누가 진짜 장애인일까요?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도 내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맹인이 아닐까요? 우리가 불행의 원인이 무엇이며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고 원망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두신 선하신 뜻과 계획에 눈을 뜰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질그릇에 보배를 담으셔서 우리를 위대한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들어 가실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실 때를 말하고 낮은 그 십자가의 때가 이르지 않은 지금을 말합니다. 이 말씀의 주어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제자들은 맹인 거지에게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다는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어둡고 슬퍼져서 아무 의욕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로 지금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때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오기 때문입니다. 때가 아직 낮인데도 제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곁에 함께 계신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빛 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캄캄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도 낮과 밤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이 있는 동안이 낮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밤이 찾아옵니다. 죽음이 찾아와 무덤 속에 들어가야 할 때가 옵니다. 그때에는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인생을 쓸데없는 일에 허비했을까 뒤늦게 후회해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 동안,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소중한 시간들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손을 놓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속에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어둡기 때문에 힘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한 것이 많을까? 나는 왜 능력이 없을까? 나는 왜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을까? 이런 슬픈 생각에 골몰합니다. 과거의 실패에 매여 다시 도전할 용기를 잃었습니다. 이렇게 흘려보낸 시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을 직역을 하면 ‘시간을 구원하라’라는 뜻입니다.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시간들이 우리를 향해 나를 좀 구원해 달라고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어감으로 시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일생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렇게 낮에 열심히 일을 하고 인생의 황혼이 깃들고 곧 밤이 오는 시점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이런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난 학사 수양회에서 철저한 불교 국가 스리랑카에서 복음 역사를 섬기고 계신 백바나바 선교사님의 선교 보고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도중에 학위 취득에 실패하시고 비자 만료로 추방당할 위기가 있었지만 선교사님은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빛 예수님이 그분의 마음속에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을 기대하시고 끊임없이 제자 양성에 도전하셨을 때 드디어 17년 만에 첫 이방 목자를 세우실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밤이 오기 전에 때가 아직 낮일 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저는 그분에게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캠퍼스 양들에게 말씀을 먹이고 살리는 목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는 절망적인 현실을 날마다 만나고 있습니다. 이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다시 한번 믿음으로 영접함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열심히 땀을 흘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신 후에 갑자기 몸을 굽혀 땅에다 퉤퉤 하시며 침을 뱉으셨습니다. 그리고 침 묻은 진흙을 손에 퍼 담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도대체 무엇을 하시려고 저러시나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은 진흙을 둥글게 반죽을 하시더니 반으로 나누어 맹인의 두 눈에 하나씩 붙이셨습니다. 맹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보이진 않아도 이 축축한 느낌이 뭔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거지라고 우습게 여기시는게 아닐까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습니다. 침이라니! 이러다 혹시 메르스 바이러스에 감염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예수님이 하시는 대로 자신을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또 그대로 가서 씻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눈이 밝아졌습니다. 찬란한 빛이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하늘이 얼마나 푸른지 장미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가 보였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실로암 못에 비춰진 자기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내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이 어두운 세상에 보내신 세상의 빛 메시아 예수님이었습니다.


여기서 맹인이 가서 씻은 연못의 이름이 실로암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실로암이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실로암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 곧 예수님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에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눈을 뜨게 되는 장소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이 여섯 번째 표적을 통해 자신이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38절에 보면 맹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함으로 육체의 눈 뿐 아니라 영적인 눈도 뜨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눈을 뜬 맹인에게 다시 눈을 감으라고 강요하고 협박했습니다. 맹인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 이것은 부인하려 해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이 한 가지 아는 것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이때 그는 어두운 세상에서도 빛을 비추이는 빛의 증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두 눈이 멀쩡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영적 맹인이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맹인을 보고 혼돈과 어둠 속에 빠져들어 갔을 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또 지금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낮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던 점에서 맹인과 같았습니다. 


이들 뿐 아니라 온 세상이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은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세상은 빛 되신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캠퍼스 역시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비추어야 할 곳입니다. 내 인생에 두신 절대적인 의미와 목적을 모르는 양들, 남들과 비교하면서 열등감과 슬픔에 빠진 양들, 젊은 날의 황금 같은 시간을 무의미하고 헛된 일에 다 허비해 버리고 있는 양들에게 예수님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들이 눈을 뜰 수 있는 실로암 연못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2015년 여름 수양회입니다. 수양회를 통해서 말씀의 진흙, 기도의 침을 발라서 눈에 붙이고 성령으로 씻음을 받으면 어떤 영적인 맹인이라 할지라도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가 펼쳐지고 삶이 풍성해지고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여름 수양회가 한 달여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한 달 기간이 우리에게 낮입니다. 수양회가 끝난 후에 뒤늦게 초청해 봐야 데려갈 곳이 없습니다. 지금 이 한달 동안 우리가 열심히 양들을 초청해서 실로암 못가로 데려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이라는 실로암 못에 몸을 담그고 죄를 씻어내고 영적 세계에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어둔 세상을 밝히러 빛으로 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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