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창무 2015. 8. 1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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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말씀 : 요한복음 17:1-26

요절 :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한 때 많이 불렀던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지쳐 기도할 수 없을 때조차 쉬지 않고 기도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그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기도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위하여 드리신 기도라 하여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 기도에는 예수님의 가슴 깊은 곳에 품으셨던 간절한 바람이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는 이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 위에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고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제목을 이루는 제자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1-5)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 기도의 키워드는 영화입니다. 1절부터 5절 사이에 ‘영화’라는 말이 무려 5번이나 나옵니다. 우리말에서 영화라는 말은 단독으로 쓰기 보다는 그 앞에 한 단어를 덧붙여서 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바로 ‘부귀영화’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거나 귀하게 대접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라 여깁니다. 예수님은 때가 이르렀으니 아들을 영화롭게 해 주시길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때가 이르렀다는 말은 드디어 부귀영화를 누릴 때가 왔다는 뜻일까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때가 이르렀다는 말은 곧이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가 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난 여름수양회 ‘다 이루었다’ 말씀에서 십자가형은 인류가 고안해 낸 형벌 중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다고 배웠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수치와 저주, 비참과 고통을 의미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기도를 하신다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요? 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참담한 고통에서 건져 주시도록 기도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을 영화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예수님은 영광의 십자가로 여기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수치와 고통만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가 가져올 열매 곧 죄로 죽을 인생이 영생을 얻게 될 놀라운 일들에 대해 묵상하셨습니다. 죽음이란 생물학적으로 볼 때는 몸의 장기들이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볼 때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생은 마치 꽃병에 꽂아놓은 꽃처럼 살았으나 죽은 인생입니다. 그러면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생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다시 접붙인 바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영생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고 체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죽을 인생들에게 영생의 길을 열리게 하라는 사명을 주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마침내 완수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분리를 가져오던 죄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높이 올리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는 십자가는 그러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십자가입니까? 이 영광은 예수님께서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광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영광을 발견했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누구나 영화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인데 아무도 찌질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처럼 영화롭게 되고자 하는 소원 그 자체는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소중한 삶을 영화롭게 만들어 갈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진정으로 영화로운 인생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입신양명’ 즉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것이나 부귀를 누리는 것이 영화롭게 되는 길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들 중에도 무슨 큰 상을 받거나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대단한 성공을 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2,7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시고 그에게 가서 이렇게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이라” 후에 사도 베드로는 ‘모든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영광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말처럼 인간의 육체와 영광은 반드시 예외 없이 결국에는 시들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헛된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며, 그 영광을 얻기 위해 인생을 의미 없이 탕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깝게 여기셨으면 이사야에게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영광은 들의 꽃과 같을 뿐임을 가서 소리쳐 외치라고 명령하셨겠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헛된 영광을 구하려 인생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된 영광은 세상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영원한 영광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위로부터만 주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림으로 진정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까? 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어감으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영생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을 필요는 없지만, 크고 작은 고난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SNS에서 고대생들이 올린 글들을 자주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캠퍼스에 전도하러 나온 사람을 어떻게 물리쳤는가를 무슨 무용담처럼 자랑스럽게 올린 글들을 종종 접하곤 합니다. 그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리고 아픕니다. 우리가 나이 어린 학생들에게 이런 대접까지 꼭 받아야 합니까? 하지만 바로 이런 고난을 감당하는 그 때야말로 오히려 우리에게 가장 영화로운 때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받는 고난은 신자의 영광입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은 말합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별은 스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유명한 가수나 영화배우가 스타가 아닙니다. 목자가 스타입니다. 선교사가 스타입니다. 우리들이 스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힘써 감당함으로 진정으로 영화로운 삶,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제자들을 위한 기도(6-19)

6절을 보십시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름이란 인격과 능력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얼마나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신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말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을 전달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신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을 위해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제자들을 귀하게 여기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볼 때 제자들은 특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은 평범한 갈릴리 시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사람들로부터 공공의 적으로 취급받던 세리 출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천하보다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제자들 덕분에 자신이 영광을 받으셨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존하고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자들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공동체로 성장하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다만 가롯 유다 한 사람이 떨어져 나갔지만 이는 성경에 예언된 말씀이 응한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곧 예수님이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두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남겨진 제자들에게는 두 가지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위험은 세상의 핍박이었습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무슨 정당한 근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제자들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해서 이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으면 제자들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눈 딱 감고 조금만 세상에 맞춰주면 미움과 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면서 조금씩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다 잃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위험은 악의 유혹에 빠져 실족하는 것이었습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의 기도 제목은 제자들이 다만 악에 빠지지 않고 보전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세상의 미움과 핍박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악의 유혹입니다. 기독교가 핍박을 받던 시기에는 오히려 교회는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핍박이 그치고 교회에 돈과 권력과 쾌락이 주어질 때 타락과 부패도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의 모습은 다 잃어버리고 세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위험 요소가 얼마나 강력하고 치명적인지 잘 아셨습니다. 동시에 제자들이 얼마나 어리고 연약한지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켜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얼마 전 미국 연방 대법원이 동성애 부부는 합헌이라는 공식 판결을 내린 사건을 다 아실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사건은 후대에 이 시대 타락의 물고를 튼 역사적 변곡점으로 기억될 사건이 아닐까 합니다. 벌써부터 미국에서는 ‘이제 일부다처제를 합법화해 달라’, ‘동성애처럼 소아성애도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해 달라’는 청원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러 목자님들이 앞으로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노아 시대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지 않을까 크게 염려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야할 양들과 자녀들을 생각할 때 가슴이 답답합니다. 제가 섬기는 말씀공부 팀의 한 목자님은 할 수만 있다면 화성으로 이주해서 살고 싶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 미움과 왕따를 받을 것입니다. 점점 그 강도가 심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말씀을 놓아 버리면 세상의 거센 탁류에 휩쓸려 함께 멸망을 향해 치달아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소유된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우리도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닙니다. 나중에 일이 터진 후에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세상의 갖가지 위험에 노출된 양들과 자녀들을 위해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의 죄악의 밤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우리의 양들과 자녀들은  연약합니다. 그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지켜 주시고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온전히 지켜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이런 악한 세상에서 제자 공동체가 보전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은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 우리들끼리 오순도순 사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세 시대 많은 수도사들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속세를 떠났습니다. 광야와 높은 산에 들어가 홀로 수행을 하거나 담벼락이 3미터나 되는 수도원을 짓고 그 안에서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5절과 18절에서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서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 산 속이나 수도원에 살면서 세상과 구별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되 세상으로부터 악영향을 받지 않고 도리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배에 비유했습니다. 배는 어디 있어야 합니까? 땅이 아니라 물이 많은 바다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배 안에 바닷물이 들어와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배는 곧 가라앉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제자 공동체가 있어야 할 곳은 산 속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 제자 공동체 안으로 세상이 들어와 있으면 그 공동체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어떻게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까요? 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심으로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거센 탁류 속에서도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119:9)”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을까요? 단순히 예전에 몰랐던 새로운 지식을 더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말씀에서 재미와 감동을 즐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주신 이유는 그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로 보전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이 있으면 시대가 아무리 노아 시대 같고 이 땅이 소돔과 고모라 땅 같을지라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이 항상 우리에게 있도록 하기 위해서 좋은 방법이 말씀을 암송하는 것입니다. 요즘 개봉된 영화 중에 사람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일을 기막히게 묘사한 ‘인사이드 아웃’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 보면 단기 기억 저장소에 있는 것들 중에서 필요한 것을 골라서 장기 기억 저장소에 넣어두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에 장기 기억 저장소에 있는 기억을 꺼내어서 영사기로 비추듯이 보여줍니다. 그 기억이 주인공이 겪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말씀을 암송하는 것은 말씀을 장기 기억 저장소에 넣어 두는 것과 같습니다. 평소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꼭 필요한 순간, 결정적인 순간에 말씀이 인출되어서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자꾸 과거 일에 얽매어 힘들어 질 때 암송했던 이 말씀 한 구절이 불쑥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네비게이토 60구절 1번)” 우리가 말씀 암송을 통해서 우리의 장기 기억 저장소에 진리의 말씀들을 꽉꽉 채워 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 자신과 양들과 또 우리의 자녀들이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어 순종과 믿음과 진리의 공동체로 함께 이루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 (20-26)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 뿐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서 믿게 될 모든 신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믿게 될 신자들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22절에서도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했고, 23절에서도 “그들이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보면 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 어느 모임에서나 수없이 갈등과 문제들에 부딪히게 됩니다. 최근 롯데 그룹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형과 동생 사이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그 결과 정부는 롯데에 대한 특별 세무 조사를 실시하겠다 하고, 시민 단체는 롯데 제품 불매 운동을 전개하고, 해외에서는 신용 등급을 내리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 사이의 문제들은 하나 되지 못하는데서 생겨납니다.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이것이 분명히 옳은데 어떻게 내 생각을 굽히겠는가, 내 소신껏 해야 하지 않는가 말하며 하나 되기를 거부합니다. 자기생각과 맞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한 교회 안에서도 당을 짓게 됩니다. 이렇게 분열하고 분쟁하는 모습을 세상이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영생의 복음을 제대로 전파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똑같은 단체 티를 맞춰 입고 체육대회를 한번 해야 할까요? 자주 회식을 하면 될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이’라는 말에 키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성부와 성자는 서로를 깊이 아시고 사랑하셔서 완벽한 삼위일체의 연합을 이루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에게 자신의 것을 다 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온전히 그분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뜻과 고집대로 행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뜻을 하나로 모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한 마음이 될 때, 하나 된 제자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저마다 자기 생각이 있고 자기만의 경험이 있고 스타일이 있습니다. 하나 된다는 것은 이런 차이를 다 무시하고 획일적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되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동역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오케스트라와 같이 각자 자기 소리를 내지만 한 지휘자의 지휘를 받아 하나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믿는 자들이 하나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초대 교회는 하나 된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닌데도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항상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같이 떼고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온 백성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그 결과 초대교회는 엄청난 핍박을 이겨내고 오히려 급속도로 성장했습니다. 이처럼 하나가 된 교회를 주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우리 안암 1부도 초대 교회 못지않은 하나 된 제자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이 유언과도 같은 당부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어떤 기도를 하셨는가를 배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이루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둘째는, 세상에 있는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고 거룩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진리의 말씀으로 보존하고 지켜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셋째는,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세상을 떠나실 때 이렇게 기도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같은 내용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기도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영접하고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또한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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