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깨어 있으라

이창무 2018. 8. 2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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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마가복음 제 24 강


깨어 있으라


말씀 / 마가복음 13:1-37

요절 / 마가복음 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제가 편입해서 컴퓨터학과에 다닐 때 어떤 과목의 중간고사를 치른 후였습니다. 저는 문제가 모두 영어로 출제된 것에 의심을 품었습니다. 시험 문제를 구글에 넣어 검색을 해 보니 캐나다 모 대학의 전년도 중간고사 시험 문제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거다’ 하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기말 고사 때는 그 대학의 기말고사 시험문제를 미리 다 풀어놓고 다른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험지를 받자마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전처럼 영어이긴 한데 제가 풀어놓은 문제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결국 기말 시험을 완전히 망치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교수님이 이번에는 다른 미국 대학의 기말 시험을 가져오셨습니다. 저는 그때 큰 깨달음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것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이렇게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 당부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종말과 재림에 관한 바른 성경적 진리를 배우며 늘 깨어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다짐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완전 죽이지 않습니까?" 도대체 성전의 모습이 어땠기에 제자가 이렇게까지 감탄하는 것일까요?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 대왕이 기원전 20년에 짓기 시작했다가 기원후 64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건축 기간이 무려 84년입니다. 성전의 크기는 예루살렘 전체의 육분의 일을 차지했습니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기둥은 높이가 12미터 정도였습니다. 성전 벽에 쓰인 돌중에는 중량이 백 톤이 넘는 것이 많았습니다. 강렬한 햇빛이 성전 벽 흰 대리석에 반사되면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습니다. 갈릴리 촌구석 출신 제자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의 모습에 넋이 나가버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하게 무너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70년 로마의 장군 디도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전을 철저하게 파괴하였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성전은 하루아침에 다 무너져 돌무더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제자들과는 달리 성전의 멸망을 미리 내다볼 수 있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처럼 화려한 성전의 겉모습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 내면의 부패함을 보셨습니다. 성전에서는 매일 제물로 바쳐지는 양과 염소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보석을 옷에 주렁주렁 달은 제사장들이 성전 이곳저곳을 천천히 걸어 다녔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전 앞에서 율법을 가르쳤고 종종 난상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성전의 겉모습은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 성전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하나도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신앙생활의 생명과도 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겉모습만 화려할 뿐 믿음과 진실함에서 나오는 참된 경건이 없었습니다. 열매 없던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았듯이 성전의 멸망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2016년 인문 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킨 '사피엔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입니다. 작년에 후속편 격으로 인류의 미래를 예측한 책이 나왔는데 제목이 '호모 데우스'입니다. 호모 데우스란 신이 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은 미래에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히 사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만드는 힘은 인공 지능과 생명 공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부터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근 알파고라는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이 이세돌 9단에게 압승을 거두어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대국 후 이세돌은 앞으로 인간은 영원히 알파고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명 공학의 발전도 눈이 부십니다. 이미 체세포 복제, 인간 유전자 지도, 줄기 세포 기술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나노 기술 등이 결합하게 되면 가까운 미래에 모든 질병을 정복하게 될 날이 올 것만 같습니다. 망가진 장기의 교체가 가능해진다면 정말로 언젠가는 인간이 영생을 누리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유발 하라리는 이런 시대가 되면 더 이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신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을 숭배하는 인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가 솔깃해하지만 사실은 이런 말은 과거에도 이미 있었던 말입니다. 19세기에 과학 기술이 급속도를 발전하던 시기에 서구의 지식인들은 20세기가 되면 문명의 꽃을 피워 에덴동산과 같은 낙원이 이 땅에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말이 무엇입니까? 세계 제 1 차 대전과 2차 대전이라는 전 지구적인 전쟁이었습니다. 기술 발전이 도리어 대량 살상이란 참담한 비극을 낳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술 발전이 인간의 부패한 죄성(罪性)을 없애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그 안에 부패와 타락이 결국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공지능이든 생명 공학이든 그 업적이 아무리 크고 화려하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부패한 본성이 인류를 얼마든지 자멸과 재앙의 길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인간이 신이 되려한 것은 이미 창세기 아담이 시도했던 바입니다. 그 결과는 실낙원과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인류 문명의 발전에 그저 감탄만 하고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이 시대의 영적인 타락과 죄악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사뭇 진지한 자세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인류 역사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멸망 예고는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에게 종말의 시기와 징조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성전 멸망과 인류 역사의 종말이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겹겹이 쌓인 산들을 보면 바로 인접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은 산과 산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고 그 거리는 수 킬로미터에 달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말씀은 가까이 있는 성전 멸망 사건과 멀리 있는 종말과 재림 사건을 중첩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성전 멸망과 종말의 징조로 알려주신 것들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징조는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자신을 그리스도라 참칭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등장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기 때문에 거짓 그리스도의 추종하는 세력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들이 불신자들만을 미혹하는 것은 아닙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거짓 그리스도는 신자들까지 공략의 대상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적과 기사를 행하기 때문에 더욱 더 미혹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의 대부분 눈속임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후로 성전 파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자칭 메시아가 여러 명 등장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척하며 사람들을 끌어 모은 사기꾼이자 협잡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제자가 취해야 할 자세가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누구든지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또 예수님은 21절에서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징조는 재난입니다. 7절과 8절에는 갖가지 종류의 재난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7절의 난리는 내란, 폭동과 같이 한 나라 안에서의 소요 사태를 가리킵니다. 8절에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난다는 것은 국제적인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앞의 두 가지가 사람이 일으키는 재난이라면 지진이나 기근과 같은 자연 재난도 있습니다. 기원후 62년에는 그 유명한 폼페이의 대지진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있었던 대기근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런 재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 세상의 종말이 곧 닥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러나 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또 8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무서운 재난의 소식이 들린다고 해서 당장 내일 세상이 끝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 처음에는 진통이 약하고 띄엄띄엄 옵니다. 그런데 출산이 임박할수록 통증이 강해지고 간격도 짧아진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지막 시점이 임박해질수록 재난이 더 세게 더 자주 발생하게 됩니다. 14절부터 19절까지에서 예수님은 성전의 멸망 직전에 임할 환란이 얼마나 참혹할 것인가에 대해 설명해주십니다. 성전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신호는 우상의 신상이 성전 제단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참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산으로 도망을 가야 합니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도망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의 겨울은 비가 많이 오는 우기이기 때문에 강을 건너 도망가기에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큰 환란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서운 환란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 범위를 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재난의 때에 예수님의 제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라면을 사재기하고 지하실에 벙커를 만들어야 할까요? 10절을 보십시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여기서 '먼저'라는 단어는 시간상으로 먼저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최고의 우선순위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언과 같은 명령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주님께서는 어떤 재난이 닥치더라도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자가 할 일은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는 일입니다.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은 평온한 때든지 환란의 때든지 계속 되어져야 합니다. 오히려 재난이 심할수록 더 열심히 복음 전파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때야말로 재난 때문에 사람들이 복음에 마음을 열 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종말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얼마 남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 징조는 박해입니다. 9절부터 13절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셨습니다. 공회에서 재판 받고 회당에서 매질을 당하며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는 공적 박해가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또 산헤드린 공회에서 한 번, 벨릭스와 베스도 총독에게 각 한 번씩, 아그립바 왕에게 한 번, 심문과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런 박해를 당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을까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해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옆으로 펴져나가기 위해서는 먼 곳까지 발품을 팔아서 전하면 됩니다. 그런데 위로 펴져나가기 위해서는 재판정에서 증언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과거 민주화 운동가들이 재판에서 최후변론과 진술을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나는 본래 소심하고 말주변이 없어서 이런 기회가 와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예요.'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11절에 보면 이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성령님께서 다 그 입에 넣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때는 아무리 겁 많은 사람조차도 자기도 알 수 없는 용기가 샘솟습니다. 두 번째 박해의 양상은 사적 박해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자식들이 부모를 죽는 데 내어줄 것입니다. 이런 박해는 마음이 갈가리 찢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받는 박해이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제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이때 제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1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제자의 길에서 떠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받습니다. 초대 교회는 산 채로 화형을 당하거나 검투 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는 끔찍한 박해를 수차례나 겪어야 했습니다.  중도에 믿음을 접고 배교의 길로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딘 결과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박해는 사라졌습니다. 혹독한 시련은 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유리할 때만 믿는 철새 그리스도인인가를 명백하게 드러내줍니다. 왜냐하면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끝까지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세가 언제입니까? 말세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재림 사이의 전 기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말세입니다. 성전 멸망의 징조들은 말세를 살고 있는 우리들 가운데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칭 그리스도라 칭하는 거짓 메시아가 전 세계에 천여 명 정도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삼백 명이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이 중에 최근 가장 큰 세력을 떨치는 인물이 신천지의 교주인 이만희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보내시기로 약속하셨던 보혜사가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얼토당토않은 말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었습니다. 광주UBF는 전남대를 장악한 신천지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양들이나 자녀들 중에 신천지에 빠진 이들이 생기는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교 당국이 신천지의 전도를 경계하여 모든 캠퍼스 내의 전도 행위를 금지시키는 바람에 양을 얻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바른 교리와 성경 공부로 무장하고 있지 않으면 누구든지 이런 이단의 미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한 전쟁과 지진과 기근과 같은 재난의 소식도 끊이지 않습니다.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IS 등의 테러 소식이 여전합니다. 2011년 진도 9.0의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습니다. 이때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사능이 유출되어 그 일대가 전부 죽음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 포항과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라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동아프리카 기근으로 26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현재도 약 100만 명의 아동이 영양실조로 죽음의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박해는 어떻습니까? 이제는 박해의 시대는 다 지난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코하람, IS, 하마스와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 하에 있는 지역에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순교 당할 각오를 한 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직접적인 박해가 없는 지역이라 할지라도 공공장소에서의 기도 금지, 전도 금지, 예배 금지 등등의 조치들이 점점 생겨나고 있습니다. 올해 성균관 대학에서는 신입생 대상의 모든 전도 행위를 금지한다는 총장 명의의 공문이 발송되었다고 합니다. 적어도 온라인상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징조들을 볼 때 지금이 바로 말세가 확실합니다.


그러면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지난 7월 26일 신 모 목사가 공항에서 회환관리법, 노동착취, 폭행 등이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신 목사는 이제 곧 종말이 올 것인데 남태양양 피지 섬을 피신해야 한다며 그곳으로 400여명의 신도를 이주시켰습니다. 그곳에서 신도들을 착취하고 폭행하다가 적발되어 쇠고랑을 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종말의 징조가 나타날 때 피지로 가라고 하셨습니까? 이런 잘못된 종말론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종말론 자체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딱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미혹되고 나면 돌이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소에 예방이 중요합니다. 신천지는 교리와 성경공부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우리가 이런 이단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교리 공부, 성경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특히 체계적인 교리 공부를 해 두면 영적인 분별력이 생깁니다. 이단의 속삭임을 들었을 때 적어도 이것이 어딘가 크게 잘못되었다 하는 정도의 감각이 생깁니다. 둘째로 먼저 복음을 만국에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늘 해왔듯이 일대일을 하고 제자 양성을 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오늘 한 팀의 일대일 나무를 심으면 됩니다. 셋째로 끝까지 견디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믿음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조금씩 갉아먹고 허물어뜨리는 요소들은 많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손해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달립니다. 남들보다 뒤쳐지고 낙오되지 않을까 불안해합니다. 초대 교회는 박해를 한 방에 굵직하게 받았다면 우리는 이를 일생에 걸쳐서 미분해서 받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부흥한국의 고형원 선교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이 길 끝에서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날까지 꾸준히 성경 공부하고 열심히 복음 전하고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4절과 25절을 보십시오.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 멸망에서 예수님의 재림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합니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이제까지 유지되어 오던 질서가 무너지고 대격변이 일어나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새로 건축하기 위해서는 앞서 해체 작업이 불가피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덧입기 직전에 일시적인 카오스 상태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실 때는 비천하고 초라한 구유에 오셨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십니다.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27절을 보십시오.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모으실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과 재난과 박해의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그 와중에 미혹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주님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며 끝까지 견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느라 많은 고생을 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곳에서 영원토록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소망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일어날까요?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먼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늦게 잎사귀를 내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나는 것을 보고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앞에서 언급한 징조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재림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짐작만으로는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정확하게 몇 년도 몇 월 몇 일에 다시 오시는지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성부 하나님만 아시고 그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아들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정말 예수님도 모르실까요? 아무튼 그 시기는 꽁꽁 감추어진 비밀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 날이 언제인지 알려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재림의 시기를 알려주시기 않는 이유는 우리가 늘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집 주인이 해외 출장을 떠나며 종에게 깨어 있으라 명령하고 갔습니다. 집 주인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저녁일지, 밤중일지, 새벽에 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들은 자지 말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안 오셨는데 뭘!'하면서 함부로 죄를 즐기다가 주님께서 도둑처럼 갑자기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부끄럽고 당황스러울까요? 우리는 주님이 당장 오늘 오시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잠을 잤더라도 이제부터 깨어나야 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모르는 것처럼 개인적인 종말도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병에 걸려서든 사고 때문이든 우리는 언제 주님으로부터 내게 오라는 호출을 받게 될지 모릅니다. 그때 주인이 맡겨 놓은 사무를 잘 관리했는지 여부를 결산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받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재림을 늘 의식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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