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첫째 되는 계명

이창무 2018. 8. 1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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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마가복음 제 23 강


첫째 되는 계명


말씀 : 마가복음 12:18-44

요절 : 마가복음 12:29,3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요즘엔 학교에서 성적을 ABCDE로 매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어릴 적에는 수우미양가로 표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학교 때까지 잘 하면 '양', 웬만하면 '가'를 받는 과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음악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타고난 음치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친구가 속해있는 중창단의 연습 시간을 구경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단장인 선배가 갑자기 노래를 해보라고 시켰습니다. 저는 안 하려고 했지만 하늘같은 선배의 말이라 할 수 없이 했습니다. 노래를 들은 선배가 이렇게 한마디 말했습니다. "노래의 핵심은 호흡이란다." 그 자리에서 제게 호흡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후 저는 거듭났습니다. 1학기부터 졸업 때가지 음악에서 계속 '수'를 받았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 선배 같은 고수를 만난다면 우리 삶도 완벽하게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초고수(超高手)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일생 힘쓰고 실천해야 할 첫째가는 계명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사두개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대제사장 그룹과 귀족층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헤롯당과 협력하면서 교권을 유지하며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 즉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만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에는 부활에 관한 교리가 없다며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육체와 영혼이 함께 소멸해 버린다고 믿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미래의 어떤 상급이나 형벌도 믿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을 전부로 여겼습니다. 19절부터 23절까지에 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신명기 25장 5절과 6절에 나오는 형사취수법(兄死取嫂法)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형사취수법이란 한 사람이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나 가까운 친척이 형수와 결혼해서 후사를 낳도록 한 법입니다. 지금 들으면 '형수와 결혼을 하다니! 참 이상한 법도 다 있네.'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한 사람이 요절함에 따라 생기는 두 가지 문제, 곧 그 사람의 토지와 재산을 보존하는 문제와 홀로 남겨진 과부를 부양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나름 합리적인 방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만약 부활이 있다면 바로 이 법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 않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까? 칠 형제가 있었습니다. 장남이 아내를 얻었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었습니다. 둘째가 형수와 결혼했지만 역시 상속자가 없이 죽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셋째, 넷째... 일곱째까지 모두 다 죽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일곱 명의 형제와 여자가 모두 부활했을 때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한 여자를 두고 일곱 명의 형제가 다툼을 벌이는 난감한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요? 이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인지 실화인지는 모릅니다. 여하간 ‘그러므로 부활은 있을 수 없고 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사두개인들이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예수님은 그들이 부활에 대하여 오해하다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오해는 첫째는 성경에 대한 무지, 둘째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부연 설명해 주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여기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된다는 말씀을 부활하면 육체가 없이 영혼만이 존재한다든지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사라져 중성이 된다는 뜻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부활하면 현재의 몸과는 다른 새로운 몸을 입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 몸을 가리켜 신령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때에는 죽음이 없을 뿐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탄생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더 이상 장가가거나 시집 갈 일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활 이후의 삶은 부활 이전의 삶과는 질적으로 다른 삶이 될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오해한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몰랐기 때문에 부활을 다만 현재의 삶이 그대로 연장되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이 말씀은 사두개인들도 정경으로 인정하는 출애굽기 3장 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얼핏 들으면 이 말씀이 어떻게 부활을 입증하는 본문이 될 수 있을지 이해가 잘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릎을 탁 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두 죽어서 무덤에 묻힌 뒤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노라'고 하셔야 옳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모두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현재도 살아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사두개인들을 은근히 디스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산 선진들은 죽었지만 현재 살아 있습니다. 또 장차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도 영생도 심판도 믿지 않고 여기에서 호위 호식하며 하는 것만을 전부로 여기며 사는 사두개인들은 살았지만 사실상 죽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성경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사는 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지금부터 영원토록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기반을 상실하고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그들은 새롭게 부활했습니다. 현대판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게 나름대로 재구성합니다. 성경에서 홍해 사건, 동정녀 탄생, 부활 등등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모두 다 제거합니다. 오직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에 천국 복음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윤리와 도덕만을 가르칩니다. 유럽의 기독교는 이런 사람들이 대세이고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인의 옷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비웃고 조롱해도 여전히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능력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믿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에 얽매이지 않고 나그네처럼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런 사람이 산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또한 말로는 신자라고 하면서 사실상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두며 살아간다면 현대판 사두개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이 영원히 하나님 안에서 산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번에 나온 사람은 서기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앞선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간의 논쟁을 곁에서 다 지켜보았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런 분이라면 평소 잘 풀리지 않던 의문점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질문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구약에는 총 613개의 계명이 있습니다. 서기관들 사이에서 이 많은 계명들 중에서 어느 계명이 첫째 계명이냐를 놓고 오랫동안 치열한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하지만 쉽게 결론을 낼 수 없었습니다. 이 질문은 또한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하다 저것이 중요하다 여러 말들이 많은데 신앙생활의 진짜 핵심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29절부터 3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먼저 신명기 6장 4절과 5절을 인용하셔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한다는 말은 부분적으로 한계를 두고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전폭적으로 사랑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셔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상숭배가 됩니다. 하지만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만큼 이웃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마지막에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덧붙임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 전체로 최고의 계명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이런 질문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신앙생활의 본질과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서기관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32절을 보십시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서기관은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 인정과 동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학생이 늘 그러하듯이 선생님의 말을 한 번 더 반복함으로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학생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한 단계 더 심화시킵니다. 서기관은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어떤 화려한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지혜로운 대답에 감동 받으시고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하시며 최우등 상을 주셨습니다.


수많은 서기관들, 랍비들이 수없이 논쟁을 벌였어도 결론이 나지 않던 문제를 예수님은 어떻게 이렇게 단번에 대답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 중심에 늘 자리 잡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기초해서 결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예수님의 교훈과 가르침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실현을 향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숨 쉬는 모든 순간마다 스스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온 맘 다해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예수님의 발 앞을 비추어 주는 등불이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예수님의 삶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원자력 발전소였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 끔찍한 고통과 괴로움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이 십자가의 죽음을 회피하실 수 있었습니다. 당장 광야로 숨어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이 아무리 말려도 예수님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짊어지려 하십니까? 예수님으로 하여금 고난의 가시밭길을 향해 스스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든 힘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답은 역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순종의 제사를 드리길 원하셨습니다. 죄로 병들고 심판 받아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그들을 살리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신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자기를 잃고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셨습니까? 35절부터 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이해하던 당시 서기관들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셨습니다. 이 견해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견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이십니다. 그 근거로 예수님은 시편 100편 1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의 주, 왕의 왕이 되실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신 예수님!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섬기시고 사랑하신 예수님! 그래서 기꺼이 자기 몸을 버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그분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존재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늘 보좌에 높이 앉으신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2015년 초중고에 재학 중인 자녀와 그 부모 1,143명에게서 부모님께 가장 듣고 싶은 말과 실제로 듣는 말에 관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에게 듣고 싶은 말 중에는 '용돈 올려줄게' '뭐 사줄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같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듣고 싶은 말 1순위는 바로 '사랑해'였습니다. 어머니에게든 아버지에게든 관계없이 '사랑해'가 압도적이었습니다. 반면 실제로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가장 자주하는 말 1위는 예상하는 대로 '공부해'라는 말이었습니다. 부모에게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공부해라'가 크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자녀가 좀 더 성장하면 '공부해'라는 말은 '성공해' '출세해' '부자 돼'라는 말로 바뀝니다. 왜 공부해서 성공하고 출세해서 부자 되라고 합니까? 그래야만 내 자녀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과 뜻 다해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부모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랑하더라도 적당히 조금만 사랑하고 나머지는 너 자신을 사랑하길 원합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일단 자기부터 먼저 챙기고 시간과 돈이 남으면 한번 좋은 일도 해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내용은 사뭇 다르지만 사실 예수님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계명을 따라 사랑하며 살 때에야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설문 조사에서 자녀들은 가장 이상적인 부모를 '나를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는 부모'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은 사랑 받기를 원하고 ‘사랑해’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행복합니다. 하지만 행복이 완성되려면 누군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면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어느새 사랑이 다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사랑을 주려고 하면 마치 샘물처럼 속에서 사랑이 다시 솟아나게 됩니다. 나를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5: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 명령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전폭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포도원 비유의 주인처럼 사랑하는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는데 우리도 뜨겁게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지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의 이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가득 차서 흘러 넘쳐 이웃에게 흘러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누리며 우리도 하나님을 온 맘 다해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자기중심적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쁨의 원천이요 삶의 에너지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처럼 되고 싶다면 먼저 우리 가슴에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가 타올라야 합니다. 이제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고정시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참된 기쁨과 참된 행복 그리고 참된 영광을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가라는 말은 그들에게서 물들지 않게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서기관들이 도대체 어땠기에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먼저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긴 옷은 당시 회당 예배가 있을 때 성경봉독 순서에 입던 옷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만찬 예식 때 목회자가 입는 가운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이 긴 옷을 식당 갈 때도 입고 마트 갈 때도 입었습니다. 땅에 끌리고 더워서 땀도 많이 났을 텐데 왜 이렇게 했을까요? 제발 좀 남들이 자기를 서기관으로 알아봐 주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상석에 앉는 것을 원했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대접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기도할 때도 일부러 기도를 길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말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를 경건한 사람으로 봐주길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이 겉으로는 이렇게 고상한 척 했지만 뒤로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과부들은 죽은 남편의 재산을 서기관에게 위탁하여 관리하도록 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때 서기관들이 과부 몰래 재산을 뒤로 빼돌려 자신이 치부하는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이런 서기관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오직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웃 역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착취하고 이용할 대상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오직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만을 위해 산 사람의 결국이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가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사례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헌금함 앞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셨습니다. 여러 부자가 와서 거액을 넣었습니다. "촤르르르 우두둑" 금화 닢이 수북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부자의 얼굴은 자부심이 넘쳐 보였습니다. 반면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부끄러운 표정으로 숨어서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이것은 현재 가치로 약 2천 원 정도 되는 금액이었습니다. “땡그랑” 렙돈은 너무 가벼워서 떨어지는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둘의 헌금에 관한 예수님의 평가가 어떠합니까? 4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겨우 동전 두 닢을 넣은 가난한 과부가 여러 부자들보다 더 많이 헌금했다니요? 팩트 체크가 영 잘못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액수를 가지고 평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일부를 넣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어떻게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지극히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두 렙돈이지만 이 작은 것으로나마 주님을 향한 진심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그가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헌금을 드리고 하루를 굶을지언정 어디선가 이틀을 굶고 있을 이웃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돕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사두개인들처럼 혹은 서기관들처럼 오직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자신들의 미래만을 걱정할 뿐 예수님의 마음을 아무도 헤아리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 가난한 과부에게서 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처럼 하나님을 온 맘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를 발견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 속에 가난한 과부를 생각하면서 지난 번 짐바브웨 이사무엘 선교사님이 전하셨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선배들 중에는 명문대학을 나오고 좋은 자리를 잡아서 사두개인처럼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또는 서기관들처럼 선생이요 학자로서 명성을 높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적당히 신앙 생활하면서 남들 할 만큼은 하는 신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이런 기회를 다 포기하고 세계 선교에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닭을 잡는 도계공이 되어 나갔습니다. 어떤 분들은 봉제공이 되어 선교지로 떠나갔습니다. 중국에서 추방당하자 성과 이름을 다 개명해서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신 선교사도 계십니다. 은퇴해서 여생을 편안히 쉬어야 할 시기에 실버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나 중동아시아와 같은 험지에 나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은 과부와 같은 분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분들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사람의 인정보다 예수님의 인정이 더 중요합니다. 이 시대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 예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드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 또 다른 과부 한 사람을 우리 중에서 찾고 계십니다. 그 한 사람을 찾으시면 너는 나를 닮은 사람이구나 하시며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만 사랑하는 자기를 위해 하나님과 이웃을 이용하는 사두개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한 과부 같은 사람,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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