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목회 현장

세계 기독교계의 거목 존 스토트 목사를 회고한다

이창무 2016. 12. 22.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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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존경하는 존 스토트 목사님이 소천하신지 5년이 지났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존 스토트 목사님을 좋아하게 되네요.

다음은 미래한국에 올라갔던 존 스토트 목사님 소천했을 당시 기사입니다.


원문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04


세계 기독교계의 거목 존 스토트 목사를 회고한다

   

  세계 기독교계의 거목 존 스토트(John Stott. 1921. 4. 27.~2011. 7. 27.) 목사가 지난 7월 향년 90세 나이로 소천했다. 스토트 목사는 영국 출신으로 20세기 현대 복음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목회자이자 신학자로 손꼽힌다. 그의 신학과 목회철학, 성장배경 등을 살펴본다.  

출생과 성장과 교육


그는 1921년 4월 27일에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던 아놀드 스토트 경이다. 아버지는 런던 서쪽 끝의 해리가(Harley Street)에서 일했는데 스토트는 BBC 방송국과 옥스퍼드가의 상점들 가까이의 랑함 플레이스, 올 소울즈 교구에서 성장했다. 그는 그의 평생을 통해 전쟁 중에 몇 년 동안 그곳을 떠난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과학적인 무신론자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경건한 루터교인이었는데, 그는 어머니의 기독교적인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와 리들리 홀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1945년에 목사로서 랑함 플레이스, 올 소울즈 교회로 돌아왔다.


회심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1938년 17세 되던 해 어느 주일 밤이었다고 한다. 그는 주님께  자신이 자신의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음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자백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것을 감사했으며, 예수님이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는 다음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는 나의 안으로 들어오셨으며, 이제 내 안에서 통치하신다”고. 그가 회심을 경험한 후 실제로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깨닫고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가 회심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 전인격의 문을 열었다. 얼마 동안은 어떤 변화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점점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신앙의 몇 가지 문제점에 부딪히게 됐다. 그것은 그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기간이었는데, 그 당시 케임브리지 신학부는 매우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는 자유주의가 복음주의적인 신앙에 던진 도전들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며 분투했다. 그리고 그가 복음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때가 있었는데, 복음주의가 근본주의적 성향을 띠게 될 때였다고 한다. 그는 ‘복음주의의 진리’(Evangelical Truth)에서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점을 상세히 논했다.


목회사역과 대외활동


그는 1945년에 영국 성공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그후 약 5년간은 교구의 부목사(curate)로 사역했다. 그가 섬겼던 교회는 런던의 중심부의 랑함플레이스에 있는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였다. 1950년 담임목사가 소천해 그가 후임으로 담임목사(rector)가 됐다. 올 소울즈 교회에서 1950년부터 1975년까지 25년간 담임목사로 사역했다. 그후 그는 명예담임목사가 됐고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사역하고 있다. 결국 그는 도합 55년간 사역을 해온 셈이다.


그는 영국교회복음주의위원회 회장, 영국 성서유니온선교회 대표, 영국복음주의연맹 대표 등으로 활동했는데 세계복음주의협회가 구성되기 전에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이 먼저 존재했으며, 사실 세계복음주의연맹은 영국복음주의연맹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단체는 1846년에 조직됐다. 그는 1945년 목사로 안수 받은 후 영국복음주의연맹에 가담했다.


그러나 1951년 네덜란드에서 복음주의대회가 열렸고 그 기간 중 세계복음주의협회가 구성됐다. 그후 영국복음주의연맹은 자체 조직으로 남게 됐다. 그는 1951년부터 세계복음주의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해 왔으며, 1951년에 그 단체의 교리적, 신앙적 기반을 닦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또한 50여 년 전 국제복음주의학생회(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의 발족 초기부터 참여해왔다. 그는 이 단체의 후원을 받아 전세계를 여행하고 여러 나라들을 방문한 바 있다. 1982년에는 기독교의 반지성주의를 반대하고 평신도들에게 신앙과 삶, 선교의 연관과 교육을 위한 현대기독교연구소를 창립해 소장을 맡아왔으며, 그러던 중 65세가 돼 퇴직하면서 명예총재직을 맡게 됐다.


올 소울즈의 담임목사가 된 지 2년 후인 1952년 그는 처음으로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대회가 처음 열린 곳은 그의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돼 1952년부터 1977년까지 그는 전세계에 걸쳐서 50회의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했다.


1956년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그리고 나서 아프리카, 아시아, 호주, 뉴질랜드 등 전세계에서 대학 복음화 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소천하기까지 최근 수년 동안 1년 중 6개월은 올 소울즈 교회의 목회에 협력하는 일에 보내며, 3개월은 세계순회사역에 그리고 3개월은 연구와 저술에 보냈다고 한다.


독신


   

 

그는 한 평생 독신으로 지냈는데, 독신 생활이 가져다 주는 제일 큰 유익은 ‘자유로움’이라고 말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독신으로 살게 되면 아내와 가족의 일보다는 주님의 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사역자로 하여금 자신의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그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7절이라고 하며,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따라서 결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독신으로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이다. 양쪽 다 하나님의 은사로 여겼다.


그는 비록 자신이 한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면서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독신 제도를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 제도는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독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 11절에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독신은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이다. 여러 해 전에 IVF 출판부에서 이 문제에 관한 상당히 좋은 책이 출간됐는데, 그 책의 제목은 ‘독신의 문제’(The Single Issue)이며, 중국계인 알버트 슈(Albert Hsu)가 저술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 부록이 있는데, 그 부분을 그가 썼다고 한다. 그는 그 부록에서 알버트 슈가 제기한 독신에 대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독신을 하나의 은사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그는 가톨릭의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독신 제도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또 한 가지 좋은 증거는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 나오는 장로와 감독의 자격 요건 중에, 그들이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목회자들의 결혼 생활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독신은 예외적인 것이지, 의무적인 규범이 될 수 없다고 분명히 하였다.


조화와 균형


‘복음주의는 성공회와 결별해야 한다’는 마틴 로이드존스의 주장에는 끝내 동조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을 지금까지 영국 성공회 내에 머물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기도 우선, 변증 전도, 정기적인 전도, 구도자와 회심자에 대한 세밀한 접근, 체계적 훈련 등을 통해 현대 도시 사역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 소울즈 교회가 주중 점심예배, 주중 기도회, 환우를 위한 기도회, 어린이 교회, 가족 예배, 유학생 예배 등 다양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스토트의 마인드와 노력 때문이다.


그는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협의회(로잔대회)에서 신학과 교육 위원장을 맡아 전도와 사회적 실천의 관계를 정립해 복음주의의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서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저서로는 '동성애논쟁'(홍성사), ‘오직 한 길'(아가페), ‘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두란노), ‘ 그리스도의 십자가’, ‘ 살아 있는 교회’, ‘진정한 기독교’, ‘현대 사회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등이 있으며, 전기로는 로저 스티어가 쓴 ‘존 스토트의 생애’가 있는데, 그는 ‘기독교의 기본진리’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현대의 기독교’ ‘나는 왜 기독교인인가’ 등 명료하면서도 균형 잡힌 수많은 저서들을 통해 전 세계 독자들을 복음주의에 든든하게 서 있게 하였다.


그는 자신이 쓴 책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를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다른 어느 책보다도 그 책에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쏟아 부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기 때문이며 자신의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기 때문이란다.

스토트 목사는 2010년 발간한 자신의 마지막 저서인 ‘제자도(The Radical Disciple)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될 것”을 강조했다.


한국에는 1993년과 1999년 IVF 전국수련회와 IFES 세계총회 참석차 방한했었는데, 그 때 그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물질주의에 빠져 있다”며 단순한 삶, 관용을 베푸는 삶을 살 것을 주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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