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바벨탑

이창무 2015. 4. 3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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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바벨탑 


말씀/ 창세기 11:1-9

요절/ 창세기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 말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6.25 전쟁 당시 1950년 10월 27일 평양 탈환 환영 시민대회에서 한 말입니다. 이후 이 말은 단합의 힘을 강조하려고 할 때마다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인생의 신조로 삼은 어떤 소대장이 있었습니다. 그가 전쟁터에 나갔다가 진지 안으로 수류탄이 떨어졌습니다. 이때 그가 외쳤습니다. “모여라!” 결과적으로 소대가 전멸 당했습니다. 이후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떤 말이 맞는 말일까요? 정답은 ‘때에 따라 다르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여라’ 하시면 뭉치고,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흩어지면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이 오라고 하실 때 도망 다니고, 가라고 하실 때 버텨보는데 그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인간들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흩어진 바벨탑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바벨탑 사건을 교훈으로 삼아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흩어지는 하나님 중심적인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창세기 10장에는 노아의 후손들이 온 세상으로 펴져 나간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11장은 그 시기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 한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당시는 온 세상의 언어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전 세계 누구를 만나도 별다른 노력 없이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세상이었습니까? 삼성 경제 연구소가 한국인이 중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10년 동안 영어 공부에 쏟아 붓는 시간을 조사해 본 적이 있습니다. 평균 1만 5548 시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엄청 난 투자를 했으니 영어를 잘하게 되었을까요? 아시아에 있는 12개국의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측정한 결과 한국이 당당히 꼴찌를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만한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지금 지구상에 알려 진 언어만 해도 5천에서 6천개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어쩌다가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었던 세상이 이렇게 수천 개의 언어로 뿔뿔이 나눠진 세상이 되었을까요?


2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창세기 9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 따라 노아의 후손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동방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큰 비전과 꿈을 가지고 길을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더 가다보니 시날 평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날은 성경에 나오는 바벨론 제국의 중심지였던 곳이었습니다. 현재의 이라크 땅에 해당합니다. 시날 평지는 사방에 지평선이 보이는 광활한 대평원이었습니다. 평지는 집을 짓기 쉽고 길을 내기도 쉽고 농사를 짓든지 목축을 하든지 뭘 하든지 좋은 곳입니다. 동방으로 가던 사람들이 시날 평지를 보자 이구동성으로 소리쳤습니다. "바로 여기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들은 고생스럽게 더 전진을 하느니 그냥 시날 평지에 머무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2절의 '거류하며'라는 말은 눌러 앉았다는 말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시며 개척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해 버린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을 축복이 아니라 부담이나 짐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인류 역사에 획기적인 일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3절을 보십시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이전까지는 돌과 진흙을 이용한 건축 공법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이 공법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돌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아 맞추어 쌓기가 어렵고 진흙은 비가 많이 내리면 무너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공법으로는 단층집 밖에는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운 벽돌은 돌처럼 단단하면서도 규격화되어 있어 쌓기가 수월했습니다. 역청은 아스팔트의 원료가 되는 타르를 말합니다. 타르는 방수가 되고 접착력이 매우 우수합니다. 신공법에 의해 인류는 건축 기술에 있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비로소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이런 비약적인 기술 혁신의 사례가 몇 가지 있습니다. 기술 혁신이 일어나면 세상의 모습이 획기적으로 바뀝니다. 예를 들자면 증기 기관이 발명되자 산업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또 컴퓨터와 인터넷이 발명되어 현재와 같은 정보화 시대가 왔습니다. 이런 일들은 인간 사회 외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세상에 돼지가 벽돌집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있기는 있습니다. 돼지 삼형제 이야기 속에서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동화 속에서나 있는 일이지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오직 인간만이 획기적이고도 놀라운 기술 혁신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의 속성 중 일부인 창조성과 지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창조성과 지혜 덕분에 인간은 이전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런 특별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의 사랑을 찬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인간들은 무슨 모의를 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성읍이란 인구가 집약적으로 모여 사는 큰 도시를 의미합니다. 또 여기서 탑은 불국사에서 볼 수 있는 다보탑이나 석가탑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도 이라크에 가면 바벨탑의 흔적으로 보이는 '지구라트'라 불리는 건축물의 유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지구라트에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는 방들이 있고 문과 창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정도라면 엄청나게 높은 고층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벨탑은 도곡동에 있는 '타워 팰리스' 같은 거대한 초고층 아파트라고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안 그래도 드넓은 평지인데 여기에 초고층 아파트를 세운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세우고자 했던 초고층 건물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도시를 생각하면 어딘가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과 비슷합니다. 현재 전 세계에는 서울처럼 인구 천만이 넘는 거대 도시가 19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2050년이 되면 27개로 늘어나고, 전 세계 인구의 70%가 도시에 거주하게 될 것으로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점점 더 도시로 모여들게 될까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도시에 가면 상대적으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일자리도 많고 출세나 성공할 기회도 많습니다. 또 도시 생활에는 더 편리한 점이 많습니다. 도시에는 수도, 전기, 교통, 통신과 같은 인프라 시설과 극장, 영화관, 박물관, 미술관 같은 문화 시설이 잘 갖추어 있습니다. 게다가 도시에 살면 은근히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서울 사람이 시골 가면 '서울 양반'이 되고, 시골 사람이 서울에 오면 '시골 촌놈'이 됩니다. 그런데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그 속에 살고자 하는 인류의 시도가 단지 이런 실용적인 이유들 때문만이었을까요?


4절에 보면 시날 평지에 거대한 도시와 탑을 세우고자 하는 그들의 동기가 두 가지로 드러나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려고 하였습니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합니다.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겠다는 말은 하나님과 맞장을 떠 보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흔히 쓰는 표현 중에 ‘하늘을 찌를 듯 한 교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비유로만 알았는데 그들은 바벨탑을 쌓아 실제로 하늘을 찔러 보려고 했습니다. 기껏해야 이제 겨우 벽돌 좀 굽게 되었을 뿐인데 기고만장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제가 회사에서 팀장을 할 때 신입 사원이 한 명 팀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 어리버리하던 이 친구를 심혈을 기울여 가르쳐 꽤 능력 있는 개발자로 키워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회의석상에서 그가 큰소리로 모든 사람 앞에서 “팀장님! 그건 아니죠. 제가 아까부터 아니라고 했는데 왜 말을 안 들으세요!” 이러는 것입니다. 너무 황당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누가 누구더러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까? ‘애써서 키워 놓았더니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이런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저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과거에 참 어리버리하고 내면이 깊이 병들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도와주시고 키워주시고 고쳐주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살만하다 싶으면 은혜를 다 까먹고 다 내가 하고 내가 이룬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별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까 내 이름이 존귀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런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회개하고 나면 어느새 또 그러고 있습니다. 제 안에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교만이라는 괴물이 같이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교만과 싸우지 않으면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처럼 결국 하나님과 맞장을 뜨고자 하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보게 됩니다.


둘째로 자신들만의 왕국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왜 그들은 이렇게 흩어짐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떨어져 있으면 매우 소심하고 연약합니다. 혼자서는 개 한 마리만 옆에 지나가도 괜히 긴장이 되고 손에 땀이 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달라집니다. 사람의 힘은 조직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은 강한 결속력으로 집단을 이루며 살 때 거기에서 엄청난 힘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자연히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더 큰 집단을 이루며 살 때 더 큰 힘이 나오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 나타난 첫 번째 감정이 두려움이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합이 깨어지고 분리를 경험하게 되면서 두려움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을 때에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이유가 바로 이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후손들은 이 길 외에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을 찾아내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도시를 만들고 그 안에 정교하고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 받고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힘에 의해 유지되고 인간의 결정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자신들만의 왕국을 구축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우리끼리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이런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무엇을 하고 있나 보러 내려오셨습니다. 이들을 보신 하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시고 걱정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힘이 약해서 그나마 사고를 쳐도 큰 사고를 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대로 내버려 두면 큰 힘을 가게 된 인간들이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대형 사고를 내게 될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어떤 인간 집단이 기술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을 했었는가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 큰 힘으로 온 세상을 섬기고 선한 일을 이루는 데에만 사용한 나라나 민족이 있습니까?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보다는 끝도 없이 교만해 져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침략과 착취와 끔찍한 범죄와 악행을 저지른 사례들은 무수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만큼 친절하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들 합니다. 그들은 ‘스미마셍’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데 이 말은 ‘미안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종군 위안부 할머니 문제에 대해 줄기차게 사과와 보상 요구를 수십 년간 받아 왔지만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스미마셍’이란 그 말 한 마디를 끝까지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모여 큰 집단을 이루게 되면 뻔뻔해지고 개인이 감히 하지 못하던 범죄를 겁 내지 않고 저지르게 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가리켜서 구조적인 악 또는 집단적인 악이라고 부릅니다. 월터 윙크라는 학자는 이런 구조적인 악, 집단적인 악의 배후에는 신약 성경에서 정사와 권세들이라고 부르는 악한 영들이 역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부패와 집단의 힘과 악한 마귀가 함께 만나서 칼춤을 추게 되면 전쟁과 살육과 학살의 광풍이 일어나고 그 칼끝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갑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은 더 큰 비극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의 손에서 칼을 빼앗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무한대로 자신의 힘을 팽창시키려고 하는 인간의 시도를 꺾으시려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직의 힘은 원활한 의사소통에서 나옵니다. 의사소통이 잘 되어야 전체가 한 몸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가 서로 달라져 버리면 의사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설계한 사람이 설계도를 들고 와서 ‘여보세요! 이 부분을 이렇게 지으세요.’ 하는데 공사하는 사람이 ‘Hey! What are you talking about?’ 이러면 탑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탑을 쌓기는커녕 서로 싸우기만 하다가 ‘나 안 해!’ ‘I gave up!' 하면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인류 최초의 초대형 프로젝트 바벨탑 건설 프로젝트는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사람들은 이후로 그 땅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벨은 혼잡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흩어짐을 면하려고 바벨탑을 쌓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바벨탑 건축은 실패하고 사람들은 흩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온 땅에 흩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좌절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사람들의 신세가 참 처량하게 되었습니다. 탑을 쌓느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에 다 흩어지고 언어 장벽이라는 덤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흩어져 개척을 했더라면 언어도 계속 하나로 유지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었는데 참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언어의 혼잡이라는 이 바벨탑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일까요?


바벨탑 사건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신약의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최초로 교회가 탄생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때 아주 놀라운 현상 하나가 일어났었습니다. 120여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불의 혀처럼 임하게 되자 갑자기 그들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방언은 천하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자기 나라 말이었습니다. 생전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전혀 다른 나라 말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말해 주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바벨탑의 저주를 바로 교회를 통해서 풀어내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벨에서도 사람들이 모였고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모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교회 공동체와 인간들의 집단과는 본질에 있어 전혀 다릅니다. 과연 어떤 점에서 다를까요?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입니다. 바벨에 모인 사람들의 목적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실 것인가 이것이 교회에 속해 있는 지체들의 최대 고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교회는 자나 깨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만약 교회의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바벨탑의 정신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내려고 삽질을 마다하지 않는데 교회인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데 열정이 식어 있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 모임이 내 이름 혹은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교회는 세상을 섬기기 위해 모입니다. 바벨에 모인 무리들의 목적은 오로지 자기들의 유익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소위 말하는 ‘집단 이기주의’라는 것이 나타납니다. 이기심에 사로잡힌 집단은 끊임없이 더 커지고 더 많아지기를 원하며 주변의 모든 자원들을 다 자기에게로 끌어 모으려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을 섬기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자기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더 많이 섬기고 더 많이 나누어 주고 더 많이 베풀어 주는 것이 교회의 본분입니다. 사람들은 집단 이기주의가 독가스를 뿜어내는 세상 속에서 교회라는 산소를 만나 숨통을 트이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교회마저 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버린다면 사람들은 실망하고 전도에 마음 문을 닫아 버립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섬기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란 사실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되겠습니다.


셋째로, 교회는 끊임없이 흩어져 개척하기 위해 모입니다. 바벨에서의 타락은 노아의 후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시날 평지에 안주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지만 결국 억지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안주하려고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끊임없이 개척하고 도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개척과 도전 정신을 잃으면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곧 타락하고 맙니다. 교회가 개척 정신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이 억지로 흩으시기도 하십니다. 어떨 때는 외부의 핍박을 통해서 어떨 때는 내부의 갈등을 통해서 흩으십니다. 억지로 흩어지면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니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자원하여 개척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때 우리는 살아 있는 교회, 영적 생명력이 충만한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가 편하게 안주하려고 하는 본성을 부인하고 개척하고 도전하라 하신 축복과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센터가 수천 명이 모이는 센터가 된다면 어떨까요? 일단 국내에서 가장 큰 센터로 유명해 질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예를 들어 전국 학생 수양회에 갔는데 ‘그 유명한 안암에서 오셨군요.’ 한다면 기분이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재정이 풍족해지니까 여기 저기 지원을 팍팍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센터 건물도 더 크고 아름답게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케스트라 60명 단원은 간단히 해결되고 찬양팀도 엄격한 오디션을 거쳐서 팀원을 뽑게 될 것 같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모이는 숫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흩어져 개척하기 위해서 모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입니다.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자기 영광과 자기 유익을 구하며 안주해 버린다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작은 것입니다. 별 볼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숫자가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사모하고, 양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고, 자발적으로 흩어져 개척하는 공동체라 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각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크던지 작던지 양들이 많이 남든지 적게 남든지 간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모이게 하신 그 본래의 목적에 합당한 공동체를 함께 이루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의 인본주의적 가치가 팽배해 있는 이 세상 가운데서 은혜로 우리를 구별하여 부르시고 거룩한 뜻을 위해 이 자리에 모으셨습니다. 주의 거룩한 뜻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이 세상을 사랑으로 섬기며, 개척하고 도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로 이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로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와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아멘. 

(2013.5.5.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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