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읽어 보는 C. S. 루이스의 "영광의 무게"라는 설교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던 설교입니다. 글 자체로 명문일 뿐더러 기독교의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영광의 무게”(C. S. 루이스), 류호준 번역, Sep. 21, 2005.
스무 명의 착한 사람들에게, 그들 생각에 무엇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느냐고 한번 물어보시라. 아마 그들 중 열아홉은 ‘비 이기심’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질문을 전(前)시대의 위대한 기독교인들에게 물어보았다면, 그들은 대부분 모두 ‘사랑’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보다시피 적극적인 용어가 소극적인 용어로 대체된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것은 단순한 용어대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비 이기심’이라는 소극적 이상(理想) 속에는 타인을 위해 좋은 일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 정도의 소극적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적극적 생각은 없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나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 사랑아 아닐 것입니다. 물론 신약성경은 자기부인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자기를 부인한다면 궁극적으로 나중에 얼마나 좋은 것들을 얻게 될 것인지에 관해 말하면서,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갈망을 향해 호소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사고 속에는, 좋은 것을 갈망하고 또 그로 인한 만족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나쁘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은 칸트와 스토아학파로부터 들어온 것이지 결코 기독교 신앙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해두는 바입니다.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대담하게 보상을 약속하고 있는지, 또 그 약속된 보상이란 것들이 얼마나 엄청난 것들인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아마 주님은 우리의 갈망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 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한심한 피조물인지, 무한한 기쁨을 주겠노라는 제안을 듣고서도 그저 술이나 섹스나 야망 같은 것들이나 만지작거리면서 놀려고 하는 어리석은 피조물들입니다. 우리는 너무 시시한 것에 쉽게 만족해버리는 것이다. 마치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없어서 뒷골목이나 배회하고 싶어 하는 무지한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여간 해서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시시한 것에 쉽게 만족해버리는 것입니다.
보상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매달리는 크리스천들에게 불신자들은 그것이 속물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비난에 괘념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상에는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보상에는 여러분이 하는 일에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그런 보상이 있습니다. 즉 보상과 보상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일 사이에 아무런 자연스런 관련이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보상은 사실 엉뚱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은 사랑이라는 행위에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보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남자가 여자의 돈을 보고 그녀와 결혼한다면, 엉뚱한 걸 바라는 속물덩어리라고 욕하는것입니다. 한편, 합당한 보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은 진짜로 사랑하는 연인에게 주어지는 합당한 보상입니다. 그가 결혼이라는 보상을 바란다고 해서 속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작위(爵位)를 얻어 볼까 하는 마음에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장군이 있다면 그는 속물입니다. 반면 승리를 얻기 위해 싸우는 장군은 속물이 아닙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마치 결혼이 연인에게 주어지는 올바른 보상인 것처럼 그 장군에게 있어서는 전투에 대한 합당한 보상인 것입니다. 즉 진정한 보상이란 단순히 보상 때문에 하는 행동들에 부착되어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놓고 볼 때 그 행동 자체가 곧 그 행동의 진정한 보상이 되는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종류의 보상은 좀더 복잡합니다. 그리스 시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그리스어를 익혀둔 것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지 속물적 보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합당한 ‘보상’인지는, 어느 정도 그리스 시를 즐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사람만이 자신의 체험을 통해 확실히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연인은 결혼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장군은 승리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지만, 지금 그리스어문법을 배우고 초등학생이 훗날 자신이 소포클레스(Sophocles: 그리스의 비극시인)의 시를 즐길 수 있게 될 것 때문에 가슴이 뛰는 법이 없습니다. 그는 점수를 따기 위해서나 혼나지 않기 위해서, 혹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문법 공부를 시작했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경우라 해도,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고 갈망할 수도 없는 장래의 좋은 그 무엇이 오리라는 막연한 소망 가운데서 공부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 경우의 보상은 엉뚱한 보상을 바라는 속물심리와 어느 정도의 유사점이 있긴 합니다. 다시 말해서 후에 얻게 될 보상(그리스 시 감상)은 사실 그가 지금 하는 행동(그리스어 문법공부)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합당한 보상이기는 하겠지만, 당사자는 그 보상을 얻게 되기 전까지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그는 보상을 천천히 받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겨운 공부시간에도 가끔씩 그리스 시의 참말을 느낄 수 있기도 하고, 또 지겨운 그리스어 학습이 끝나고 곧바로 즐거운 그리스 시 감상 시간이 시작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보상을 그 자체로서 얼마나 열망할 수 있게 되느냐 하는 것은 그가 그 보상에 얼마만큼 가깝게 접근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그 보상을 갈망할 수 있는 능력자체가 이미 그 보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늘과 관련하여 기독교인들은 이 초등학생과 동일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 즉 하늘나라 보상은 세 번째 종류의 보상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영원한 삶을 사람들은 그 영원한 삶이 뇌물의 대가가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를 따라서 살아가는 제자들의 삶의 최종 결집 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아직 얻지 못한 우리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렇게 그저 순종하다 보면 그 순종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보상의 맛을 조금 알게 되고 그러면 우리 속에는 최종적으로 완성된 보상을 갈망하는 내면적 힘이 점점 더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상에 대한 갈망이 자라나는 것만큼,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우리의 갈망이 어떤 보상을 바라는 속물심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우리 속에서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런 사고(思考)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이런 깨달음이 하루아침에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시가 문법을 대신하고 복음이 율법을 대신하고 갈망이 순종을 대신하게 되는 것은 마치 바닷물이 조금씩 불어나 정박해둔 배가 마침내 물에 뜨듯이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앞서 말한 그 초등학생과 우리 사이에 중요한 유사점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만일 그 학생이 상상력이 풍부한 소년이라면 그는 아마 자기 나이에 맞는 영국 시인들이나 소설가들의 작품에 푹 빠질 것입니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그리스어 공부가 나중에 자기를 그와 같은 종류의 즐거움과 기쁨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큰 즐거움으로 이끌어 주리라는 생각은 아직 못하고서 말입니다. 또한 그리스어 문법 선생님 몰래 셜리(Shelley: 영국의 낭만파 서정시인, 1792~1822)나 스윈번(Swinburne: 영국의 비극시인, 1837~1909)의 책을 읽느라고 정신없어서그리스어 공부를 등한히 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훗날 그리스어를 통해 진정한 만족감을 얻게 된다는 갈망이 이미 그 소년 안에 존재하고 있지만, 지금 그가 갈고 닦는 크세노폰(Xenophon: 그리스의 비극작가)이나 그리스어 동사와는 별도로 그 갈망을 엉뚱한 대상에게로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원래 하늘나라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우리 안에는 진정한 고향인 하늘나라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갈망은 진정한 대상이 아닌 다소 엉뚱한 대상을 향하고 있고, 심지어는 그 엉뚱한 대상이 갈망의 진정한 대상과 라이벌 관계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발견해 낼 수 있는 유사점입니다. 물론 이 초등학생 비유가 잘 맞아 들어가지 않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대신에 지금 읽고 있는 영국 시는, 그리스어 공부를 통해 그 아이가 나중에 즐길 수 있게 될 그리스 시에 못지않게 좋은 작품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스킬로스(Aeschylus: 로마의 비극시인, 525~456 B.C.)를 탐구하는 대신밀턴(Milton, 영국의 시인, 『실낙원』Paradise Lost의 저자, 1608~74)을 택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거 아이더러 너는 지금 너의 갈망을 만족시켜줄 진정한 대상이 아닌 엉뚱한 대상을 잘못 알아보고 얼싸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이것과 매우 다릅니다. 만일 영원하고 무한한 행복을 누리는 거시우리의 진정한 운명이라면,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이 영원하고 무한한 행복 외에 우리의 갈망이 택하는 여하한의 모든 다른 행복들은 다 어느 정도는 우리를 현혹시키고 있는 것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을 상징해 주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먼 본향을 향한 우리의 이 갈망,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이 갈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다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지금 가히 점잖지 못한 말을 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 각자 안에 숨겨져 있는, 위로 받을 길 없는 그 비밀스런 갈망을 들추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비밀스런 갈망이 여러분에게 준 상처는 너무나 깊은 것이라서 여러분들은 종종 그 갈망에다가 무슨 ‘향수병(Nostalgia)'이니’낭만적 생각(Romanticism)'이니 ‘철없는 꿈(Adolescence)'이니 하는 이름들을 붙여버림으로써 복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달콤하게 우리 내면 깊은 곳을 뚫고 들어옵니다. 누군가와 매우 친밀한 대화를 나눌 때 이 갈망에 대한 이야기가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나올 뻔 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어색해하면서 자조의 웃음을 짓곤 합니다. 숨기고 싶지만 숨길 수 없고 말하고 싶지만 또 말할 수도 없는 우리 안의 이 비밀스런 갈망 말입니다. 우리가 이 비밀을 터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결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또 이 비밀을 숨기지도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경험 속에 끊임없이 은연중에 암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연인들이 그러지 않으려 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들리면 어쩔 수없이 티를 내게 됩니다. 이러한 갈망의 대상에 대해 우리는 흔히 “그런 걸 바로 아름다움(美)이라고 하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간단히 설명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책이나 음악 속에 아름다움(美)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 책이나 음악은 우리의 그런 믿음을 배신해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그것들 안에’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들을 거쳐서’ 우리에게 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것은 무언가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입니다. 사실 이것들은 ㅡ 그것이 아름다움(美)이든 자신의 과거 기억이든 ㅡ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고 있는 그 무언가의 좋은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무언가의 이미지에 불과한 것들을 그것 자체로 착각해버린다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말 못하는 우상이 되어 숭배자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무엇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꽃의 향기요 우리가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음악의 여운이요 우리가 아직 방문해보지 못한 나라로부터 들리는 소식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주문(呪文)을 걸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렸을 적 읽어보았던 동화 이야기를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주문(呪文)은 마법을 거는 데에도 사용되지만 마법을 푸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과 나에게 필요한 것은 거의 백 년 가까이 우리를 묶어왔던 세속주의2)라고 하는 이 악한 마법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줄 강력한 주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온 교육의 대부분은 우리더러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이 끈질긴 목소리를 잠재워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 거의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들도 인간의 낙원은발로 이 현세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주는데 혈안이 되어왔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진보적 혹은 창조적 진화 철학들 자체가 자기들 본의와는 다르게 우리의 진정한 목적지는 여기 이곳 현세가 아닌 다른 데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오히려 드러내주는 격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이곳 현세만이 우리의 진정한 고향(故鄕)이라고 납득시키려 할 때 그들이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 한번 주의 깊게 들어보십시오. 그들은 우선 이곳 현세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설득하려 하는데, 이것은 ‘지금 이 세상은 단지 우리의 타향일 뿐이다’라는 여러분의 직관에다 대고 호소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그러나 이러한 복된 일은 지금은 아니고 꽤 먼 장래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또한 우리의 본향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는 사실, 즉 여러분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참된 지식을 향해서 호소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미 익히 직관하고 있는 지식에다 호소를 하고 나서,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 그만 여러분 속에서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깨어나게 되어 문제를 다 망쳐버리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사학을 다 동원하여 자기들의 말을 그럴 듯하게 꾸밉니다. 설령 그들이 약속하는 모든 행복이 이 지상에서 인간들에게 다 실현된다 한들, 여전히 개개의 인간은 각자 죽음을 통해 그 행복을 다 잃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인류 최후의 세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모두 다 공허한 이야기, 아니 무슨 이야기라고 부를 만한 것도 되지 못하는 그저 허무함으로 영원히 끝나버리고 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여러분 머리 속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하려고, 모든 멋들어진 말은 있는 대로 다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어떠한 자연적 행복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일종의 갈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의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갈망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무언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요?“무슨 소리! 배고픔을 느낀다는 것이 곧 빵이 있다는 걸 증명해주지는 못하는 것 아니오?”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반론은 논리에 있어 부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이 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서양 한가운데서 뗏목을 타고 표류하다가 결국굶어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가 식사로 배를 채우는 종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음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세상에 그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증명해줍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낙원을 갈망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후에 낙원을 즐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준다고는 믿지 않지만(이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낙원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즐기게 되리라고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증거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가 결국 그녀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도대체 성(性)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에서 ‘사랑에 빠짐’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존재한다면, 그건 참 기괴한 일 아니겠습니까! VII자, 여기 자신이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디에 그것이 있는지 잘 몰라 그저 이리저리 헤매고만 있는 어떤 갈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갈망의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명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하늘나라란 당연히 우리의 경험 밖에 있는(우리가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것이고, 또 우리는 우리의 경험 이내에 있는(우리가 경험해 본) 것에 대해서만 알아듣게 묘사할 수 있이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에 대해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그림은 일종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갈망의 대상에 대해 우리가 성경의 도움 없이 혼자 만들어본 그림들도 마찬가지로 상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늘나라가 실제로 성경이 그리듯
이 무슨 금은보화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이 아니듯이, 마찬가지로 하늘나라는 우리가상상해 보는 것처럼, 무슨 자연의 미(美)도 아니고 아름다운 한 곡의 음악도 아닙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성경이 보여주는 이미지들에게는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우리보다 더 하나님과 가까웠던 분들이 기록해놓은 것들이고, 게다가 수세기에 걸쳐 기독교인의 경험의 시험을 거쳐 온 것들입니다. 처음 나는 이 권위 있는 이미지들에게서 거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니, 처음에 그것들은 하늘나라에 대한 나의 갈망을 일깨우기는커녕 오히려 식혀버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당연히 그러하리라 예상했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만일 기독교가 우리의 먼 본향인 하늘나라에 대해 나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들이 내가 내 기질 상으로 자연히 예상해왔던 이미지들과 별 다를 바가 없다면, 기독교란 겨우 나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만일 그 이상이라면, 나는 그것이 처음부터 ‘내 취향’에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으리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겨우 셜리(Shelley)의 시 정도만 읽어본 아이에게는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시가 처음에는 당연히 재미없고 무미건조해 보일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객관적인 종교라면, 우리는 기독교 안에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고 또 거부감마저 일으키는 것이 있다 해서 거기서 눈을 돌려버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고 또 알 필요가 있는 것들은, 다름 아니라 기독교에게서 우리가 당혹감과 거부감을 느끼는 바로 그 부분들에 숨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관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약속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다섯 개의 항목으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둘째, 우리는 그분을 닮게 될 것이다. 셋째, 우리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엄청나게 화려한 이미지들을 보여주고 있다. 넷째,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잘 먹고 잔치를 하고 기쁨을 얻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주 안에서 일종의 직위를 얻게 될 것이다. 성경에는, ‘고을을 다스린다, 천사를 심판한다,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등의 말이 있다. 여기서 나올 만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 첫 번째 축복만으로 충분하지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됐지, 또 무엇이 거기에 더 필요하단 말인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그렇긴 합니다. 옛날에 어떤 작가가 말했듯이, 하나님을 모시고 또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해도, 그는 사실상 오직 하나님만을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분 외에 다른 것을 소유했다 해도 최상의 소유인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우리는 상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또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언뜻 봐서는 잘 모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말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개념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나머지 다른 약속들 못지않게 역시 상징적인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 속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공간적으로 아주 가까이 있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 같은 어떤 친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은근슬쩍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배제시킨 채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에만 우리의 생각이 집중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우리는 기독교인들 중 오로지 이 첫 번째 약속에만 관심을 두는 이들은 항상 그 약속에 대해, 온통 결혼이나 성애(性愛)같은 매우 현세적인 이미지만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그러한 이미지들이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러한 이미지가 주는 체험에 내가 지금보다 더 깊이 들어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고,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 역시 하나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점에서는 그것이 나타내주고 있는 실제와 같긴 하지만, 또 다른 점에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징은 나머지 약속들이 다른 상징들에 의해 보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약속들이 제시되어 있다고 해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얻게 되는 것’말고 무슨 다른 지족(至福)이 또 있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여러 개의 각양각색 이미지들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인격체 그 이상인 분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우리가 그분의 임 재 안에서 누리게 될 기쁨을 상상할 때, 우리가 너무 이곳 현세에서 경험해보는 사람간의 사랑만을 가지고 연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은 (하나님과의 사랑에 비해선) 궁색하고 피곤하고 무미건조한 것에 지나지 않기에, 그 이미지를 보완해주고 또 바로잡아줄 여러 개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이제 ‘영광’이라는 개념에 대해 살펴볼 차례입니다. 신약성경과 초기 기독교 저술들에니 ‘영광’이라는 개념이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매우 자주 종려나무 가지, 면류관, 흰옷, 보좌 혹은 빛나는 태양이나 별 같은 것들과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에 나는 이런 것들에 전혀 매력을 못 느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애가전형적인 현대인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습니다.‘영광’이라는 말을 접하면 나에게는 두 가지 느낌이 드는데, 하나는 악하다는 느낌이고 다른 하나는 우스꽝스럽다는 느낌입니다. 영광이란 말을 들으면, 나는 ‘명성’ 아니면 ‘빛나는 물체’가 생각납니다.‘명성’의 뜻으로 봐서는, 영광 곧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알려진다는 말이고 따라서 명성을 갈망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엔 경쟁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쟁심이란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옥에 속한 것이 아니었던가요? 또 빛나는 물체라는 뜻에서 본다면, 대체 자기가 일종의 살아있는 전구(電球)같은 것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내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밀턴(Milton)이나 존슨(Samuel Johnson: 영국의 문학가, 사전편찬가, 1709~84) 그리고 토마스 아퀴니스(Thomas Aquinas: 이탈리아의 철학자, 가톨릭 신학자, 1225~74) 같이 서로 아주 다른 기독교인들이, 이 하늘의 영광에 대해 말할 때는 전혀 스스럼 없이 입을 모아 그것을 명성이나 명예라는 의미로 사용했었다는 사실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명성이란, 같은 인간들끼리 부여해주는 그런 명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명성, 하나님의 인정, 혹은 (이런 말까지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그 진가를 인정해주시는 것’이라는 의미의 명성을 말함이었습니다. 심사숙고 끝에 결국 나는 그들의 관점
이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이 애컬레이드(accolade: 왕이 칼로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하는 작위 수여식)는 결코 그 예화(마25: 14~30)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오자, 그때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 중 상당 부분이 마치 종이카드로만 든 집처럼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의 뜻이 갑자기 깨달아졌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분명한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린아이는 칭찬을 들으면 너무나 좋아하는데, 그것도 아무런 꾸밈없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개나 말 같은 짐승들도 그러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겸손에 대해 잘못 생각해왔기 때문에, 사실 모든 즐거운들 중 가장 겸손한 즐거움이요 가장 동심(童心) 같은 즐거움이요 가장 피조물다운 즐거움인, ‘작은 자가 되는 특별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작은 자 된 즐거움, 이것은 사람 앞에서 짐승이 느끼는 즐거움이요, 스승 앞에서 제자가 느끼는 즐거움이요, 창조자 앞에서 피조물이 느끼는 즐거움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순수한 갈망이 얼마나 끔찍한 인간적 야심으로 쉽게 변질되어버리는지, 마땅히 기쁘게 해드려야 할 분에게서 칭찬을 받았을 때 그 합법적인 즐거움이 얼마나 빨리 자기도취라는 치명적 독으로 변질되어버리는지, 나는 경험상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 내가 사랑하고 어려워해야 마땅한 분을 내가 기쁘게 해드렸을 때 그 어떤 변질이 일어나기 전에는 ㅡ 비록 대단히 짧은 순간에 불과하긴 하지만 ㅡ 그야말로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순수한 만족을 느끼는 순간도 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속 받은 영혼(자신)이 창조 받은 목적대로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는 사실을 하늘나라에서 알게 되었을 때, 이 믿기지도 않고 상상도 안 되는 사실 앞에서 그 영혼이 무엇을 느끼게 되리라는 것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그 영혼에게는 허영심 같은 것이 발붙일 자리란 도무지 없을 것입니다. 그 엄청난 일 앞에서는 모든 게 다 자기 덕이라는 파렴치한 환상 따위는 발붙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그저 한없이 천진난만한 기쁨만을 느끼는 그 영혼에게서 자기자랑 같은 것은 흔적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의 모든 열등감이 영원히 치유되는 그 순간에는 교만심도 역시 영원히 사라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겸손은 항상 절제하는 겸양입니다. 자신이 만드신 작품에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데, 그 작품도 마땅히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인님께서 해주시는 칭찬에 어쭙잖은 겸손 같은 건 떨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하늘나라를, 하나님께서 잘 하셨다며 우리 등을 다독거려주시는 곳으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못마땅해 하는 마음 이면에는 교만함에서 비롯된 오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면, 그것은 우리각자에게 무한한 기쁨 아니면 무한한 공포, 이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종국에 가서는 우리 개개인을 보시며 이것 아니면 저것, 즉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을 주시거나, 아니면 영원히 치유될 수 없고 숨길 수 없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나는 얼마 전 어떤 잡지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하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건 정말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따위의 문제와는 도무지 비교도 되지 않을 만치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분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정도만큼만 중요할 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 앞의 시험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영광을 얻게 해주시겠다는 약속, 우리 중 진정 그러기로 선택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고 인정을 받으며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이라는 이 약속은, 그야말로 실로 믿기지 않는 약속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만 가능해진 약속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것,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이유가 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는 것, 단지 불쌍히 여김을 받은 그런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마치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기뻐하듯이,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기뻐하듯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것, 이것은 실로 인간의 생각이 감히 감당해낼 수 없는 영광의 무게입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자, 영광이 이런 것이라면 이제 무엇인가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만일 내가 영광에 대한 성경의 권위 있는 이미지를 거부하고 내게 있어서 하늘나라를 가리켜 주는 유일한 지시자였던내 안의 그 막연한 갈망에만 고집스럽게 집착했더라면, 나는 아마 내 갈망이 기독교의 약속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내게 당혹감과 거부감마저 주는 부분을 따라가 보고 나서 뒤돌아보니, 너무나 놀랍게도 이제 나는 그것들이 얼마나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즉, 기독교가 내게 소망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영광이 알고 보니 내가 그 전부터 갈망해왔던 바로 그것이었고, 또 그 영광은 내가 내 갈망에 대해 미처 모르고 있던 점을 나로 하여금 알게 해주기도 했던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자 나는 내가진 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아까 우리의 영적인 그리움에 대해 묘사해보았을 때, 나는 그것의 가장 흥미 있는 특징들 중 하나를 빠뜨리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런 그리움을 느끼게 되는 때는 바로 어떤 비전의 순간이 사그라지는 때이거나 음악이 끝나는 때이거나 혹은 황홀했던 자연풍경이 빛을 잃어가는 때 같은, 그런 시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갖는 느낌을 키츠(Keats: 영국의 시인, 1759~1821)는 “일상적인 자아에로 귀향”(the journey homeward to habitual self)"라는 말로 잘 표현해 놓았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도 알 것입니다. 얼마간 우리는 우리가 그 세계에 속해 있다는 환상에 젖어 들어가곤 합니다. 그러나 금방 우리는 거기서 깨어나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단지 구경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미(美)의 여신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보고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우리 쪽으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쳐다보려 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세계는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고 환영하지도 않았고 그 무도회에 우리를 껴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를 떠나든 아니면 어떻게든 남아있든, ‘우리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과학자라면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들 중 대부분은 생물체가 아니므로,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목하지 않는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사실이 못 된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어떤 물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물체들을 잠시 자신의 메신저로 삼아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이 메시지는 우리에게 달콤함과 함께 쓰디쓴 마음을 들게끔 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그 메시지란 것이 우리보고 들으라고 보내어진 것이 아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어떻게 하다 우연히 그것을 엿듣게 된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쓴 마음이란, 어떤 분개심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주목해달라는 요구까지는 감히 할 생각을 못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여전히 그리움에 목말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서 우리는 이방인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그리고 자신을 알아봐주었으면 하고 어떤 반응을 기대하면서 우리와 실재 사이에 벌어져 있는 이 간격에 다리가 놓여지기를 바라는 이 갈망은, 우리 모두의 마음 속 위로받을길 없는 비밀로 다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이 약속해주고 있는 바로 그 영광이야말로 우리의 마음 속 이 깊은 갈망에 너무도 잘 맞아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시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 반응 혹은 인정, 그리고 우리가 사물의 심장 속으로 환영 받아 들어가는 것 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생 두드려왔던 문이 마침내 열리는 것입니다. 영광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아봐주시는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다소 유치해 보일 수 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성경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기를,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알아주실 것이다(고전 8:3)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이상한 약속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언제나 알고 계시는 분이 아니었던가요? 그러나 이 이상한 약속은 신약성경의 또 다른 구절에서 이번에는 우리를 오싹하게 만드는 음향으로 반복되어 울리고 있습니다. 그 구절은 경고하기를, 우리가운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의 대면에서 그분으로부터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나를 떠나라”고 하는 끔찍한 말을 듣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견디기 어려운 말씀일뿐더러 머리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의 임 재로부터 쫓겨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앎)으로부터 우리가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밖으로’ 쫓겨나가, 거절당하고, 추방되고, 소외되고, 그리고는 마침내 무시되고 마는, 참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러한 지경에 우리가 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초대받고 환영 받고 영접 받고 인정받게 되는 가능성 또한 열려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매일매일 이 두 가지 믿기지 않는 가능성 사이로 나 있는 아슬아슬한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일생 동안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는 이 노스탤지어(nostalgia), 즉 우주의 무언가로부터 자신이 떨어져 나왔다고 느끼고 그것과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이 갈망, 밖에 서서 언젠가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원하는 우리 마음 속 깊은 이 갈망은, 어떤 신경증적인 몽상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처해 있는 상황을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지표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부름을 마침내 받게 될 때, 우리의 모든 공로를 초월하는 이과분한 영광과 영예는 동시에 우리 마음 속 이 오래된 아픔에 대한 치유도 될 것입니다.
이제 영광의 두 번째 의미, 즉 광채, 광휘로서의 영광에 대해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해처럼 빛날 것이고 새벽 별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이런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새벽 별을 주셨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나가보면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물을 얼마든지 보고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더 이상 또 뭘 원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러나 사실 여러분과 나는 이것 이상의 훨씬 더한 무언가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단지 ‘보기’만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한 축복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ㅡ 말로표현하긴 어렵지만 ㅡ 단순히 아름다움을 보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그 아름다움과 자신이 하나가 되고, 그 아름다움을 자신 속으로 받아들이고, 그 아름다움 속에 온통 잠기고 그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하늘과 땅과 강, 바다, 호수를 온통 무슨 신들, 여신들, 꼬마 요정 같은 것들로 채워놓은 이유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들의 갈망을 밖으로 투사하여, 자연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어떤 아름다움, 은혜, 힘 등을 스스로 지니고 있는 어떤 존재들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또 이것이 바로 시인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스러운 거짓마을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인들은 마치 서풍이 진짜로 인간의 영혼 속에 불어 들어올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또 그들은 ‘살랑거리는 소리에서 태어난 아름다움’이 마치 인간의 얼굴 속으로 진짜 들어올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아직까지는 사실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사실이 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늘나라에 대한 성경의 이미지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우리에게 새벽 별을 ‘주실‘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태양의 광휘를’입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고대의 신화들과 현대의 시들 모두 다, 비록 역사로서는 거짓된 것들이지만 예언으로서는 진실에 무척 가까이 접근해 있는 것들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로서 우리는 그 세계의 밖에, 그 문밖에 서 있습니다. 아침의 신선함과 청명함을 우리가 알아볼 수 는 있지만, 그 아침의 신선함과 청명함이 우리를 신선하고 청명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찬란함을 우리가 볼 수는 있어도, 우리는 그 찬란함과 어우러져 하나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언젠가는 이러한 사정이 달라질 것이라는 약속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언젠가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무생물들이 하나님께 기계적으로 온전히 순종하듯이 그렇게 우리 인간들도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온전히 순종하게 되는 날, 우리는 자연의 영광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영광을, 자연을 통해서는 단지 그 초벌 스케치만을 볼 수 있었던 그 영광을 입게 될 것입니다. 자연은 이렇게 우리가 장차 얻게 될 그 영광의 초벌 스케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성경의 약속은 우리가 자연 속으로 흡수될 것이라는 이교적 공상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오히려 자연이 죽어 사라질 운명입니다. 우리 인간이 자연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입니다. 모든 태양과 성운들이 다 사라져 버린 후에도, 우리들 각자는 여전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자연은 단지 이미지요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우리더러 이용하라고 초대하고 있는 상징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자연을 넘어서서, 그리고는 마침내 자연이 잘 반영해주고 있는 그 찬란한 영광 속으로 들어가라는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을 넘어선 그 곳에서, 우리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사람이 거듭나면 그 사람 속의 그 사람 속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양식을 받으며 살게 되지만, 현재로서는 그의 마음과 몸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수천 번 걸러진 상태로만 받고 있을 뿐입니다. 즉 그 생명은, 우리의 선조들, 우리가 먹는 음식들, 그 음식들의 성분 요소 등을 통해 수없이 걸러진 상태로 우리에게 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쾌락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그 창조적 환희가 물질 안에 심어놓은 에너지들을 현재 인간의 육체가 아주 어렴풋하고 희미하게나마 맛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수없이 걸러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 쾌락은 우리가 다 맛보기에 벅찬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낮은 곳에서 맛보는 물맛에도 우리가 이렇게 도취되고 있다면, 하 물면 그 수원지에서 맛보는 물맛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나는 바로 이것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과 마음과 몸, 전인(全人)이 기쁨의 수원지에서 기쁨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했듯이, 구원받은 영혼의 환희는 영화롭게 된 그의 육체 속으로도 ‘흘러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입맛이 버려져 있고 한정되어 있기에 우리는 이 강력한 ‘폭포수 같은 기쁨’(Torrens voluptuaries)에 대해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지나치게 심각하게 상상해 보려는 것은 해롭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해롭고 또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의 몸은 아니고)우리의 영혼만이 구원을 얻는다든지, 아니면 부활한 몸은 오감으로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감한 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마땅히 근절되어야 합니다. 육체 역시 주를 위해 지음 받은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음침한 공상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면류관 전에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차갑게 닫혀있던 세계의 벽이 한 틈이 벌어졌고, 우리의 선장 되신 주님은 그 안에서 우리더러 따라 들어오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핵심은 물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말해온 이 모든 추리적 사색들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대체 무슨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최소한 한 가지 정도의 쓸모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장차 받게 될 영광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이 장차 받게 될 영광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리 자주, 혹은 아무리 깊이 생각한다 해도 그것이 결코 지나친 일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의 영광의 무제, 그 짐, 그 하중을 우리 등에 짊어져야 합니다. 그 짐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워 오직 겸손만이 짊어질 수 있으며 교만한 등은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삶은 진지한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신과 여신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재미없고 또 지루했던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만약 우리가 지금 그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엎드려 경배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그런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쩌면, 지금은 우리가 악몽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그런 끔찍하게 부패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루하루, 우리모두는 서로서로에게 이 두 가지 방향 중 어느 한 방향으로 가도록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대하고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하고 함께 놀고 정치를 하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이 같은 엄청난 가능성을 기억하며 경외 심과 신중함을 가짐이 마땅합니다. ‘평범한’ 사람이란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껏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들 중구 누구도 ‘그저 죽으면 끝날’'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라들, 문화들, 예술들, 문명들 이모든 것들은 다’그저 사라지고 말‘ 것들이고, 그것들의 생명이란 우리 인간 개개인의 생명에 비하면 고작 모기만도 못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농담을 주고받고, 함께 일하고, 결혼하고, 무시하고, 이용해 먹었던 인간들은 불멸의 존재들입니다. 장차’불멸의 혐오‘(immortal horrors)가 되거나 아니면’불멸의 광채‘(immortal splendors)가 될 존재들인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언제나 항상 심각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유희는 서로를 평소에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런 종류의 유희 ㅡ 그리고 사실 이런 종류의 유희가 가장 즐거운 것이기도 하다 ㅡ 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박함이나, 거만함, 무례함 같은 것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 역시 죄인은 사랑할지라도 그 죄에 대해선 깊이 염려하는 사랑, 참된 사랑, 그리고 대가를 치르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마치 경박함이 진정한 유희의 모조품에 불과한 것처럼, 단순한 관용이나 그저 내버려두는 것 등은 진정한 사랑의 모조품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정서로 느낄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성찬의 떡과 포도주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만일 기독교인이라면 그는 거의 성찬의 떡과 포도주만큼이나 거룩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즉 영광을 주시는 분이자 동시에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며 영광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찬에서처럼 그 사람 속에 참으로 감추어져(vere latitat)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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