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골로새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

이창무 2015. 4. 3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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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방학 골로새서 제 5 강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


말씀/ 골로새서 3:18-4:1

요절/ 골로새서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우리는 지난 주 말씀에서 위의 것을 찾고 땅의 지체를 죽이라는 바울의 권면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어떤 분은 기도하는 것, 어떤 분은 일용할 양식을, 어떤 분은 소감을 쓰는 것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말씀과 기도 없이는 어떻게 위의 것을 찾고 땅의 지체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매일매일 말씀을 붙들고 두더지처럼 다시 튀어 오르는 죄들을 죽이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지난 주 말씀에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센터에 오면 분위기 자체가 우리를 경건해지도록 유도합니다. 책을 봐도 센터에 오면 성경이나 신앙서적만 보지 다른 책은 잘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센터에서 양들과 동역자들 앞에서 보이는 경건이 우리가 가진 경건의 전부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진정한 경건은 센터뿐만 아니라 집과 직장에서 보이는 경건입니다. 또한 가정과 사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경건을 훈련하고 연습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가정과 사회는 경건의 학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가정과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경건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크게 아내와 남편에 대한 권면, 자녀와 부모에 대한 권면, 종과 상전에 대한 권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각 관계를 이루고 있는 양쪽 모두를 짝을 지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유교에 뿌리를 둔 윤리 체계를 수백 년 동안 고수해 왔습니다. 전통 윤리의 특징은 단방향이라는 점입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윤리, 부모에 대한 자녀의 윤리, 상전에 대한 종의 윤리만을 강조합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윤리, 자녀에 대한 부모의 윤리, 종에 대한 상전의 윤리는 거의 무시되거나 매우 미약합니다. 현대에 들어서자 이런 전통 윤리에 대한 반발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반대로 남편과 부모와 리더에 대한 요구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졌습니다. 요즘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 상사 노릇 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남성 해방을 부르짖는 남성연대라는 시민단체가 생겨났겠습니까? 얼마 전 이 단체의 대표인 성재기 씨가 한강 다리 위에서 투신하는 퍼포먼스를 펼치다가 익사하는 사고가 나서 큰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한쪽의 윤리를 일방적으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상호 윤리를 말합니다. 관계를 이루고 있는 양쪽 모두에게 똑같이 각각 실천해야 할 윤리가 있습니다. 아내의 의무를 말하면서 동시에 남편의 의무도 말합니다. 자녀의 도리가 있고 부모의 도리도 있습니다. 종과 상전 모두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관계성이라는 것이 어느 한 쪽만 잘한다고 해서 형성되지 않습니다. 양쪽 편 모두가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때 그 관계가 건강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해 요구하거나 정죄하려는 도구를 이 말씀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아내에게 “봐라!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는데 왜 당신은 나한테 복종을 안 하는 거요?”라고 한다거나 자녀가 부모에게 “성경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 지금 엄마 때문에 화났으니까 책임져요”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이럴 줄 미리 알고 ‘아내들아’ ‘남편들아’ 이렇게 먼저 대상을 호명해 가면서 권면을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내가 실천해야 할 도리를 잘 배우면 됩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서는 요구하지 말고 그가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이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구체적인 권면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아내와 남편에 대한 권면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바울은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복종이라는 단어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는 단어입니다. 조선 시대나 남존 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가부장적인 구시대를 연상시키는 단어입니다. 지금은 여성 해방의 시대가 아닙니까? 심지어 여성 해방 정도가 아니라 여성 상위의 시대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니 이 시대에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1세기를 살았고 그 시대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던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폄하하기까지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실은 남녀평등의 시대를 가져온 것은 기독교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막론하고 과거에는 남녀 차별과 불평등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여자를 독립된 인격으로 간주하기 보다는 항상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로 보고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 가운데 새바람을 일으킨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제자들 무리 중에는 수산나를 비롯한 여러 명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당시로는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킨 사람도, 부활의 첫 번째 증인들도 여인들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브리스가, 루디아, 뵈뵈 같은 여성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여자들에게는 전혀 교육을 시키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최초로 이 땅에 여성 교육을 누가 시작했습니까? 바로 선교사들이 와서 조선 땅에 이화학당 같은 여학교를 세우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남존여비 사상이 여전히 팽배하던 시절에 여자들이 숨통을 트고 쉼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지금도 기독교에 문을 걸어 잠근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들에서 여성들의 처지는 참으로 비참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남녀차별을 부추긴다든지 가부장적이라느니 하는 것은 다 오해이고 잘못된 편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간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복종하라는 원어의 뜻을 살펴보면 주도권을 내어주라는 뜻입니다. 결코 끽소리도 내지 말고 시키는 대로 다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내는 남편이 옳은 판단을 내리도록 조언을 지혜롭게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2장에서 말하는 돕는 베필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을 잘 도와주되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의 권위를 세워 주도록 해야 합니다. 조언을 하더라도 최종적인 결정을 남편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주도권을 쥐고 앞장 서 가도록 잘 밀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신이 나서 큰 일을 하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는 한 가지 딜레마가 있습니다. 남편을 존경하고 싶어도 존경할만한 구석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내 남편은 능력이 출중해서 돈을 많이 벌어다 줄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영적인 투쟁을 열심히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기도도 잘 안 하고 말씀 투쟁도 열심히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집에 오면 TV나 보고 주말엔 잠만 잡니다. 가끔씩 말도 없이 친척의 빚보증을 서기도 하고 주식 투자를 했다가 다 말아먹기도 하는 등등 사고를 치기도 합니다. 이러니 어떻게 존경하고 복종할 수 있겠습니까? 아내들이 이런 말을 할 줄 알고 사도 바울은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존경할 구석이 없어도 남편을 존경하고 복종하고 싶지 않아도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만약 아내가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남편을 찍어 누르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싸움 밖에는 더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겨봐야 남편은 의기소침해지거나 밖으로 돌면서 가정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부모에게서 성 정체성을 배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권위가 없고 어머니가 주도권을 쥐는 가정에서 성장하는 자녀들은 반드시 성 정체성의 큰 혼란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은 아내가 남편을 쥐고 흔들려고 해 봐야 자녀에게도 좋지 않고 아내에게도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 죄를 범한 하와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저주를 새번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아내가 가정의 주도권을 쥐려하는 것은 범죄 후의 결과이지 타락 이전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실 때부터 이미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세우셨습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가정이라는 공동체에 질서와 조화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평등하지만 각각 머리와 돕는 베필로서의 역할이 다릅니다. 각자 그 역할에 충실할 때 그 가정에는 에덴의 기쁨과 행복이 충만하게 됩니다. 또한 아버지의 권위가 있을 때 자녀들은 권위를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남편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아내의 의무는 복종이라면 남편의 의무는 사랑입니다. 사실 신혼 때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은 별로 없습니다. 이때는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아내의 모든 것이 다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콩깍지는 평균 삼년 내에 다 벗겨지고 만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집은 폭탄 맞은 집처럼 난장판이고 빨래는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반찬은 어제 먹은 것과 똑같고 달라진 것은 여러 번 데우는 동안 국물이 쫄았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일대일 양이 많은 것도 아닌데 하루 종일 뭐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오늘도 열심히 드라마만 보고 있습니다. 날씬했던 아내의 몸은 어느새 많이 풍성해져 있습니다. 남편의 딜레마는 ‘별로 사랑스러운 구석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하느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바로 이런 때부터 시작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남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무슨 사랑할만한 구석이 있어서 사랑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또 그 사랑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부 지간에는 촌수가 없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이고 내 몸을 사랑한다면 아내도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자녀들은 언제가 내 곁을 떠나 독립할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나와 한 몸을 이루어 영원히 내 곁에 있을 존재는 아내 밖에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입니다. 

남편들은 흔히 월급을 송금하고 집에서 아이들을 봐주는 것으로 아내 사랑을 다 보여주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보통 아내들은 이를 당연히 것으로 여기지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요? 남편이 아내에게 사랑의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당신은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야. 당신이 너무 좋아. 당신만을 사랑해’라고 이렇게 말로 표현을 해야 합니다. 최대한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남자로서 쑥스럽고 오글거립니다. 하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반드시 극복을 해야 합니다. 반대로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괴롭게 한다는 말은 거칠게 대한다는 말입니다. 이 또한 평소 언어 습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남편들은 아무리 씩씩해 보이는 여자라 할지라도 남편의 거친 말에 얼마나 쉽게 상처를 받는지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안 깨지는 코렐 접시처럼 강하지만 아내는 깨어지기 쉬운 유리그릇과 같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힐난하는 말, 경멸조의 말, 추궁하고 따지듯이 하는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아내를 괴롭게 해 봐야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밥상부터 ‘먹기 싫으면 굶든지’ 밥상으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아내의 은근하고 집요한 복수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기만 괴롭게 됩니다. 


양마가 선교사님이 지난봄에 오셔서 ‘Love & Respect’ 라는 책을 소개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이 짧은 두 단어 속에 행복의 비결이 들어 있습니다. 가정이 행복해 지는 길은 그냥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가정들이 남편에 대한 존경과 아내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여져서 행복이 깃드는 아름다운 가정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로 자녀와 부모에 대한 권면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바울은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사실 순종을 전혀 안 하는 막장 자녀는 없습니다. 순종을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순종을 가려서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순종하고 싫은 것은 안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일에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자녀는 성장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욕구는 건강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 독립에 대한 욕구가 인간 속에 내재된 죄악된 본성과 결합하게 될 때입니다. 이때 자녀는 아무에게도 간섭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살고자 하게 됩니다. 순종은커녕 청개구리처럼 부모님의 말씀에 자꾸만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사는 게 좋을 것 같지만 그러나 알고 보면 사실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생각에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서도 잘 될 줄 알았는데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도 먹지 못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모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제어할 수 있도록 우리 곁에 두신 하나님의 안전장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자녀는 아직까지 인생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지혜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들이 걸어 왔던 길을 이미 다 거쳐 왔습니다. 부모에게는 자녀에게 없는 경험이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의 경험과 축적된 지혜 속에서 최선을 다해 자녀에게 무엇이 유익이 되고 무엇이 해가 될지를 권면합니다. 때로는 그 권면이 부모 자신의 한계 때문에 그릇된 방향을 제시해 줄때도 있지만 그 동기 자체는 항상 사랑에 기초해 있다. 예수님도 악한 자라 할지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준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부모의 권면을 존중하고 거기에 순종해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은 결국 자기를 위한 길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다른 계명들과 달리 오직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만 이 땅에서 네 날이 길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녀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사도 바울이 부모에게 권면을 하면서 어머니는 언급하지 않고 아버지를 콕 집어서 권면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부모 중에 가정에서 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동안 인생 소감을 많이 들어봤는데 아버지 문제가 대부분이었지 어머니 문제는 거의 없었습니다. 아버지들의 문제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왜 아버지가 자녀들을 노엽게 만들겠습니까? 아버지가 자녀를 권위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이해하거나 설득시키기 보다는 권위를 내세우며 무조건 하라고 윽박지르기를 잘합니다. 또한 아버지는 자녀가 아버지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잘 참지 못합니다. 그럴 때 감정이 폭발하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는 자기 자녀에 대한 기대 수준이 대단히 높습니다. 자기 자녀는 공부도 잘하고 악기도 잘하고 예의 바르고 대인 관계도 원만하고 기도도 잘하고 소감도 잘 쓰고 믿음도 좋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현실의 자녀는 내 기대를 자꾸 배반합니다. 그러니 자꾸만 쉬지 않고 자녀들에게 잔소리를 합니다. 엄마 친구 아들이나 엄마 친구 딸을 들먹이면서 걔는 하는데 왜 너는 못하냐고 다그칩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사람은 비교 당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부모가 이렇게 자녀를 노엽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면 자녀는 그 분노를 부모에게 돌려 복수하려고 들게 됩니다. 자녀는 자기 삶을 스스로 망쳐 버려서 부모에게 복수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밥을 안 먹겠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공부를 안 하겠다. 신앙생활도 안 하겠다’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또 권위적이고 감정적인 부모 아래서 자녀는 쉽게 낙담하게 됩니다. 낙담한다는 말은 주눅이 든다는 말입니다.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너는 그것 밖에 못하냐? 좀 제대로 해 봐라.” 이런 말을 계속 들은 자녀들은 기가 죽습니다. 방어적이 됩니다. 의욕을 상실하고 매사에 소극적이 됩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더 못하게 되고 또 다시 부모의 핀잔을 듣게 되는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부모는 자녀를 낙담시키는 것이 아니라 격려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그치기보다는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끝까지 믿어 주면서 오래 참아 주고 최악의 순간에도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전 경북대 총장이었던 박찬석 교수는 아버지에 대한 남다른 추억이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전교 68명 중 68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 창피한 나머지 성적표의 68을 지우고 1자로 고쳐가지고 집에 들고 왔습니다. 이를 본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며 돼지를 잡고 동네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는 또다시 가짜 성적표를 만들 자신이 없어서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습니다. 결국 유학까지 갔다 와서 경북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33년이 지난 후에 아버지에게 어릴 적 성적표를 조작했던 일을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쉿! 조용히 해라. 네 아들이 듣겠다. 알고 있었다.’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다 알면서도 속아 준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아버지가 마구 분노를 발하였다면 오늘 대학총장이 된 그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후대에는 아버지 문제가 인생 문제가 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찬석 교수님의 이야기처럼 우리의 2세들이 30년 후에 ‘아버지 덕분에 오늘 제가 있습니다. 저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셋째로 종과 상전에 대한 권면입니다. 3장 22절부터 4장 1절까지는 종과 상전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종에게는 노예근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인이 볼 때는 열심히 일하는 척 하지만 보지 않을 때는 대충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 노예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주인이 상과 벌을 내리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꾀를 내어 주인 몰래 게으름을 피워서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다 보셨기 때문에 책망하실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했지만 주인이 알아주지 않아서 섭섭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다 보셨기 때문에 상을 주실 것입니다. 반면 상전은 상전이라는 특권 의식에 사로 잡혀서 자기 마음대로 종들을 부려 먹기 쉽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인 상전들은 의와 공평으로 종들을 대우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상전의 권세는 상전 위에 계신 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전이 위임 받은 그 권세를 남용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상전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를 바란다면 자기도 의와 공평으로 종들을 다스려야 마땅합니다. 

지금은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종도 없고 상전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얼핏 보면 지금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 같지만 지금도 그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어딜 가나 상하 관계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상사 눈치나 보면서 적당히 대충 대충 일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사와 동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부하 직원들을 자기 멋대로 대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부하 직원들에게 누군가 전도라도 할라치면 이가 갈리는 그 상사 생각이 나서 전도의 문이 막히고 말 것입니다. 반면에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열심히 일을 하고 부하들을 사랑하고 의와 공평함으로 대하면 어딜 가나 예수 믿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구나 하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상급과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임의 제자 양성 목표인 영향력 있는 평신도 목자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이상에서 부부 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 상사와 부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존재의 유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세에 살았던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알아나가고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우리가 이 세상 속에 있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이해해서 알아나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 아버지는 말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어머니는 남자처럼 성격이 괄괄하신 분이셨습니다. 또 남자 삼형제의 장남으로 컸습니다. 그래서 저는 친밀함이란 단어를 머리로는 이해를 했는데 실제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딸만 셋을 낳았습니다. 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경쟁하는 여자 네 명에게 둘러싸여서 저는 친밀함이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제 기도가 확 달라졌습니다. 10분 이상 하기 힘들던 기도가 두 시간도 길지 않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가정 생활이 저를 하나님과의 깊고도 친밀한 교제로 이끌어준 셈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는 신랑이고 교회는 그의 신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통해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자녀와 부모 관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 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없이 내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맺어 보십시오. 그 관계는 평행선을 그리다가 결국 파멸로 치닫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관계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맺게 되면 거기에는 교제에서 오는 참된 행복과 기쁨이 꽃피게 될 것입니다. 관계 속에서 경건을 훈련하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가정과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3.8.18,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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