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로마서

너희도 서로 받으라

이창무 2023. 2. 2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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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새봄맞이 특강 / 이창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말씀 / 로마서 15:1-13
요절 / 로마서 1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1963년에 했던 연설의 제목입니다. 그는 연설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꿈, 흑인 소년소녀들이 백인 소년소녀들과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꿈을 말했습니다. 이 연설이 유명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듣는 사람들이 그의 꿈을 공감했고 같은 꿈을 꾸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는 로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꿈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꿈 속에는 지금 우리가 함께 이루어 가야 할 교회의 모습에 대한 청사진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의 꿈이 우리 모두의 꿈이 되기를, 그래서 바울의 기도가 우리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로마 교회의 상황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로마 교회는 명절에 예루살렘에 방문했다가 오순절 성령 강림 역사를 체험하고 로마로 돌아간 디아스포라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래서 설립 초기에는 유대인의 색채가 매우 짙은 교회었습니다. 이후로 복음을 듣고 영접한 이방인들이 교회에 조금씩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내에 유대교 신자와 기독교 신자들의 갈등이 심해지자 글라우디오 황제는 유대인들을 추방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로마 교회에는 이방인 출신 신자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이 교회의 다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고 로마 교회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돌아온 시점에 이 로마서가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장인 로마서 14장을 보면 특히 음식을 먹는 것과 절기를 지키는 것에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주일 예배 후 요회 식사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방인 출신 신자들은 맛있게 삼겹살 파티를 하자고 했습니다. 반면 유대인 출신 신자들은 고개를 저으며 우리는 채소만 먹겠다고 고집했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습니다. 유대인 출신 신자들은 유월절 행사를 열려고 하는데,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 시대가 어느 때인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전부 반대를 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뿔이 단단히 났습니다. 이렇게 부딪힐 때마다 불만들이 쌓여갔습니다. 나중에는 “유대인! 너는 너무 고리타분하다. 이방인! 너는 근본이 없다”하며 대놓고 서로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사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들도 얼마나 다른 지 모릅니다. 저희 가족이 다 함께 가끔 외식을 하려고 하면 메뉴 정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누구는 중식, 누구는 한식, 누구는 양식을 고집합니다. 결론은 ‘그냥 뷔페로 가자’일 때가 많습니다. 하물며 사로 다른 삶의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오죽하겠습니까? 각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경험이 다 다르고, 삶의 습관도 다르고, 소중히 여기는 것도 다릅니다. 예를 들어 기성 세대는 관심을 있어 물어보고 알고자 하고 이를 공유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이런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 합니다. 우리 교회는 도무지 프라이버시가 없다며 불평을 합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영역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날 지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짜증이 나고 서로 관계 맺기를 힘들어 하고 모임 참석이 괴롭다고 느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어떻게 권면합니까? 보기 싫으면 얼굴 보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했을까요? 차라리 이방인 교회, 유대인 교회로 딱 갈라서라고 했을까요?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1,2)”

첫째,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 권면합니다. 여기서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는 누구일까요? 믿음이 강한 자는 율법에 매이지 않고 복음 안에서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다수의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예수님을 만나 거듭났지만, 여전히 과거에 매여 율법과 전통을 따라 사는 소수의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상에서는 강자와 약자, 다수와 소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결합니까?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제압해 버립니다. 다수의 논리,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정반대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약점을 담당하라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그가 특별히 약하고 예민한 지점을 최대한 배려해 주라는 뜻입니다. 로마 교회의 상황에서라면 굳이 삼겹살 파티를 벌이지 말고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함께 즐겁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해 가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절기가 낯설지만 같이 참석해서 축하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한 쪽에서 먼저 관용을 베풀고 양보하고 배려할 때 약한 자의 마음이 열리고 공동체의 하나됨을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둘째,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이웃을 기쁘게 하기 힘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감당하려면 어느 정도 자신의 기쁨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내려놓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신 상대방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내 좋아하는 삼겹살을 포기하고 풀만 먹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나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들이 모아질 때 공동체 전체의 선이 이루어지고 덕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부분이 참 어렵습니다. “왜 맨날 내가 양보해야 해? 왜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해야 해?” 하면서 자칫 피해의식, 손해의식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힘써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는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3절 후반부는 시편 69편을 인용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깊은 시기심이 약점으로 작용하여 인생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와 교만 때문에 공생애 내내 근거 없는 중상모략에 시달리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도 상대방과 이런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미워하기보다, 선한 마음을 품고 그들을 용서하였습니다. 다윗에게는 동굴에서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번이나 있었으나, 그는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고 칼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비방한 자들을 향한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과거에 내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고 해서 무조건 멀리하고 배척하는 것은 이 세상의 넓은 길입니다. 우리가 따를 길은 다윗이 가고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 곧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는 좁은 길입니다.

이 세상에는 조기축구회부터 시작해서 동창회, 동호회 등등 여러 형태의 모임이 있습니다. 이런 모임 대부분은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서로 생각이 같고 배경이 같고 관심이나 좋아하는 것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마음에 안 맞으면 언제든지 헤어지고,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찾아 갈아타면 그만입니다. 이런 모임이 재미있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내 인격이 성숙해지거나 내면이 깊어지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출신과 배경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모이게 된 곳이 교회입니다. 어떤 경우는 서로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자연스럽게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 인간 관계 속에서 상처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그 중에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어울려 다니면 될까요? 그런데 이것은 사교 모임이나 동아리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나와 너무 다른 사람, 심지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그런 교회를 지향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엎치락뒤치락하며 한 사람을 품기 위해 씨름하는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배우고 우리의 성품이 변하고 인격과 믿음이 성숙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속한 요회나 팀에서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무 힘들 때는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얼마든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거리두기를 지나치게 고집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갈등을 회피한 대가로 아무런 성장도 성숙도 이루지 못한 영적인 어린 아이로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론 힘들어도 도전할 때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공동체를 통해 예수님을 배우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무엇을 통해 도와 주실까요?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4)”

바로 성경입니다. 그리스도와 다윗 이야기, 그 외 믿음의 조상들이 상대방의 약점을 감당하며 믿음으로 성숙하게 대처한 이야기들을 들을 때 우리는 인내할 힘을 얻게 되고 성경이 주는 위로를 받게 됩니다. 2023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위로를 기대하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힘과 위로를 얻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절과 6절은 바울의 기도문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문을 통해 바울이 로마 교회를 향해 가졌던 꿈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5,6)”

바울은 하나님께서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의 서로 뜻이 같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모든 사람이 다 똑 같은 생각을 하기를 기대했다고 이해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그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고 바울이 원하는 바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간구하는 연합과 일치는 획일화가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일’에 있어서 연합과 일치였습니다. 아무리 서로 다르다고 해도 성도라면 누구나 다 예수님을 본받는 일을 목표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라는 점에서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최종적인 목표는 연합 그 자체가 아닙니다. 최종 목표는 연합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만약 믿는 사람들끼리 맨날 언쟁하고 싸우고 분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신자들은 ‘교회가 왜 저래?’ 하면서 손가락질을 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힘이 쭉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 거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명예가 실추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반대로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있는데 서로 마음이 하나가 되고 한 목소리로 힘차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하냐며 놀라워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다양성 가운데 연합과 일치를 이룬 교회야말로 다양한 음색의 악기들이 어울려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주는 교향곡처럼 이 세상에 큰 울림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7)”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한 사도 바울의 처방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 받으라는 말은 밀쳐내거나 거부하지 말고 영접하고 수용하라는 말입니다. 나와 다른 부분이 있더라도 연약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서로 두 팔을 벌려 환영하고 그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벽한 분이시지만 죄 많은 우리를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고 일방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강하신 분이시지만 한없이 연약한 우리의 약점을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라사 광인에서 니고데모까지,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에서 유대인의 서기관까지, 십자가 강도에서 왕의 신하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대인,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다 품고 영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까칠하고 고약하고 내면이 병든 나를 받아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받아 주셨기 때문에 그 넉넉한 품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가 치유되고, 깊은 인생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우리를 받으심으로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시상식에 나가서 트로피를 번쩍 들어올리며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연상되시나요? 우리는 이처럼 무엇을 성취하고 업적을 이루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자 생활도 많은 양을 치고 수적인 성장이 있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이런 것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우리가 서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동역자들을 서로 영접하고 존경하고 인정하고 세워주는 것 그 자체로 위대한 일,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요회에 양이 별로 없습니다. 양이 없어서 요회 모임 할 때 신이 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젊은 사람들이 러너스로 빠져나가 주로 가정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요회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가, 요회 모임이 여전히 중요한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 양이 있든 없든 요회에는 아주 중요한 역할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나온 대로 우리가 서로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 해결되지 않은 깊은 인생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보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받아 주시는 은혜를 체험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를 어디서 누리고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전체 모임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회나 팀과 같은 소그룹 공동체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요회에 새 양이 없어도 요회 동역자들의 고민과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를 따뜻하게 환대해 주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회가 삶을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 섬김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 자연스럽게 요회를 통해 영혼이 구원받고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요회 모임이 서로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요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구체적으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8,9)”

유대인에 대해서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나타내시려고 예수님은 유대인을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어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고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낮아지시고 섬기는 삶을 사신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은 인간적으로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섬김 덕분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곳에 모여 함께 예배하고 식사하고 교제를 나누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10절부터 12절까지 인용된 말씀을 통해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바요 목표였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열방이 예수 그리스도로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참되신 한 분 하나님 앞에 찬송 드리며 예배하는 것, 민족과 나라, 계층과 계급으로 막힌 담이 무너지고 사랑과 섬김의 원리로 세워지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울의 기도이며 바울의 소망이며 바울의 꿈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이며 소망입니다. 현재 우리는 무엇을 꿈꾸며 소망하고 있습니까? 혹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서 공동체에 대한 기대를 아예 접은 것은 아닐까요? 나에게 그런 공동체를 이룰 역량이 없음을 깨닫고 이미 포기해 버렸나요? 다시 새로운 꿈을 꾸기엔 너무 늙어 버렸나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은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령을 공포한 지 딱 백 년이 지난 후에 행해진 연설입니다. 흑인에게 자유가 선포된 지 백 년이 지났지만 현실은 여전히 차별 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킹 목사는 이런 현실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흑인들의 복수가 이루어진 세상이 아닌 백인과 흑인 모두 평등하게 서로 공존하며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우리도 현실에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도 잘 안 변하고 현실도 잘 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꿈까지 버리면 곤란합니다. 꿈이 없으면 소망도 없습니다. 꿈이 없으면 기도가 절실해지지 않습니다. BBF부터 70대까지 모든 세대가 어우러져 하나 되는 교회, 나이를 뛰어넘어 서로 친구가 되는 교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진솔한 교제를 나누는 교회를 꿈꾸어 봅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영혼들의 피난처인 요회, 섬김과 사랑으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요회, 영혼 구원 역사가 일어나는 요회를 꿈꾸어 봅니다. 대학생이든 아니든, 다니는 학교가 어디든, 2세 출신이든 아니든 외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예수님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돌보는 러너스를 꿈꾸어 봅니다.

우리는 3월 셋째 주부터 새로운 요회와 팀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3년 전 요회 개편을 했지만 거의 대부분 시간을 코로나와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어떻게 하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정말 애 많이 쓰셨습니다. 저는 이번 요회 개편을 ‘요회 2.0’이라고 칭하고 싶습니다. 지난 3년 간 요회 1.0 시기에 비해 이번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꿈을 향해 좀 더 업그레이드한 요회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심기일전하기 위해 요회라는 명칭에 대한 새 이름도 공모를 시작했습니다.

꿈을 꾸지만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한 번 받아주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계속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한 두 사람을 받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여러 사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기에 그분의 능력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마지막 기도는 이제 우리의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꿈을 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꿈을 위해 서로를 받아줄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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