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하나님의 구원 내러티브의 구현 예배학’
간혹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때가 있다. “지난 주 예배 때 설교 본문이 어디였나요? 지난 주 예배는 어땠나요?” 이 질문이 나를 곤혹스럽게 하기도 한다. 분명히 예배가 좋았다는 느낌과 여운은 남아 있다. 그러나 정작 설교 본문이 무엇이었는지 예배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예배에 집중하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이 질문에 대해 로버트 웨버의 ‘하나님의 구원 내러티브의 구현 예배학’이라는 책이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구원 내러티브의 구현-예배학은 로버트 웨버가 췌장암으로 2007년 소천하기 직전에 쓰여진 마지막 책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저자의 유언과도 같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의 원제목은 Ancient-Future Worship – Proclaiming and Enacting God’s Narrative 이다. 이 책은 저자가 1999년부터 Ancient-Future 시리즈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다. Ancient-Future에서 Ancient는 고대 교회, 우리가 흔히 초대 교회라고 부르는 시대를 말한다. 저자는 이 초대 교회 시기를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시대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초대 교회가 돌아가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로 간주하고 있는 듯 하다. 이와 같은 관점은 이 책에서도 역시 예배와 관련하여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재발견하기’라는 제목으로 예배의 본질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저자는 예배의 본질을 책의 제목에서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의 구원 내러티브의 구현으로 보고 있다. 2부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예배에 적용하기’라는 제목으로 예배의 갱신 방안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저자는 예배 전반과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들인 말씀, 성만찬, 기도에서 하나님의 구원 내러티브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지를 제안하고 있다. 이 책의 구성 중 특이한 부분은 결론 부분이 다른 책과 다르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책들은 본론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식으로 결론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 책에서는 저자가 고대-미래 예배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게 된 과정과 배경을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책을 읽을 때 이 결론 부분을 먼저 읽은 후에 본론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더 쉽게 이해가 된다. 저자 서문에서도 이렇게 읽도록 권하고 있다.
저자가 결론 부분을 먼저 읽어보도록 권면한 것은 확실하게 필요한 일이었다. 결론 부분 속에 이 책 전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키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대 교회 시대가 복음의 핵심,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 그리고 성경적인 가르침을 바르게 전달하고 있던 시대로 보고 있다. 이 전달자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사도들이며 속사도들과 교부들이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인물들로 이레니우스와 히폴리투스 등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 교부 전통은 동방 교회에서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계승되었다고 믿고 있다. 여기서 저자의 숨은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즉 저자는 서방 교회가 예배의 본질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다고 보고 있다. 그 원인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되면서 동방 교회 쪽에서는 고대 교회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반면 서방 교회에서 그 전통을 상당수 상실하였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따라서 저자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동방 교회와 고대 교회의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단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는 지향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고대 교회의 전통이란 말은 단지 형식이나 스타일과 같은 외면적인 부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여기서 서방 교회란 로마 카톨릭 교회뿐 아니라 개신교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다. 서방 교회에서는 성경의 거대 담론을 ‘창조-죄악-구속’의 이야기로 이해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이룬 대속 사역이 될 수 밖에 없다. 대속 사역으로 인류의 죄악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해는 구교와 신교를 망라하여 신학의 근저를 형성하고 있는 어거스틴의 신학으로부터 발원한 것이며 중세 때 안셀무스 등에 의해 더욱 체계화되고 발전되었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의 전통은 이와 다르다. 동방 교회에서는 성경의 구원 내러티브를 ‘창조-성육신-재창조’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이해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은 부활이다. 부활은 이 세상의 재창조를 확증하고 보증하는 우주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해의 차이가 신앙의 범위와 색깔을 결정짓는 과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서방 교회에서는 대개 개인의 회심과 경건이라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신앙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면, 저자에 따르면 동방 교회에서는 만유의 회복이라는 폭넓은 비전과 공동체성을 지켜 나갔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방 교회 전통의 예배가 상실된 부분을 동방 교회 혹은 고대 교회의 예배에서 발견하게 된다. ‘창조-성육신-재창조’로 이어지는 구원의 내러티브가 예배 곳곳에 깊숙히 스며들어지 못하다는 것, 예배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파편화되어 있다는 것, 예배 가운데 영광 받으셔야 할 그리스도가 너무 어두운 색깔을 띠고 있다는 것 등이 그가 서방 교회 전통의 예배에서 발견한 문제점들이다. 여기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구원의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예배를 재구성하자는 것, 예배의 보편성과 공동체성을 회복하자는 것, 예배의 중심에 승리자 그리스도를 놓이게 하자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는 1부의 첫번째 장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야기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창조-죄악-구속’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창조-성육신-재창조’의 맥락에서 보고 있다. 저자는 먼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언급하면서 오순절 베드로 사도의 설교가 이러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해 나가고 있는지를 살핀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상징적인 장소 네 곳을 말하는데 에덴 동산, 사막, 겟세마네 동산, 그리고 낙원이다. 이 곳들은 각각 친교, 타락과 회복의 언약, 그리스도, 미래를 보여주는 장소들이다. 이 중에서 특별히 겟세마네 동산이 중요한 곳이다. 왜냐하면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로부터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행하신 사역을 저자는 성육신, 창조와 구속, 하나님과 인간 간의 연합으로 보고 있다. 눈 여겨 볼 대목은 창조와 구속이다. 저자는 창조와 구속을 하나로 통일해서 볼 것을 권한다. 왜냐하면 구속이란 곳 재창조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장에서 저자는 먼저 현재의 예배를 조각난 예배로 규정한다. 조각난 예배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서 어느 특정 부분만 강조되어 드러나는 예배를 말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고르게 영광이 돌려져야 하는데 만약 어떤 한 위만 계속해서 지나치게 강조된다면 그 예배는 조각난 예배가 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저자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예배를 제시한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의 이야기들이 생생한 실제로 체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배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기억하는 예배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올바른 순종의 삶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으로 제시되고 있다. 예배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크게 낭송과 재현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해 왔다. 낭송이란 말로 기억하는 행위인데 설교, 신조의 고백, 찬송 등이 여기에 속한다. 재현이란 가시적인 드라마를 통해 기억하는 행위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성만찬이며, 각종 절기 등도 여기에 속한다.
3장 ‘예배는 미래를 예상한다’에서 저자는 예배의 종말론적 측면을 조망한다. 이 말은 예배 중 설교 시간에 종말론을 주제로 설교한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모든 요소들에서 미래에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이야기들을 현재 이곳에서 생생하게 경험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미래는 앞서 ‘창조-성육신-재창조’의 패러다임 가운데 마지막 재창조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미래에 하실 일은 세상을 재창조하실 것이며 예배는 그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예배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 나간다. 이러한 비전을 예배 속에서는 안식일 제도 가운데, 성전 공간의 구성 가운데, 그리고 거룩한 삶 가운데서 드러나게 된다.
4장에서는 하나님의 충만한 구원 이야기가 오늘 우리들의 예배에서 사라진 이유를 탐색해 본다. 저자는 초대 교회와 동방 교회의 예배 속에는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에 대한 이야기가 예배를 지배했다고 본다. 그러나 중세 시대 서방 교회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초점이 전체 이야기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만 지나치게 편중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 결과 창조와 구속이 분리되어 예배의 모습 속에서 후자만 비대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예배의 초점이 개인의 내면적 영역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근대에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예배마저도 건조한 주지주의적 예배와 체험과 감정을 중시하는 열광주의적인 예배로 양분화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20세기 복음주의 권의 예배는 부흥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 결과 예배에서 회심과 중생 체험을 강조하게 된다. 부흥 운동의 결과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한국 교회의 예배는 더욱 더 부흥 운동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여겨진다.
5장에에서는 어떻게 예배를 하나님의 과거와 미래의 이야기가 충만한 예배로 변혁시킬 것인가에 대해 논한다. 먼저 저자는 현대의 예배를 예배의 위기라고 단정한다. 그 이유는 예배의 내용이 지나치게 개인화되었다는 점, 예배의 구조에서 기억과 예상이란 이중 구조의 균형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 예배의 스타일이 프로그램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저자는 이 위기를 타개할 해결책으로 고대 예배를 알고 그 고대 예배의 내용과 구조를 현대에 다시 되살려내야 한다고 제시한다. 고대 예배는 현대 예배와 달리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선포하고 구현했다고 말한다. 고대 예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 중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은 주로 설교를 중심으로 하는 말씀을 통해 구현되었으며, 미래에 대한 예상은 주로 성만찬 예전을 통해 구현되었다. 고대 예배를 현대의 예배에 적용하여 미래 예배로 나아가기 위해 저자는 고대 예배의 순서를 회복하라고 권면한다. 예배 순서의 초점을 회중에게 두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 두면서 말씀과 성찬이라는 구조를 균형 있게 세워야 한다. 또한 예배의 내용을 자기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이 무엇인가로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고대 예배의 열정적인 진리 추구 자세를 배워서 현대의 프로그램 중심적인 예배를 갱신하기를 제안한다.
6장에서는 예배의 두 구조 중 먼저 말씀 예배의 변혁 방안을 논한다. 저자는 오늘의 설교가 위기를 맞이 했다고 본다. 저자는 그 원인으로서 역사 비평, 문학 비평 등을 통한 성경 독법이 구원 이야기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으며, 이에 맞서 체험을 지향하는 성경 독법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말씀을 너무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큰 폐해를 낳기도 했다고 본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저자는 초대 교회에서 어떻게 성경을 읽었는가를 보라고 말한다. 사도들과 교부들은 성경 어떤 본문이든지 그 본문은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이해하고 해석하였다. 또한 그들은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창조-성육신-재창조라는 구원 이야기의 중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믿었다. 오늘날 설교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런 초대 교회 방식의 성경 읽기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이에 따라 성경을 상호 관계적으로 읽고 설교하라, 성경을 열정적으로 읽으라, 성경을 은유의 관점에서 읽으라, 성경이 우리를 읽어 내도록 하라는 구체적인 지침을 제안한다. 이렇게 할 때 말씀에 목마른 현대인들이 생생한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7장은 성만찬에 대해 논하는데 저자는 이번에도 역시 성만찬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로 시작한다. 성만찬이 위기에 빠진 원인으로 합리주의의 영향력과 초자연적 세계관을 거부하려는 현대적 세계관의 영향으로 보았다. 이그나티우스나 순교자 저스틴과 같은 교부들의 문헌을 연구해 보면 현실 세계에 대한 초자연적인 전망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찬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변화시키는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다. 성만찬의 빵과 음료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 전체를 상징하며,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 그리스도의 대속, 사단 권세에 대한 승리, 온 세상의 구원, 하나님의 기억하심이라는 폭 넓은 메시지를 가시적으로 대표한다. 우리가 성만찬 속에서 이런 풍부한 의미를 발견하고 흡수하려면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적인 세계관을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세계에 대한 연결 고리를 회복해야 한다. 이 책에서의 저자의 성만찬에 대한 입장은 ‘실제적인 임재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마 카톨릭은 널리 알려진 대로 화체설을 주장했고,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빵과 음료 안에 속에 주변에 임재한다는 공재설을 주장했다.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쯔빙글리는 상징설을 취했다. 실제적인 임재라는 말은 성만찬의 식탁 가운데 하나님과 인간이 신비로운 연합을 이룬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저자의 요지는 쯔빙글리의 상징설은 분명하게 거부하면서 성만찬의 신비와 초자연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본론의 마지막 8장에서 저자는 기도 역시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기도란 단지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말로 아뢰는 기도 뿐만 아니라 곡조 있는 기도라고 불려지기도 하는 찬송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기도가 위기에 처하게 된 원인 역시 앞에서 설교나 성만찬의 위기에서 언급했던 원인들과 다르지 않다. 즉 기도가 구원 이야기에서 유리되었다는 점과 프로그램으로 전락한 예배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 역시 고대 교회의 기도를 연구하고 적용함으로써 이뤄진다. 고대 예배의 기도문들을 읽어 보면 예배의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 대한 감사와 찬송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기도를 하고 자기가 부르고 싶은 노래로 찬송하는 현대 예배와는 대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저자는 기도를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역사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기도가 우리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어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신자의 묵상이 구원 이야기 안에서 기도의 언어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기도할 때 기도는 신자의 삶을 변화시키며 능력을 공급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먼저 저자가 예배를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구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이 매우 새로웠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는 예배 중의 특정한 요소 즉 설교에만 관련된 것이라고 이해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예배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말씀 뿐 아니라 기도, 찬송, 성만찬의 예식, 예배 순서, 예배 공간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재현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예배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로 깊은 관련을 맺는다면 회중은 설교 뿐 아니라 예배에 참여하는 것 그 자체로서 복음과 성경의 내러티브를 풍부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예배 전체가 통일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각 구성 요소들이 파편화되는 현상이 생기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예배라면 예배가 형식화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의미가 충만한 예배가 되리라 믿는다. 저자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나로 하여금 예배를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시각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이 책은 나에게 잊혀진 고대 예배를 재발견하게 해 주었다. 지금까지 나의 예배의 모습에 대한 관심은 주로 종교 개혁 시대의 예배, 그리고 현대의 몇몇 실험적인 예배들에 머물러 있었다. 고대 예배에는 관심이 없었고 설령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고대 교회의 예배에 대한 자료를 접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고대 예배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사상과 원칙에 의해서 드려졌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 점이 큰 수확이었다. 고대 예배가 단지 먼 과거의 예배가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예배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셋째로 이 책은 예배의 중심에 승리자 그리스도를 좀 더 부각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서 위로와 평안과 감동을 구한다. 이런 사람들의 기호를 따라가다 보면 그 예배에서 그리스도는 내 죄를 짊어 지고 죽으신 대속의 그리스도, 나의 상처와 아픔을 깊이 이해하시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로 부각될 수 밖에 없다. 이런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틀린 것은 결코 아니다.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우리가 묵상하고 더 깊이 발견해야 할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저자가 이 책에서 지적한 대로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이런 부분만을 부각시키려고 하다가 우리 예배에서는 승리자 그리스도의 모습이 실종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 그리스도는 너무 작고 개인화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말이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나 개인 뿐 아니라 만유를 회복시키시고 창조 세계를 갱신시키실 승리자 그리스도에 대한 송영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예배 중에 영광송이 너무 간헐적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예배가 결여하고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잘 지적해 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의문점이나 아쉬운 점도 몇 가지 느껴졌다. 첫째는 저자가 주장하는 바대로 정말 고대 예배가 과연 가장 바람직한 예배 인가? 하는 점이었다. 저자는 고대 예배는 거의 아무런 흠이 없고 완벽한 이상적인 예배인 것처럼 이 책에서 묘사되고 있다. 예배에 대한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을 고대 예배와 일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고대 예배 역시 교회사의 한 시대의 예배로서 그 시대가 가진 한계와 진리의 왜곡이 없을 수는 없지 않을까? 바울 서신을 보면 사도 시대에도 예배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변혁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예를 들어 고린도 교회의 무질서한 예배) 그렇다면 교부 시대의 예배 역시 그 안에 잘못된 부분들이 충분히 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데 저자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동방 교회에 대한 점수가 너무 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동방 교회의 예배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번 학기 예배학 강의를 통해서 학우들의 동방 교회 예배 탐방기를 들으면서 대략적인 감을 얻을 수는 있었다. 내가 본 동방 교회 예배는 한 마디로 말해서 성직자 그들만의 잔치처럼 보여졌다. 저자의 말대로 동방 교회가 고대 예배의 예전을 잘 간직했다 하더라도 과연 그 예전들이 하나님의 구원 내러티브를 반영한 예전들이라는 것을 회중들이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예배 의식이 매우 복잡하고 상징들이 화려해서 오히려 회중들이 소외되고 있다고 느껴졌었다. 저자는 이런 점들을 간과하고 너무 동방 교회 예배와 신학을 높게만 평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셋째로는 책의 용어 선택에 있어서 몇몇 아쉬운 점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고대 교회라는 말과 초대 교회라는 말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책을 다 읽고 난 이후에도 이 두 가지가 같은 말인지 아니면 다른 실체를 지칭하고 있는 말인지 혼란스럽다. 같은 말이라면 한 가지 말로 통일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고 만약 다르다면 좀 더 엄격하게 구분해서 사용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원서를 본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미래에 대한 예상’이라는 표현이 걸림이 되었다. 이 말은 상당히 빈번히 등장하며 또한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은 표현이다. 그런데 예상이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 일이 일어날지 확실하게 알지 못할 때 과거의 경험적 자료를 기반으로 해서 일어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상황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행하실 구원 이야기에 대해 예상이란 표현을 계속 쓰고 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약속하신 일에 대해 예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좀 어색한 표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연 이것이 원저자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번역 과정에서 번역자가 그렇게 옮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서두에서 왜 예배가 기억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이 책의 결론에 따르면 그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 내러티브가 열정적으로 전달되지 않은 예배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현대 예배의 위기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드리는 예배에서 성찬이 너무 간헐적으로 드려지고 있다는 점, 예배 때 부르는 찬송이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감상적이라는 점, 예배가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충분히 담지 못하고 회심과 헌신이라는 측면에 지나치게 쏠려 있다는 점 등 변혁이 필요한 지점들을 있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끼게 되었다. 이런 점들을 개혁해 나가는 가운데 우리 예배가 요한 계시록에 묘사된 천상의 예배를 이 땅에서 구현하는 살아 있는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소망해 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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