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하나님의 그리스도

이창무 2017. 6. 11.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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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6 강


하나님의 그리스도


말씀 / 누가복음 9:18-27

요절 / 누가복음 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016년에 나온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에게 최고의 명대사로 손꼽는 대사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아가씨 역의 히데코가 하녀 숙희에게 하는 독백 중에 나오는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숙희"라는 대사입니다. 이후로 인터넷 상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주 대상으로 하는 다채로운 패러디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대사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구원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구원자를 잘못 만나면 내 인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진정한 구원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누가 진정한 우리의 구원자가 되는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온다는 것은 곧 중요한 일이 있으리라는 예고편과 같습니다. 기도를 마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얼마 전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에 이 질문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무리들이 가진 견해는 다양했습니다. 그렇지만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언급된 세 사람 모두 다 선지자이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무리들은 예수님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한 반쪽짜리 답변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이 정답을 말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누구보다 가까이서 예수님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까요? 20절 하반절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그리스도'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인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왕을 세울 때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란 일차적으로 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왕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리스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성취할 특별한 왕을 가리킵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에 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이 구원의 약속을 성취한 왕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바로 그 구원자시며 왕이시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위대한 선지자 중 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리들이 무엇을 상상했든 예수님은 그 이상의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실 분, 유일하신 구원자, 영원하신 왕 곧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흔히들 인류의 4대 성인 중 한 사람 혹은 기독교의 창시자로 알고 있습니다. 힌두도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를 가장 탁월한 윤리 교사로 여기고 산상수훈을 따라 살고자 했습니다. 이슬람교에서조차 예수를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알고 존경합니다. 안티 기독교인들조차 교회와 신자들을 비난할지언정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이 위대하고 탁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높게 평가한다고 해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서점가 인문학 코너에 가면 종종 이름 난 세계적인 석학이 역사적 예수(인간 예수)에 관해 이렇게 저렇게 나름대로 견해를 밝힌 책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읽어보면 그 날카로운 통찰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나도 여기에 동의를 해 주어야 지성인의 반열에 함께 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모르다면 가장 결정적인 부분을 놓친 것입니다. 사실상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우리들 중 많은 분들은 이미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유일하신 왕으로 믿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어릴 때부터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습니다. 하지만 정말 내 마음 속으로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자, 내가 일생 섬기고 순종해야할 왕이시다. '하는 고백은 아직 없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목자님이 내게 너무 잘해 주셔서 성경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하고 여전히 주저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에 오면 다들 믿는데 나만 못 믿고 있는 것 같아 괴롭고 힘들 것입니다.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님이나 목자님도 괴롭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무리가 모르던 것을 제자들만이 알았습니다. 우리도 무리가 되지 말고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리는 아웃사이더이고 제자는 인사이더입니다. 계속 무리처럼 밖에서 빙빙 돌기만 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고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권위와 능력을 경험하게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님께서 우리들 마음에 역사하시고 감동을 주셔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봄 학기 누가복음 말씀을 통해서 또한 이번 여름수양회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이런 성령님의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핵심을 찌르는 올바른 답변을 했습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은 즉시 널리 전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21절에 보십시오. 예수님께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왜 이런 경고를 하셨을까요? 이는 제자들이 아직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들에 관해 큰 오해와 착각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해야만 할 일들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이 'MUST' 반드시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할 일들이라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때 화들짝 놀란 베드로가 그런 말씀 하지 마시라고 예수님을 책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당시 대다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메시아, 민족적 메시아,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대 민족은 기원전 586년 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된 독립 국가를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때도 로마 제국의 가혹한 식민 통치 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 얼마나 절실했겠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하면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여 로마 군대를 다 몰아내리라 기대했습니다. 그 후에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을 부자 나라, 강한 나라로 만들어 줄 그 날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고난 받고 버림 받고 죽임 당하는 그리스도라니요?' 어찌 보면 제자들이 패닉에 빠지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그리스도로 고백한 이때야말로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알아야만 할 때였습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가 먼저 고난 받고 죽임 당하고 그 후에 부활해야만 합니까? 이는 하나님은 예수님을 온 인류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할 구원자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단지 유대 민족의 문제, 정치 문제의 해결자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을 죽은 자(엡2:1)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인간들은 세상에서 온갖 형태의 악과 고난에 짓눌려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인간이 죽음 아래 지배를 당하게 되었습니까? 로마서 6장 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죄'라고 하면 도둑질이나 거짓말 같은 윤리적인 죄들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죄의 정의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뜻과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서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인간만의 제한된 자원으로 살아가려 하다 보니 세상은 치열한 생존 경쟁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정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악과 그로 인한 고난이 나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합니까? 우리가 감기가 걸리면 목이 따갑고, 콧물이 나며, 머리가 아픈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면 바이러스가 우리의 몸속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먹는 감기약은 엄밀히 말하면 치료약이 아닙니다. 감기약은 다만 증상을 완화시킬 뿐입니다. 감기의 원인인 바이러스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죽음의 증상들을 완화시키는 것에만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정치 문제, 경제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여깁니다. 위대한 통치자가 나타나서 이런 문제들을 일거에 다 해결하고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를 잘 하는 대통령이 나온다 하더라도 죽음의 증상을 완화시켜줄 수 있을지언정 죽음 그 자체를 해결해줄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원인인 죄 문제를 더더욱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죄와 죽음 문제에서 인간을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죄는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없어집니다. 죄 범한 사람이 스스로 죄의 대가를 지불하려 한다면 그의 운명은 멸망뿐입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해서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 받고 버림 받고 죽임 당하셔야만 하는 이유는 이렇게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의 저주를 받으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당연히 죄가 원인이 되었던 죽음도 해결이 됩니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삼일 만에 부활하셔야만 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내 눈에 보이는 시급한 현실 문제 해결자로서 그리스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온 인류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이분만이 그리스도로 칭함과 고백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구원자를 찾고 있습니까? 대통령이 나의 구원자입니까? 가난한 나를 부자가 되게 해 줄 사람입니까?나를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는 어떤 연예인입니까?아니면 나를 솔로 신세에서 건져 줄 남친이나 여친입니까? 저마다 자기가 생각하는 구원자의 모습이 각자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각자가 처한 현실 문제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에게 심각한 현실 문제를 바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그 누군가를 찾습니다. 환자가 지금 당장 열이 올라 괴로우니 열만 내리게 해 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증상 완화는 일시적인 생명 연장일 뿐입니다. 우리는 나를 죄와 죽음 문제로부터 해결해 줄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구원자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또한 죽음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죄 때문에 생긴 죽음의 증상들을 치유해 가고 계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마침내 그리스도는 다시 오셔서 이 땅에서 죽음을 완전히 몰아내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4:12). 아직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이 시간 그분을 나의 구원자, 나의 왕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신앙고백을 하셨던 분이라 할지라도 너무 현실 문제에 매여서 살다보니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시라는 고백이 희미해졌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도 이 시간 예수님을 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로 새롭게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 함께 고백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


지금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만 하는 그리스도이심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23절을 보십시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란 무엇입니까? 단순하게 말하면 자기 자신에게 'No'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No'한다고 해서 다 자기 부인은 아닙니다. 이런 자기 부인은 자칫 자기 비하나 자기학대로 흘러갈 소지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No'하는 이유는 예수님께 대하여 'Yes'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부인의 사례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잘 보였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이 기도에서처럼 고난의 잔을 거부하고 싶은 나에게 'No'하고 하나님의 뜻에 'Yes'하며 순종하는 것,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모든 고난이 다 자기 십자가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잘못해서 벌 받는 것은 자기 십자가가 아닙니다. 나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 겪는 힘든 일들이 다 자기 십자가는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치를 수밖에 없는 크고 작은 고난을 가리킵니다. 십자가는 사형 틀입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때 많은 이들이 사형 언도를 받고 순교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어느 곳에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십자가가 반드시 순교의 십자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께 대하여 'Yes'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크고 작은 대가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충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주어지는 주위 사람들의 따돌림과 냉대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손해나 아픔이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져야 할 자기 십자가입니다. 고난 받고 버림 받고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에게 이런 고난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제자의 삶에는 고난만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여기서 제 목숨은 각자가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부여받은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 생명은 죄로 인한 죽음의 저주 가운데 있는 생명입니다. 이 목숨을 아무리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에는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이렇게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25)? 그러나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생명을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고난을 통과한 자에게 영광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만큼 고난을 많이 겪은 사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외쳤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날마다 죽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부활하는 삶을 체험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자기가 죽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과도 연합하여 다시 살게 됩니다. 만약 이 역설의 진리를 거부하면 어떻게 됩니까? 2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사람,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며 그분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나도 너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을 극대화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시대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자기를 무한 긍정하고, 자기의 꿈을 이루고,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펴져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은 참으로 낯선 삶의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신을 돌아볼 때 정말 나를 힘들고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어렵고 힘든 사건이나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보다는 강한 자아와 자기에 대한 집착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중심이 되려고 하다가 관계를 망쳐버렸습니다. 부풀려지고 비대해진 자아가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자기가 죽고 자아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우리는 참된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죽는다고 자기가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오염되어 죽을 운명의 자기는 죽고, 그 자리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새로운 자기가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된 사람이 죄에 오염된 이 세상과 부대끼며 고난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전혀 놀랄 일도 회피할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은 내가 진정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인증이며 표식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우리가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참된 제자가 되어 장차 생명의 관을 받아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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