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고린도후서

주의 영광을 보매

이창무 2015. 11. 1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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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영광을 보매


말씀 :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예전에 제게 말씀을 가르쳐 주셨던 한 목자님에게 독특한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 습관이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는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양 마가 목자님이 인도하시는 소감 발표 모임에 들어갔다가 조금 놀란 적이 있습니다. 양 마가 목자님이 똑 같은 동작으로 머리를 넘기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짐작으로는 양 마가 목자님의 목자님이신 고 이 사무엘 선교사님도 똑같은 습관이 있으리라고 예상해 봅니다. 십중팔구 거의 확실할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따라 하다가 이런 습관이 생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도 그런 습관이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목자님을 존경하고 집중해서 계속 보다가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닮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주님을 보는 것과 닮아가는 것 사이의 관계에 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주목해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여기서 수건을 벗는다는 표현을 보면 누가 떠오르십니까? 바로 출애굽기 34장의 모세를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의 두 돌판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빛난 얼굴을 수건으로 덮고 있었습니다. 왜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을까요? 


13절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해석에 따르면 모세가 수건을 덮었던 이유는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가져 온 율법은 옛 언약에 속해 있었습니다. 옛 언약에 속한 영광도 참으로 엄청 나서 모세의 얼굴을 찬란하게 빛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영광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새 언약의 영광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이 옛 언약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그 빛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을 뵈오러 갈 때는 그 덮었던 수건을 벗고 나아갔습니다. 수건이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보는데 방해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다 바로 그 모세처럼 수건을 벗고 주의 영광을 보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 언약에 속한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제가 좀 아는 디지탈 카메라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디지탈 카메라 안에는 외부의 빛을 받아들여서 인식하는 이미지 센서가 있습니다. 예전 디지탈 카메라에는 이미지 센서 앞에 필터가 덮여 있었습니다. 이 필터의 역할은 강한 적외선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필터 때문에 사진이 조금 뿌옇게 나오는 것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나오는 디지탈 카메라는 이 필터를 제거해 버렸습니다. 기술 발전의 덕분에 적외선을 처리할 다른 방법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전에 비해 쨍하고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옛 언약에 속한 율법이라는 필터를 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영광을 보기는 보되 뿌옇게 흐릿하게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필터가 제거되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주의 영광을 쨍하고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 모세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었던 수건 없이 주의 영광을 보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혜와 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보매'에서 본다라는 동사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어에서 보다라는 말은 주목해서 보다 또는 지속적으로 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학창 시절 영어 단어 see 와 look 의 차이에 대해 배운 적이 있습니다. see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것이고 look은 주목해서 보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여기서도 보다라는 말이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목해서 지속적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보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기 쉽습니다. 한 번 봤다고 해서 별 일이 있겠어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별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목해서 보는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지속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무엇인가를 주목하게 되면 그것이 우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의 영광을 주목해서 지속적으로 보게 된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18절 하반절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주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의 변화입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 타락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형상을 보는 사람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됩니다. 


거룩과 사랑으로 대표하는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회복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회복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회복합니다. 더 나아가서 창조 세계에 대한 지배권까지 회복하게 됩니다. 점점 하나님을 닮아 갑니다. 


물론 이 변화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며 천천히 점진적으로 변화합니다. 우리 자신은 그 변화를 인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변화가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내가 내 자신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동안 이와 같은 변화는 분명히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 말할때 똑 같이 영광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앞의 영광과 뒤의 영광이 같은 뜻이 아닙니다. 앞의 영광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점점 더 거룩해 짐으로 얻게 되는 성화의 영광을 말합니다. 뒤의 영광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변화될 영화의 영광을 말합니다. 


신자의 삶을 요약하자면 수건을 벗고 주님의 영광을 봄으로서 시작되고 점점 더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다가 결국 주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18절을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말로 마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우리 각 사람에게 적용시키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주님의 영광에 눈을 뜨게 하시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시고 주님과 같이 변화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은 육의 세계에 속한 사람은 이해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에 자신을 열어 놓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현실이 되는 일입니다.


벌써 11월 중순입니다. 푸르렀던 나무는 울긋불긋 물들었고 낙엽은 길 위에 이불처럼 덮히고 있습니다. 곧 겨울이 옵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시계도 빠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46번째 생일을 맞았습니다. 세상에 마흔여섯이라니요! 정말 내일 모래면 오십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제는 생일 축하가 아니고 다들 생신을 축하한다고 해서 좀 서글펐습니다. 


겹겹이 쌓여가는 시간의 흐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큰 복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안타까움이 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나이 듦은 더욱 더 거룩해지고 영혼이 아름다워지며 영광에서 더 큰 영광으로 나아가는 복된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인간성이 메말라 가고 속물이 되어가는 사람에게 나이 듦은 안타깝고 슬픈 사건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양 마가 선교사님이 우리 센타에 오실 때 마다 끊임 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더 성장하고자 하시는 그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해 칠순이 되셨다고 하는데 제 주변에서 이런 칠십대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가끔씩 신문 지상에서 접하는 성추행 사건을 일으킨 할아버지들 이야기, 욕과 저주를 입에 달고 사는 할머니들 이야기, 욕심에 찌들어 죽을 때 갖고 갈 것도 아니면 끝까지 재물에 집착하는 분들의 모습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성화의 열매는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신자들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차이들이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소개시켜 드릴 분이 한 분 있습니다. 얼마 전 르네 지라르는 프랑스 출신의 인문학자가 96세를 일기로 소천하셨습니다. 이 분은 인본주의 사상이 팽배한 인문학계에서 거의 독보적으로 성경이 참되며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인류의 소망이 된다는 사실을 한곁같이 설파하시고 학계의 인정도 받은 분이십니다. 


이 분의 핵심 사상 중 하나가 인간은 자기가 본 것을 욕망하며 모방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만약 본 것이 없다면 욕망도 없고 모방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예를 들어 60평 아파트에 안 살아 본 사람은 60평 아파트를 욕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60평 아파트를 보고 나면 달라집니다. 아파트에 대한 욕망이 생기고 그 아파트를 가진 사람의 모든 것을 따라서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르네 지라르의 말처럼 보는 것과 욕망과 모방은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이를 적용해 보면 주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더 큰 주님의 영광을 사모하게 되고 주님의 형상을 본받고 닮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시작은 보는 것입니다. 보되 주목하여 지속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소원이 생기고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으면 소원도 사라지고 닮아갈 수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그 대상을 닮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모든 것은 보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고 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주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더 거룩해지고 긍휼과 자비가 풍성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보고 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돈을 닮아갈 것입니다. 결국 인간성은 잃어버리고 오직 더 많이를 외치는 탐욕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다면 그 분을 닮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처럼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보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그것이 우리 인생을 지배할 것입니다.


가끔 이런 질문과 상상을 던져 봅니다. "내가 더 나이가 든 후에 사람들이 내 얼굴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만약 사람들이 우리의 얼굴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과 그 영광을 보게 된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우리의 얼굴에서 탐욕과 추함만을 보게 된다면 그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내가 일생에 걸쳐 무엇을 주목하여 보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수요 찬양 기도회는 찬양과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주목하여 보는 시간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이후에도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미 주님의 영광을 맛본 우리가 일생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점점 더 하나님의 영광에 가까워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수건을 벗겨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고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하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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