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교회교육과 상담

유진 피터슨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법’

이창무 2015. 6. 3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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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피터슨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법’


리는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을 말하면서 부주의로 인해 많은 해를 일으킨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개선하기 위해 꺼내 먹도록 준비된 약상자가 아니다. ‘적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집어내고 선택하는 것이라고,  그 말씀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일이 우리의 주도하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으며, 우리를 빚고, 창조하며, 구속하고 있다.


성경을 영적 도구상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무엇인가를 집어내고 그것이 우리를 위해 일하게 할 수는 없다. 영적인 삶의 전 과정이 살아계시고,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시며, 그 말씀을 통해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고 계시는 말씀일 뿐 우리의 소유는 아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존중과 복종과 집중의 태도로 성경에 다가간다. 우리는 성경을 눈으로 보는 대신에 눈을 귀로 바꾸고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메시지를 듣는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그 말씀을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다.  그러나 말씀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충분히 주목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러한 어려움은 영적 생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은 소유의식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말씀이 우리를 소유하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말씀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성경책을 사는 단순한 행위 하나에도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미묘한 부작용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성경책을 샀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의 소유이며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문맹(文盲)이었을 때는 이러한 위험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경을 들을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누군가 성경 말씀을 암송했고 다른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다.  대부분의 성경 말씀은 기록되기 전에 구전(口傳)의 형태로 존재했다. 처음부터 기록된 형태로 출발했던  서신서의 경우에도, 수신 교회에서 한 사람이 낭독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는 식이었다.  하나의 단어를 듣는 것과 읽는 것은 다르다. 들을 때, 우리는 반응의 자세를 취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듣는 사람은 하나의 단어나 구를 취하고 분석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메시지를 놓쳐버릴 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전체적인 메시지를 우리에게 제시하며, 우리는 전인(全人)으로서 반응한다.  그러나 메시지가 기록되는 순간, 우리는 원하지 않으면 듣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전체적인 교육시스템은 성경을 잘못된 방식으로 읽도록 훈련시킨다.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정보를 위해, 하나의 교리를 끌어내기 위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을 읽도록 가르친다.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말하고 있으며, 우리를 사랑과 믿음의 관계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절 한 절을 붙잡고 연구하면서 그 의미를 찾아내느라 바쁘다. 이것은 무례한 짓이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이런 일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우리는 분석적, 형식적인 성경공부를 지금보다 많이 줄이고 우리 각자가 성경 앞에서 더 많이 기도할  필요가 있다. 말씀을 분석하는 대신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귀를 열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큰 과제 가운데 하나는 성경 앞에 귀를 여는 것이다. 중심 되는 방법이 바로 예배이다. 예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기본적인 모임 장소는 스터디룸이나 강의실이 아니다.

신자들이 듣는 훈련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의 이야기로 다가온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성경은 조직적인 교리나 도덕적인 교훈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게 아니다.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양식은 그 이야기가 말하는 진리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러한 내러티브 스타일은 우리가 읽는 방식을 구체화하려는 의도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역사를 통해, 시작과 끝과 줄거리가 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행위에  이끌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적인 삶이 번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형태로 성경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그분께로 이끌리면서  자신도 이야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여정과 훈련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이야기에 대한 감각”(story sense)을  기르지 못한다면 필연적으로 성경을 ‘적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구절이나 교리나 도덕을 취하여 우리의 한 부분을 고치려 할 것이다. 이것은 훌륭한 바리새인, 곧 성경을 읽는 데는 대가이지만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데는 형편없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탁월한 방법이다.  성경의 이중적 정황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 성경의 말씀이 선포되고 이스라엘과 그리스도께서 그 말씀을 들었던 정황과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정황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동일한 문장을 사용하여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의 성장 정도가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이 가정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있다.  아버지가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면, 두 살 난 아이와 열다섯 살 난 아이와 아내가 각기 다르게 듣는다.  이들은 모두 정확하게 듣는다. 이들은 모두 다르게 반응하지만 또한 적절하게 반응한다.  우리의 정황은 날마다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꾸준하게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이 부분에서 우리보다 뛰어났다.  그들은 학문의 방법보다는 들음의 방법으로 성경 앞에 나왔다.  성경 앞에서 공손하게 듣는 데 친숙했던 그들의 모습을 볼 때면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처럼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빈약한지 알게 된다.  우리는 성경에 복종하고 하나님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가르쳐달라고 내맡기는 대신에  성경을 ‘이용하고’ ‘적용하려는’ 유혹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다가갈 때 듣기의 태도를 가져야 하며, 의도는 좋지만 스스로 정한 우리의 목적을 위해 말씀을 사용하는게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사용하게 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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