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봄 수양회 개회 예배 / 이창무
우리의 가장 큰 자랑
말씀 / 예레미야 9:23-2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쯤 자랑거리를 품고 살아갑니다. 어떤 이는 “우리 아이가 이번에 대학에 붙었어요!”라며 자녀를 자랑하고, 목소리를 반 옥타브쯤 높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예전엔 나도 잘 나갔지”라며 과거의 성공이나 경력을 드러냅니다. 누군가는 새로 장만한 차나 집, 고급 시계를 보여주며 은근한 자랑을 하고, 또 다른 이는 “내가 이런 책도 읽고, 이런 곳도 다녀왔지. 지중해 노을이 정말 멋지더라고요”라며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줄 무언가를 붙들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학력일 수도 있고, 외모나 재산, 혹은 인간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는 네가 가진 것으로 증명되어야 해.” “네가 이룬 것으로 인정받아야 해.”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SNS에, 사람들 앞에,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문제는 우리가 자랑하는 그것이 결국 우리 존재의 중심이 되고,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자랑하며 사느냐’는 결국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느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자랑하라고 말씀하실까요? 우리가 진짜 붙들어야 할 자랑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자랑이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23)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흔히 자랑하는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지혜, 힘, 그리고 부입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첫째,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하나님은 먼저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판단력과 전략적 통찰력, 상황을 꿰뚫는 분석 능력 등을 의미합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학벌, 자격증, 높은 IQ, 정보력, 말솜씨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지금 지식과 정보가 곧 힘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아는 사람’, ‘똑똑한 사람’이 인정받고 리더가 되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지식을 축적하고, 지성을 과시하며, 스스로의 판단과 통찰에 자신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그 지혜가 하나님을 아는 데 이르게 하는가?” 아무리 머리가 좋고 말이 논리적이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그것은 공허한 지혜에 불과합니다. 머리는 풍성하지만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오히려 그 지혜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적 우월감은 영적 교만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55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지혜보다 크고 깊습니다. 우리가 진정 자랑해야 할 지혜는 세상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혜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따르는 영적 통찰이야말로 우리가 자랑할 참된 지혜입니다.
둘째, 힘을 자랑하지 말라
두 번째로 하나님은 “용사는 자신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용맹’은 단순한 무력이 아니라, 군사력, 정치적 권세, 신체적 강건함, 리더십과 영향력 등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모든 ‘힘’을 의미합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좋은 직장, 높은 지위, 영향력 있는 위치, 건강한 몸, 카리스마 있는 말과 행동 등이 포함됩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강해야 살아남는다.” “남들보다 앞서야 의미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공을 추구하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 애쓰며, 사람들에게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힘이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사람의 힘은 결코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탄탄하던 건강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고, 쌓아 올린 명예나 권세도 어느 순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은 바람 같고, 안개 같으며, 곧 방전되는 스마트폰 배터리와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삼손은 초인적인 힘을 가졌던 사사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을 때, 그의 힘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결국 우리가 자랑할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진짜 강한 사람은 자기 힘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능력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의 강하심을 신뢰하는 사람이 진정한 강자입니다.
셋째, 부를 자랑하지 말라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부자는 자신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는 언제나 대표적인 ‘성공의 상징’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얼마나 큰 집에 사는지, 차의 브랜드가 무엇인지가 그 사람의 ‘가치’를 말해 주는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재물은 진정한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경기가 나빠지면 재산의 가치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고, 건강이 무너지면 재물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쌓아두기만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생명이 끝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한순간에 남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 12:15) 그 말씀 그대로,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졌어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불안정하고 허망합니다. 참된 자존감, 인생의 의미, 그리고 진정한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자존감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참된 생명과 기쁨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가운데서 누릴 수 있습니다.
지혜도, 힘도, 부도 결국은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의지할 대상도, 자랑할 대상도, 인생의 중심도 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와, 멋지다!” 싶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때 왜 그렇게 집착했을까…” 하고 돌아보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랑은 무엇일까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4)
하나님은 여기서,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문에서 말하는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지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교리를 외우고, 성경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안다’는 말은 깊고도 실제적인 관계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그분과의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를 몇 년 다녔느냐”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주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공부에 참여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을 알고, 그분의 뜻을 내 뜻보다 앞세우며, 그분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그분의 마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갈 때, 우리 삶에는 어떤 열매가 맺힐까요?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분의 성품을 점점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처럼 살고 싶어집니다.
머리로만 아는 지식은 삶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체험된 하나님은 반드시 삶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무관심과 냉소로 가득한 이 시대 속에서도, 그 마음에 흐르는 하나님의 인자(慈愛)로 인해 연약한 이웃을 돌아보고, 용서하고, 품고,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하람은 자기 유익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공평한 시선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억울한 사람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선 자리에서 진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삶으로 드러나는 믿음. 자랑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삶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처럼 연약하고 죄 많은 인생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압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그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한복음 14:9)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말씀,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을 가장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그 깊은 마음을 가장 분명히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가 다음 시간부터 함께 나눌 요나서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긍휼이 많은 하나님이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요나 4:2). 하지만 그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알고 있었지만 닮지 못했고, 들었지만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요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원하지만, 그 은혜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 때는 외면하는 우리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니느웨처럼 악한 성읍조차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자랑해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도망친 요나를 끝까지 붙드신 하나님, 회개하는 니느웨를 기쁘게 용서하신 하나님, 그리고 오늘 우리를 여전히 품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번 봄 수양회 말씀 가운데,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친히 역사하셔서 우리가 자랑해야 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깊이 만나게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사실— 그분이 나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내 이름을 부르시며, 언제나 나와 함께하신다는 이 복된 진리가 우리 삶의 영원한 자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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