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이창무 2024. 4. 1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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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5강 / 이창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말씀/ 마가복음 2:18-28
요절/ 마가복음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4월 14일은 블랙 데이라고 해서 짜장면을 먹는 날이라고 합니다. 또 오늘은 제 개인적으로 특별한 날입니다. 제 첫째 딸이 태어난 날이기도 하고, 제 어머니께서 소천하셨던 날이기도 합니다. 딸이 태어난 이후 제 삶은 엄청나게 달라졌고, 늘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역시 제 삶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날보다 더 중요한 날, 더 특별한 날이 있습니다. 그날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날이고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은 날입니다. 이 날 이후 우리 삶이 그 이전의 삶과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이 펼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날 이후 우리는 어떤 삶을 기대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 가운데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잔치가 벌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을 보면 세리 레위가 자신을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연 모습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면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문제 제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8)

이번에는 사람들이 이날에 먹고 마시는 것, 그 자체를 문제로 삼습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기로 정해 놓은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경건하다 하는 이들은 다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 하는지, 그들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19)

예수님은 제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묘사해 주는 비유를 들어 답을 주십니다. 혼인 잔치가 열렸는데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이 금식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신부를 남몰래 짝사랑해 온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 혼인 집 손님은 제자들입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아무 자격 없는 죄인들을 다만 은혜로 부르시고 고치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이때! 잔치를 벌여야지 금식이 가당하기나 한 일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금식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20)

언젠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빼앗기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게 되는 날입니다. 동시에 믿는 자들이 죄의 유혹에 넘어져 죄를 범하고 신앙의 기쁨을 잃어버린 그날을 가리킵니다. 그 날에는 금식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때입니까? 금식할 때일까요? 잔치할 때일까요? 이 질문은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때에 따라 금식해야 할 필요도 있고 잔치해야 할 필요도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금식해야 합니까? 영적 침체에 빠져 심령이 메마르고 어둡게 되었을 때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임재가 사라졌음을 느낄 때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애통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 용서를 구할 때입니다. 이 때는 금식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오직 금식만이 경건의 표지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자연스럽게 기쁨이 뒤따라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 기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기쁨, 다시 주님 품에 안기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날에는 슬픔과 뉘우침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이 날에는 금식할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벌여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현재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시 세상과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우리 마음 중심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나요? 혹시 게임과 쇼츠(Shorts) 영상에 푹 빠져 말씀에는 너무 둔감해지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금식이 필요한 때입니다. 욕심을 절제하고 미디어 금식이라도 해야 할 때입니다. 애통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간절한 소원을 눈물로 주님께 아뢰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예수님,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 날은 금식의 영성이 아니라 잔치의 영성이 우리를 지배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고난주간을 거치고 지난 주 부활절 예배를 드릴 때 잔치 집 분위기가 났습니다. 호박이 들어간 노란색 설기는 잔치 떡 같았고, 흐드러지게 핀 벚꽃 나무 아래를 걸어갈 때 너무 기분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주는 큰 위로가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역사, 캠퍼스 가운데 봄과 같은 그리스도의 계절이 임하는 역사,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매주 예배마다 천국의 잔치가 벌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새 포도주 되시는 예수님을 담는 새 부대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를 통해 금식에 대한 논쟁을 총정리해 주십니다.

첫번째는 옷에 대한 비유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21)

요즘 사람들은 이 비유를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요즘은 낡은 옷을 수선해서 입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그냥 버립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옷이 해어지면 천 조각을 덧대어 고쳐 입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때 새 천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경우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탁 후 새 천과 낡은 옷이 수축되는 정도가 달라 결국 옷이 찢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포도주를 담는 가죽 부대에 대한 비유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22)

포도주를 보관할 때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포도주는 발표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킵니다. 만약 새 포도주를 탄력이 떨어지는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펑!” 포도주는 다 쏟아져 버리고 낡은 가죽 부대는 더 이상 쓸모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신축성이 좋은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두 가지 사례 모두 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옛 것에 담을 수 없다. 서로 어울리지 않고 둘 다 망하게 된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틀과 형식이 필요하다.” 입니다. 여기서 새것은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가리킵니다. 반면 옛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옛 시대를 가리킵니다.

옛 시대에는 죄인을 무조건 멀리 하고 열심히 금식하는 것이 ‘국룰’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것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새 시대에는 죄인을 찾아가 부르고 열심히 잔치를 벌이는 것이 ‘국룰’입니다. 새 시대에는 새것이 어울립니다. 문제는 이 두 가지를 억지로 섞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둘 다 망치게 됩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조건 모든 것을 다 바꾸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래 되었다고 무조건 나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패션에도 색이 바랬거나 구겨진 중고 의상을 즐겨 입는 빈티지 패션이 유행합니다. 심지어 청바지는 오래 입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워싱을 하고 찢어서 너덜너덜하게 하기도 합니다. 음악에서도 최신 K-Pop 음악도 좋지만 오래된 클래식 음악이 너무 좋습니다.

저는 복음도 빈티지 가스펠, 오래된 복음을 좋아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재발견한 복음, 그보다 훨씬 더 앞선 사도들의 복음, 신약 성경의 복음을 사랑합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번영 복음, 싸구려 감성 팔이 복음을 극혐 합니다. 제가 주일 오후 피곤한 중에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공부를 섬기고자 하는 이유는 오래된 복음의 그 깊고 진한 맛을 함께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오래된 복음 안에는 깊고 진한 맛만 있는 것이라 아니라 톡 쏘는 강렬한 맛도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은 엄청난 역동성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가득 들어차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지금도 꿈틀거리고 살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개를 열기만 하면 우리 안에 복음이 주는 생명이 넘쳐 나면서 모든 지저분하고 낡고 묵은 것들을 싹 닦아 버립니다. 복음은 이미 굳어진 문화와 관습을 뚫고 나와서 사람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만약 이런 새 포도주와 같은 복음이 일으키는 새 역사와 변화를 오래된 관습이나 전통으로 묶어 놓으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사람도 망치고 공동체를 망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우리 주변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담으려면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싱싱하고 자유로워야 합니다. 신축성이 있고 유연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외적인 형식과 방법은 무엇이든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충돌과 갈등이 불가피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부대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철근과 시멘트는 온도 습도에 따라 정확하게 같은 비율로 수축하거나 팽창한다고 합니다. 건축 엔지니어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이 둘의 열팽창계수가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여름과 겨울을 한 번만 지나도 모든 건물이 다 무너져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열팽창계수가 같기 때문에 철근과 시멘트로 엄청나게 높은 마천루 빌딩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복음과 충돌하면 무너지지만, 복음과 공존할 수 있으면 한 사람의 인생에도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아울러 오래동안 지속가능한 신앙 공동체를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랑 되신 예수님을 위해, 새 포도주 같은 복음을 위해, 그리고 내가 살아있기 위해 새 부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안주하다 도태되지 말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며 복음이 빚어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에 열린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23)

요일이 바뀌어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것은 귀엽게 봐주면 ‘밀이삭 서리’이고 심각하게 보면 ‘절도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죄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에서 굶주린 사람을 위해 낫을 대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남의 밭의 이삭을 잘라먹을 수 있다고 허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다른 이유로 이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24)

‘손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고 비벼서 탈곡하고 껍질을 털어 키질을 했으니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세 가지나 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관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제자들의 행동을 적극 변호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안식일 법 위에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25)

구약에서도 안식일 법에서 예외를 인정했던 사례가 있습니다. 이 사례는 바리새인들도 잘 아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느라 시장할 때였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제사장만 먹도록 규정된 진설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아히멜렉이 이를 허락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지 그들의 배고픔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대상이 다윗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구속 역사 가운데 메시아의 직접적인 그림자가 되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단순히 왕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선지자이며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림자인 다윗에게 안식일 법을 뛰어넘는 일이 허락되었다면 하물며 실체인 예수님에게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께는 자신이나 자기 사람들이 배가 고플 때 안식일 법을 어길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안식일에도 일을 했듯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둘째,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제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27)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는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피곤하고 쉼이 필요해서 안식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람에게 쉼을 주시고 복 주시기 위해 구별한 날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무너뜨리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기껏 밀 이삭 몇 개를 잘라먹은 제자들은 아닙니다. 바로 이를 문제 삼고 있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무척 바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고 감시하느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정작 안식일에 안식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는 몇 보 이상은 걸으면 안 된다, 몇 킬로그램 이상은 들면 안 된다는 규칙을 정해 놓았습니다. 안식일만 되면 인간 CCTV 바리새인들의 눈이 모두를 감시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걷다 가도 내가 지금 몇 미터를 걸었는지, 물건을 들려 하다 가도 들어도 되는지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습니다. 그 결과 안식일은 안식하는 날이 아니라 일주일 중에 가장 피곤하고 지치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도 안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안식까지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8)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구원자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안식일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해되고 지켜져야 합니다. 안식일은 아무 일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날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회복과 구원이 일어나는 날이어야 합니다.

신약 시대 성도들은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주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일이 안식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는 재창조과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안식일을 계승하고 흡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에는 안식일처럼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월요일에 중간 고사가 있어도 주일에는 공부를 하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일체 돈을 쓰지 못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주일에는 예배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예배를 드리고 종일 놀러 다니기도 하고, 아예 카페에 앉아서 유튜브로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예전 한국 교회는 율법적인 주일 성수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세속화된 주일 성수가 더 큰 문제인 듯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일을 지켜야 할까요? 우리는 두 양극단을 다 피해야 합니다. 주일을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도 문제이고, 주일을 다른 날과 구별되지 않게 보내는 것도 잘못입니다. 율법적으로 지키면 율법의 짐에 눌려 정작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주일을 구별하여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세상 근심에 매이고 갖가지 욕망에 이끌리느라 안식하지 못합니다.

주일은 주님께서 행하신 창조와 구원의 큰 일을 기념하고 감사하고 주님께 경배 드리는 날입니다. 주일은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이 치유 받고 회복되는 날입니다. 주일은 가족과 동역자들과 양들을 돌아보며 사랑하고 섬기며 선을 행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주일을 보내고 나면 한 주를 성령충만한 가운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뿐 아니라 모든 것의 주인이자 기준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언제 기뻐하고 언제 슬퍼합니까?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기뻐하고 그분을 놓쳤을 때 슬퍼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지키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새 포도주 되시는 예수님의 복음을 지키고 그 복음을 담을 수 없는 것들을 버립니다. 우리의 일과 안식이 어떻게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습니까?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통해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의 새로운 기운과 능력을 우리를 통해 이 시대 사람들에게 나타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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