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삼서

영혼이 잘 되려면

이창무 2015. 4. 30. 18:28
반응형

영혼이 잘 되려면


말씀 / 요한삼서 1:1-11

요절 / 요한삼서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방금 읽은 요절 말씀은 매우 유명한 구절입니다. 왜 유명하느냐 하면 전세계에서는 단일 교회로는 가장 큰 교회로 알려진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요절과 같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로부터 조 용기 목사님의 소위 삼박자 구원이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삼박자 구원이란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면 첫째 영혼이 잘 되고, 둘째 범사에 형통하고, 셋째 강건하게 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평안해 지고 부자 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삼박자 구원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논란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런 논란에 대해 언급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이 구절은 이 편지를 쓴 사도 요한이 수신자인 가이오에게 하는 인사말입니다. 인사말에서 수신자의 복을 빌어주는 경우는 다른 서신서에서도 거의 공통으로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주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쓰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경우는 바울과는 다른 인사말 습관이 있었던 것 같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오늘 요한삼서에 나오는 2절 말씀입니다. 삼박자 구원이 맞든 틀리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실은 사도 요한인 편지의 수신자인 가이오를 깊이 사랑하며 크게 인정하고 칭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절부터 4절까지를 보면 가이오에 대한 애정과 칭찬 세례가 쏟아집니다. 가이오를 부르는 호칭을 보십시오. 1절에서 사랑하는 가이오, 참으로 사랑하는 자, 또 그 이후로 계속 사랑하는 자로 부릅니다. 교회에 보내는 서신이 아니라 혹시 연애 편지에 더 어울릴 법한 호칭이 연속으로 등장합니다. 또 사도 요한은 3절과 4절에서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는 말을 듣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요한삼서에는 칭찬 받는 가이오만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이 더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디오드레베였습니다. 10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가 한 일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십니다. 또 11절 말씀을 통해서 요한은 디오드레베가 악을 행했고 그가 행한 악 때문에 하나님을 뵈옵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교수님이 이 사람의 이름을 암기하기 쉬운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디오드레베의 이름을 디오드러워라고 기억하면 쉽다고 합니다. 인격이 드러운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사랑의 사도라고 알려진 요한이 이렇게 칼 같이 단호하고 준엄한 면이 있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이를 통해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사랑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 거룩한 사랑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런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이오가 칭찬 받은 이유는 무엇이고 디오드레베가 책망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이오가 칭찬 받는 이유는 5절과 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이오가 칭찬 받는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나그네 된 형제를 영접하고 사랑과 섬김을 베푼 것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이 말하는 나그네 된 형제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나그네 된 형제란 초대 교회 당시의 순회 전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순회 전도자들은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는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개척자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둘째는 이미 교회가 세워진 곳을 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상담을 해 주면서 교회를 굳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개 풀타임으로 순회 전도자의 직무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런 순회 전도자들이 가이오가 섬기던 교회에 왔을 때 가이오는 따뜻하게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머물고 있는 동안 필요한 것들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근처에 가장 맛있는 집으로 모시고 가서 좋은 음식으로 대접도 하고 경치 좋은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사역을 하다가 어디 아픈 곳이 있거나 불편한 곳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건강 검진도 하고 발견이 되면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또 하던 일을 마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갈 때는 그곳으로 가기까지 필요한 여비를 지원하였습니다. 이런 순회 전도자들이 사도 요한에게 와서는 가이오가 얼마나 사랑으로 대했는가를 보고하였습니다. 한 두 명이 아니라 모든 전도자들에게서 이 같은 말을 공통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감사하고 가이오가 참 기특하고 사랑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이오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초대 교회 당시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고 견고히 서 갈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이오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디오드레베가 심한 책망을 듣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9절과 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이런 순회 전도자들이 오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왜 또 왔냐고 따지며 귀찮아 죽겠다면서 대 놓고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이런 순회 전도자를 보낸 사도들에 대해서는 비방을 일삼았습니다. 왜 이런 사람들을 자꾸 보내서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느냐며 불평을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교회 내에 나그네를 영접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했습니다. 자기가 싫어서 영접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자발적으로 영접하려는 사람들을 훼방 놓는 것은 이 무슨 못된 심보란 말입니까? 순회 전도자들은 이런 디오드레베의 태도에 심한 모욕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 갔던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디오드레베가 이렇게 나그네를 영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을 보면 디오드레베를 가리켜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문제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섬김을 받기를 원하지 섬기기를 싫어합니다. 또 디오드레베는 으뜸이 되어서 교회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데 자꾸만 외부에서 사도들이 보낸 순회 전도자들이 오는 것이 간섭 받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간섭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도움을 주려고 왔을 뿐인데 디오드레베의 눈에는 그런 것은 안 보이고 짜증과 불평만 가득했었습니다. 손대접을 할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고 사랑도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비전보다는 그저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3절에서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또 히브리서 13장 2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또 디모데전서 3장 2절을 보면 감독이 될 자격 요건을 검증하는 항목 중에 “나그네를 대접하며”라는 항목이 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 당시 손 대접 하기는 모든 성도들의 의무 사항이었으며 신자의 신앙 성숙의 척도, 영성의 척도 중 하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 식구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손 대접이란 이런 본성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타인 중심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말합니다. 또한 손 대접이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은혜의 원리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은혜란 댓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손님 대접이 힘든 이유는 내가 대접한 손님이 다시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왔다가고 안 올지도 모를 사람에게 잘 해 줄 필요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아는 사람,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 보상이나 댓가를 바라지 않고 일방적으로 쏟아 부으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에 양들이나 동역자들이 종종 와서 식사를 하고 갑니다. 그러면 저희 집 아이들이 좀 안 좋아 합니다. 특히 안 좋아 하는 한 명이 있습니다. 가고 나면 늘 툴툴 댑니다. 누구 오는 것을 극히 싫어합니다. 이때마다 말로 타이르지만 아직까지는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아직 아이들이 은혜를 잘 모르는구나 공동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섬김의 기쁨, 베품의 행복을 잘 모르고 있으니 참 안타깝기도 합니다. 장차 성장해서 가이오 같은 사람이 되야 할텐데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걱정스럽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자녀들에게 가이오의 마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이 그리고 특히 우리 안암골이 파송한 선교사님들의 숫자가 어마어마합니다. 교회사에서 보면 모라비안 교인들이 교인 60명 당 1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 경이로운 일이라고 누구나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숫자는 모르겠지만 모라비안 교인들은 충분히 능가할 듯 싶습니다. 이미 파송한 선교사들도 많고 선교사들의 자녀들도 많습니다. 저는 때로는 이런 상황이 너무 우리에게 큰 짐이 되고 부담이 되지 않는가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지난 한 해 안암골 역사 보고서 초안을 연초에 작성한 적이 있는데 작년에 안암을 방문한 선교사님들이 이렇게 많았나 하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 선교사님들을 우리 들 중 누군가가 본문의 가이오처럼 영접하고 섬기고 베푼 역사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 해도 주님 보시기에 참 인정 받고 칭찬 받을 일이 아닐까 합니다. 가이오 같은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디오드레베 같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손 대접하기를 싫어 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꼭 선교사님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요회의 동역자들, 양들을 섬기는 일까지 불편해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손 대접은 자발적으로 해야 의미가 있고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에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손 대접 스피릿이 식어버린다면 안타깝고 슬픈 일이 될 것입니다. 손 대접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경건의 핵심입니다. 좀 있으면 여름이 되고 그러면 올해도 역시 많은 손님들이 안암골을 방문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오늘 이 요한 삼서 말씀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형통하고 강건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가이오처럼 손 대접하기에 힘쓰면 됩니다. 사도들에게 찍히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디오드레베처럼 손 대접을 싫어하고 비난을 일삼으면 됩니다. 우리가 손 대접에 힘씀으로 영혼이 잘 되고 형통하고 강건한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안암을 오 가는 모든 분들이 위로와 격려와 새 힘을 얻는 2015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