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사도행전

환난과 하나님 나라

by 목자 이창무 2025. 6. 22.
반응형

2025년 사도행전 제 19 강 / 이창무

환난과 하나님 나라

말씀 / 사도행전 14:1-28
요절 /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서론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 있습니다. “꽃길만 걷게 해 줄게.” 처음에는 그저 가볍고 유쾌한 유행어처럼 들리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말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신앙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힘든 일은 마주하고 싶지 않고, 신앙조차도 내 삶이 좀 더 편안하고 성공하며 평안해지기 위한 도구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은혜’, ‘회복’, ‘축복’을 자주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십자가’, ‘고난’, ‘희생’, ‘순종’과 같은 단어들은 점점 설교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 마음 속에는 ‘위로받는 복음’은 남아 있지만, ‘고난받는 복음’은 지워져 버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런 우리에게 사도행전 14장은 매우 분명하고도 강력한 도전을 던집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할 때, 환호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돌팔매였고, 기적 뒤에 따라온 것은 감사가 아니라 오해와 배척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그 길을 두고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과거 사도들의 특별한 경험담이 아니라, 오늘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현재형의 복음 명령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과연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을 내 삶의 ‘꽃길 디자이너’로 착각한 채, 겉은 신앙으로 포장했지만 속은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길을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복음의 길을 다시 정면으로 마주보아야 하겠습니다.

1. 복음은 인내 가운데 열매를 맺습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14:1,2)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변함없이 유대인의 회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매우 놀라웠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맺은 기쁨의 열매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또 다른 반응이 있었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그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복음이 그들의 죄를 정면으로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숨기고 싶었던 탐욕과 거짓이, 복음 앞에서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에 대해 악한 감정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은 어떤 이에게는 생명의 향기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불편한 진실로 다가갑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여전히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상대주의와 자기중심, 자기긍정이라는 문화 속에서 불편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집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종종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고, 반응은 냉담합니다. “요즘 누가 그런 얘기를 믿어?”라는 말과 함께 무관심하거나 조롱하는 태도에 마음이 움츠러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너무 고지식한 것은 아닐까, 괜히 분위기를 망친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위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달랐습니다. 말씀을 한 번 전하고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라”(14:3). 그들은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복음을 향한 인내의 머묾이었습니다.

그들이 담대했던 것은 그들 안에 어떤 비범한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힘을 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사실 저도 목자로서 종종 고민합니다. “지금 전하는 이 말씀이 과연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수년간 말씀을 가르쳐도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을 때, 청년들이 복음을 점점 멀리하는 모습을 볼 때, 저의 마음도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제게 들려주신 음성은 분명했습니다. “창무야, 결과는 내 몫이다. 너는 그 자리에 있어라.” 주님은 제게 ‘버티라’고 하셨습니다. 반응이 없어도, 얼굴이 굳어 있어도, 누군가 돌아서 버려도,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어느 날, 주님의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영혼이 살아나고, 무표정하던 눈빛이 다시 살아나고, 삶의 방향이 바뀌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변화는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길이었습니다.

혹시 지금 복음을 전하다 지치신 분이 계십니까? 열매가 보이지 않아 낙심하신 분은 없으십니까? 아니면, 지금은 자신조차 복음의 능력을 믿기 어려운 시간을 지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을 붙드십시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버티는 자리, 그 인내의 자리에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조롱 속에도, 거절 속에도 주님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말씀을 증언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가 심는 복음의 씨앗은 반드시 주님의 때에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오늘도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 복음은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번에는 소아시아 내륙 지역에 위치한 루스드라로 가 보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바울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에게서 믿음을 보았다고 말하며, “당신의 두 발로 일어나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장면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 기적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착각하였습니다. 바울은 말을 잘하니 헤르메스, 바나바는 연륜이 있어 보이니 제우스라 부르며, 황소와 화관을 끌고 와 제사를 지내려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오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이 사람에게 돌아가는, 매우 위험한 방향 전환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많은 교회가 겪고 있는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때, 사람들은 종종 그 복음을 전한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합니다. “아, 그 목사님 정말 대단하시다”, “저 간증자는 특별한 분이야” 하며 그 사람의 말이면 무조건 따르고, 그 사람의 권위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위험의 시작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이 커 보이기 시작하면, 복음의 본질은 흐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는,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단이 출현하는 자리도 여기서 시작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상황의 심각성을 즉시 알아차립니다. 그들은 옷을 찢고, 사람들 가운데로 달려나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14:15). 그들이 옷을 찢었다는 것은, 단순한 거절이 아닌 거룩한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시당할 때 분노하지만, 사도들은 과분한 영광을 받을 때 분노하였습니다. 자신이 높아지고, 사람들이 자신을 신처럼 여기자 그들은 분노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영적 원칙이었습니다.

돌팔매를 맞는 고난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박수와 추앙입니다. 거절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하고, 돌팔매는 우리를 무릎 꿇게 하지만, 박수와 추앙은 우리를 자만하게 하고,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중심에 놓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빛이 아니라, 빛을 반사하는 거울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 목소리는 내 것이지만, 그 안에서 들려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내 행동은 내 손에서 나오지만, 그 안에 보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우리 안에 빚어 주소서.” 그렇다면 그 인격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이 말씀이 곧 복음이며, 우리의 길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길을 따라,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이 높임받는 시대, 연예인과 정치인이 아이돌이 되는 시대, 사람을 신처럼 섬기는 문화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높임받으시는 거룩한 공동체로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3. 복음은 환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로 인도합니다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에게 한순간에 엄청난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이전에도 그를 괴롭혔던 유대인들이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이어 이번에는 루스드라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거의 스토커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사람들을 선동했고, 결국은 돌을 들어 그를 쳤습니다. 한편으로는 과거 다메섹까지 원정 핍박을 떠났던 사울의 모습, 그리고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졌던 장면이 이제 바울 자신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온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날 바울은 심하게 다쳤고, 거의 죽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갔고, 그는 복음을 전한 대가로 상처 입고 쓰러진 채로 남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14:20).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기절한 상태에서 깨어난 것일 수도 있고, 실제로 죽음에 가까운 상태였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다시 일어섰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그는 자기 몸으로 살아낸 셈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 다음에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쉬거나 물러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곧장 더베로 향해 복음을 전하였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세웠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을 돌로 친 루스드라로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고니온, 안디옥까지 복음을 전하러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런 도시는 다시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 같아선 택배 하나 보내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돌아갑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그곳에 양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듣고 거듭난 영혼들이 걱정되었고,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기꺼이 다시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자의 결단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이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14:22). 이것은 단순한 설명이나 교리가 아닙니다. 바울의 온몸으로부터 흘러나온 고백입니다. 돌에 맞아 쓰러졌던 그가, 다시 일어나 피 묻은 입술로 선포한 진리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 말을 꺼내기를 두려워합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상할까 봐”, “청년들이 떠날까 봐” 십자가의 고난은 감추고, 복음의 현실은 미화하거나 생략하려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신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가장 먼저, 가장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유효합니다. 복음을 자기계발처럼 소비하고, 교회를 취향의 플랫폼처럼 여기며, 신앙을 옵션으로 관리하는 시대에 이 말씀은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합니다. 고난 없는 제자도는 없습니다. 환난 없는 천국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너무나 거칠기 때문입니다.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안락함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빚어내시는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의 교만과 욕망을 벗기시고, 우리 안에 예수님의 인격을 새기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고난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내가 너를 다시 걷게 하리라.”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철저히 낮아지셨고,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나 그 쓰러짐은 실패가 아니라, 부활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는 박수를 원하고, 편안함에 익숙해져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 당신의 나라를 심으십니다.

복음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최근 간증을 나누어 주신 김바나바 선교사님과 강안드레아나 선교사님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말의 설득이 아니라, 쓰러짐과 다시 일어섬의 신앙의 결로 증언된 복음이었습니다. 오해를 받고, 넘어지고, 홀로 눈물 흘리는 길 위에서 그들은 복음을 붙들었고, 그 걸음 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길 위에 다시 서야 하겠습니다. 다시 일어서는 믿음, 포기하지 않는 순종, 그리고 누군가에게 다가가 “당신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복음의 손길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부르심은 이것입니다. 환난을 통과하여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길 위에 서는 것,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누군가의 ‘다시 일어섬’이 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실 제 마음이 먼저 흔들렸습니다. “나는 복음을 정말 제대로 전하고 있는가?”, “아니, 그 전에 나는 정말 그 복음대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 안에서 끊임없이 맴돌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서 저는 종종 사람들의 반응을 의식하였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한 마디에 위로받고, 고개를 끄덕이는 성도들의 반응을 보며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끝난 뒤에는, 정작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려는 제 모습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는 듣기 좋은 말로 적당한 위로를 전하고, 적당한 도전을 얹고, 마지막에는 감동 한 스푼을 더한 ‘괜찮은 메시지’를 만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는 복음으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 “돌을 맞고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겠느냐?”, “박수를 바라고 있는 너, 정말 나를 따르고 있는 것이냐?” 그 물음 앞에서 저는 두려웠고, 숨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작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을 전하는 저부터 그 자리로 부르십니다. 돌에 맞고 쓰러져야만 들어갈 수 있는 그 나라, 환난을 지나야만 열리는 그 영광의 문 앞에서 저도 오늘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사도행전 14장은 우리 모두를 낯선 길 위에 세웁니다. 그 길은 박수보다 침묵이 많고, 꽃길이 아니라 자갈길이며, 때로는 돌에 맞아 쓰러지는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심으십니다. 우리가 상처 입고 쓰러진 그 자리에서, 부활은 시작됩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나는 복음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을 활용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걷고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라는 이름의 안락한 방 안에 머물러 있는가? 주님은 오늘도 쓰러진 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다시 걸어라. 그 길 끝에 내 나라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박수가 아니라 돌이 날아와도, 이해가 아니라 오해가 먼저 와도,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겠노라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부르심 앞에서, 우리 모두가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환난을 통과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반응형

'설교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방의 빛 바울  (7) 2025.06.15
성령의 보내심을 따라  (5) 2025.06.14
두 교회 이야기  (4) 2025.06.14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시는 하나님  (2) 2025.05.25
일어나 잡아 먹어라  (0) 2025.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