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고린도전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창무 2023. 5. 14.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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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봄수양회 특강 / 이창무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말씀 / 고린도전서 13:1-13
요절 / 고린도전서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은 별명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 장’입니다. 세계 문학사에서 사랑에 대해 이처럼 아름답게 또한 깊이 있게 묘사한 글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에 대한 최고의 찬가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 장을 읽게 되면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앞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게 왜 이렇게 사랑이 없을까 탄식하며 좌절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 두 가지 반응이 사도 바울이 기대했던 반응일까요? 앞뒤의 맥락을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13장은 12장과 14장에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12장은 은사에 대한 이야기이고, 14장은 방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방언은 여러 은사 중 고린도 교회를 대표하는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사랑 그 자체를 단독으로 다루기보다는 은사와 사랑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은사는 다른 말로 하면 사역, 섬김, 사명 등으로 바꾸어 표현해도 큰 무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3장은 사역과 사랑의 관계, 섬김과 사랑의 관계, 사명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고 정립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 생활을 점검하고 앞으로 방향 설정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먼저 모든 은사를 세 가지 묶음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방언과 천사의 말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1)

방언과 천사의 말이란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를 가리킵니다. “νυνι δε μενει πιστις ελπις αγαπη τα τρια ταυτα μειζων δε τουτων η αγαπη(고전13:13, 헬라어)” 한국 사람들에게 이런 헬라어는 방언입니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제주도 사람들의 말이 방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은 이런 외국어나 사투리 같은 방언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부 사람들이 냈던 알아 들을 수 없는 신비한 소리를 가리킵니다. 이런 방언으로 말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일입니까? 방언의 은사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나 다름이 없다고 말합니다. 꽹과리 소리를 옆에서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지금은 사라졌지만 고려대 학생회관 근처에서 항상 풍물패가 꽹과리를 치는 소리가 들리곤 했습니다. 당사자는 신명 나게 두들길 지 몰라도 옆에서 듣는 사람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처럼 바을은 아무리 대단한 말, 놀라운 말을 한다고 해도 만약 사랑이 없다면 불쾌한 소음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둘째는 예언과 비밀과 지식과 믿음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2)

바울은 이 두 번째 묶음에 해당하는 예언과 비밀과 지식의 은사들을 방언보다 더 나은 은사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개인의 유익에 속하는 반면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전부 다 한국 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사모하는 은사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것들 역시 만약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예언도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구제와 순교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

자기 소유를 모두 포기하면서 남을 돕는 일은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우리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큰 감동을 받습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는 것은 순교를 불사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도 은사입니다. 두 가지 모두 다 극한의 자기 희생입니다. 이보다 더 귀한 일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소유를 나눠주고 살신성인의 삶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인정해 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으면 다 소용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은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언, 예언, 지식, 능력, 구제, 순교 이런 은사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런 은사들을 부정하거나 그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은사와 떼레야 뗄 수 없는 것이 직분입니다. 일대일 성경 선생의 직분, 메신저의 직분, 팀 리더의 직분, 부장단의 직분, 다음 세대 교사로서의 직분, 매주 예배 환경을 만드는 섬김, 주일 예배 특송을 섬기는 봉사 등등 모든 섬기는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은사와 직분을 통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더욱 풍성해 지기를 기도하고 은사와 직분을 사모해야 마땅합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이런 귀한 은사들이 사랑과 연결돼야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은사들은 사랑이 없이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방언, 예언, 비밀, 지식, 믿음, 구제, 순교 모두 다 그렇습니다. 사랑 없이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고 사랑 없이 설교를 기가 막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 없이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고 사랑 없이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도 섬길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도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됩니까? 훌륭한 명분을 가진 일들이 사랑 없는 열심당원에 의해 추진됩니다. 한편에서는 자기 자랑과 교만이 자라고, 다른 한편에는 비난과 정죄가 쌓여가게 됩니다.

이것은 실제로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누구보다 영적인 은사를 사모했던 교회, 그 어떤 교회보다 열정이 넘치던 교회, 적극적이고 도전적이었던 고린도 교회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갈렸고 누구의 은사가 더 큰가 하는 문제로 싸웠습니다. 심지어 성찬식 문제로 마음이 찢겼습니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사라지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신앙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동체는 무너지고 성도들은 파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특별히 인격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사 자체가 가진 한계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닌 은사가 중심이 될 때, 사역이나 그 사역의 결과가 교회의 중심이 될 때 이런 현상들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고린도 교회의 중심에 은사가 있었다면 우리의 중심에는 늘 캠퍼스 제자 양성이라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은사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듯이 사명 역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캠퍼스 사명을 중심으로 직업 선택을 하고 결혼도 하고 집을 구하고 인생 계획을 세웠습니다. 양을 돌보고 먹이는 일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동시에 양이 있어서 보람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양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캠퍼스 양을 얻기가 참 어려워졌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 특히 캠퍼스에서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낮아진 이유가 가장 클 것입니다. 또한 목자님들이 점점 더 나이를 들어가면서 젊은 세대와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 이유도 클 것입니다. 직장 생활과 자녀 양육에 모든 에너지를 다 쓰고 나니 예전처럼 양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제는 현실적으로 사명과 나 사이의 연결 고리가 거의 끊어진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캠퍼스 양이 없으니까 어떤 현상이 생기게 됩니까? 목자 생활을 하기 하는데 별로 신이 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열정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내 양도 없는데 굳이 모임에 참석할 이유나 열심히 해야 할 동기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제는 양 대신 다른 곳으로 눈이 돌아갑니다. 자녀 교육에 올인해야 할 것 같고, 예전에는 크게 관심 두지 않았던 물질과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가 점점 더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양이 중심에 있었는데 이제 양이 없으니 신앙 생활, 목자 생활의 좌표를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우리에게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오직 사랑만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이며 그 외에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양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은사와 직분 역시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역의 결과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고 끝나지도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양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가족은 물론이요 같은 팀 안에 있는 동역자들, 교회 안에 있는 후배들, 친구들, 자라나고 있는 다음 세대들, 선교지에 계신 선교사님들, 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들입니다. 이분들이 다 우리가 섬기고 사랑해야 할 양들입니다. 이미 양들이 차고 넘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하고자 하면 교회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만큼 알고 배울만큼 배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고 사랑이 몸에 배어 있지도 않습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멉니다. 사랑에 대해서 이제서야 막 우리는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배워야 할 참된 사랑의 속성이 무엇일까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4-7)

총 15개의 항목입니다. 이 항목을 하나하나 일일이 다 설명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냥 읽기만 해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시처럼 느끼고 우리 가슴에 담으면 됩니다. 다만 여기서 사랑을 묘사하는 헬라어는 형용사가 하나도 없고 다 동사라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말해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랑은 단순히 머리 속에서 맴도는 생각이나 관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사랑은 감정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랑은 행동입니다. 또한 여기서 사용한 동사의 시제가 모두 현재형이라는 것은 사랑은 일시적인 행동이라 아니라 몸에 밴 습관화된 행동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오늘부터 내가 사랑 해야지’ 한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참지 못하고 거칠고 시기하고 자랑하고 교만하고 무례하며 이기적이며 쉽게 화를 내고 악하고 불의한 것을 좋아하고 진리를 외면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결심해 놓고 번번히 실패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사랑하는 습관이 생길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런 참된 사랑을 배울 수 있도록 세우신 학교가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사랑을 연습하도록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공동체입니다. 혼자서는 사랑을 배울 수 없습니다. 방구석에서 나 홀로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참기 힘든 사람을 어떻게 하든 참으려고 애쓰면서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내가 속한 팀 안에서 나 중심이 아니라 타인 중심이 되는 법, 나를 비워 다른 사람을 살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물론 실패도 많이 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공동체의 격려와 지원이 큰 힘이 됩니다. 다시 일어나서 또 사랑을 배우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조금씩 조금 씩 조금 씩 우리 안에 사랑이 제 2의 천성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사랑의 본을 될 만한 모델이 필요합니다. 사실 앞선 4절에서부터 7절까지 사랑을 전부 다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인이라 할지라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누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예수님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닮고 배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물론 우리가 죽을 때까지 노력을 해도 이 예수님의 사랑을 조금 흉내내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충분히 의미가 있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8-10)

사도 바울은 이제 은사는 상대적이고 오직 사랑만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이번에는 표현을 약간 달리해서 은사는 다 부분적이고 사랑만이 온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일상과 신앙 생활에서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부분적인 것을 온전한 것일 줄로 착각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은사를 너무 좋아하다가 은사 지상주의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러다 온전한 것인 사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반대로 부분적인 것을 무시하고 평가절하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난 부분적인 것 안에 온전한 것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전하는 메시지는 부분적인 것입니까? 온전한 것입니까? 부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분적인을 통해서 온전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섬김과 헌신은 다 부분적입니다. 그런데 그 섬김과 헌신을 통해서 온전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

바울의 이 말은 우리도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한 바입니다. 저는 어릴 때 학교 앞 문방구 주인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문방구에는 학용품부터 떡볶이까지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금 전 종례 시간에 선생님이 준비물로 가져오라고 한 철가루와 막대 자석을 턱 내미는 문방구 주인은 어린 저에게 전지전능한 존재였습니다. 물론 제가 어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다 버렸습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분을 전부인 줄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이 말을 들려주고 있을까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

바울은 지금 이 땅에서 우리의 삶 전체가 어린아이와 같다고 합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희미하게 보고 부분적으로 알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장차 온전한 것이 옵니다. 이 세상의 종말이 오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가 옵니다. 그 날에는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감추어졌던 진실, 보지 못하던 이면의 일들까지 속속들이 다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부활해서 이 땅에서의 지난 삶을 바라볼 때 어떻게 보일까요? 다 어린 아이의 장난처럼 보일 것입니다. “왜 별 것 아닌 일을 가지고 그렇게 싸웠을까? 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그토록 목숨을 걸었을까? 그러면서도 왜 진짜 중요한 일에 이토록 무관심했을까? 왜 내가 본 좁은 세계만이 전부인 줄 알고 저렇게 고집을 부렸을까?” 이렇게 유치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른스러운 것, 성숙한 것, 온전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2절에 말하는 산을 옮길 만한 능력과는 다릅니다. 은사로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를 말합니다. 그런 믿음에 근거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자신을 나타내시는 그 날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온전한 것들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 최고의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제가 예전에 사랑 요회의 요회 목자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이 말씀을 근거로 “믿음 요회, 소망 요회, 사랑 요회가 있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 요회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써 먹으라고 주신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일까요?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며 존재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믿음이시라 하나님은 소망이시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는 말씀은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흘러 넘쳐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삼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참여하는 존재, 사랑 받고 사랑하는 존재로 우리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요 목적입니다. 사랑이 곧 우리의 사명입니다.

혹시 지금까지 우리가 사명을 너무 좁게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캠퍼스 양을 데려와서 의자에 앉혀 놓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만이 사명일 수는 없습니다. 사랑으로 하는 일이 다 사명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여 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다 사명이고 동역자들을 사랑하여 기도하고 돌보고 섬기는 것이 다 사명입니다. 우리는 사명도 중요하지만 먼저 사랑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명도 저절로 살아나고 본래의 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섬김과 교제를 통해서 사랑하는 습관을 형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이 중심이 되는 안암1부 교회를 함께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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