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복
2026년 로마서 제 8 강 | 본문 로마서 5장 1~11절 | 요절 로마서 5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서론
로마서 1장부터 4장까지는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을 탐구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가?
4장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율법이나 할례가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장 1절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그 바탕 위에서 앞으로 어떠한 삶을 펼쳐나가야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탈북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조사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에 갔더니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풍성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옆에 있던 직원이 "한번 드셔보세요" 했는데, 이 탈북자는 "아, 저 이런 거 싫어해요. 못 먹어요"라며 손사레를 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중에 돈을 내라고 할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직원이 "다 공짜예요"라고 하자, 그제서야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앞에는 엄청난 복의 식탁이 화려하게 차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혹시 저 탈북자처럼, 차려진 음식 앞에서 감히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을 누려도 되는 것인가?" 하며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 공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식탁 위에 차려놓으신 것들이 과연 무엇인지, 오늘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미 주어진 복을 누릴 때 즐거움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로마서 5:1~2)*
이미 주어진 복이 세 가지 나옵니다.
첫 번째 복: 하나님과의 화평
1절 하반절에 "화평을 누리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리고 있다"가 아니라 "누리자"입니다. 화평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적극적으로 누리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몫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화평이 왜 그토록 큰 복일까요? 화평이라는 말은 그 이전에 불화한 상태가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우리도 인간관계에서 누군가와 불화 상태에 있으면 얼마나 힘들고 괴롭습니까? 직장인들에게 월요병이 있는 것도, 일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출근해서 그 불편한 사람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해지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람과의 불화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불화가 있다면 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겠습니까?
그러면 왜 이런 불화가 생겼습니까? 그 원인은 바로 죄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바로 그 죄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장벽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두려움이 아니라 친밀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전에는 두려운 심판자, 부담스러운 분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나를 품어주시는 아버지로서 만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복을 지금 누리고 계십니까?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마음껏 누리시면 됩니다.
두 번째 복: 은혜의 세계에 들어감
2절 상반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기 이전, 은혜 없는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공로가 있는 만큼 보상을 받는 세계, 잘해야 인정받는 세계, 실수하면 모든 것이 다 망하는 세계, 항상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만 하는 세계—곧 율법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이 율법의 세계에서 벗어나, 아무 자격 없이 거저 들어가는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고 누리게 됩니다. 오랫동안 율법의 세계 속에서 살던 사람은 은혜의 세계 안에 있는 풍성함을 온전히 누리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금씩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짧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이미 우리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율법의 세계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은혜의 세계로 들어오십시오. 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세 번째 복: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
2절 하반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바라면, 그것이 아직 손에 들어오지 않았어도 바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해질 때가 있습니다. 어릴 때 소풍 가는 날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도 손꼽아 기다리며 괜히 행복했던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그날 먹을 것들을 생각하며 설레었던 그 마음 말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이런 기대와 설렘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기대를 했다가 실망한 경험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많은 사람들이 "인생 뭐 있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기대도 없고 소망도 없이 삶이 굉장히 건조해집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절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소망이 생깁니다. 그 소망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생각만 해도 좋은 분이신데,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로 보게 될 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이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아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얼마든지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소망은 결국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풍성해집니다.
둘째, 닥쳐온 환란을 견뎌낼 때 즐거움은 깊어집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3~5)
앞서 살펴본 내용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은 은혜에 들어가고, 화평을 누리고, 소망으로 즐거워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환란도 있습니다. 환란이 믿는 사람은 비껴가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임하고, 어떨 때는 믿는 사람이 더 심한 환난을 겪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의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젊은 시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장모님의 조건을 받아들여 "평생 주일 예배를 빠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결혼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는 장모님이 돌아가신 지 오래가 지난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며 매 주일 아내와 함께 예배에 나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오래 교회에 다니면서도 아직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수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보니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다르더라고요.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분들이 고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더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밝을 수 있는지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는 내가 모르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울대를 나와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최재천 교수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 무언가—그것이 무엇일까요? 바울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환난의 연쇄고리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환난을 즐거워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환난이란 뭔가 강한 압박, 나를 세게 짓누르는 것을 뜻합니다. 요즘 청년 세대는 취업에 대한 압박, 인간관계에 대한 압박, 건강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 등 끊임없는 압박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환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은 180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환난에는 이어지는 연쇄고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고리: 환난이 인내를 낳습니다.
인내라는 말은 원래 "제자리에 계속 서 있다"는 뜻입니다. 압박이 세게 조여오는 그 순간에 도망치지 않고 자기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보통 압박이 강하게 들어올 때 사람들이 택하는 선택은 회피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환난이 있을 때, 그 환난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를 꿋꿋하게 지킵니다. 인내는 그 말만 들으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 고리: 인내가 연단을 낳습니다.
연단은 대장간 용어입니다. 쇠를 녹여 틀에 붓고, 달구어서 두드리고, 식히고, 또다시 달구고 또 두드리는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연단입니다. 그렇게 할 때 쇠 안에 있던 불순물들이 빠져나가고 점점 단단해집니다. 같은 칼이라도 이 연단의 과정을 얼마나 철저하게 거쳤느냐에 따라 명검이 되기도 하고, 한 번 부딪히면 뚝 부러지는 싸구려 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삶에 닥치는 환난이 바로 그 연단 과정에서의 망치 역할을 합니다. 이런 고난을 겪어봐야 "나도 별것 아니구나, 나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겸손함이 생깁니다. 고난을 직접 겪어봐야 다른 사람의 고난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생깁니다. 또한 고난을 통해, 내면이 거칠고 날카로웠던 사람이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런 인격과 성품의 열매들은 환난의 망치질 없이는 결코 저절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세 번째 고리: 연단이 소망을 낳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과한 사람 안에 드디어 확신이 생기고, 흔들리지 않는 소망이 생깁니다. 앞서 2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는데, 바로 그 내용과 다시 연결됩니다.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는 소망이 더욱 순수해집니다. 이 땅에 두었던 욕심이 다 떨어져 나가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순수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연쇄고리는 결코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알지 못하면, 즉 이 연쇄고리를 모르면 어떻게 될까요? 환난이 임할 때 분노부터 생기고 짜증이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좋은 성품마저 다 망가져 버리고, 삶 전체가 붕괴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이 내용을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막상 삶에 환란이 실제로 닥쳐왔을 때, 이 연쇄고리를 끝까지 붙잡고 가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첫 단계인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는 것부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5절을 들려줍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5)
우리가 이 환난의 연쇄고리를 끝까지 따라갈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러 한 분이 오셨습니다.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붓는다"는 표현을 쓴 것은 액체처럼 흘러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점점 메마르게 됩니다. 그런 우리 심령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봄비처럼 확 부어주십니다. 또 삶의 에너지가 바닥나고 열정이 다 식어버릴 때, 성령께서 우리 삶이 계속 불타오를 수 있도록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더 뜨겁게 타오르게 하십니다.
이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실 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구나"라는 것을 느끼면서, 그 감격 가운데 환난 중에도 다시 일어날 힘을 새롭게 얻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 인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뜨겁고 확실하게 느꼈던 것이 언제였습니까? 아무 일 없이 평안하던 때였습니까, 아니면 환란 중이었습니까? 대부분 환란 중이 아니었습니까? 만약 그런 환란이 없었다면,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렬한 체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란이 주는 훌륭한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환란의 망치 소리 너머에서 나를 빚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변함없는 사랑을 신뢰할 때 즐거움은 영원합니다
환난이 우리 삶에 찾아올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게 맞을까? 나를 버리신 건 아닐까?"*
이런 의심이 들게 되면, 그 의심 때문에 결국 마음의 둑이 완전히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바로 그런 순간에 우리에게 계속 일깨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7절과 8절에 나와 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7~8)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아주 가끔 있습니다. 일본에서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다 희생된 이수현 씨의 이야기,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 자녀를 구하고 희생당한 부모님의 이야기—이런 것들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의 극치, 최고의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수현 씨는 선량한 시민을 위해서, 부모는 목숨보다 더 아끼는 자녀를 위해서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원수를 위해 대신 죽어주겠다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 수 있겠습니까?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바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8절 끝에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확증하다는 말은 원래 법정 용어입니다. 재판을 통해 증거와 사실에 입각하여 어떠한 선고를 내렸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온 우주 앞에서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환난 중에 있을 때, 우리가 바라보고 붙잡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그런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그 사랑을 다시 붙잡을 때 무너졌던 마음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더욱이라는 말
9절과 10절도 보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5:9~10)
9절과 10절에 공통적으로 반복되어 나오는 중요한 부사가 있습니다. "더욱"이라는 말입니다. "A가 이루어졌으니, 더욱 B는 당연하지 않겠느냐"라는 구조가 반복됩니다.
그 A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의 피를 통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구원한 사람을 끝까지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시는 것은 더욱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큰 마음 먹고 거액을 들여 집을 샀는데, 수도세가 아까워서 물을 못 쓴다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들까지 주시며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 이후에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구원해 놓고 나서 취소하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중에 너무 많이 헤매고 실족했을 때, "이제는 하나님도 나를 포기하시지 않을까? 나에게는 더 이상 구원의 소망이 없는 것 같아"라고 스스로 자포자기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런 사람을 향해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 그 사람을 반드시 끝까지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많이 넘어져도, 내가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도 다시 하나님께 나가시면 됩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크신 사랑에 우리 인생을 온전히 맡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11)
앞에서 세 가지 복을 살펴보았습니다. 화평과 은혜와 소망—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11절에서 그 선물을 넘어서, 그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 즐거움의 대상이자 근원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는 궁극적인 이유는 화평을 얻었기 때문만도 아니고, 은혜의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만도 아니고, 소망이 생겼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환란이 오면 화평이 잘 느껴지지 않는 날도 있을 것이고, 은혜가 잘 와닿지 않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 선물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자신은 흔들리지 않고 영원토록 그 자리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환란이 오더라도 그 즐거움의 뿌리까지 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라."
이 짧은 말씀 속에 우리 인생 최고의 복, 최고의 즐거움, 최고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이 복을 지금 얼마나 누리고 있습니까? 아직 절반밖에 못 누리고 있는 것 같더라도 괜찮습니다. 조금씩 더 누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마음껏 누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환난 중에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항상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창무 | 2026년 5월 3일 | 안암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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