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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및 나눔/양식 86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말씀 :시편 119:65~88(71) 제목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본문말씀) 시편 119:65~88(71) 시편 기자는 고난을 하나님 편에서 바라봅니다. 고난을 겪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주는 커다란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가 달라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했습니다. 내 마음대로 행하며 본성이 원하는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받고 나니 겸손해집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이전에 우습게 여기던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우습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듣습니다. 그리고 받아들입니다. 말씀 앞에서 교만하게 굴던 사람이 ..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말씀 :시편 119:41~64(57) 제목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시인은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로 인해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42). 교만한 자들이 그를 심히 조롱했습니다(51). 악인들이 중상모략과 음모로 그를 해치려고 했습니다(61). 이때 감정적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들과 말싸움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주의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주의 계명을 즐거워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말씀을 심히 사랑하여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읊조렸습니다. 손을 드는 것은 전적인 의뢰와 순종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해치고자 해도 시인은 관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갔습니다. 말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말씀은 고난 중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말씀이 그의 생명을 ..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을까? 하는 질문은 이스라엘만 관련된 질문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한 번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 있다면 신약 시대의 성도들 역시 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잠시 하나님과 등을 지고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십니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합니다. 하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럴진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우리도 결코 버림 받지 않습니다. 이 땅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버리시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듭니다. 대형 교회들..

욥의 회개와 중보기도

어제 수요 기도회 말씀의 주제는 무지를 아는 것이 지혜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욥기에서도 같은 주제가 다른 곡조로 나옵니다. 욥과 욥의 세 친구들 서로 반대의 말을 하고 논쟁을 벌이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뭔가 알고나 있는 듯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사실 둘 다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별로 알지도 못하면서 큰 소리를 치며 자기 주장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둘은 닮아 있었습니다. 온 세상 만물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용량 초과입니다. 과열되어 다 타버립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범주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겸손하게 모든 걸 다 설명해 주시지만 그래도 역시 미지수로 남는 부분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인간의 지식은 근대 이후 비약적으로 늘어 났습니다.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할 등 현대 물리학 이론들을 접하게 되면 인간이 이런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비단 물리학 뿐이겠습니까? 모든 영역에서 과거 우리 조상들이 알지 못했던 수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각 분야의 고수들이 하는 공통적인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이것이 그들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아직 우리는 우주의 신비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숟가락 한 스푼을 떠낸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세계, 이해못할 일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것들을 섭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자

누가 내 가족일까요? 물론 한 핏줄을 타고 난 사람들이 내 가족입니다. 우리에게는 부모와 형제들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출생 관계에 의해 형성된 가족입니다. 이 세상에 이 가족만큼 끈끈하고 결속력이 단단한 공동체가 있을까요?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더 그런 경향이 강한 듯 합니다. 이 거칠고 험난한 세상에서 이 가족은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 가족들이 찾아왔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질문하십니다. 누가 내 가족이냐? 여기 있는 내 제자들이 내 가족이다.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공경하고 섬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순간에서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신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족 관계를 파괴하시거나 불효를 조..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요즘 인터넷 댓글을 읽기가 점점 무서워집니다. 너무 독한 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꼭 기독교에 대한 비난 때문만은 아닙니다. 독기가 서린 글들이 너무 많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그런 글들이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상위에 랭크된다는 사실입니다. 욕설은 기본이고 저주의 말이 넘쳐 납니다. 그러나 말이 문제가 아닙니다. 말은 그 동안 마음 속에 쌓아 놓아던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마음 속에 저주와 미움을 쌓아 놓았다면 독설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 속에 사랑과 화평을 쌓아 두었다면 온유하고 사랑스러운 말들이 나옵니다. 말 중에 가장 독한 말은 성령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은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일은 죽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방..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을 아십니까?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 두려운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두려움은 더 큰 두려움으로 내어 쫓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기껏해야 우리 육신의 생명을 가져갈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육신의 생명은 물론이요 영혼까지도 주관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특급 열차에 제 1 호차에는 두려움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연약해서 두려워하는 것 가지고 너무한다 여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하나님을 믿지 않음에서 오기 때문에 이는 심각한 죄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무시하는 셈이지요. 하나님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이 어떻게 작다 말할 수 있겠습니..

추수할 일꾼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명목상의 목자인 제사장들이나 헤롯 왕이 목자 노릇을 해야했지만 그들은 자기 배 불리기만 바빴습니다. 백성들은 버림 받았고 갈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추수할 밭은 있지만 추수할 일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일꾼이자 백성들의 목자로 삼기 위해 열 둘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열 둘을 사도라고 칭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복음서에서 쓰이지 않는 말입니다. 사도 행전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나 보편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반면 제자는 배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에게서는 권위가 느껴진다면 제자에게서는 부족함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열 둘을 처음부터 사도로 세우셨다고 하셨습..

너희 믿음대로 되라

소경 두 사람이 주님께 나와서 불쌍히 여겨 주시길 청했습니다. 불쌍히 여겨 눈을 뜨게 해 달라는 말이겠지요. 예수님은 믿느냐 물으셨고 그들은 믿는다 하였고 다시 주님은 믿음대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소경은 믿은대로 눈을 떴습니다. 이스라엘에 소경이 이 두 사람만 있었겠습니까? 많았겠지요. 그러나 고침을 받은 사람은 이 두 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요한 복음 말씀을 배우면서 거의 모든 말씀마다 반복되는 장면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영의 세계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육의 세계의 시각에서만 이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계속 겉돌게 됩니다. 사람들은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습니다. 인생의 절반 아니 그 이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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