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부활절

부활의 영광

이창무 2019. 4. 28. 15:02
반응형

2019년 부활절 특강


부활의 영광


말씀 / 고린도전서 15:1-58
요절 / 고린도전서 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한 젊은이가 박사 학위 논문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 애인에게 청혼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응급실로 실려 갔습니다. 의사로부터 시한부 인생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떨어졌습니다. 그것도 남은 시간이 단 15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문자가 한 통 왔습니다. 억만장자인 삼촌이 돌아가시면서 당신에게 전 재산을 남겼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잠시 후 다른 문자가 왔습니다. 박사 학위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자 하나가 더 도착했습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결혼 승낙 메시지였습니다. 마침내 15분이 다 지나고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15분’이라는 연극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를 더 살게 될까요? 적어도 15분보다는 더 길겠지요.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은 다 이 청년처럼 시한부 인생입니다. 이 세상의 부와 영광과 즐거움이 죽음 앞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부활의 복음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이기는 승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놀랍고도 찬란한 부활의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고 소망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알려줄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이 새로운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3년 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 이미 복음을 전했습니다. 3, 4절에 나온 대로 복음의 내용인 십자가와 부활을 열심히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 성도들이 복음을 믿고 영접했습니다. 현재도 그 복음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새삼스럽게 다시 복음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중요한 말이 헛되이 믿는다는 말입니다. 헛되이 믿는다는 것은 나름대로 믿기는 하는데 그 믿음이 삶에 어떤 변화나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믿음이 효력을 잃은 상태입니다. 그 결과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상태가 딱 이 모습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파벌과 분쟁이 있었습니다. 음행도 있었습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세상 법정에 마구 고발하는 사태가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복음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잘못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믿음이 헛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 진리와 우리 삶과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 삶에 복음적이지 못한 모습, 거룩하지 못한 모습, 세속에 물든 모습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삶이 엉망진창이 되고 공동체의 문제가 불거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이런 문제가 왜 생겼는지 원인 진단이 필요합니다. 원인을 정확히 진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해결책이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속의 고린도 교회는 무언가 새로운 해결책이 없을까 이리 저리 찾아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방언, 신유, 예언과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에서 답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해결은커녕 문제가 더 꼬이기만 했습니다. 바울의 진단과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그 진단은 '너희가 복음을 모른다. ’이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알기는 알지만 복음 진리가 담고 있는 은혜의 깊이와 풍성함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복음으로 돌아가라!’이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진짜 멋쟁이들 사이에는 빈티지(vintage) 패션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탈색시키고 구멍 낸 청바지를 입기도 합니다. 가구도 빈티지 가구가 더 고급이고 가격도 비쌉니다. 오래되고 낡아 보이는 것에서 진정한 멋을 발견합니다. 복음도 빈티지 복음이 좋습니다. 오래된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우리 인생과 우리 공동체의 해답입니다. 괜히 쓸데없이 유행에 이리저리 휩쓸릴 필요 없습니다. 복음이 우리 삶의 체계가 되고 생활 구석구석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우리가 아직 가야할 길이 멉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셔서 영광스럽고 복음의 세계를 풍성히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4절까지 서론이고 12절부터 본론입니다. 그런데 본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신뢰성 문제를 잠깐 다루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만 성도의 부활, 우리의 부활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활의 증인들과 목격자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증인들이 누구입니까? 게바 곧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또 12 제자들이 증인입니다. 오백 여 형제가 한꺼번에 보았는데 그 중 대다수가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사도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사도 바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표현했을까요? 이는 과거에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박해하는 무리들의 행동대장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장소마저도 교회를 국제적으로 박해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소아시아와 헬라 지역에 쟁쟁한 교회들을 세운 개척자가 바울입니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 책들의 저자가 바울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극에서 극으로 바뀔 수 있었을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 인생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형님이 집안을 일으키셔야 뭐 하고 계시냐? '면서 잡으러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총회장이 되었습니다. 또한 신약성경 야고보서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이렇게 변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때 무서워서 뿔뿔이 흩어졌던 자들입니다.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열두 사도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서슬 퍼런 당국자들 앞에서 너희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였다 일갈하면서 담대히 회개를 촉구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확 바뀔 수 있었습니까?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 부활의 증인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수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한결 같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둘째 증인들의 변화된 삶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이 아니라면 베드로, 야고보, 바울 등의 삶의 변화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인류가 달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그보다도 훨씬 더 믿을만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 질문이 34절까지 계속 이어지는 문제의식입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다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죽은 자의 부활은 믿지 않는 일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성도가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지 않았을까요? 헬라의 이원론 사상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원론 사상이란 본질적으로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헬라인들에게는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낙원에 가는 것이 구원이었습니다. 겨우 감옥에서 벗어났는데 부활해서 다시 몸을 입게 된다니!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만약 몸의 부활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께서도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전파하는 복음이 다 헛것이 됩니다. 믿는 것도 헛것이고 그렇게 전파하는 자는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여전히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 죄에 대한 속죄가 다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부정되면 우리가 죄사함 받았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 믿고 죽은 사람은 망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장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삽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며 베풀고 나누며 삽니다. 이 모든 것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부활이 없다면 깜빡 속아서 헛된 인생, 손해 보는 인생을 산 셈입니다.  인생을 통째로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두 다 가정법이었습니다.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는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넓은 논에서 한 벼에서 첫 이삭이 열렸습니다. 그러면 농부는 이제 곧 논에 있는 모든 벼에서도 이삭이 달리게 될 것을 압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장차 예수님께 속한 모든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을 확실히 보증하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하고 죽음이 모든 인생들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24절부터 28절까지는 성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역사 가운데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속 역사의 마지막 수순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권세자들을 멸망시키시고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입니다. 그 계획 속에 성도의 부활이 있습니다. 왜 성도의 부활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까? 마지막 날에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유를 회복하신 후에는 더 이상 죽음이 지배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고자 하십니다. 그때에도 여전히 죽음에 매여 있는 성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반드시 부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부활 곧 우리의 부활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플랜 속에 클라이맥스입니다. 

29절부터 34절까지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것이 성도의 현재 삶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을 때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말하려고 자신의 삶을 예로 들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베소에서는 맹수와 더불어 싸운 적도 있었습니다. 실제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와 싸웠다기보다는 에베소에서 겪었던 격렬한 핍박을 이렇게 묘사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주와 복음을 위해 치열하고 헌신적이며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성도의 부활 곧 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장차 내가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의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32절 하반절에 나온 대로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시 에베소 검투사들의 표어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몰랐습니다.  그러니 그날그날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이 삶의 목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정말 부활이 없다면 이렇게 사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이런 거짓말을 퍼뜨리는 사람은 악한 동무입니다. 그들을 가까이 하면 어떻게 됩니까? 선한 행실을 더럽히게 됩니다. 부활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성도는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나 몸으로 부활해서 하나님 앞에서 선악 간에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12절부터 34절까지 바울이 호소하는 대상은 부활을 믿고 신앙생활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부활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도 아닙니다. 바울이 가장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은 교회 안에 있는데 부활이 없다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부활이 없다 하지는 않습니다. 말로는 부활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마음속에 부활 소망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제법 신앙생활을 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쁨도 없고 열정도 없습니다. 인상 쓰면서 억지로 끌려가듯이 신앙생활 합니다. 차라리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는 불신자라면 갈등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소망도 붙들고 그리스도도 붙들려고 하니 그 사이에서 갈등에 시달리며 삽니다. 성공과 성취를 바라면서 동시에 목자로서 감당해야 하는 손해와 희생 때문에 슬퍼합니다. 세상 쾌락도 놓칠 수 없고 동시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양심이 괴롭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이 가장 불행한 신앙생활입니다. 

부활을 소망하지 않으면 어떻게 낮아짐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목자 생활의 소망이 부활이 아니라면 목자의 삶에서 만나는 숱한 아픔을 어디에서 위로 받겠습니까? 죽기 전에 성공해서 모두 다 만회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만약 그렇게 안 된다면 어떻게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헛되고 헛된 세상 소망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 소망을 붙들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의 길을 즐거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소망은 하나님이 내 모든 손해와 희생 아시고 부활의 날 다 갚아주심 믿으며, 안심하고 기쁘게 고난의 길을 가게 합니다. 세상에서 보상을 다 못 받아도 괜찮습니다. 부활의 날 몇 배로 다 갚아 주실 것 믿고 헌신의 길을 가게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고 이해해 주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부활의 날에 높여주시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 모든 소망은 죽음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은 죽음과 함께 확실해집니다. 세상 소망은 고난 앞에서 우리를 약하게 합니다.  그러나 부활 소망은 고난의 날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부활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이 제기할 수 있는 예상 질문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는 질문이고, 둘째는 어떤 몸으로 부활할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36절부터 44절에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먼저 대답합니다. 바울은 이런 회의를 가진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한탄합니다. 왜냐하면 창조 세계의 기본 섭리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씨를 땅에 심어 보십시오. 거기서 자라난 식물은 씨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의 형체가 각각 다릅니다. 해, 달, 별 등의 천체도 각각 다 다른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각각에 가장 알맞은 형체와 영광을 주십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한 후에 입게 될 몸은 현재의 몸과 아주 다릅니다. 부활은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입니다. 부활 후의 몸은 형체도 달라지고 영광도 달라집니다. 현재 몸은 언젠가는 소멸하지만 부활의 몸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현재 몸은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지만 부활의 몸은 다시는 죄에 넘어지지 않을 강한 몸이 됩니다. 육의 몸이 확실히 존재하듯이 부활 후 입게 될 신령한 몸도 확실히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도에게 죽음이란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45절부터 49절까지는 35절에서 제기했던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대답합니다. 바울은 땅에 속한 아담과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를 대비합니다. 아담은 단순히 생명 있는 존재(living soul)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life giving spirit)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도 주십니다.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이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킵니다. 장차 성도가 입을 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과 같을 것입니다. 부활하면 창조 때 아담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업그레이드된 종말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왜 부활 소망이 잘 생기지 않을까요? 왜 부활을 이야기해도 시큰둥하고 뜨겁게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그 이유는 부활의 영광을 너무 과소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단순히 현재 삶의 연장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활한 후에도 현재처럼 약한 몸, 죄 많은 몸이 계속 된다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일은 없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엄청납니다. 지금과는 아예 클래스가 달라집니다. 무엇을 상상 하든 그 이상이 될 것입니다. 

축구를 하면 손흥민 선수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멋진 골을 넣게 될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빠질 일이 없고 늘 풍성하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 머리가 유지될 것입니다. 김태희가 소를 몰고 한가인이 밭을 간다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추남추녀로 보일 정도로 다 선남선녀들이 될 것입니다. 뇌출혈로 쓰러질 일도 없고 암에 걸릴 일도 없고 없습니다. 죽음 때문에 사랑하는 이와 작별한 일도 없어집니다. 죄 지을 일이 없으니 회개 소감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다 했더니 전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서로 더 사랑하고 더 섬기려고 경쟁하게 될 것입니다. 꿈같은 이야기입니까? 꿈이 아니라 우리에게 현실이 될 일들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영광을 너무 시시하게 만들지 맙시다. 우리가 부활 이후의 삶을 뛰는 가슴으로 뜨겁게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혈과 육은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썩는 것은 죽은 사람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현재 상태로는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신령한 부활의 몸을 입어야만 합니다. 

언제 부활의 몸을 입게 될까요? 나팔 소리가 날 때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 때에 죽은 자들은 썩지 아니할 부활의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납니다.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던 성도들은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됩니다. 이렇게 새롭게 입은 몸은 더 이상 죽음에 굴복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사망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선포합니다. 54절과 55절을 보십시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성경은 사망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 날에 사망은 더 이상 자기 승리를 자랑할 수 없게 됩니다. 더 이상 인생들을 고통스럽게 쏘던 능력도 상실하게 됩니다. 사망의 파괴력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치명상을 입었고, 성도의 부활과 함께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죽음은 죄로부터 발생한 것입니다. 죽음은 죄를 통해 세력을 확장해 왔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었지만 인간을 죄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장차 부활하여 죄와 영원히 작별하고 율법으로부터 영원히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57절은 바울의 감사제목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성도들에게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5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 동안 고린도 성도들은 복음의 핵심인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부활 진리 위에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주의 일이란 복음을 알고 복음대로 살아가고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을 위해 때로는 땀 흘리고 때로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미 고린도 성도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정도면 되었으니 그만하자 하지 않습니다. 더욱 열정적으로 복음을 위해 더욱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이 이런 권면을 하는 근거는 그들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께서 주의 일에 힘쓴 자들의 땀과 눈물을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하시며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돈을 위해 헌신하고 명예와 권력 위해 수고한 삶의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죽음 앞에 다 헛될 뿐입니다. 좋은 아파트와 자가용 가지고 갑니까? 다 놓고 갑니다. 그러나 복음은 영원합니다. 복음을 위한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다 들고 갑니다. 부활의 몸 얻을 때 하나님의 칭찬과 존귀를 얻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복음 전하고 열심히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곳입니다. 영원히 붙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영원합니다. 복음을 붙들 때 우리도 영원한 존재가 됩니다. 복음을 위한 수고와 헌신과 눈물은 영원한 보배입니다. 한 영혼에게 복음 전하기 위해 아픔 겪고 눈물 흘린 그 수고가 가장 귀하고 가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한 우리들의 헌신이 해가 갈수록 더 뜨거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의 가치를 날이 갈수록 더 깊이 알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음 위해 열심히 헌신하다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다시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반응형

'설교 > 부활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년아 일어나라  (0) 2022.04.17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  (0) 2022.04.16
엠마오로 가는 길  (0) 2015.04.30
마른 뼈들을 큰 군대로  (0) 2015.04.30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0) 201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