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서평

‘뒤돌아 서서 바라본 하나님’을 읽고

이창무 2015. 5. 1.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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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 서서 바라본 하나님’을 읽고


‘뒤돌아 서서 바라본 하나님’은 류호준 교수님의 설교 모음집이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물론 이 독후감을 과제로 제출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내가 류호준 교수님의 책을 처음 접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미 저자의 책을 여러 권 읽어보았다. 그 책들의 목록은 ‘우리의 기도가 천상의 노래가 되어’, ‘영혼의 겨울에 부르는 희망의 교향곡’, ‘인간의 죄에 고뇌하시는 하나님’, ‘일상신학사전’ , ‘십자가의 복음’ 이다. 물론 과제나 시험에 관계 없이 사서 읽은 책들이다. 이 정도면 나는 저자의 팬임을 자처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과제물의 대상이 된 책은 이 책과 ‘장막치시는 하나님을 따라서’ 두 권이었고 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는 ‘장막치시는 하나님을 따라서’에 비해 좀 더 두께가 얇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고, 둘째는 제목이 더 멋지고 세련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회가 된다면 ‘장막치시는 하나님을 따라서’도 꼭 읽어보고 싶다. 과제 제출일이 지나면 추가 비용 없이 그럴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더 나아가 ‘아버지를 떠나 자유를’이라는 책도 북 리스트에 추가해도 좋겠다. 왜냐하면 이렇게 세 책이 모여 삼부작을 이룬다고 하니 말이다. 무쇠 솥도 다리가 셋이면 설 수 있는데 삼부작을 두 권만 읽고 마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 책은 총 21편의 설교를 모아 놓은 설교 모음집이다. 각 설교마다 제목 외에도 설교의 주제를 지시하는 한 단어의 표제어가 달려 있다. 그리고 21편의 설교 모음 앞에는 서문이 붙어 있고 그 바로 뒤에 프롤로그, 뒤에는 에필로그가 덧붙여져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 나는 서문을 통해서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다.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는 설교자이다. 보통 설교집은 일반 회중을 독자로 상정하고 발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일반 회중이 청중으로 한 설교이니만큼 저자 역시 일반 독자들을 배제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기와 같은 설교자들이 이 책을 읽기를 더 바란 듯 하다. 그래서 흔히 쓰는 설교집이라는 이름 대신 문예적, 신학적 에세이라는 다소 낯설게 보이는 장르명을 고집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왜 설교자가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기대했을까? 아마도 설교에 있어서 문예적 요소와 신학적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 책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한국 교회의 설교 상당수가 아니 대부분이 문예적 요소나 신학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이 책은 그런 현실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여러 동료 설교자 여러분! 설교는 모름지기 이렇게 해야 하지 않겠소?’라고 설득하고 있는 듯 하다.


프롤로그는 ‘설교와 설교자’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역시 이 책이 목표로 하고 있는 독자층이 설교자라는 점을 확인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여기서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왜 사건이 되지 못하고 있느냐고 탄식한다. 이런 탄식은 나도 종종 듣게 되는 탄식이다. 대부분 그 원인은 설교가 성경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저자는 그 이상을 말한다. 아무리 성경을 내용으로 충실하게 전달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현실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면 그 설교는 사건을 일으킬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설교를 가리켜 성서실증주의와 무인격적 설교라고 진단한다. 설교는 사람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설교는 결국 말이고 글이기 때문에 설교가 지닌 사람의 얼굴은 문예적 요소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프롤로그를 읽고 나서 저자의 생각에 동의를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문예적인 설교, 사람의 얼굴을 한 설교를 들어 본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설교를 쓰도록 훈련 받아 본 적도 별로 없다. 그러니 아무리 동의를 한다 해도 막상 설교자가 그런 설교를 작성하여 전달하려고 하면 막연하고 답답하기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문예적 신학적 설교가 무엇인지를 맛보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저자가 섬기고 있는 무지개 교회에서 선포되었던 21편의 설교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21편의 설교문은 모두 구약을 본문으로 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이사야서 이렇게 세 책이 전체 21편 중 14편으로 삼 분의 이를 차지 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특정 장르의 구약 본문에만 치중되어 있지 않고 五經에서부터 豫言書까지 구약 전반에 걸쳐 골고루 본문이 선택되어 있다. 설교문의 배열 역시 성경의 배열 순서 그대로를 따르고 있다. 다만 詩歌書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아마도 저자의 다른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결코 시가서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은 아니다. 이 책의 19장 기도편의 본문은 요나서이지만 사실 그 내용은 詩篇의 중요성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7장 기적 편과 21장 시간 편과 같이 간혹 신약을 본문으로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경우는 主 本文이 아니라 部 本文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여전히 구약 설교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다. 덕분에 구약을 전공한 저자의 번득이는 신학적 통찰력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9장 갈망편의 제목은 ‘뒤돌아 서서 바라본 하나님’이다. 책 전체의 제목과 같다. 왜 하필이면 9장의 설교 제목이 책 전체를 대표하는 제목이 되었을까? 책 자체의 내용 중에는 그 이유가 따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저자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 나름대로 그 이유를 유추해 보았다. ‘뒤돌아 서서 바라본 하나님’이란 설교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시고 계실 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나 뒤돌아 서서 회고적으로 바라볼 때에야 비로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볼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점은 성경의 인물들이 그리고 성도들의 실존적인 삶 속에서 경험하는 바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아쉬움과 목마름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뒷모습이 아니라 앞모습을 뵈올 수 있는 그 종말의 때를 갈망하고 있다. 나는 이 설교에서 뒤돌아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행위가 바로 神學함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책의 장르를 저자는 文藝 神學的 에세이로 구별하였다고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여기서 나는 저자가 뒤돌아 서서 바라본 하나님에 대한 묵상을 담은 책이 바로 이 책이기 때문에 제목을 여기서 취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이 책은 문예적이기도 하지만 또한 신학적이다. 신학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바라봄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어느 설교이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향하는 신학적 설교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신학적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닌 것 같다. 똑같이 신학적이라는 말을 쓴다 할지라도 그 신학을 인습적, 기계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욥을 찾아 왔던 세 친구들의 신학이다. 그들 모두 하나님에 대해 욥에게 말한다. 일종의 설교를 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학은 인습적이고 기계적이었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왠지 공허하게 들리는 설교이다. 현재 처한 욥의 상황에 아무 울림도 주지 못하는 신학이었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인습적이고 기계적인 신학을 배격한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추구한다. 그래서 때로는 묻고 때로는 따지고 때로는 답답해 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멈추어 선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언어와 내 목소리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한다. 이 책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씨름했던 사람의 책이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이해되고 정리된 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뒤돌아 서서 바라본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신비에 싸여 있다. 정리되지 않은 채 설명되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런 부분은 그런 부분대로 한계를 간직한 채 받아들이는 것이 이 책이 말하는 신학함이라고 나는 이해하였다.


이와 같은 신학함의 결과가 녹아 있는 이 책의 설교들은 그래서 인습적이지 않다.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친숙함을 깨는 내용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때문에 놀람이 있다. 궁금하게 만들고 긴장하게 만드는 설교들이다. 1장부터 바다 괴물을 만드신 하나님이 등장한다. 야곱의 선택 문제에서는 인습적 질서를 뒤엎으시고 주권적으로 선택하시는 하나님을 다루기도 하고 , 기존 설교와 달리 엘리 제사장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업어주시는 하나님, 부조리 속에서 거하는 하나님이 등장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기까지 한다. 이 외에도 구석 구석에서 이런 놀람을 일으키는 내용들이 많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이런 내용 때문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非道德的인 것이 아닐까? 혹은 不敬虔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말해도 될까 싶다. 그러나 설교를 끝까지 읽고 나면 어느 한 순간 ‘아하, 그렇구나’ 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눈이 떠지는 경험이다. 이전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그분, 그분의 마음 속으로 , 그분의 심장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오해가 풀리고 의문이 풀리고 답을 얻고 만족과 기쁨을 누린다. 저자는 이처럼 신학함의 결과를 매우 정교한 문예적인 틀에 넣어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설교에 움직임이 있다. 엎치락 뒤치락하는 반전의 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지옥에서 드리는 시편’이라는 요나서 설교를 보자면, 저자는 요나서 2장의 기도문을 언급한다. 요나가 처한 정황, 그의 지옥 같은 현실에서 어찌 보면 기도는 당연한 일이다. 의례히 우리는 그래서 그가 기도를 드렸다고 지나간다. 그러나 저자는 요나의 기도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지적한다. 읽어보니 정말 그렇다. 당혹스럽다. 왜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기도문이 여기 실려 있을까? 혹시 이것이 편집 비평자들의 주장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이 아닐까? 정녕 서로 다른 전승이 한 책으로 엮이면서 이렇게 되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그 다음에 반전이 일어난다. 바로 요나서의 기도가 시편에서 가져 온 기도이며 구약 성도들의 기도는 시편 기도였다는 점을 깨우쳐 준다. 이 때 그 동안 쌓인 긴장이 해소되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말씀을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인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경험되어진 말씀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저자는 우리가 익숙하게 느끼고 있는 주제를 선택한다. 21개의 장을 구성하고 있는 주제어들 자체는 이미 많은 설교와 책들에서 다루어졌던 주제들이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에게 질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 과연 그럴까 라는 질문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신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두 가지 텍스트를 관찰한다. 하나는 우리의 현실이라는 텍스트를 관찰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를 관찰한다. 또한 저자는 성경을 관찰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느끼시고 무슨 생각하시고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를 관찰한다. 이 두 측면이 허투루 이뤄지지 않는다. 탁월한 구약 신학자로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관찰은 깊이가 있고 정확하고 날카롭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관찰 또한 날카롭다. 특별히 저자는 고난과 슬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민감하다. 특히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설교에 나타난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탁월하다. 저자의 또 다른 저서들을 보면 일상이란 말이 들어간 책들이 여럿 있다. 그만큼 저자의 관심은 일상 속에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일상의 삶,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세속적인 삶, 반복적인 삶, 그 일상의 삶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허무하게 만든다. 일상은 무거운 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상은 하나님을 만나는 은총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 책의 설교들은 일상의 현실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대한 관찰과 묵상이 한 자리에서 만나서 잉태되고 숙성되어 탄생된 설교들이다. 


우리는 흔히 설교라고 하면 떠올리는 정형화된 형식이 있다. 바로 삼대지 설교이다. 서론이 나오고 삼대지가 있고 결론으로 끝을 맺는 설교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설교의 특징은 대개 연역적이다. 먼저 본문의 교훈을 선포하고 그 내용을 풀어나간다. 그러나 이 책의 설교들은 이런 전형적인 설교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서론부터 파격적이다. 예화가 등장하기도 하고 성경 속으로 곧바로 들어가기도 한다. 결말의 형식도 다양하다. 기도문으로 끝나기도 하고 예화로 끝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게 끝인가 싶은데 갑자기 끝날 때도 많다. 그래서 이 설교들의 첫 번째 형식적 특징은 자유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롭다고 해서 무질서하게 산만하지는 않다. 분명히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설교들의 두 번째 형식적 특징을 소나타 형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교향곡을 비롯해서 소나타 형식의 악곡의 특징은 주제 멜로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제 멜로디를 다양하게 변주해 가면서 절정을 향해 치달아간다. 이 설교들을 읽으면서 마치 소나타나 교향곡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주제를 작은 소리로 조용하게 연주한다. 그런데 그 주제가 점점 확대 확장되면서 웅장하고 울림이 있는 절정을 맞은 후에 결말로 끝을 맺는다. 일상에서 출발한 메시지가 하나님의 위대하고 웅장한 스토리로 끝을 맺는다. 말하자면 이 설교에서 설교자는 베에토벤이나 모짜르트 같은 작곡자가 되는 셈이다.


설교를 읽던 중에 저자의 독특한 화법 한 가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저자가 열거법을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다는 점이다. 다른 저자의 책에서는 흔히 발견하지 못하는 문학적 기법이다. 한 가지 내용을 서로 다른 표현으로 나열하는 이 방식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는 듯 하다. 어찌 보면 위에서 언급한 한 주제의 변조를 통한 반복을 마이크로한 영역에서도 적용하고 있는 듯 보인다. 또 한 가지는 이 방식이 혹시 구약 성경이 즐겨 사용하는 문학적 장치를 끌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구법이 구약의 시가 문학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문학적 기법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있다. 대구법이 두 개 항목의 열거법이라면 열거법은 서 너 개의 짝을 가진 대구법이라도 말할 수 있다. 혹시 저자는 구약을 연구하다가 구약의 표현 방식마저 몸에 습관처럼 배어 버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쯤 되면 저자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일종의 오마쥬)으로 나도 이 독후감의 일부를 열거법을 사용해서 쓰고 싶어 진다.


저자는 열거법 매니아입니다.

열거법은 반복입니다.

반복은 음악과 같은 리듬을 낳습니다. 

저자의 열거법은 반복하지만 변화가 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설교들의 공통점은 결말 부분은 항상 희망적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아무리 서론 부분에서 어두운 이야기, 우울한 이야기, 슬픈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마무리도 그렇게 끝나는 법이 없다. 마치 한 편의 시편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시편을 보면 처음에는 비탄에 젖어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같은 시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환희와 찬양, 감사와 경배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험이 있다. 그 만남과 경험을 통해 시편 기자는 도약을 이룬다. 이 책의 설교들 또한 그러하다. 암울한 현실, 절망적인 현실, 의문스러운 현실을 솔직하게 직면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도약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 지는 순간이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이 책의 저자는 이 설교를 전하고 나서 찬송을 불렀을 것 같다. 믿음의 도약으로 말미암아 고양된 영적 감정을 찬송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지지 않을까? 이 설교를 듣는 회중들 역시 이 설교의 맥락을 잘 따라왔다면 그들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함으로 인해 벅찬 감격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는 쉼표에 대해서 논한다. 쉼에 대한 성경적 주제들을 두루 언급하면서 마지막으로 사역자들에게 쉼의 필요성에 대해 권면하고 있다. 역시나 이 책은 설교자이자 사역자인 이 땅의 목회자를 향한 책이었다. 이 에필로그의 내용은 유진 피터슨의 목회론과도 많이 맞닿아 있는 듯 하다. 유진 피터슨은 목회자는 바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아무도 이 땅의 설교가 문예적 신학적 감수성을 잃어 버린 이유 중 하나는 목사들이 너무 바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제목처럼 하나님은 뒤를 돌아 보아야만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정신 없이 앞만 보고 비전으로 포장된 목회적 목표 달성을 위해 오늘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동분서주하는 목회자들이 어떻게 뒤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감정은 솔직히 부러움이었다. 나도 이 책에 나와 있는 설교와 같은 수준을 설교를 하고 싶다. 그저 그랬으면 좋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꼭 해 보고 싶은 열망이다. 이런 설교를 할 수 있는 저자가 부럽다. 동시에 나는 결코 할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감도 든다. 나는 저자처럼 구약학자가 아니다. 과연 신대원 과정을 마친 정도의 실력으로 저자처럼 깊이 있는 메시지를 성경의 우물로부터 건져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한 나를 기죽이는 것은 저자의 박식함과 풍성한 인문학 지식이다. 이런 지식이 바탕이 되어 문예적 에세이의 골격이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한 가지 드는 의문이 문예 신학적 에세이는 특별한 훈련과 교육을 받은 사람,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 가려고 하다가 다리가 찢어질 수 있듯이 보통의 평범한 설교자는 문예 신학적 에세이를 섣부르게 따라 하려다가 이도 저도 아닌 중간도 못 가고 죽 쓰는 설교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든다. 삼대지 연역식 설교가 최고가 될 수는 없을지언정 중간은 가게 해 줄 수 있는 안전판은 될 수 있지 않을까? 또 한 가지 염려는 이와 같은 설교를 청중이 소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이다. 분명히 문예 신학적 설교를 열렬히 환영할 청중들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이와 같은 설교에 거부감을 가질 청중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내가 보기에 문예 신학적 설교는 청중들이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들어야 한다. 중간에 집중력을 잃어 흐름을 놓쳐 버리면 그 뒤에 나오는 말들이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 말들인지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존의 삼대지식 설교는 자다가 하나를 놓쳐도 두 개는 능히 건질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가 어렵다느니 복잡하다느니 하면서 불평할 청중이 분명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더구나 기존 설교자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을 가진 청중들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솔직히 혹시 이와 같은 설교는 소위 인텔리 계층 이상에 호소력 있는 설교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남는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설교자, 사역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반드시 이 책 혹은 저자의 다른 설교집을 꼭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옷을 팔아서라도 이 책을 사라고 권할 것이다. 이것이 설교의 전부가 아닐텐데 … 천편일률적이고 진부한 설교의 대안은 어디에 있을까 … 라고 고민하는 설교자 혹은 설교 연습생이 있다면 이 책은 방향을 알려주는 지시등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위에서 문예 신학적 설교를 하려고 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험 없이 변화를 이룰 수 있는가? 위험을 감수하려는 용기 없이 어떤 개혁도 불가능하지 않은가? 나는 母敎會에서 강해 설교를 들으며 성장했다. 강해 설교만이 성경적 설교라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강해 설교라고 불리는 그 설교가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성서실증주의와 무인격적 설교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누구 못지 않게 나 자신이 뼈저리게 느껴왔던 바이다. 나에게 아직 문예 신학적 설교라는 말은 여전히 낯설고 생소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그 미지의 세계를 탐구해 보고자 하는 열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열망은 크지만 실력은 없는 이 초자배기 어줍잖은 설교자 지망생에게 먼저 길을 개척한 선배이자 선생님으로서 저자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이 독후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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