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실천신학

설교 비평 그레이다누스의 빛에서 본 전도서 설교

이창무 2015. 5. 1.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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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평 그레이다누스의 빛에서 본 전도서 설교



안 오순 목사님의 ‘삶의 즐거움을 찾아서’라는 설교를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의 ‘전도서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의 빛 아래에서 설교의 한계와 방향성을 분석해 보았다.




설교 제목 : 삶의 즐거움을 찾아서

설교 본문 : 말씀; 전도서 2:1 - 11

설교자 : 안 오순 목사

설교일자 : 2008년 12월 1일 주일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북한은 “우리와 손을 끊겠다”고 하고, 우리나라는 8년 만에 빌려준 돈보다 갚아야 할 돈이 더 많은 ‘순 채무국’이 되었어요. 연말은 즐거움보다는 우울함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아야 할까요?


  1절을 봅시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그는 마음껏 즐김으로써 쾌락이 뭔가를 알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허무한 일입니다. 그는 웃음을 생각해 보았어요. 여기서 ‘웃음’은 탤런트 전원주 씨의 웃음처럼 크게 웃는 웃음입니다. 그녀는 별 것도 아닌데 크게 웃어요. 그런데 전도자가 웃음을 자세히 보니까 그것도 미친 짓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웃음 뒤에 허무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웃음 속에서 보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즐깁니까? 3절을 봅시다.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 그는 마음으로는 지혜를 찾으면서 술에 취합니다. 그는 한 잔의 술과 함께 인생과 사랑의 기술을 터득합니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났습니다.


  1975년, 제가 대학 새내기 때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철학과 남학생 병태와 불문과 여학생 영자가 미팅에서 만나 사랑을 키워갑니다. 병태가 입영열차에 몸을 싣자, 영자는 그 창문에 매달려 키스하며 말합니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기다릴게 꼭 돌아와.” 한편 병태 친구 영철이는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절망합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동해바다 절벽 위에서 파란 물을 가르며 떨어집니다. 그때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이 울려 퍼집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영화는 암울하고 불안한 대학인들의 미래와 함께 장발단속, 음주문화, 무기한 휴강, 군 입대 등 당시 대학문화를 드러냅니다. 동시에 지성과 술의 조화를 통하여 즐거움을 찾는 일 역시, 허무하다는 메시지를 보여줍니다.


  전도자는 다시 어디에서 즐거움을 찾습니까? 4절을 봅시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그는 사업을 크게 하여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는 어떤 프로젝트를 벌입니까? 그는 왕궁을 건축하는데, 무려 13년이나 걸렸어요(왕상 9:10). 그는 많은 신도시들을 건설합니다(왕상 9:15-18). 농경문화의 ‘인프라’(infrastructure)라고 할 수 있는 소와 양떼들의 수를 증가시키고, 노비의 수도 크게 늘립니다. 그는 당대 최고부자가 됩니다. 그는 문화예술 사업에도 손을 뻗치고, 유흥문화에까지 투자합니다. ‘기쁨조’들도 특별 관리합니다. 그는 정치계에도 진출하여 권세도 가집니다. 돈만 있고 권세가 없으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세금 포탈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서는 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지혜까지 가집니다(5-9). 최고 명문학교 ‘예루살렘 MBA’를 졸업합니다. 머리가 없으면 그 많은 돈과 권세도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어요. 그는 ‘졸부’가 아닌 유능한 CEO로서의 명성을 갖춥니다. 그는 마침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정상 맨’, 온 세상이 부러워하는 ‘최고 봉’에 섰습니다.


  그는 누굴 위해 달렸습니까? “나를 위하여”라고 고백합니다(4, 6, 7, 8). 그는 자기만을 위해서 달렸습니다. 마침내 정상에 우뚝, 그리고 홀로 섰습니다. 그는 얼마나 수고했나요? 10절입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는 즐거움을 찾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쾌락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기쁨을 누립니다. 이것은 그가 한 모든 수고의 보상입니다. 뭔가를 얻고자 한다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잠언은 말씀합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4). 부지런한 사람이 뭔가를 성취하고, 그 성취를 통해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그 즐거움이 영원합니까? 11절을 읽읍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힘든 노력 없이 살을 빼는 일이 쉽지 않지만, 간혹 빼는 경우가 있어요. 이런 사람은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합니다. 쉽게 살이 원상복구가 되고 말아요. 반면 정말 힘들게 운동하고 애를 써서 살을 뺀 사람은 그 즐거움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수고를 통해서 얻는 즐거움’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어요. 분명 처음에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로또’ 당첨이 헛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애를 써서 얻은 즐거움이 헛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나요? 왜 수고를 통해서 얻은 즐거움이 처음에는 기쁜데 후에는 헛됩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영혼의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기만을 위해서 얻은 것들은 때가 되면 한계가 드러납니다. 이것은 마치 목마를 때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요. 자기 성취를 통해서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일에 ‘all in’하는 사람은 일중독에 빠지고 맙니다. 일중독에 빠진 사람이 정신을 차리면 허무에 빠집니다. 의욕상실증에 걸려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멍만 때리며’ 삽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없이 자기만을 위해서 수고하여 얻은 즐거움도 헛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디에서 즐거움을 찾나요? 많은 사람들이 먹는데서 찾아요. 먹음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요. 지역 특산물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별별 먹을거리를 반드시 먹어야만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아요. 일부 고상한 척하는 사람은 우상숭배에서 즐거움을 찾아요. 대부분의 우상숭배자들은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쾌감을 느낍니다. 또 헬라철학 중 하나인 ‘쾌락주의’(Hedonism), 즉 ‘에피쿠리안니즘’(Epicureanism)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쾌락의 추구라”고 말합니다. 신학자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는 그의 책 The Challenge of the Disciplined Life: Christian Reflections on Money, Sex, and Power(경건한 생활에 대한 도전: 돈, 성, 그리고 권력에 대한 기독교인의 반응)에서 “인간의 욕망 중에서도 가장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욕망의 정점에 돈과 성, 그리고 권력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이 세 가지에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가 참 즐거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점점 황폐화되어 갑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합니까? “배우로서 누렸던 모든 것도 버릴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배우 심은하에서 아내와 엄마 심은하로 만족할 수 있게 해주신 것, 그리고 한 때의 영광을 그리워하기보다 그 힘으로 더욱 감사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영화배우 심은하 씨가 기독교 잡지 ‘빛과소금’ 12월호에서 털어놓은 신앙고백입니다. 그녀는 “화려하지만 헛헛하고, 다 가졌으나 한없이 부족하던 삶을 당신(하나님)이 주신 가족들이 바꿔놓았다”고 지난날을 회상합니다. 그녀는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 주고 싶다. 하나님께 쓰임 받아 벼랑 끝에 선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앞으로의 바람을 전합니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강마에’를 연기한 김명민 씨는 “함께 연기해 보고 싶은 여배우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합니다. “처음 심은하 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심은하 말고는 다른 배우는 생각도 않는다.” 이러한 ‘톱스타’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만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니, 의미 있는 말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사마리아에 살았던 한 여인은 삶의 즐거움을 남편에게서 찾았어요. 하지만 처음에는 괜찮다가도 좀 지나면 별로였어요. 남편만 갈아 치웠어요.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냥 체념하고 사는데, 이 여인은 보통이 아닙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이 참 남편으로 오십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고 참 즐거움을 누립니다. ‘예수님이 주는 물을 마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예배드리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예배드리면 그 안에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참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그 즐거움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표출됩니까? 더 이상 남편을 갈아치우지 않아요. 남의 남편과 비교하며 갈등하지 않아요. 오히려 참 남편이요 즐거움의 근원인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즐거움을 누립니다(요 4:28-29).


  우리는 어떠하나요? 어느 덧 한해를 마무리 짓는 시기가 되었어요.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꿀꿀’해져요. 지금은 경제까지 ‘칼바람’이 불고 있으니 더욱 그래요. 재고품을 싼값에 파는 이른바 ‘땡처리’가 유행인데, 그것도 잘 팔리지 않는대요. 이런 중에도 립스틱과 소주는 잘 팔립니다. 립스틱은 다른 화장품에 비해 값이 싸고, 게다가 립스틱 하나만 발라도 멋을 낼 수 있기 때문이래요. 소주가 잘 팔리는 이유도 값은 싸고 그 효능은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정말로 잘 팔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황을 실감해요.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도 이런 문제에 눌려서 피곤함으로 보내기 쉽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배드리는 삶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합니다. 그 예수님을 전하는 데서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결과물에서 즐거움을 찾고 누리려고 하면 자칫 세상 사람들처럼 되기 쉽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아간다는 그 사실 자체가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까요? 누군가가 제게 묻더군요. “목회하신지 얼마나 되셨나요?” “전 사회생활이라고는 군대 생활 외에는 해보지 못했어요.” 그 많은 세월에 비해 겉으로 드러난 일은 대단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말씀연구를 통해서 예수님을 좀 더 깊이 만나고 배우고, 그 예수님을 전파하는 일을 생각하면 즐겁습니다. 교회 성장학을 가르치는 교수의 마지막 한마디를 들었어요.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목자의 기쁨은 내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데 있습니다. 이 기쁨이 곧 하박국 선지자의 기쁨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 할 겁니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겁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십니다”(합 3:17-19a).

 (설교문 전체가 3 페이지 정도로 짧기 때문에 따로 요약본을 넣지 않고 전문을 실음)


내가 이 페이퍼를 위해 선택한 전도서 설교는 안 오순 목사의 전도서 2:1-11을 본문으로 한 ‘삶의 즐거움을 찾아서’라는 설교이다. 가급적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전도서 설교를 대상으로 하고 싶었으나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전도서 설교를 현 출석 교회에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한국 교회 전도서 설교의 현주소는 한 마디로 ‘전도서 설교를 잘 하지 않는다’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의 ‘전도서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의 1장 전체가 전도서를 해석하고 설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라는 주제에 할당되고 있다. 그만큼 전도서 설교는 설교자에게 부담을 주는 본문이다. 그래서 주변 지인들의 추천을 받아 전도서 전체를 강해설교하신 목사님 한 분이 있음을 알게 되어 그 분의 설교 중 한편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이 분을 선택한 것이 과연 잘한 선택인가 하는 회의가 든다. 왜냐하면 안 오순 목사님은 내가 분석하기엔 너무 높은 곳에 계신 설교의 전문가이시기 때문이다. 안 목사님은 총신 신대원에서 성경적 설교로 학위 논문을, 역시 총신에서 헬무트 틸리케에 대한 설교 연구로 신학 석사를, 그리고 백석 신대원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청중에게 들리는 설교’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감히 내 주제에 이런 분의 설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또한 한국 전도서 설교의 현 주소를 점검하기에는 이 분의 설교 수준이 평균 이상이라서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분의 설교를 읽어 보니 참 잘 쓴 설교요 성경에 충실하고 또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교하려고 애쓴 설교라는 점을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설교문을 더욱 자세히 읽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이 설교가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른 설교라 할지라도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의 빛 아래서 한계점과 개선점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이 설교문의 한계점에 대해서 살펴 보자.


첫째, 적합한 설교 본문을 정하는 일에 있어서 실패하였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전도서 1:12-2:26까지를 하나의 본문으로 나누었다. 물론 이 본문이 약간 길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본문 속의 세부 단락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레이다누스의 견해대로 좀 길더라도 1:12부터 2:26까지 전체를 하나의 설교 본문으로 정하든지, 아니면 본 설교처럼 2:1-11까지만 본문으로 취하더라도 전 후 맥락과 연계성 속에서 해당 본문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이 설교는 오직 2:1-11 그 본문 내에서만 의미를 해석해 내고 있지 앞 뒤 본문과의 주제적 연결 흐름을 전혀 포착해 내지 못하고 있다. 설교 본문을 그 본문이 위치하고 있는 앞 뒤 문맥 속에서나 혹은 그 본문이 속한 책의 전체 흐름 속에서 읽어내지 못하는 일은 한국의 설교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이다. 설교자가 본문을 떼어내서 맥락을 무시한 채 일종의 명제적 진리처럼 제시하는 일은 전혀 낯설지 않다. 짧은 설교 본문을 선택한 후에 그 본문의 단어 하나 하나를 설명하는 것을 소위 말하는 깊이 있는 설교, 잘 쪼개는 설교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원래의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최소한의 의미 단락이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나는 배웠다. 복음서에서는 그런 부분을 페리코프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구약의 지혜 문학에서는 어떻게 칭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본문은 그 최소한 의미 단락보다 더 작은 단락을 설교 본문으로 취함으로 인해서 원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살리는데 실패했다고 본다.


둘째, 수고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라는 두 관점을 모두 포괄하는 주제 설정에 미흡하였다. 본문은 인간의 수고에 대해 기쁨의 원천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무익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이렇게 전도서에서는 서로 모순이 되는 듯한 주장을 한 곳에서 펼치는 경우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주제 설정을 할 때 이렇게 상반된 주제를 포괄할 수 있는 주제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설교자는 수고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라고 두 가지 관점을 모두 언급하기는 하였지만 이를 통합적으로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일에 있어서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각각을 그냥 병렬적으로 나열하기만 하였다. 이렇게 되면 청중들은 과연 저자가 말하려고 했던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상당히 혼란스러워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는 청중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전도서 본문 내에서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들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 설교자는 두 관점을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나열하기 때문에 청중은 수고를 하란 말인지 수고를 하지 말라는 말인지 종잡을 수 없게 될 수 밖에 없다.


셋째,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단조롭다. 이 설교자는 전도서 본문과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 사건을 유비 관계로 활용하여 전도자가 즐거움을 추구했던 과정과 여인이 다섯 명의 남편을 두었던 과거를 동일한 관점 즉 수고의 헛됨으로 풀이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설교자는 삶의 즐거움은 그리스도와의 만남 즉 예배에 있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유비를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려고 한 점 역시 탁월하고 요한복음 4장을 그 근거로 삼은 것 역시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체 설교에서 오직 이 한 부분에서만 그리스도와 관련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좀 아쉽게 느껴진다. 해 아래서의 수고의 무익함에 대해서는 신약의 다른 본문들 속에서도 좀 더 다양하고 풍성한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신 설교자는 시의성이 사건들 속에서 소재를 찾으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시사적인 사건들을 언급함으로 청중들의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성경을 전체로 보고 계시의 점진성을 주요 모토로 삼는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좀 더 신약 성경의 내용들을 부각시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넷째, ‘해 아래에서’라고 하는 핵심적인 구절을 붙들지 않기 때문에 설교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를 놓치고 있다. 전도자는 본문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같은 장 24절부터 26절까지에서 보면 즐거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으로 말하고 있다. 다만 해 아래에서 즉 하나님 없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없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만족과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헛된 애씀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해 아래에서 라는 구절은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해 아래에서라는 관점을 잃어 버리면 전도자의 말은 모순 덩어리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이 설교에서 설교자는 해 아래에서 라는 말을 설명해 주지 않고 있다. 해 아래 라는 관점이 없기 때문에 설교자는 시종 일관 즐거움의 추구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도서 기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즐거움의 추구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해 아래에서는 헛되다는 것이 전도자의 관점인데 이를 무시하게 되면 자칫 이 설교가 금욕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설교자가 이런 함정에 빠진 이유는 본문을 전도서 전체의 맥락에서 살피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본문 안에만 갇히게 되면 설교자는 핵심을 놓치고 지엽적인 부분으로 지나치게 몰입하게 되곤 한다.


다섯째, 현재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누려야 한다는 전도자의 방향 설정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난 결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전도자의 이 본문의 결론으로서 본문 24절부터 26절까지 현재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선물들을 즐거워 하며 누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교의 결론은 모든 즐거움의 추구가 헛되나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기쁨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전도자는 예배와 사역을 즐거워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더구나 이것이 신구약의 대조점도 아닌 것 같다. 일종의 이원론적 경향도 여기에 보여지고 있다. 이 세상은 허무하고 악하니 세상 낙을 다 버리고 오직 신앙 생활 안에서 얻는 즐거움만을 추구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이와 같은 성속 이원론, 영육 이원론 성향은 한국 교회의 설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어찌 보면 이런 이원론이 교회의 행사나 사역에 동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설교자에 의해 선호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전도서는 해 아래에서 삶에 대한 비관과 부정을 강하게 표출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금 현재 일상의 삶에 대한 긍정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설교는 결국 후자의 측면 즉 일상의 삶에 대한 긍정을 상실하여 전도서의 두 축 중에 한 축이 무너져 버린 설교가 되고 말았다. 교회 밖에 삶에 대해서 지극히 현실주의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전도자의 관점을 놓쳐 버린 점은 이 설교에 대해 느끼는 가장 큰 아쉬움 중의 하나이다.


여섯째, 서론의 역할이 너무 축소되어 있어서 임팩트가 없다. 이 설교는 서론이 단 세 줄로 끝나고 있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설교 형식에서 특별히 서론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만큼 서론 부분은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서론에서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현재 나의 삶에서 문제 상황을 발견하고 성경에서 그 해답을 기대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설교는 서론이 너무 간략하다. 물론 우울한 시대에서 어떻게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가 라는 문제 의식을 전달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너무 짧은 나머지 서론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레이다누스는 2:1-11부분이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론 부분에서 즐거움을 얻기 위해 헛된 추구를 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과연 그런 추구가 어떤 유익을 주고 있는지를 던지면서 청중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 설교는 그런 서론의 기능을 거의 담당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본문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다. 이런 부분들을 모아서 좀 더 서론에서 다루어 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까지 이 설교에 대해서 그레이다누스의 빛 아래에서 본 나의 관찰의 결과를 기술하였다.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온통 이 설교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만을 남겨 놓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설교가 한국의 설교 평균을 수준을 넘는 좋은 설교라고 생각한다. 또한 성경 신학적 설교에 근접하려는 설교라도 본다. 한편 이 설교에 대해 이렇게 설교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정황도 유추해 보았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이 설교가 전도서 전체를 연속으로 강해한 시리즈 설교의 일부라는 점에 있다고 본다. 연속 강해 설교를 하게 되면 설교자는 각 설교에서 중복을 피하려고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청중은 이미 들었던 설교와 거의 흡사한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집중하여 들으려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서 해 아래에서 라는 중요한 개념에 대한 설명이 너무 미흡하다고 했지만 만약 이미 앞선 설교에서 이 부분을 충분히 강조했다면 여기서 설교자는 이미 청중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생략했을 가능성도 있다. 서론이 간략한 이유도 시리즈 설교 중 일부이기 때문일 수 있다. 사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의 책 ‘전도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읽으면서 느낀 가장 큰 당혹감이 바로 중복의 문제였다. 그레이다누스의 책에서 2장부터 16장까지 본문을 설교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중복된 내용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전도서 자체가 주제의 반복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만약 거의 동일한 회중들을 상대로 해서 매주 전도서로 시리즈 강해 설교를 한다면 처음에는 신선한 전도서 설교라고 좋아할지 모르지만 조금 지난 후에는 반복되는 내용으로 인해 지루해 가능성도 크다. 과연 전도서와 같은 지혜 문학을 시리즈로 강해 설교하는 것이 좋은 방식이냐 하는 점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쩌면 하나의 의미 단락을 중심으로 해서 각 설교를 독립된 설교로 진행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만약 혹시라도 설교자께서 이 페이퍼를 보신다면 일단 위에서 행한 나의 분석은 이 설교를 시리즈 설교의 일부로서 라기 보다는 하나의 독립된 설교로서 보고 분석한 점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그렇다면 위에서 행한 나의 분석을 바탕으로 해서 본 설교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제안을 몇 가지 해 보고자 한다.


첫째, 본문의 선택은 1:12-2:26까지를 하나로 하는 편이 좋다. 한 편의 설교로 다루기에는 조금 길기는 하지만 자기 고백적인 본문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내용을 다루기가 어렵지는 않다. 만약 이 본문이 너무 길어서 부담스럽다면 이 설교처럼 2:1-11절을 택하되 거기에 더하여 2:24-26을 추가하여 본문으로 선택하는 것을 제안해 본다. 왜냐하면 2:24-26에 하나의 의미 단락 전체의 결론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결론을 배제하고 2:1-11만을 다루는 것은 원저자의 의도를 왜곡시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전도서에서 본문 선택이 매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의미 단락을 구분에 대해서도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견해들이 있다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전도서 같은 경우는 너무 작게 단락을 나누는 것보다 크게 의미 단락을 나누는 편이 더 안전할 수 있을 것 같다.


둘째, 이원론적 시각을 극복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교회에 만연된 이원론적 시각을 극복하는데 가장 도움을 주는 책이 전도서가 아닐까 한다. 전도서 기자는 우리의 삶을 부정과 긍정이라는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보도록 유도한다. 사실 우리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부정과 긍정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광대와 같은 삶이 우리들의 삶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전도서는 사람의 수고에 대해 기쁨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무익하다고 말한다. 즐거움의 추구는 헛된 것이지만 동시에 전도서 기자는 삶을 즐기라고 권면한다. 이것이 전도서를 읽는 묘미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설교에서는 이런 전도서의 묘미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이원론, 선과 악, 빛과 어두움의 이분법적 틀 안에서 전도서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이 설교가 좀 더 전도서의 메시지에 근접하려면 그러므로 인생의 즐거움이라는 주제에 대해 천착해 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대해서 기독교 희락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존 파이퍼 목사님의 관점이 좋은 포인트가 될 수 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모든 인간은 다 희락주의자이며 희락주의자인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가장 큰 희락을 추구하는 대신 작은 희락으로 만족해 버리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우리는 흔히 큰 바다를 앞에 두고 수영을 하기는커녕 해변에서 모래 놀이에만 열중하는 아이들 같다. 파이퍼 목사님은 가장 큰 희락이신 하나님을 기뻐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이를 가리켜 기독교 희락주의라고 불렀다. 본문에서도 전도서 기자는 희락을 추구하되 하나님의 빛 아래서 추구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이퍼 목사님의 기독교 희락주의와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해 아래에서의 희락 추구가 아니라 구름을 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연결된 희락 추구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설교자가 예배와 사역 등으로 기독교인의 희락의 범위를 한정 짓은 것은 무척 아쉽다. 이 점은 꼭 교정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다.


셋째, 그리스도와 연결시키기 위한 좀 더 다양한 방식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전도서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식을 메인으로 삼고 그 외 두 세 가지 정도를 보조적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설교에서는 유비 관계를 사용했으나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쉽다고 했다. 수고에 대해서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등을 통해서 조명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수고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고린도전서 15장 ‘.. 우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로라’라는 부분을 통해서 수고의 긍정적인 측면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즐거움에 대해서는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 지으신 만물을 보시고 좋다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을 짚어 볼 수도 있고 요한복음 2장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도 있다. 성경 외적 자료로는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 문의 답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인용하는 것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기독교 희락주의의 접근 방식처럼 즐거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있지만 가장 큰 즐거움, 최고의 즐거움 예수 그리스도라는 식으로 점진적 접근 방식을 취해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이 설교가 취한 방식이 너무 단조롭고 투박하기 때문에 좀 더 입체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 본다면 더 완벽한 설교가 되리라고 기대해 본다.


백석에서 설교학 박사를 취득하신 설교학 전문가이신 설교자답게 안 오순 목사님은 동시대에 청중들에게 들리는 설교를 하고 계시며 최대한 성경 본문에 충실한 설교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내가 선택한 전도선 설교 본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이 설교를 통해서 배운 점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계점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의 ‘전도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라는 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드니 그레이다스의 책은 전반적으로 다 유익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지혜 문학과 그리스도를 연결하기 위한 일곱 가지 방법, 즉 점진적 구속사, 약속-성취, 모형론, 유비, 통시적 주제, 신약의 관련 구절, 대조가 가장 유익했다.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배제하면서 어떻게 타당하고 설득력 있게 구약의 본문에서 신약의 그리스도로 옮겨 올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방법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설명에 그치지 않고 전도서의 각 장에서 어떻게 이 방법들을 적용할 수 있는지 실례를 충분히 보여주어서 실습의 효과도 있었다. 성경신학적 설교가 참으로 까다롭기 때문에 잘 듣기 힘든 전도서를 가지고 이렇게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다는 신기한 체험을 하면서 이 페이퍼 작성의 나의 설교에 대한 시각이 새롭게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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