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서평

書評: ‘누가신학의 제자도와 청지기도’

이창무 2015. 5. 1.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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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와 청지기도

저자
김경진 지음
출판사
솔로몬 | 2007-02-1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백석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김경진의 『누가 신학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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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評: ‘누가신학의 제자도와 청지기도’


프롤로그

김경진 교수님이 저술한 ‘누가신학의 제자도와 청지기도’를 읽고 다음과 같이 1부에서는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2부에서는 본서의 장점, 문제점, 질문 및 건의점을 중심으로 비평해 보았다.

제 1 부 요약

제 1 장 서론

누가복음에 나타난 경제 사상에 대한 기존 연구가 재물 혹은 빈자와 부자라는 관계 속에서만 지나치게 편중되었다는 점을 극복하고자 저자는 기존의 제자도와 새롭게 부각시키고자 하는 청지기도라는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이해하고자 한다. 이를 누가 공동체의 삶의 정황을 고찰하고 다른 복음서와 비교를 통해 누가복음만의 독특한 청지기 사상을 조명하려고 한다.

제 2 장 누가-행전의 삶의 정황

1. 누가 복음서 서론에 나오는 데오빌로는 가상의 인물인가 실제 인물인가 하는 논란이 있다. 인위적으로 볼 수 없는 직위의 사용이나 후견인에게 책을 선사하는 당시의 관습, 서문에 매우 공들인 흔적들을 살펴 볼 때 실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데오빌로는 어떤 식으로든 기독교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에게 필요한 지식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누가 공동체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혼합된 공동체로 보이며 데오빌로는 그 공동체의 대표성을 지닌 인물로 간주될 수 있다.

2. 누가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은 바울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과 비교해 볼 때 도시 중심적 묘사가 빈번하다는 점, 공동체 내의 부유한 신자들에 대한 증거나 재물에 가르침에서 유사함이 있으며, 반면 누가 복음서에만 나타나는 구제에 대한 명령이나 빈자에 대한 자료에서 나타나는 절대적인 빈곤 계층에 대한 언급에서 차이가 난다. 이는 아마도 팔레스타인 지역의 빈번한 기근으로 발생한 계층으로 보인다.

제 3 장 마가복음의 제자도

1.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기록되었으며 예루살렘 헤롯 성전이 무너지기 전인 AD 64년에서 70면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은 수난 기사의 차지 비중이나 핍박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사례가 빈번하다는 점, 배교자들에 대한 경고 등이 자주 나타나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극심한 핍박 가운데 있었던 공동체였을 것이다.

2. 방법론은 균형 있는 자세와 본문 자체에 대한 강조를 기준으로 선택되어져야 한다. 절차 상으로는 먼저 마가복음의 삶의 정황을 연구하고 그 후에 제자도에 대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3. 마가복음의 제자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걸어 가셨던 그 길로 함께 가야 할 운명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체로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에 대한 묘사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마가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제자들이 희망과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새롭게 될 것을 믿으며 현재 삶에 위로와 격려를 주고자 한다.

4. 제자들의 대한 마가의 묘사를 살펴 보면 믿음의 부족함이나 이해력의 부족, 두려움, 자기 중심적인 욕망 등을 가진 부정적 존재들로 묘사된다. 그와 동시에 부르심 받은 제자의 즉각적인 순종이나 제자들이 보냄을 받아 사명을 성취함으로써 새로운 긍정적 삶의 모델로 제시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인 묘사가 더 많은데 이는 마가 공동체에 대한 경고이자 격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제 4 장 누가복음의 제자도

1.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에 비해 제자들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친 사건들을 축소하거나 생략해서 표현한다. 또한 마가복음에 빈번히 나타나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함을 생략한다.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 장면에서도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책망하신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2. 누가는 마가에 비해 제자들을 비종파적으로 묘사한다는 특징이 있다. 좀 더 개방적인 공동체로 제자 무리를 표현하고 있으며, 현재 누가 공동체 구성원들 역시 제자들의 무리와 같은 신분을 가진 제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3. 누가복음에는 유랑 제자와 정착 제자라는 두 종류의 제자직이 나타난다. 유랑 제자는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예수를 따라나선 제자들이다. 반면 정착 제자는 자기 소유를 포기하지는 않았으나 그 소유로 예수를 섬긴 제자들이다. 누가는 이 두 종류의 제자직을 모두 소개하면서 재물 사용에 있어서 완전한 포기뿐 아니라 바른 사용과 섬김의 가치도 함께 부각시키고 있다.

제 5 장 누가복음에 나타난 주종관계 모티프

1. 누가복음은 주종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에 있어서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서도 사용하는 용어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단어들의 용례가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이 말해주는 바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에 비해 누가는 주종 관계에 대해 더욱 각별한 관심과 신학적 전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2. 다른 복음서에 나타난 주종관계의 모티프를 누가복음과 비교해 보면 누가복음은 주종 관계의 모티프를 포함한 본문이 가장 많으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종 관계 모티프를 반영하는 단어를 가장 빈번히 사용하면서 다른 복음서에서 등장하지 않는 단어들을 많이 언급하였다.

3. 주종관계 모티프와 관련되어 누가는 그리스 식의 노예 제도에 매우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노예 제도를 바탕으로 해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그리스도의 종 또는 하나님의 종으로 표현하며 이 관심이 결국에는 누가복음의 독특한 청지기 사상까지 확장된다.

제 6 장 누가의 청지기도

1. 누가복음 내에서 청지기는 가사 전체를 주관하기도 하며 주인으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아 회계 업무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 당시 사회에서 청지기들의 실제 신분은 국가에 소속된 공노예이거나 부유한 개인들에게 소속된 노예들이었다.

2. 신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 비유에서 청지기는 자신의 재산이나 소유를 전혀 갖지 않고 임시적으로 주인으로부터 위탁된 재물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선한 청지기의 모범적인 자세와 악한 청지기의 불의한 자세가 대조되어 등장한다. 이 본문 바로 뒤에 시대의 징조에 관한 말씀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누가는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심판 때까지 청지기직의 수행을 선하게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제자 공동체의 모습을 교훈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비유는 그 공동체 내에서 특별히 재산을 많이 소유했던 이들에게 주고자 했던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3.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성경에서 해석이 쉽지 않는 여러 난해 구문들 중 하나이다. 어떻게 악한 청지기를 주인이 칭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청지기의 성품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지혜로운 처신을 칭찬한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가 자선의 실천을 통해 미래를 대비하였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결국 이 비유의 목적은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교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바른 사용이란 바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쌓는 것이 된다.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을 받았다면 의로운 청지기의 호혜적 행위는 더 큰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4. 열 므나의 비유는 앞선 다른 비유들과 유사성으로 인해 청지기직에 대한 비유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다른 청지기직에 대한 비유들처럼 이 비유 또한 종말의 시기를 대비하는 삶의 중요성과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 비유가 다른 앞선 비유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신실함뿐만 아니라 이윤을 남겨야 하는 책무까지 주어져 있다는 점이다.

5. 청지기도의 주제는 이제까지 살핀 것처럼 누가복음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청지기도의 개념을 문학적 장치를 통해 묘사한 이 비유들을 통해 청지기의 기능과 역할, 자세와 평가 등에 대한 공통적인 주제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결국 이 청지기도가 의도하는 방향은 이 땅에서 재물을 어떻게 선하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주제에 맞물려 있다.

제 7 장 재물에 대한 올바른 청지기도

1. 세례 요한의 윤리적 교훈에 대해 모인 무리들이 질문하였을 때 그 답변으로 임박한 종말 앞에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할 필요성과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구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간에는 재물관에 있어서 연속성을 보여준다.

2.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랑하라, 선대하라, 빌려 주라는 세 가지 자세를 당부한다.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부분은 어떠한 호혜적인 보답을 기대하지 말고 주라는 권면이다.

3. 예수와 제자들의 무리가 유랑 생활을 하는 동안 생계를 어떻게 해결했는가에 대해 누가복음에서는 갈릴리 여자들의 헌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러 명의 갈릴리 여인들이 제자들의 무리를 따르면서 자신들의 재물로 그들을 섬겼다. 특히 이 무리들 중에는 상류층에 속하는 요안나가 속해 있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며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는 하나의 예로서 보여지고 있다.

4.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 사랑의 실천에 관해 주어진 말씀이다. 이 비유에서 눈 여겨 볼 대목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의 물질을 사용해서 강도 만난 사람을 구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이웃 사랑이란 자신의 재물을 베푸는 자선 행위를 동반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5.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본문에 대해서 그 안이란 마음이란 아람어 단어를 오역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누가의 의도는 구제 행위를 통해서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것, 즉 구제에 대한 강조점은 재차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6.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뒤이은 말씀들을 보게 되면, 여기서 이기적 탐욕으로 인해 오직 쌓아두기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을 교훈하려고 함을 볼 수 있다. 결국 지혜란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를 실천하는 것이 된다.

7. 큰 잔치의 비유에서는 공동체 내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공동체 내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자기 재물을 써서 보답을 기대하지 않은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공동체 내 가난한 형제를 두고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것은 기독교적인 태도가 아니다.

8.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는 이웃의 궁핍함을 외면한 부자가 겪게 될 형벌을 통해 자선을 베풀지 않고 자기 만족 속에 살고 있는 부유한 자들에게 경고한다. 부자와 나사로가 운명이 극적으로 역전되는 모습을 통해 종말의 때를 대비하도록 교훈하고 있다.

9. 부자 관원과 삭개오의 사건에서 부자 관원과 삭개오는 대조적으로 비교되고 있다. 부자 관원은 율법을 지켰지만 부를 나누라는 예수의 요구를 거절한다. 반면 삭개오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죄인이었지만 부를 자발적으로 나누는 실천을 행하므로 예수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 둘의 대조를 통해 율법 조문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느냐 여부보다도 부의 사회적 실천이 더욱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윤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0. 누가는 좋은 예와 나쁜 예를 통해 자선을 베풀도록 교훈하고 자극하고 있다. 이러한 자선의 대상이 반드시 누가 공동체 내의 가난한 자들로 한정되는 것 같지는 않다. 부유한 자들의 자선 행위는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밖으로도 흘러가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제 8 장 재물에 대한 그릇된 청지기도[부의 오용]

1. 누가는 부자들이 받을 화를 구약 선지자들의 선포 형식을 빌어 표현하고 있다.

2. 큰 잔치 비유에서는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받게 될 비참한 운명에 대해 경고한다. 이는 누가 공동체 내의 부유한 자들에 대한 충고라고 볼 수 있다.

3.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의 죄는 아버지에게 받은 재물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한 죄이다. 청지기 사명을 외면하고 재물을 낭비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도 낭비의 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4. 누가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재물을 축적하기 보다는 구제를 행하라고 권면한다.

5. 결론적으로 누가는 재물에 대한 집착이나 낭비, 축적이 모두 재물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로 보고 비판하고 있다.

제 9 장 사도행전의 구제 모티프

1. 사도행전에는 다비다와 고넬료와 안디옥 교회의 예에서 구제의 모티프를 발견할 수 있다.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그녀가 행한 구제 덕분이었다. 고넬료는 경건과 함께 구제 덕분에 인정을 받았다. 안디옥 교회는 기근에 처한 유대인 형제들을 도움으로 공동체적 구제의 모델을 보여 주었다.

2. 누가는 누가의 공동체를 신명기적 이상과 헬라의 유토피아 사상의 희망의 실현으로 봄으로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아우르는 공동체적 이상을 보여주었다.

3. 누가복음에 나타난 구제의 모티프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몇몇 구제의 모티프는 두 책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4. 예루살렘 공동체와 쿰란 공동체는 재산의 공동소유를 했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으나, 예루살렘 공동체는 사랑에 의해 자발적으로 원하는 수준에서 기부를 한 반면에 쿰란 공동체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전 재산을 기부해야 했다는 점에서 상이점이 존재한다.

제 10 장 그리스-로마 세계의 자선 제도

1.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는 오직 일반 시민 계급에 속하는 자들에게만 행하여지고 정작 구제가 절실한 최극빈층은 제외되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2. 도시의 부자들이나 가신들이 피후견인들에 대한 사적인 구제를 행하는 일이 있었으나 이는 사랑의 발로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서였고 철저히 호혜주의적 관점에서 행하여졌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 일시적 도움이 될지언정 사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4. 클럽, 조합 및 장례 단체 등에 의해 이뤄진 구제는 본질과 목적에 있어 참된 구제라고 볼 수 없다.

5. 쿰란이나 엣세네파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율법 준수라는 차원에서 구제를 행하였다.

6. 유대교의 구제는 기독교의 구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호혜주의적인 자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보상을 기대한다는 점과 진정으로 구제가 필요한 극빈층에서 구제가 행해졌다는 점에서 당시 그리스 로마 세계의 일반적인 자선 제도와 차별성을 보인다.

7. 결론적으로 사회적 맥락 속에서 본 누가의 구제는 당시 일반적인 구제 제도를 뛰어 넘는 급진적인 사상이었으며 기독교적 사랑에 기초한 자발적인 구제를 강조하였다.

제 11 장 결론: 청지기도와 구제-누가신학의 재물관

1. 누가복음은 핍박 상황 속에 있는 마가복음의 제자도와는 달리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제자도에 대해 많이 논하고 있다. 그 결과 유랑 제자와 정착 제자라는 두 개의 구분이 생겨났다.

2. 누가복음에 나타난 재물에 대한 청지기 사상은 재물을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하고 자선을 베푸는 일에 선용함으로 주인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삶임을 강조한다. 만약 이런 삶을 외면하는 부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아울러 경고하고 있다.

3. 누가는 누가 공동체 내의 부유한 자들에게 자신이 가진 재물을 포기하여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것을 권면하며 사도행전을 통해서 이러한 삶의 실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제 2 부 비평

제 1 장 논지의 장점

첫째로 한국 교회가 당면한 현실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훌륭한 신학적 지침을 마련해 준다. 한국 교회는 초기 가난한 서민들의 종교였다. 그러나 현재는 교회의 중추는 도시의 중산층 계급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가 전체의 경제적 상황은 선교 초기에 비해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볼 때는 부자 나라라는 호칭이 아직은 어색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부유한 나라의 반열에 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헌금을 통해 적지 않은 재물을 수입으로 얻을 수 있었고, 교인들 중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재력을 갖춘 교인들이 늘어났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 교회가 과연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재물을 어떻게 어떤 곳에 사용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올바른 사용인가에 대한 숙고와 방향을 제대로 제시해 주지 못했던 측면이 있었다. 현실적으로 교회는 들어온 수입을 지금까지 대개 크고 현대적이며 가능하다면 화려한 교회당의 건축에 사용해 왔던 것이다. 이렇게 아직도 한국 사회의 그늘에 있는 가난한 빈곤층에 대한 구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자기 교세의 확장과 교회당 건축에 물질을 사용하는 모습이 세상이 보기에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게 될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일들이 누적되면서 한국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 큰 장벽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본서의 재물에 대한 청지기도라는 주제는 한국 교회가 앞으로 교회의 수입을 그리고 재물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그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며 복음적인가 하는 큰 밑그림을 제시해 주면서 든든하고 확실한 신학적 기반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둘째로 재물에 대한 제자도 관점뿐 아니라 청지기도 관점을 새롭게 제시하여 현실 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제자도에 관해 최근에 나온 저작 중에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작품은 얼마 전 고인이 된 고 존 스토트 목사님의 ‘제자도’라는 작품이다.  원 제목은 ‘Radical Discipleship’으로서 직역하자면 ‘급진적인 제자도’라고 할 수 있다. 왜 한국어로 제목을 번역하면서 급진적인 이라는 중요한 단어를 누락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의 원제목 대로 제자도라는 것은 굳이 언급을 하지 않더라도 급진적이라는 느낌을 가진 단어이다. 그런데 복음서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자신의 직업과 재산을 모두 다 포기한 사람처럼 보인다. 만약 신자가 된다는 것이 제자가 된다는 것과 동의어라면 모든 신자들은 다 자신의 직업과 재산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또한 논리적인 귀결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는 현실의 교회 안에서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생각으로 보인다. 그러나 청지기도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재물을 모두 다 버리거나 직업을 버리지 않더라도 자신의 재물을 선용함으로써 예수 따르는 일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이미지가 대다수의 교인들에게 접근할 수 있고 또한 필요한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너무 제자도의 급진성을 강조하다 보면 오히려 이것이 소수의 선택 받은 자들만을 위한 제자도로 남아 실제적인 영향력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누가신학이 가진 독특한 관점과 특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저자는 제자도와 청지기도에 있어서 누가신학만이 가진 독특한 강조점을 특별히 주목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공관복음이라고 불리는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대해서 각 복음서의 차이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애매하게 큰 범위를 잡지 않고 제자도와 특별히 재물의 사용이라는 관점에서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를 하게 되니 누가복음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과 독특한 신학적 관점을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차이의 배경에는 누가공동체가 다른 마태, 마가 공동체와는 또 다른 특징과 삶의 정황을 가진 공동체였다는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누가신학의 독특한 차별성과 개성을 청지기도라는 관점에서 잘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서 본 서의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제 2 장 문제점

첫째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제자도를 비교하는 것이 전체적인 주제와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모호하다. 본 서의 초반에 마가복음의 제자도와 누가복음의 제자도를 서로 비교하고 있다. 그런데 그 비교의 맥락이 주로 마가복음은 제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긍정적인 측면을 강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는 점에서 있다. 그러나 제자들에 대한 긍정적 시각 혹은 부정적 시각이 이 책의 전체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재물의 사용에 관한 문제와는 무관해 보인다. 만약 이것이 또 하나의 다른 주제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다른 주제라 하더라도 그 주제가 병렬에 놓여 있는 다른 주제와 유기적으로 연관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제자도와 청지기도를 통해 물질에 대한 누가신학의 강조점과 특징을 서술하려는 본 서의 목적에 잘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다만 마가복음의 제자도와 비교하면서 정착 제자와 유랑 제자를 모두 아우르려는 것이 누가신학의 의도라고 보여주려고 했다는 점은 매우 참신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누가복음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서로 극단으로 대비하면서 중간 지대의 요소를 남겨두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본문들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본문으로 대표적인 누가복음 1장에서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이다. 이 마리아의 찬가 속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결국 둘의 관계가 역전되는 새 질서의 도래에 대한 기대와 감격이 들어 있다. 부자의 존재를 긍정하면서 재물의 선용만 있다면 된다는 구도에 이 마리아의 찬가는 잘 맞지 않는 면이 있다. 또한 누가복음 6장의 평지 설교에 보면 가난한 자에게는 복, 부자에게는 화를 선포하고 있다. 여기는 물질을 선용하는 부자 혹은 물질을 이기적으로 쓰는 나쁜 부자의 구별이 전혀 없다. 그저 가난한 자와 부자로 통칭 대별되는 계급 혹은 계층을 포괄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본문 역시 본 서의 논지와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오히려 이 평지 설교 부분은 마태복음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표현을 통해 긴장을 완화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셋째로 청지기도의 문제를 구제란 단일한 관점으로 지나치게 협소하게 본 것 같다. 청지기라는 성경적 사고의 관점이 물질이란 측면과 구제의 실천이란 측면에서만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청지기인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위탁 받은 것에는 단지 재물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재능이라든지, 시간이나 능력과 재능 등등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기신 것들이고 우리는 청지기로서 이런 것들을 잘 활용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이바지하도록 할 책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누가신학의 청지기도를 오직 물질관과 구제라는 측면에서만 다른 것은 너무 폭이 좁지 않나 하는 문제 의식이 생긴다.

제 3 장 질문 및 건의점

첫째로 마가복음의 제자도가 비교 대상이 되었는데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의 제자도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으며 누가복음과 비교해서 어떤 유사상과 차이점이 있는가? 본 서에서는 오직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제자도를 비교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는 핍박 가운데 있는 공동체인 마가복음 공동체와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있는 누가의 공동체의 삶의 정황을 살펴 봄으로 누가신학의 독특한 제자도와 청지기도가 나오게 된 역사적 정황을 이해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과의 비교가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누가신학의 강조점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건의해 본다.

둘째로 개인 혹은 공동체의 구제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문제 해결이 될 수 있다고 궁금하다. 현대 사회는 구제라는 수단 한 가지로 해결할 수 없는 정도로 복잡해 졌고 제도라는 측면에서 접근도 있어야 하지 않은가? 물론 누가복음과 행전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문제 제기를 개인이나 공동체 측면에서 접근했지 구조적인 악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현대의 복잡다단한 사회 속에서 부자의 기부로 현실적인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묻는다면 대답은 부정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에는 기부 문화가 크게 발달해 있다고 자랑하지만 그러나 그런 부자들의 통근 기부만으로 사회 문제가 해결되거나 급진적으로 호전된 예를 찾아 보기 힘들다.

셋째로 청지기도는 제자도 내 일부로 포섭될 수는 없는 것인가? 반드시 제자도와 청지기도를 분리할 필요가 있는가? 청지기도라는 개념과 관점을 굳이 제자도와 분리시켜 새롭게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청지기도를 제자도의 하위 개념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문 내에서 청지기도를 교훈하는 예수의 말씀은 대부분 제자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다. 즉 제자들에게 제자도를 훈육하시는 과정 중에서 청지기도라는 사상을 제자도의 일환으로 제시했다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누가신학의 제자도에 나타난 청지기적 사상의 강조 정도로 이해할 수는 없을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에필로그

위와 같이 ‘누가신학의 제자도와 청지기도’에 대한 요약과 비평을 기술해 보았다. 감히 신약 전공 교수님의 학위 논문을 비평한다는 것이 주제 넘은 짓으로 보여 주저되었지만, 이것 또한 학습의 방편이라는 생각에 외람되지만 시도해 보았다. 책의 내용도 훌륭하였지만 신학 분야의 학위 논문의 구성과 흐름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점에서 교수님께 감사들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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