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실천신학

성공회 예배 탐방 보고서

이창무 2015. 5. 1.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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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란?

성공회는 16세기 영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성공회(聖公會)란 명칭은 한자문화권인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사용하는 교회이름으로, 사도신경의 '거룩한 보편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한자로 옮긴 이름이다. (참고 #2, #3)

대한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우리 조가 방문한 곳은 서울 정동에 있는 서울 주교좌 성당으로 대한성공회를 대표하는 성당이다. 서울 주교좌 성당은 한국전통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조화시킨 성당으로 1978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에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감사성찬례

성공회는 일정한 예배 양식을 따르는 전례적 예배를 드린다. 성공회의 전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성찬례(Eucharist)(줄여서 "성찬례")이다. 감사성찬례는 사제나 주교가 집전하고 설교나 강론을 하며 허가를 받으면 일반 신자도 설교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조는 9월 11일 화요일 평일 오전 7시에 드려지는 감사성찬례에 참여했다. 이 예배는 주일 감사성찬례에 비해 약식으로 치러진다.

예배실

이날 감사성찬례가 드려진 곳은 세례요한성당 지하예배실이라고 하였다. 안내하시는 부제님의 당부사항을 잠시 듣고 우리는 예배실 안으로 들어갔다. 예배실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경건한 분위기였다. 입구로 들어서니 커다란 오르간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한국의 유명한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오르간이라고 하였다. 오르간은 성찬대를 등지고 서 있었으며 위에 작은 거울이 놓여 있었다. 예배실 가운데에는 성당을 설립하신 설립자 주교님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양 옆으로 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창문은 소박해 보였고 벽은 온통 하얀색으로 깔끔해 보였다. 예배실 앞에는 성찬대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 강단이 함께 놓여 있었다.

예배 순서

감사성찬례의 순서는 개회예식과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 파송예식 순으로 진행된다.


개회예식

시작 전 예배실 안은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오르간 연주자의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집전하시는 신부님과 조력을 하는 여성신도가 각각 손에 무언가를 하나씩 들고 조용히 앞으로 지나갔다. 예배를 집전하는 신부님의 기도를 통해 시작한 예배는 죄의 고백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순서가 성공회기도서라는 작은 책자 안에 상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예배를 처음 참석하는 이들에게 좋은 지침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동기도서는 성공회의 신앙생활, 예배생활, 신학과 영성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고 한다. 예배 내내 일어섬과 앉음을 반복해서 행하였다. 예배를 진행하는 인도자가 뒤에서 진행하는 모습과 온 회중이 짧은 대답과 몸짓으로 화답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찬송곡은 단조로운 리듬과 멜로디로 이루어져 있어서 처음 듣는 사람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이 대부분이었다.


말씀의 전례

성경을 읽는 독서자와 대도자가 모두 일반성도에게 맡겨져 있었다. 예배를 집전자 단 한사람만의 진행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역할을 성도들에게 맡김으로 모든 성도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예배를 진행하고 섬기는 일반성도들은 까다로운 절차를 통해 투표로 뽑아지며 2년 동안 책임을 지고 섬긴다고 한다.

신부님의 설교는 조금 짧은 느낌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장로교회의 설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공회는 신학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폭넓게 인정한다고 한다. 성공회는 신앙의 기준으로 성서의 권위와 이성과 전통을 삼고 있다고 말한다.

설교가 끝나고 난 후 우리에게는 생소한 니케아 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였다. 신앙고백이 설교 다음에 있는 것은 설교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인간의 견해와 신학적 오류들을 바로잡아주고, 공동체적으로 함께 고백함으로써 신앙적 유대감을 일으키기 위함이라고 한다.


성찬의 전례

말씀의 전례가 다 끝난 후 성찬의 전례를 진행하였다. 조력을 하시는 여성도님의 도움을 받아 신부님이 집례를 하셨다. 회중이 모두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신부님이 큰 잔에 담겨 있는 포도주에 찍어주는 떡(전병)을 받아먹었다. 영세를 조건으로 삼는 카톨릭과 달리 우리도 성찬례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성찬례가 시작되며 기도를 하는데 옆에 앉아계시던 부제님이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하셨다. 원래 이렇게 무릎의자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한다고 하셨으나 그날 대다수의 성도들은 그냥 의자에 앉아 기도를 하였다. 여하튼 이렇게 잠시만이라도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거나 기도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의식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성찬례는 매 예배 때마다 한다고 한다. 말씀례와 성찬례가 매일 드려진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이 모든 과정이 한 시간 안에 모두 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해 보였다. 성공회 예배는 말씀례와 성찬례가 함께 진행되어 예수님의 구원 사건이 매 예배 때마다 기념되고 깊이 경험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점은 주의 깊게 새겨 둘 부분이었다.


파송예식

성찬례가 끝난 후에는 파송예식으로 이어졌다. 파송예식에서는 공동체와 사회와 성도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하였고 평화의 인사로 서로를 축복하였다. 이러한 축복의 시간을 통해 공동체성을 느끼고 국가와 열방을 향한 마음을 품을 수 있어, 성도들로 하여금 이기적인 신앙보단 이타적인 신앙심을 가질 수 있게 한다고 한다. 파송예배를 끝으로 전체적인 예배는 모두 끝이 났다. 예배가 끝나자 성도들이 성찬대를 향해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갔다. 성도들뿐만 아니라 집전하셨던 신부님도 아래로 내려와 성찬대를 향해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가셨다. 이 모습이 예배의 주인은 설교자도 성도들도 아니고 오직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예배 후 견학

예배 후 신부님과 부제님과 함께 성공회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을 들고 나서 대성당을 향했다. 대성당의 내부모습은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를 떠올리게 하였다. 성당 벽에는 예수님과 성 스테파노, 성 사도요한, 성모 마리아, 성 이사야, 성 니콜라스의 모자이크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순교자와 사도와 성인과 선지자의 대표들이 함께 예배드림을 상징하는 것으로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보편적인 교회의 공동체의 일원임을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상징성은 좋으나 전체적으로 너무 화려해 예배의 본질에 집중하기에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고 보였다. 감사 성찬례 역시 너무 많은 순서가 오히려 예배를 산만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든 예배와 견학을 마치고 부제님과 인사를 드리며 나오는데 일 년간의 교회순서지를 모아놓은 곳이 눈에 띄었다. 그 곳에는 각 주일마다의 명칭이 차례대로 적혀 있었다. 성공회는 전 세계 예배가 통일되어 있어서 매 주일마다 모든 순서가 정해진 대로 집례 된다고 한다. 이렇게 모든 순서가 정해져 있기에 교회력에 따라 전체 구속사가 펼쳐지는 장점이 있는 반면 또 한편으로는 매 순간마다 나타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약점이 있지 않을까 하였다.


참고 #1 성공회의 상징에 대한 이해

ⓛ 대성당 : 주교좌가 있는 성당으로 ‘주교좌 성당’이 정확한 이름이다.

② 축성 : 성별(聖別)이라는 말로 보통 사람들, 보통 물건들 가운데서 뽑아 거룩한 존재로 떼어놓는다는 의미이다.

③ 성수 : 교인들 중에 손에 성수를 찍어서 십자성호를 긋고 자리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무릎을 꿇는 사람들도 있다. 의무는 아니지만 성수를 찍어 십자를 그어야 성당에 들어선 기분이 난다고 표현한다. 세례 주는 사제는 먼저 물을 축복하고 그 물로 세례받는 자의 이마에 십자를 긋는다. 주일 대미사 시작 때 제단에 성수를 뿌리는데 가옥축복식과 같은 축마식(마귀 쫓는 식) 때도 성수를 골고루 뿌린다.

④ 십자가 :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 수난의 모습을 조각한 고상십자가를 쓴다. 전통적으로 주교와 수사들은 십자가가 달린 목걸이를 목에 건다.

⑤ 십자성호 긋기 : 성찬식 핵심부에서 집전자가 “이것은 나의 몸”, “이것은 나의 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외운 다음 성체나 보혈이 든 성작(포도주 잔)을 약간 들어올릴 때 그것을 쳐다보면서 십자를 긋는 것이 가장 많다.

⑥ 성무일과 : 하루 일정한 시간에 올리는 기도로 크랜머 대주교가 개혁 당시 일반 교인들도 아침과 저녁 두 번의 기도와 시편과 성서를 읽고 들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는 1년 내내 의무적으로 드리게 되어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라는 대목은 개정된 예식서에서 그 부분이 없어져서 반드시 사제 인도가 필요 없도록 했다.

⑦ 키리에 : 성찬식의 시작 기도로 희랍어로 된 ‘키리에 엘레이손, 그리스데 엘레이손, 키리에 엘레이손’을 세 번씩 외우거나 노래했는데 1982년 개정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알기 쉽게 고쳤다.

⑧ 공도문 : ‘교회 예식서’(Book of Common Prayer)로 잉글랜드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기도문을 쓰도록 의회에서 결의한 기도서이며, 대한 성공회의 공도문은 1965년 8월 15일 발행한 것이다. 지금은 1998년 개정한 공도문을 사용한다.

⑨ 신명: 성공회 교인은 신자로서의 ‘신명’을 가지고 있으며 세례받기 전에 정한다. 그러나 요즘은 자기 본명으로 부르는 습관이 증가하고 있다.

⑩ 미사보 : 여성의 경우 세례나 견진 받을 때 대부모가 ‘미사보’를 씌워주는 관습이 있었지만 성공회의 공도문에는 이러한 언급이 없으며, 개인의 자유에 따라 사용하도록 한다. 

⑪ 교회력과 절기 : 교회의 한해를 대림절로 시작하여 절기마다 기념일이나 특별한 예식을 따라 제단보나 사제들의 제복 색깔이 바뀐다. 교회의 한 해인 대림절(참회→자색 제복)을 시작으로 성탄절(백색)과 공현절(생명→녹색), 사순절(참회→자색, 결혼식도 올리지 않음), 부활절(백색), 승천절, 성령강림절(적색→견진, 성직 서품식, 순교한 성인 기념식), 대림절 전야까지 성령강림 후 주일(장례식→백색 또는 흑색, 성 금요일→흑색)을 지킨다. 한국 성공회는 이러한 제복과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 #2 성공회의 기원과 역사

세계 성공회의 기원이 되는 영국 교회(the Church of England)는 16세기 유럽에 시작된 종교개혁의 연장 선 상에 있다. 특히 마르틴 루터 등의 대륙 종교개혁 사상이 일찍부터 전해져 영국 내에서도 개혁이 움트고 있었다. 특히 당시 영국을 지배하던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대와 반성직자 운동이 이미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영국 교회의 정치적 분립은 혼인무효(annulment)와 관련한 영국 왕 헨리 8세의 개인적 문제가 아닌, 당시 유럽의 국제 관계와 근대 왕정 국가의 탄생,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영향으로 이뤄졌다. 1534년 영국 왕 헨리 8세는 수장령을 선포하여, 영국 교회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때를 곧장 영국 교회의 성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에 영국 교회는 다시 로마 가톨릭 교회로 복귀했다가, 엘리자베스 1세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여러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종교개혁도 정치 상황과 신학 운동이 결합하여 일어났다. 신학에서는 초기에 마르틴 루터의 신학이 영향을 미쳤으며, 후기에는 칼뱅주의를 따르는 청교도의 세력이 성장했다. 그러나 영국 교회 종교개혁은 대륙의 사변적인 신학 논쟁보다는 교회의 예배 생활, 즉 전례를 통한 개혁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 전례 개혁은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가 이끌었고, 그 결과물이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이다. 공동 기도서는 성공회의 신앙생활, 예배생활, 신학과 영성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

근대 성공회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건설과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으로 영국성공회(Church of England)에서 세계성공회(the Anglican Communion)로 발전하는 두 단계의 과정을 겪는다. 첫 단계는 17세기에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영국 교회가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으로 퍼졌다. 두번째 단계는 18세기에 펼쳐지는데, 이때 성공회는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성공회의 선교적 노력이 낳은 결과였다.

세계성공회(the Anglican Communion)에 속한 각 지역 성공회 교회들은 교회는 교회가 위치한 국가나 지역에 따라 자치적이고 독립적인 교회로 성장했다.

참고 #3 한국의 성공회

1890년 9월 29일 영국 성공회 선교사가 인천항에 도착하여 서울과 경기도 그리고 충청도 지방에서 주로 성공회 선교를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개화기에 신교육을 보급하기 위하여 각지에 신명학교를 설립하고, 인천, 여주, 진천 등지에 병원을 설립하였으며, 수원과 안중에는 보육원을 개설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전래된 장로교, 감리교 등과는 달리 적극적인 전도보다는 사회선교와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것에 무게를 두었다. 대한 성공회는 1980년대 후반 이후에 도시 빈민 선교 기관인 "나눔의 집"을 중심으로 사회 선교 운동을 전개했고, 지금도 나눔의 집 협의회 등을 설립해 다양한 사회선교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

대한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 문화를 존중하고 그 토양 깊이 뿌리를 내린 교회를 추구하여 기독교 토착화에 힘썼다. 그 사례로 한국 건축 양식(한옥)으로 지은 성공회 성당들이 현재까지 강화 (강화성당), 진천 (진천성당), 청주 (내동성당) 등에 남아 있다.

1965년에는 대한 성공회 역사 상 처음으로 한국인 주교 이천환 주교가 성품되어 서울교구장이 되었다. 1993년에 대한 성공회는 캔터베리 대교구 관할에서 벗어나, 세계 성공회 독립 관구가 되었다. 초대 관구장은 김성수 주교였다. 2001년에 대한 성공회 부산교구의 민병옥이 사제로 서품되어 첫 여성 사제를 배출했다.

현재 대한성공회는 서울, 부산, 대전에 교구를 두고 있고, 교육기관으로는 성공회대학교 등이 있다. 그리고 미국 성공회 선교사 출신인 대천덕 신부가 세운 예수원 과 대한성공회 성가수녀회,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 등 수도 단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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