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죄 사함과 사랑

이창무 2017. 5. 1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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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2 강


죄 사함과 사랑


말씀 / 누가복음 7:36-50

요절 / 누가복음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사람은 언제 가장 행복할까요?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행복해 지는 존재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얼굴에는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집니다. 눈도 반짝반짝 빛납니다. 사랑 받는 사람은 따로 관리를 받지 않아도 피부에서 윤기가 납니다. 하지만 사랑 받는 것만으로는 아직 반쪽에 불과합니다. 내가 사랑을 할 때 행복이 더 커집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페닐실라민, 엔돌핀, 도파민 등의 호르몬이 분비되어 얼굴이 예뻐진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을 하면 삶에 열정과 에너지가 솟아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성에게서 이러한 사랑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성간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국에는 식어지고 파국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껏 사랑해도 괜찮은 사람, 끊임없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만나는 것, 인생에서 이만한 축복도 없지 않을까요?


오늘 말씀은 이름 모를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사건입니다. 이 여인과 극적으로 대조되는 시몬이라는 바리새인도 등장합니다. 이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한 사람은 여자이고 또 한 사람은 남자입니다. 한 사람은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존경 받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다른 점은 이런 외적인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은 사랑 받았고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용서도 모르고 사랑도 몰랐습니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일까요? 예수님께 죄 사함을 받고 온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 이 여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해 여인처럼 마음껏 사랑 받고 사랑할 수 있는 진정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오늘 사건은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와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어떤 동기로 예수님을 초대한 것인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도 있었고 호기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시몬은 공식적으로 함께 식사하기를 청했고, 예수님은 이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식사 자리에 한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당시 이런 공적인 연회 자리에는 마을 사람들이 와서 초대된 손님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등장이 반드시 특별한 일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 여자가 특별한 여자라는데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을까요? 혹시 이 여자가 국정을 농단했을까요? 아니면 간음죄를 지었을까요? 어떤 죄인지는 모르지만 성경학자들은 이 여자가 몸을 파는 여자였으리라 추측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온 동네가 이 여자의 죄를 다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소설 '주홍글씨'의 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간통죄에 대한 벌로 가슴에 'A'라는 글자가 새겨진 옷을 입고 다녀야 했습니다. 이 여자도 역시 사람들에게 가슴에 공인된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여자였습니다.


그런 여자가 바리새인의 집에 나타났습니다. 이것만 해도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식탁 가까이로 다가와 뜻 밖에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님은 유대의 풍습을 따라 비스듬히 기대어 누운 자세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때 여자는 조용히 예수님의 발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예수님의 발에 떨어졌습니다. 이 눈물의 행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비가 내리듯 떨어진 여인의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온통 적셨습니다. 잠시 후 여자는 갑자기 자신의 긴 머리를 풀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푸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아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자는 마침내 가져온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향유는 향기 나는 기름으로 당시에 매우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종종 여인들이 가지고 있다가 팔아 결혼 지참금으로 사용하는 아주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귀한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었습니다. 온 집안 구석구석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시몬의 마음은 알 수 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시몬은 이렇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죄인인 줄 알았을 텐데...'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영문법 시간에 가정법 과거는 현재 사실의 반대라고 배웠습니다. 곧 시몬의 말은 예수님이 선지자일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선지자라면 저 여자가 어떤 자인지 알았겠지. 그렇다면 저런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당장에 쫓아내었을 텐데 가만히 두고 보다니? 이 사람은 절대 선지자일리가 없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여자의 과거를 잘 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시몬의 마음까지도 모두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짧은 비유 하나를 들려주셨습니다. 돈을 빌려 주는 사람에게 두 사람이 빚을 졌습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다른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그런데 둘 다 갚을 것이 없어서 돈을 빌려준 사람이 두 사람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빚을 면제 받은 두 사람은 열배의 차이가 납니다. 대략 2년 동안 일한 연봉과 2달 간 일한 월급의 차이입니다. 결코 적지 않은 차이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시몬에게 물으셨습니다.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판단이 옳다 하시며 방금 말씀하셨던 비유를 현재 상황에 적용하셨습니다.


시몬은 예수님께 기본적인 예의라 할 수 있는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형식적인 입맞춤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머리에 인사치례라도 감람유를 부어야 했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예수님의 발에 자신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둘은 얼마나 큰 대조가 됩니까?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까? 47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이 여자가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많은 죄가 사함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여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용서의 조건이나 원인이 아닙니다. 사랑은 용서의 결과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비례 관계에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많이 사랑합니까?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자신을 죄 많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빚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용서 받은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당연히 감사할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드릴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적게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죄 많은 여자였습니다. 빚진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용서 받은 것도 많았습니다. 당연히 감사할 것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이 가진 모든 것, 가장 귀한 것을 드려 이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는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선생님 말씀하소서(40)' 이렇게 깍듯하고 예의바르게 말을 했습니다. 정답을 잘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입을 맞추지 않았고 감람유조차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여인을 보십시오. 오늘 여인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기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아무 말은 없지만 행함으로서 주님을 향한 사랑을 뜨겁게 고백했습니다. 여인의 행동은 그 어떤 소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대조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많이 사함을 받은 사람이 있고 적게 사함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둘의 차이는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로 나타납니다. 적게 사함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이 죄인이라고 하니까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까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완벽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저기 있는 저 사람보다는 낫지 않아?'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 줄 모르니 예수님의 용서도 얼마나 큰 줄 깊이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함 받은 것이 적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사랑합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정도로만 사랑하려고 합니다. 인생에서 예수님께 대한 신앙은 내 개인의 목표를 이루는데 필요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진심을 다해 헌신한 적이 없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향유를 부은 적이 없습니다. 


반면에 많이 사함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봅니다. 오백 데나리온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백배 천배 되는 빚진 것과 같은 비참한 죄인인 것을 압니다. 또한 이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압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를 머리로만 아니라 가슴으로 압니다. 진심을 담아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됩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찬 143장 1절)" 그래서 내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그 사랑이 너무 감격스러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큰 빚을 탕감 받았는데 큰 용서를 받았는데 무엇을 아까워하겠습니까?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신 그 분을 위해 어떻게 향유를 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찬 143장 5절)" 


기독교 출판사인 홍성사를 설립하시고 현재는 백주년 기념 교회 담임 목사이신 이재철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한때 사업을 한답시고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1984년 36살 어느 날 평소 같이 술에 취해 밤늦게 집에 왔는데 먼저 잠든 아내의 얼굴 밑에서 하얀 노트 한권을 발견했습니다. 그 노트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약을 먹고 죽을까 손목을 그어서 죽을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취할 길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돌아왔다.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께서 내게 주신 남편이므로 나는 사랑해야 한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의 약함을 잘 아시잖아요." 노트는 여기저기 눈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아내가 나로 인하여 죽음의 방법에 골몰하고 있을 때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가?" 이렇게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질문에 그는 한 마디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새벽기도를 쉬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불쌍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이때 누군가 등 뒤에서 포근히 감싸 안아 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내인가 했지만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눈을 감자 세미한 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재철아, 지금까지 나는 너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단다. 나는 영원토록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술과 담배가 냄새마저 역겨워지고 트럼프와 화투가 보기 싫어졌습니다. 그 후 목회자가 되어 지금까지 30년을 한결같이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2011년 한 컨퍼런스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허랑방탕한 알코올중독자에 도박 중독자였습니다. 마리화나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저는 도저히 목사가 될 수 없는 무자격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혈로 저를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저를 당신의 종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살수밖에 없고, 죽도록 그분께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죄를 많이 사함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여자처럼 죄를 많이 지어야하나요?" 답은 결코 그럴 수 없다 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을까요? 베드로가 특별히 죄가 많아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했을까요? 아닙니다. 죄를 더 지어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설 때,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더러운 죄인 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도무지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 주님의 십자가가 너무나 크게 보이게 됩니다. 주님의 용서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지은 죄로도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미 큰 사랑을 받은 몸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 인생의 남은 시간 전부를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에 쏟아 부어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죄를 지으며 헛되게 보낼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여인처럼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온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48절을 보십시오. “이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또 50절에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여자는 이미 과거에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여인에게 죄 사함과 구원을 선포하셨을까요? 저는 그 해답이 여인의 눈물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인의 눈물이 오직 감사의 마음을 담은 눈물이었을까요? 예수님의 발을 적실 정도로 흘린 눈물에는 참회의 눈물도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죄 사함을 받은 후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죄에 넘어질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여인은 혹시 이렇게 되면 죄 사함이 취소되지 않을까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졌습니다. 이때 그 마을에 다시 찾으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이미 허락하신 죄 사함의 은혜에 감사하여 울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 못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죄송해서 울었습니다. 감히 예수님께 나올 면목이 없었지만 그래도 다시 죄 사함을 베풀어 주실 줄 믿고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이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과 구원을 선포해주셨습니다. 저도 만약 지금 제기동에 오신 예수님을 만난다면 한편으로는 은혜에 감사해서 울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죄송해서 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거의 삼십년이 되어가지만 매년 늘 같은 마음뿐입니다.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한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예수님이 계셔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예수님이 계셔서 우리는 더욱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출발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여인의 자리에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혹시 바리새인 시몬이 앉은 상석에 앉아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날이 갈수록 죄 사함의 은혜가 더욱 깊어지고 그래서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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