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이창무 2017. 5. 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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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10 강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말씀 / 누가복음 6:20-38

요절 / 누가복음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신 후에 산으로 가서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 설교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평지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평지 설교라고 부릅니다. 평지 설교는 예수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내용은 다양하지만 공통된 특징은 매우 수준 높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인간으로서 이것을 과연 행할 수 있는 내용일까 하는 질문이 절로 나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한 편 참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예수님께서 부족한 우리에게 이토록 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가져야 할 탁월함이 무엇인지 잘 배우고, 날마다 예수님을 조금씩 닮아가는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절부터 26절까지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23절까지는 네 가지 복에 대해서 그 다음 26절까지는 네 가지 화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어떤 자들이 복 있는 자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은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박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어떤 자들이 화 있는 자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은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모든 사람에게 칭찬 받는 자'가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습니까? 동의가 되십니까? 언뜻 잘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혹시 실수로 내용이 서로 뒤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박해 받는 자는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되면 당연히 슬프고 우울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반면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칭찬 받는 삶에 행복이 있다고 믿습니다. 누구나 이런 삶을 동경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어째서 지금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박해 받는 자가 행복합니까? 어째서 지금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칭찬 받는 자에게 화가 있을까요?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될 것인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박해 받을 때 사람 마음이 어떻게 됩니까? 마음이 저절로 겸손해집니다. 부족함을 느끼고 소원이 간절해집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위로를 찾을 수 없기에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고 기다리게 됩니다. 눈물로 부르짖음으로 탄식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영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아 기쁨으로 웃을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놀라운 하늘의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 아니면 또 누구겠습니까? 그러나 현재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칭찬 받으면 어떻습니까? 아쉬울 것이 없으니 영적인 소원이 식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르지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도 냉담해지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과 위로도 맛보지 못합니다. 그의 영성은 황폐해지고 인생의 열매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화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 자체가 복이라거나 부요함 자체가 화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도 있고, 부요하지만 부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 복이요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이 화입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가 나옵니다. 한나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처음에 한나는 자신이 지지리도 복이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 없는 현실로 인해 가난한 심령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눈물로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열 아들 부럽지 않는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을 낳게 해 주셨습니다. 한나는 이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 눈물의 기도로 태어난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경성시키는 영적 거목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풍요 속에서 자란 제사장 엘리의 자식들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훔쳐 먹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죄를 짓고 악을 행했습니다(삼상2:22). 그러다 결국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무서운 화가 그 집에 임한 것입니다.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칭찬만 듣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교만과 부패, 타락의 위험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을 하나님을 얻고 체험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때 고난과 시련은 얼마든지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다보면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을 거슬러 살기 때문입니다. 제자도를 실천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면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도 있습니다.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현실에 잘 적응하고 안주해서 살면 세상으로부터 보상과 위로와 칭찬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이 땅에서 받을 것을 다 받았기 때문에 하늘에서 상급이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그런 삶을 살았듯이 그들은 거짓 제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사도로 부르심 받은 제자들은 가난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그 성곽에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계21:14). 그들은 초대 교회 개척역사를 섬기느라 많은 고생을 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큰 영광에 들어가게 됩니다.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가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큰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 제자는 당연히 예수님의 영광에도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제자의 삶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우리가 사명인의 삶을 사느라 물질적 풍요를 충분하게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양들을 돌보다가 마음이 상하여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또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다 보면 아주 한심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독교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 한 명의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많고 많은 교회 중에서 하필이면 UBF에 부르심을 받고 목자의 삶을 살게 되었는가 하면서 좀 슬픈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목자님의 자녀들은 나는 아예 태어날 때부터 UBF에서 태어났는데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고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큰 복 받은 사람인 줄을 왜 모르십니까? 예수님을 배우며 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의 삶을 사는 우리야말로 참으로 복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제자로 살기 위해 세상에서 손해 본 것이 있다면 백배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기느라 흘린 모든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실 것입니다(계21:4). 이때 우리는 진정으로 웃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다면 그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센터에 와서 춤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날이 하늘나라에 큰 상을 적립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개근상, 우등상 이런 상들은 안 받아도 괜찮습니다. 진짜 큰 상은 영원한 생명과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 하는 상입니다. 상을 받으려면 이런 상을 받아야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박해를 받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고 인증을 받는 일이기 때문에 기뻐할 일입니다. 그 어떤 일보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고난을 적극적으로 감당하며 하늘에 큰 상을 쌓아가는 기쁨 속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27-38절은 사람 사이에서 제자들이 실천해야 할 윤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먼저 27-29절까지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제자의 윤리 첫 번째는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관계의 핵심 윤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여기서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원수를 어찌하든지 복수하고자 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를 대적하고, 나를 저주하면 가만 두지 않습니다. 내 뺨을 치면 몽둥이 들고 달려듭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마음의 상처 때문에 상대방을 영접하기 어렵습니다. 평생에 원수가 되고 그것도 모자라 자녀에게까지 원한을 물려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해주라고 하십니다.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 주고,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30, 31절을 보십시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상대방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적극적으로 네가 먼저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정말 어려운 말씀입니다. 오죽하면 이 말씀은 실천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실천 못하는 나의 한계를 발견하라고 주신 말씀이라는 주장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46절에서 분명히 듣고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는 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까? 왜 내가 먼저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까?


3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먼저 제자로서 칭찬과 상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제자에게는 탁월함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승이신 예수님이 탁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탁월하지 못하면 스승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제자에게 아무 비범함이 없다면 제자가 아닌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자의 탁월함을 보여야 할 영역은 다른 영역이 아닙니다. 바로 사랑에 있어서 탁월함을 나타나야 합니다.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합니다. 선대하는 자를 선대합니다. 받기를 바라고 꾸어 줍니다. 그러나 제자는 어떤 사랑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일에 어마어마한 경험을 쌓아서 몹시 능하게 된 사람을 달인이라고 부릅니다. 말하자면 제자는 사랑의 달인이 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사랑이 깊고 넓어져서 마침내 사랑의 최고봉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에 있어서 탁월함을 나타내는 제자에게 상급이 따를 것입니다. 원수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다 보면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칭찬과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늘의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너는 내 제자다 하는 인정과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상급도 있지만 이런 사랑이 가져올 이 땅에서도 칭찬과 상급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미움과 적대감을 갖습니까? 상처를 받았거나 상대방이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손해를 당하거나 해를 입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수로 생각하고 공격하고 비방을 합니다. 만일 상대방이 나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미움이나 적대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품고 있는 미움과 적대감을 없애는 방법은, 아무런 조건이 없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일지라도 사랑하고 호의를 베풀면, 처음에는 마음을 닫아서 받아들이지 않고 반발할지라도 점차 마음 문을 엽니다. 마음 문을 열고 사랑을 받아들이면 자연스럽게 미움과 적대감이 사라집니다. 복수로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입니다. 오직 선으로만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제자의 강력한 무기는 바로 사랑과 용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35절 하반절과 36절을 보십시오.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른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예수님의 제자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바로 제자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자녀를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자녀인 우리 모습을 보고 세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 한량없으십니다. 악한 자, 은혜를 모르고 악으로 갚는 배은망덕한 자까지 사랑하십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로마서 5:10절에서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우리도 자비로운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많은 장면들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제자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야 할 때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하는 두 아들을 모두 공산당원에 의해 잃었습니다. 얼마나 큰 슬픔과 절망을 맛보았겠습니까?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잡아서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원통함이 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를 용서해 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손양원 목사님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원수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당국에 간절히 탄원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 직전에 있던 범인을 살려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범인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때문입니다. 원수 되었던 나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전기가 있습니다. 제목이 '사랑의 원자탄'입니다. 원자탄은 얼마나 강력합니까? 주변을 모조리 파괴하여 초토화시켜 버립니다. 이처럼 사랑은 원자탄처럼 강력합니다. 그러나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킵니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립니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을 끊고 자비가 자비를 낳는 선순환을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원자탄은 못 해도 적어도 수류탄이라도 던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용서가 터지고 자비가 터지고 사랑이 터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다운 제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에게 상처 주고 아픔을 준 모든 사람들을 다 품고 용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힘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나 같은 죄인을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하며 우리도 자비를 베푸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제자의 윤리 두 번째는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라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비판은 분별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분별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라면 비판은 재판석에 앉아서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반드시 분별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판과 정죄는 사람을 질식시킵니다. 사랑을 메마르게 합니다. 사랑이 메마르면 두려움, 반발심, 적대감, 위선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낳게 됩니다. 비판과 정죄는 다시 비판과 정죄로 돌아옵니다. 결국 관계성을 파괴시키고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동일한 비판의 잣대로 우리를 심판하셔도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비판과 정죄는 자해 행위입니다. 그러면 비판과 정죄 대신에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37절 하반절과 3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비판하는 대신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면 용서가 돌아옵니다. 받기보다는 주기에 힘써야 합니다. 주면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올 때는 덤까지 얹어서 돌아옵니다. 용서하고 베풀면 사람과의 관계성이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베푼 자비가 상대방의 감춰져 있던 자비를 불러 일으켜 깨우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긍휼을 베푼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베푸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38)”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사람들에게 한 그대로 결국 다 돌려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비판과 정죄를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비판하지도 말고 정죄하지도 마십시오. 용서 받고 사랑 받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용서하고 사랑하십시오. 


인애, 자비, 긍휼 등등 다양한 말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헤세드라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이 헤세드가 가장 잘 묘사된 책 중 하나가 룻기입니다. 모압 여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비참한 상황을 보았습니다. 이때 룻은 시어머니를 불쌍히 여겨 그와 여생을 함께 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룻의 헤세드입니다. 룻은 이 때문에 남의 집 밭에서 밀 이삭이나 주우며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이때 우연히 룻을 만난 나오미의 부자 친척 보아스가 룻의 헤세드에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보아스의 헤세드입니다. 그들 사이에 오벳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는 나중에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이처럼 룻기는 헤세드가 또 다른 헤세드를 낳고 더 큰 헤세드로 마무리되는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성경 속의 이야기를 그쳐서는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우리들에 의해서 계속 써내려갈 이야기입니다. 비판과 정죄가 난무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들은 용서와 회복의 드라마를 이어나가도록 부르심 받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결코 거룩한 성인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용서 받은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여전히 죄의 소욕에 시달리고 있고, 아직 성숙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크고 작은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이 살다 보면 부대끼는 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 상처를 주는 일이 생깁니다. 미운 사람도 생깁니다. 표정이 싸늘해지고 말이 곱게 나가지 못합니다. 미움이 깊어지면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다 기분 나쁘게 들립니다. 눈에 보이는 자체가 스트레스가 됩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한 사람 때문에 여러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 같습니다. 네가 사라지든지 내가 사라지든지 결판을 내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될 것 같습니다. 뒤에서는 비판하고 정죄하고, 만나면 다투고 싸웁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그 공동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무너져 내리지 않겠습니까? 그 속에서 지옥을 간접 체험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대접 받고 싶은 대로 서로를 대접 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비판과 정죄를 삼가고 용서하고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과 똑같은 위치에 있다면 이 말씀을 가볍게 무시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제자는 달라야 합니다. 상대방이 잘못한 것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고 품지 못하고 있는 나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다운 탁월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움과 복수가 해결책이 아닙니다. 회피한다고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말씀 그대로 용서해야 합니다. 화해에 이를 때까지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용서와 베풂의 공동체를 이룬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서로 모습은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간접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머리로는 이것을 다 아는 마음이 안 따라주어서 도저히 안 될 것 같습니까? 왜 마음이 안 따라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의 깊이가 그만큼 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비를 경험해 본 사람이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용서를 경험해 본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아직 어떤 죄인이고 내게 임한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한량없는지 모르지는 않지만 얕게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용서와 자비의 깊이가 그토록 깊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결코 제자들에게 오늘 말씀에 순종하도록 요구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실지 모릅니다. “네게 준 나의 은혜가 너의 동역자 한 사람을 품기에 부족하다는 말이냐? 그 형제 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서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린 나의 피를 헛되게 할 작정이냐?” 그 동안 미워하고 영접하지 못했던 사람이 있다면 당장 오늘 이 시간부터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서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세상에 나타내는 공동체를 온전히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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