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열둘을 사도라 칭하셨으니

이창무 2017. 4. 3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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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제 9 강


열둘을 사도라 칭하셨으니


말씀 / 누가복음 6:6-16

요절 /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요즘 우리나라 최대 이슈는 이제 열흘 남짓 남아 있는 대통령 선거입니다. ‘앞으로 5년 동안 누가 이 나라를 이끌 것인가?’를 놓고 후보들 간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도 엄청나게 뜨겁습니다. 그만큼 리더십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타락하고 부패한 리더십으로 고통 받는 시대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 시대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를 이 시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서 이 시대 가운데 우리들에게 두신 예수님의 비전과 소망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그 자리에 누가 있었습니까?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손이 말랐다는 것은 손에 살이 별로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른손에 장애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 손에 장애가 있다고 해서 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결코 가벼운 문제는 아닙니다. 외경에 따르면 이 사람은 본래 석공이었다고 합니다. 장애향이라는 가수가 79년도에 발표했던 '석탑'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아오른 거대한 돌덩이 / 이름모를 석공의 땀과 눈물이 흘러내리듯 / 은은한 너의 모습 은은한 너의 모습 / 바람이 놀다간 바람이 놀다간 너의 가슴 속에 / 석공의 땀이 어린 석공의 손때묻은 정과 쇠망치 소리가 ~ / 들려온다! (야!) 들려온다! (야!) / 들려~온~다!" 이 노래의 주인공인 이름 모를 석공이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작업 도중에 일어난 불의의 사고 때문에 오른손을 못 쓰게 되었습니다. 정을 들고 망치질을 하던 힘찬 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너덜너덜해진 손이 남았습니다. 오른손을 쓸 수 없으니 더 이상 석공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직업을 잃고 이리저리 전전하다가 결국 빌어먹는 거지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항상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 속에 깊숙이 찔러놓고 다녔습니다. 절대로 남들 앞에서 말라버린 오른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한 손을 바지에 넣고 한 손만으로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별 건방진 거지가 다 있다며 욕을 해댔습니다. 오른손 마른 것 때문에 죽지는 않았지만 그는 죽지 못해 하루하루 살고 있었습니다. 이 날도 회당에 왔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눈에 가장 띄지 않는 기둥 뒤편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오른손 마른 사람을 주목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그들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왜 그들이 오른손 마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을까요? 그를 불쌍하게 여겨 도와주기 위해서였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다만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얻고자 했을 뿐이었습니다. 어째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시는 것이 고소 조건이 됩니까?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당시 안식일 규례에 따르면 병자를 치료하는 행위도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다만 생명이 위독한 위급 상황만을 예외로 두었습니다. 오른손 마른 것은 누가 봐도 위급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께서 마른 손을 고쳐주신다면? 이것을 안식일 법을 어긴 것으로 몰아 고발할 조건이 되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율법 교사였고 백성들의 목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땅히 한 손 마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양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교권 수호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불쌍하게 여기기는커녕 자기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손 마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백성들을 향한 어떤 공감도 긍휼도 사랑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정말로 안식일 법이 잘 지켜지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께 미리 주의와 경고를 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잠자코 있으면서 증거를 잡으려고 스마트폰을 꺼내 몰카를 찍을 준비만 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법을 어기는 것을 바라고 응원했습니다. 법을 이용해서 함정을 판 것입니다. 거룩한 율법마저도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것이 함정인 것을 모르셨을까요? 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다 아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사람의 깊은 생각까지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 음모와 거짓은 실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함정인 것을 알았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함정을 피해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오른손 마른 사람에게 내일 고쳐줄 테니 이 시간에 다니엘 카페에서 만나자 이렇게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셨습니다. 이로서 그를 당장 고쳐주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힘 있는 종교지도자들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하지 않으시는 용기 있는 남자, 진짜 상남자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9)" 여기서 옳다는 말을 원어로 보면 '적법하다(lawful)'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칭 율법의 전문가들에게 진정으로 법에 합당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절묘한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질문에 어느 쪽으로도 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로서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기도 곤란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안식일 치유 사역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러자 한 손 마른 사람이 주머니에 감추어 놓았던 오른손을 꺼내 앞으로 쭉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말랐던 손에 피가 통하고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힘줄이 불끈 솟아오르고 마디마디가 꿈틀대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손이 원래의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한 손 말랐던 사람은 자신도 믿기지 않는 듯 연신 손을 오므렸다 폈다 했습니다. 좀 전까지 풀 죽었던 그의 얼굴이 봄꽃처럼 기쁨으로 활짝 피어올랐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함께 기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정반대로 너무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라고 말씀만 하신 것 가지고 안식일 규례를 어겼다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했던 시도가 이렇게 좌절된 것에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과의 대결에서 제대로 말 한 마디 못하고 패배한 것에 분노했습니다. 그들에게 옳고 그른 것, 참과 거짓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내가 졌다,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 속에서 부패하고 타락한 리더십의 전형을 발견합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리더는 사람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여깁니다. 사람에 대한 긍휼이나 사랑이 없습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할 능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항상 법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뒤에서는 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자기 유익을 취합니다. 거짓되고 교활하여 진실 되지 못하고 늘 이런 저런 음모를 꾸미길 잘 합니다. 옳고 그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이기는 것에만 혈안에 되어 있습니다. 이런 부패하고 타락한 리더십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고통을 받습니다. 무거운 짐을 진 채 내내 이용만 당합니다. 그러다가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즉시 버림 당합니다. 모욕과 무시를 당해도 힘이 없으니 참는 것 외에는 별 도리가 없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깊은 상처를 입고 몸과 마음에 골병이 들어갑니다. 최근 모 방송국의 pd 자살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한 예능프로그램의 조연출을 맡았던 그는 55일 동안 단 2일만 쉬었다고 합니다. 날마다 새벽 2시에 퇴근해서 아침 6시에 출근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폭언과 욕설과 같은 언어폭력과 왕따를 일상적으로 당해 왔습니다. 게다가 다른 계약직 직원들을 정리해고 하는 악역까지 떠맡은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견디다 못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정말 너무 마음이 아픈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도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디에서 구원이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께 희망과 구원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시며 치유하시고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메마른 땅에 사랑과 긍휼의 강물이 흐르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한 영혼을 향해 흘러넘치는 예수님의 뜨거운 긍휼의 심정은 인간의 규례와 전통이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떤 위협으로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이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세상에서 받은 상처가 아물고 치유가 일어납니다. 영혼이 소생하고 봄꽃처럼 활짝 피어납니다. 저도 어릴 때 얼굴이 좀 까만 것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상처가 많았습니다. 이 문제 하나 때문에 대인기피증이 생기고 주눅 들고 인생 전체가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이 제 마음의 상처를 다 아물게 하고 새살이 돋게 하였습니다. 말라붙어 오그라들었던 제 마음이 활짝 펴졌습니다. 어느 해 여름수양회 때 제가 메시지를 전하기 앞서 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던 적이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암골의 흑진주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서서히 말라 죽어갈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진주 중에서도 가장 귀한 흑진주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리저리 상처 받아 신음하던 저를 살리시고 새 생명을 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의논을 했을까요? 어떻게 예수님을 잘 해드릴까 의논했겠습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를 의논했을 것이 너무나 뻔합니다. 이때가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본격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고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었을 뿐인데 돌아오는 것은 죽음의 위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사람 살리는 일은 그만 하고 몸조심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지도자들 아래서 시름시름 말라 죽어가고 있는 양들을 살릴 근본적인 해결책이 무엇일까?' 예수님은 이런 깊은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12)"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아버지, 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회개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지도자들인데 너무 율법적이고 상한 심정이 없습니다. 이런 시대에 주의 어린 양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할까요?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얼마나 고민과 시름이 깊으셨던지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밤샘 기도하신 예수님께서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13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날이 밝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중에서 열둘을 따로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가 누구입니까?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그 당시 황제의 명을 받아 파견된 전권대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사도란 왕 되신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고 세상 속으로 침투하여 전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왜 하필 열둘이었을까요? 이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명의 사도들로 옛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열두 사도는 예수님 제자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리더십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긍휼과 사랑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양들을 섬길 사람들이었습니다. 형식화된 율법주의 대신 생명과 구원의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가운데 생명의 꽃이 피어나는 예수님의 꿈을 함께 이루어갈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큰 비전 가운데 예수님께서 택하신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14절부터 16절까지 보십시오. 먼저 허세가 심한 빅마우스 시몬 베드로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심정 많은 시몬의 형제 안드레가 있습니다. 다혈질이라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얻은 야고보와 요한 형제도 있습니다. 계산 잘하는 빌립, 사색파 바돌로매도 있고 매국노 출신 마태와 매국노 잡으러 다니던 열심당원 시몬도 있습니다. 배신자 유다와 있으나 없으나 별 티가 안 나는 또다른 야고보와 유다도 있었습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목록을 쭉 살펴 볼 때 어떻습니까? 과연 영적인 지도자로 쓰임 받을만한 자질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로 보이십니까? 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 출신 마태처럼 평균 이하의 사람도 있었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치명적인 단점 한 가지씩은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사도로 세우시다니 예수님께서 실수하신 것 아닐까요? 기왕 부르실 것이면 아주 능력이 뛰어난 사람, 배경이 든든한 사람, 학벌 좋은 사람, 스펙이 빵빵한 사람, 키도 크고 잘 생긴 사람으로 택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다 중시하는 이런 지도자의 자격과 요건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처음부터 사도라고 칭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은 사도 후보 또는 인턴 사도라고 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평생 고용이 보장된 정규직 사도로 뽑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믿음과 소망이 반영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지금은 한없이 부족하지만 장차 예수님을 닮은 목자요, 인류의 스승이 될 것을 믿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아둔해서 깨닫지 못할 때도, 실수하여 넘어질 때도,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하고 헛소리를 할 때에도, 예수님은 결코 이 소망의 끈을 놓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양육하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의 나오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영적인 지도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예수님께 사탄이라고 꾸중 듣기도 하고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그 베드로가 한 번 설교로 삼천 명을 변화시키는 담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어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이름 그대로 든든한 반석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갈릴리 촌구석의 별 볼 일 없던 어부들이 인류 역사를 뒤 바꾸어 놓은 위대한 사도들이 될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거친 돌이라도 미켈란젤로의 손에 들어가면 살아 움직이는 불멸의 위대한 작품이 되는 것과 같이 무식하고 거친 사람들이 예수님의 손에 들어갔을 때 인류역사를 길이 빛낼 위대한 사도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쓸모 없는 자를 쓸모 있는 자로 빚어 만드시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는 능력이 좀 부족하고 단점이 있고 인간 조건이 좀 부족한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도로 택하신 제자들에게 찾으신 것이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들은 출신과 배경이 아주 다양하고 저마다 개성이 다른 제자들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 차 있었다는 점입니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능력 면에서 이 열두 제자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이었을텐데 왜 안 부르셨겠습니까? 그들은 교만했고 자기 생각만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낡은 가죽부대처럼 신축성이 없어 예수님의 교훈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언제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겸손하고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소망 가운데 우리를 미래의 지도자로 택하시고 키우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면 나의 부족함 때문에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이생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생망이란 ‘이번 생은 망했어요.’라는 뜻입니다. 경향신문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세부터 34세까지 청년 천 명 중에 사백 명이, 약 40%가 이번 생은 망했다는 말에 동의한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고 꿈꿀 수 없는 청년들이 너무나 많은 시대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도, 영적인 지도자라는 말은 너무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내 형편과 주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처음부터 사도의 소망을 두시고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계획과 소망에 기초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희망을 두시고 부르셨기에 우리는 누가 뭐래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로 성장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게 자질이 있는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한 열린 마음이 있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겸손히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반드시 채워주시고 키우시고 빚으셔서 사도와 같은 영적 지도자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나 자신조차 나에게 소망 둘 수 없는 자를 사도라 칭하시고 키우고자 하시는 주님의 믿음과 소망을 인하여 감사 찬송 드립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붙들고 예수님을 배워 양들의 생명을 살리는 영적 지도자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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