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서평

서평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창무 2015. 5. 1.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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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저자는 서신서가 해석이 쉬워 보이지만 의외로 어렵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서신서가 쉽다고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반 정도 밖에는 공감을 하지 못하겠다. 내가 서신서가 어렵다고 느낀 것은 개역 한글 성경의 번역 문제가 큰 원인인 듯싶다. 한글 성경에서 이해하지 못할 경우 영어(NIV) 성경을 보면 오히려 더 잘 이해가 되는 경우가 흔했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문장의 명백한 의미를 이해한 뒤라 하더라도 서신서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자주 만나게 된다. 뒤에서 다시 언급되지만 이는 주로 서신서를 주고 받은 당시의 정황이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낯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서신서의 특징을 몇 가지 살펴 보자.


첫째로 서신서라는 한 카테고리 안에 묶여 있다고 하지만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서신서는 전형적인 편지의 형태를 띠고 있는 서신서가 있는 반면 일종의 문학 장르로서 회람용 서신서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저자가 특정한 수신자를 염두에 두고 쓴 서신이며 당시의 일반적인 편지의 형식 즉 발신인, 수신인, 인사, 기도 및 감사, 본문, 맺음말과 끝인사라는 형식을 따르고 있다. 반면에 후자인 회람용 서신서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쓰여진 서신으로 편지의 전형적인 형식을 잘 따르지 않는다. 편지에 속하는 서신서는 바울 서신 전부와 요한 이서와 삼서 등이 있으며, 회람용 서신서에는 요한 일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항상 뚜렷한 것은 아니며 히브리서의 경우처럼 설교문과 편지글이 뒤섞인 듯한 서신서들도 있다.


둘째로 서신서는 철저하게 일세기 교회의 상황 속에서 탄생한 문서들이다. 저자들이 서신서를 쓰게 만든 정황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그 정황을 떠나서 무시간적인 관점에서 서신서를 해석하게 되면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 정황이라는 것은 주로 교회가 처하게 된 어려움들이다. 이단이 교회 내에 침투하여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든지, 교회 내에 분열이나 분쟁이 일어났다든지, 선교에 대한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라든지 하는 일들이 대표적으로 여기에 속하는 일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정황을 파악하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신서의 발신자와 수신자들은 서신서가 기록되는 시점에 서로 공유한 전제들이 서신서 자체에는 뚜렷하게 드러나있지 않고 다만 암시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셋째로 서신서는 신학 논문이 아니다. 서신서를 잘못 읽게 되는 흔한 실수 중 하나는 서신서를 신학적 진술의 모음집 정도로 보는 것이다. 물론 서신서에 신학이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서신서에서 신학을 다루는 이유는 교회에 당면한 과업을 해결하기 위해서이지 어떤 명제적 진리를 나열하거나 증명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서신서에 나타난 신학적 진술들도 그 진술이 나타나고 있는 역사적, 문학적 맥락을 떠나서는 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


서신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신서의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을 재구성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가리켜 서신서의 역사적인 문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문맥을 파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성경 사전이나 주석의 서론을 참고하여 서신서의 배경을 찾아내어야 한다. 서신서의 수신자는 교회들이다. 그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특징, 역사, 문화, 풍습들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 교회가 편지를 수신할 당시 처하고 있던 특별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러모로 현대의 사회적 상황과 1세기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 서신서 전체를 단번에 완독하도록 한다. 우리가 편지를 받았을 때 일부분만 따로 떼어서 읽는 경우는 없다. 당연히 편지의 서두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어내려 갈 것이다. 서신서라고 해서 다르게 읽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렇게 읽게 되면 편지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된다. 한 번 읽어서 잘 파악이 되지 않는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한 번 더 읽으면 된다.


셋째, 중요한 참고 사항을 메모해 두도록 한다. 여기서 중요한 참고 사항이란 당시의 문제 사항을 재구성할 수 있는 정보들을 말한다. 여기에는 1) 수신자들에 관련된 내용 2) 수신자들에 대한 저자의 태도에 관한 언급들 3) 편지를 보내게 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것들 4) 편지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논리적 구분들이 포함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4번 항목이다. 이 작업은 일종의 서신서 개요를 작성하는 과정이다. 바울의 서신서는 대개 한 가지 큰 주제를 길게 논증해 나가지만 고린도전서나 데살로니가전서 등에서는 독립적인 작은 문제들을 병렬적으로 다루기도 한다.


역사적인 문맥 파악의 예시

본문 : 고린도전서

1. 수신자들에 관한 내용 : 고린도 교회는 유대인들이 약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은 지혜와 지식을 사랑했으며 교만하고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2. 바울의 태도 : 책망과 호소와 권면 등 다양하다.

3. 서신서를 쓰게 된 상황 : 바울이 직접 듣거나 편지를 통해 알게 된 고린도 교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으로 쓰여졌다.

4. 편지의 개요 : 7장 이전과 이후를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가 나뉜다.

 교회 내 분쟁에 관한 문제(1:10-4:21)

 음행하는 남자에 관한 문제(5:1-13)

 송사에 관한 문제(6:1-11)

 간음에 관한 문제(6:12-20)

 부부 간의 행동에 관한 문제(7:1-24)

 처녀에 대하여(7:25-40)

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8:1-11:1)

 교회에서 여자가 머리에 쓰는 문제에 대하여(11:2-16)

 주의 만찬을 더럽히는 일에 대하여(11:17-34)

 신령한 은사에 대하여(12-14장)

 신자의 육체의 부활에 대하여(15장)

 연보에 대하여(16:1-11)

 아볼로의 귀향에 대하여(16:12)

 마지막 권면과 인사(16:13-24)


다음으로는 석의 작업을 통해 본문의 본래적인 의미를 파악하도록 한다. 석의 작업은 크게 역사적인 문맥과 문학적인 문맥을 파악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먼저 본문의 역사적인 문맥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단계를 거치는 것이 좋다. 먼저 서신서를 단숨에 최소한 두 번 이상 읽도록 한다. 가능하다면 서로 다른 번역본으로 읽는 것이 좋다. 이 과정을 통해 전체적인 윤곽을 형성하도록 한다. 다음으로는 수신자가 당면 문제들을 언급한 부분이 있으면 기록하도록 한다. 그리고 저자가 이 문제에 대해 답변한 내용 중 핵심 단어와 반복 문구들에 주목하여 이를 기록하도록 한다. 이렇게 서신서를 검토해 보면 서신자가 다루고 있는 당시의 교회가 직면한 정황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성경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없는 지나친 추측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추측이 서신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하나의 가설로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석의의 다음 단계는 문학적인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본문에서 단락별로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왜 그 말을 하고 있는지를 조사하여야 한다. 단락은 단순히 자연스러운 사상의 단위 정도가 아니라 서신서의 논증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열쇠이다. 서신서를 대하는 데 있어서 멈추지 말아야 할 질문은 ‘이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이다. 이를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첫째는 단락의 내용을 간단히 기술한 뒤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둘째는 저자가 왜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 한 두 문장 정도로 설명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이 저자의 논증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 본다.


석의의 첫번째 예

역사적인 문맥

본문 : 고린도전서 1장-4장

(1)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교회 지도자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3:5-23)

(2)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복음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다. (1:18-3:1)

(3)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다. (4:1-21)

문학적인 문맥

본문 : 고린도전서 3:5-16

(1)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주인이 아니라 종이며 바울과 대의를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3:5-9)

(2)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이 만약 인간적인 지혜나 방법으로 교회를 세워간다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3:10-15)

(3)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하나님의 대안으로 존재해야 한다. (3:16-17)


지금까지 석의 과정과 방법을 살펴 보았다. 석의는 본문만으로 충분하다.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본문을 떠나서는 안 된다. 또한 논증에 적합하지 않은 내용은 본문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석의란 본문 속에서 저자를 통해 당시 독자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석의 작업은 모두가 할 수 있는 작업이다. 다만 더 깊은 내용들은 전문적인 주석들을 참고하면 되는 것이다.


석의의 두번째 예

본문 : 빌립보서 1:27-2:13

(1)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서로 연합할 것을 권면하고 당부한다. (1:27-30)

(2) 겸손이야말로 신자들이 연합을 이루는 바른 태도이다. (2:1-4)

(3) 예수 그리스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본받아야 할 겸손에 관한 최상의 모범이다. (2:5-11)

(4) 그리스도에 관한 바울의 교훈을 빌립보 교인들이 순종해야 한다. (2:12-13)


앞에서 본문의 역사적인 맥락과 문학적인 맥락을 분석하여 석의하는 방법에 대해 보았다. 그러나 이런 석의 작업만으로도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 구절들이 서신서에는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고린도전서 15장의 ‘죽은 자들의 위한 세례’나 베드로전서 3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내용 등이 그러하다. 이런 문제 구절들을 다루기 위한 몇 가지 지침들이 있다.


첫째, 분명하지 않은 구절에 대해 독단적인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문제 구절이 어렵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서신서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 아니다. 1세기 독자들이 저자와 공유하고 있던 부분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알기 힘든 부분이 서신서에 남겨져 있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중 하나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분명치 않다 하더라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과 불확실하지만 가능한 해석을 찾아 보아야 한다. 아무리 해석이 어려운 구절이라 하더라도 전후 문맥을 살펴 보면 전부는 아니지만 그 구절에서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능한 해석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다만 잠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셋째로, 전체적인 요지를 파악하도록 한다. 세세한 사항까지 완벽하게 이해를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 요지를 파악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넷째로, 좋은 주석을 참고하도록 한다. 좋은 주석이란 문제 구절들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의해 판가름 난다. 좋은 주석은 문제 구절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고 균형감각을 가지고 이 견해들을 평가한 주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섯째로, 학자가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문제 구절에는 수십 개의 추측들이 존재하지만 그 중 어느 하나가 확실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한계점들을 각자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문제 구절들에 대한 해석의 예

본문 : 고린도전서 15:29

(1) 고린도 교회에 죽은 자를 위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2) 누가 누구를 위해 왜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았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3) 죽은 자를 위한 세례를 바울이 언급한 까닭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미래에 있는 신자의 부활을 일관되게 부인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었다.


이 책을 통해 서신서를 읽을 때 역사적 문학적 문맥에 따라 석의해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여러 내용들 중에서 특히 서신서를 주후 1 세기 당시의 교회의 정황에 비추어 의미를 파악해야 하며, 보편적인 신학적 진술을 담은 책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들을 안고 씨름하면서 나온 신학적 통찰력이 담긴 답변이라는 이 두 가지가 깊이 와 닿았다. 지금까지 익숙해 왔던 방식 즉 서신서에서 마음에 드는 한 두 구절을 따오는 파편화된 서신서 읽기가 얼마나 잘못된 방식이었는가를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에게 공감하고 통찰력을 얻게 되면서도 한 가지 아직까지 깊이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은 역사적 문학적 문맥을 파악하는 일은 독자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언급한 부분이다.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독자는 기본적으로 텍스트를 놓고 분석과 추론을 할 수 있는 훈련을 어느 정도 받은 독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최근 교육을 받은 어린 학생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또래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 이와 같은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지가 의문이다. 성경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상한 신학 공부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신학도들은 국어책 읽기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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