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빌립보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

이창무 2015. 5. 1.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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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 보서 1:6)


고연전도 끝나고 중간 고사도 끝나고 제자수양회도 끝났습니다. 폭풍 같은 10월이 지나가고 11월이 왔습니다. 아마 대개 이번 학기를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결심했던 일들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어떤 결심을 하셨습니까? 공부를 한 번 제대로 열심히 해볼 결심을 하셨습니까?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할 결심을 하셨습니까? 어떤 결심이든 지금쯤은 중간 점검을 해 보아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 볼 때입니다. 결심한 대로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까? 사자성어 중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 먹은 것이 삼일을 못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삼일도 못 갈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앞으로 절대 화를 내지 않을 거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이 말을 들은 친구가 코웃음을 치며 ‘니가.. 그럴 리가 없잖아’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이 친구에게 왜 내 말을 안 믿느냐며 버럭 화를 내었습니다. 이 경우는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삼초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영어는 잘 못하지만 To 부정사와 동명사에 대해서는 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고등학교 때 보던 영어 문법책 1장이 부정사이고 2장이 동명사였기 때문입니다.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공부를 시작하면 항상 동명사까지는 진도가 잘 나가는데 그 다음부터는 흐지부지되곤 했습니다. 결국 다시 결심하고 새 마음으로 처음부터 공부를 시작하는데, 이번에도 역시 동명사까지 열심히 공부하다 맙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가정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어쿠스틱 기타 레슨을 해 주면 지금까지 경험으로 볼 때 열에 여덟 명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합니다. 손가락 끝에 굳은 살이 박혀야 하는데 그 때까지 아픔을 참고 견디며 기타 줄을 꾹 누르지 못하고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편이 이러니 내가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지 않으십니까? 맨날 시작만 하고 도대체 끝 맺음이 안 되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장을 보고야 마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께서는 누구실까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십니다. 착한 일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션과 정혜영 부부처럼 자신의 수입을 불쌍한 이웃을 위해 나누고 봉사할 때 착한 일을 한다고 합니다. 바닥에 떨어진 5만원권 지폐를 주워서 주인을 찾아 주는 일은 선한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물론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은 이런 일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멸망과 심판으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축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시는 구원의 은혜가 바로 선한 일입니다. 복음을 듣도 죄를 깨달아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죄를 사함받고 , 영적으로 소경이었다가 거듭 나서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되고 날마다 죄와 싸우며 거룩한 예수님의 형상을 조금씩 닮아가며,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마침내 풍성한 인생의 열매를 맺는 일. 이보다 더 선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선한 일들을 누가 시작했습니까? 나의 일대일 목자님이 시작하신 것 같지 않습니까? 목자님이 나에게 다가와서 성경 공부에 초대해 주었고, 목자님이 전화하고 문자도 보내고 심방도 오시고, 목자님이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었고 나를 위해 기도도 해 주신다고 하니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목자님이신 것이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믿음을 가진 부모 가운데 태어난 분은 부모님이 시작하신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부모님이 예배가니까 나도 예배에 가게 되었고 부모님이 성경 공부를 하시니까 나도 따라서 성경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내가 시작했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제 발로 찾아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혁상 목자님은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에 가면 성경 공부를 하고 제자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꿈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목자님도 아니고 부모님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쓰셔서 사람들을 통해서 나를 부르신 것이지 그 사람 자체가 기원이 아닙니다. 만약 목자님이 내 구원의 시작이라면 그 목자님이 어디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기라도 한다면 거기서 내 구원도 끝이 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나에게서 시작된 선한 일은 사람에게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가십니다.


내 자신을 보면 이 선한 일이 끝까지 갈 리가 없습니다. 저는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의지가 약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영적인 소원이 날마다 뜨거운 것도 아니고 믿음도 별로 없습니다. 여전히 죄를 사랑하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이 선한 일이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면 저는 영적인 세계를 알아 가는 일을 흐지부지하다가 그만 두고 구원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가 이루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을 보존하시고 구원의 완성을 위해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천로역정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해석자가 크리스천의 손을 잡고 한 방에 들어갑니다. 그 방의 한쪽 벽면에 있는 난로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불을 끄기 위해서 계속해서 물을 부었습니다. 그런데도 불은 꺼지지 않고 점점 더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크리스천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때 해석자는 크리스천을 벽난로 뒤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에는 다른 한 사람이 기름병을 가지고 은밀하게 계속 기름을 불 위에 붓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불을 꺼지게 물을 붓는 이는 악마 사탄이며 기름병을 가지고 계속 기름을 불 위에 붓고 있는 이는 예수님입니다. 영어 단어 중에 ‘Unquenchable’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소멸시킬 수 없는” “억누를 수 없는”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불이 바로 “Unquenchable Fire” 입니다. 여러분 속에 조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은혜의 불씨가 있다면 이 불씨는 결코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있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조금씩 조금씩 더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때로는 물벼락을 맞아 다 꺼진 듯 보여도 그 불씨는 곧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형편에 상관 없이 은혜의 불길에 계속해서 기름을 부어 주시는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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