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데살로니가전서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창무 2016. 8. 1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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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데살로니가전서 5강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말씀 / 데살로니가 전서 4:13-5:11

요절 / 데살로니가 전서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오늘 말씀은 개인적 종말인 죽음과 우주적 종말인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천년 동안의 교회사를 보면 종말론은 늘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불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성도들이 핍박과 환란을 겪는 가운데 그들에게 위로를 주고 소망을 심어준 것이 바로 종말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뜨거운 재림 신앙이 아니었다면 교회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 종말론으로부터 역사상 각종 이단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최근 뜨거운 이슈를 일으키고 있는 신천지도 그 핵심에 자기들 나름대로의 종말론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해서 바르게 종말론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단에 미혹되는 일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고난과 슬픔이 많은 이 세상 가운데서 참된 위로를 얻고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장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자는 자들이란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왜 그들에 관해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는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성도가 죽음 이후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무지와 혼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이 곧 오시리라는 기대와 소망이 아주 뜨거웠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모습도 볼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기대했던 것만큼 빨리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예수님을 믿던 친구나 가족들 중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데살로니가 교인들 마음에 이런 의문들이 떠올랐습니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 어떻게 될까? 이미 죽어버렸으니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결국 우리들과도 영원히 헤어지게 되지는 않을까?' 그들은 죽음이 곧 영원한 이별이요 단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슬펐습니다. 또한 이 문제는 단지 죽은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시기 전에 내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이제까지 신앙 생활한 것이 다 헛것이 되고 마는가?' 하는 의문과 걱정이 그들에게 엄습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죽음과 관련하여 이처럼 혼란에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부활과 재림에 관한 복음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복음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소망을 굳게 붙들 수가 없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여느 불신자들과 별 다를 바 없이 죽음 앞에서 한 없이 절망하고 낙심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생전에 예수님을 믿었다가 죽은 사람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 안에서 잠든 이들을 함께 데리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죽음 이후 현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음이 분명합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죽음을 심장이 멎은 것 또는 뇌기능이 정지한 것 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입니다. 죽음 이후 육체는 땅에 묻히고 썩고 분해됩니다. 반면 믿는 자의 영혼은 죽음과 동시에 낙원으로 올라가 주님 곁에 머물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던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죽음 이후 성도는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안식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예수님 곁에 머물며 예수님과 교제하는 축복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성도에게 있어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 38, 39절에서 바울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목록의 첫머리에서 사망이 있습니다. 죽음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에게는 죽음 이후 사모하는 예수님 곁에 함께 있게 될 소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자기와 함께 있던 모든 성도들을 다 데리고 같이 오실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떠난 성도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가족이나 친구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이와 같은 소망을 가지지 못한 불신자들처럼 그렇게까지 슬퍼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 말이 슬프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랑하던 사람과 짧지 않은 이별을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항에서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리다 보면 나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나는 것은 한참 동안 서로 보지 못할 것을 아쉬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죽음으로 떠난 사람이 그리워서 어떻게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느끼는 슬픔에는 소망과 기쁨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부활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 안에서 잠든 그가 지금 하나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 8월 5일은 라트비아의 김갈렙 선교사님이 소천한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라트비아 리가에서는 이 날 모스크바에서 오신 선교사님 몇 분과 함께 조촐한 추모 예배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갈렙 선교사님과 저는 같은 학번 동기이자 친구였습니다. 갈렙 선교사님은 28살의 나이에 모스크바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 후 처음으로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 때 저는 그에게 무엇이 가장 먹고 싶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갈렙 선교사님은 '팥빙수'라는 다소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쭉 갈렙 선교사님이 한국에 잠시 들를 때마다 계절에 상관없이 저희는 함께 팥빙수를 먹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직 젊은 나이에 갈렙 선교사는 동역자와 어린 외동딸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처음 소식을 접하고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너무 큰 충격이었고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제 안에서 이 말씀 한 구절이 계속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갈렙 선교사님의 일생은 한 마디로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된 삶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 모스크바로, 다시 모스크바에서 라트비아로 터전을 옮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제 갈렙 선교사님이 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영원토록 빛나는 존재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갈렙 선교사님은 틀림없이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칭찬을 받고 올림픽 금메달이 부럽지 않은 금 면류관을 받아쓰고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요 소망이며 기쁨이 되는지 모릅니다. 저는 장차 천국에서 갈렙 선교사님과 다시 만나서 그때도 꼭 팥빙수를 함께 먹을 작정입니다. 누구보다도 충격과 슬픔이 더 크실 김에스더 선교사님이 의연하게 일어나서 현재 세종학당 설립과 라트비아 제자양성 역사를 이루시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그 힘은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부활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입니다. 우리도 혹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는다 할지라도 이 소망을 굳게 붙들고 위로함을 받고 다시 힘차게 일어날 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요? 15절부터 17절까지 바울은 예수님 재림 때에 일어날 일들을 네 단계에 걸쳐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이 말씀은 주의 말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재림에 관해서 이런 저런 말들이 많이 떠돌고 있었지만 대부분 혼자 상상하거나 그럴듯하게 지어낸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에 가장 확실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첫째, 주님께서 강림하십니다. 여기서 강림이란 말은 원어로 '파루시아'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당시 왕이나 황제가 지방을 공식적으로 방문할 때 쓰던 특별한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은 왕으로서 이 땅에 내려오신다는 뜻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볼 것입니다(막 13:36).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비천한 마구간 구유 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소식이 신문에 보도된 적도 없고, TV에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조용하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전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보고 들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큰 소리와 함께 오실 것입니다. 만왕의 왕으로서 영광과 존귀와 위엄이 충만한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강림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소리는 모두 군대에게 진격 명령을 내릴 때 쓰는 신호입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편을 보면 간달프의 군대가 사우론의 군대에 계속 밀리다가 뿔피리 소리와 함께 등장한 아라곤 왕의 군대에 의해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날 때 천군과 천사들이 돌아온 왕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최후 승리를 위해 하늘로부터 진군해 올 것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 모든 원수들이 멸망당하는 날입니다. 그 날에 마귀는 결박당해 무저갱에 갇히고 죄의 세력은 소멸하고 죽음이 정복됩니다. 무너진 우주의 질서가 회복되고 온 우주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롭게 됩니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죽은 성도의 영혼은 새로운 육체와 재결합하여 부활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2절에서 이때 얻을 부활의 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부활한 몸은 죽음 이전에 가졌던 몸과는 다른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입니다.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소욕에 시달릴 일이 없게 되고 죽음을 경험할 일도 없게 됩니다. 이때까지 살아있던 성도들의 몸도 신령한 몸으로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합니다. 이로서 모든 성도들이 구원의 절정이자 완성인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셋째, 성도들이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왕이 어느 마을을 공식 방문한다고 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동구 밖으로 먼저 나가서 왕을 맞이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 그분의 백성들은 주님을 영접하러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임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이때 지구 반대편 중남미로 파송되었던 선교사님들도 북한 지하 교회의 성도들도 모두 다 한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토록 오랫동안 사모하던 주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뵙고 두 팔 벌려 큰 기쁨으로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넷째, 성도들은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17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한 마디가 이제까지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내용의 핵심이고 결론입니다. 종말과 재림에 관해서 수많은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저마다 각자 다양한 별의 별 의견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모습을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장차 영화롭게 되어서 죄와 죽음이 완전히 극복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토록 함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오신 것도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었고, 다시 오시는 것 또한 임마누엘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18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큰 위로가 됩니다. 믿는 자의 삶에도 많은 고난과 슬픔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살고자하기 때문에 애매히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어찌하든지 감당하려 하다가 남몰래 눈물 흘리는 때도 있습니다. 함께 믿음의 길을 가던 이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이별의 슬픔을 있습니다. 해가 갈수록 점점 연약해져 가고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 현실에 서글퍼집니다. 이런 우리에게 무엇이 위로를 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부활과 재림에 관한 복음만이 근본적으로 우리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눈물을 우리 눈에서 닦아 주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계 21:3,4). 제 둘째 딸의 이름이 예림입니다. 어떤 분이 이 이름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뜻입니다.'라고 대답을 해 드렸습니다. 그러자 대뜸 왜 그렇게 무서운 뜻으로 이름을 지었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왜 무서운 말입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두려워할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이지 믿는 사람이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도리어 성도에게 예수님의 재림만큼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고 기대감을 일으키는 말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슬픔이 많은 이 세상사는 동안 부활과 재림 신앙을 끝까지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부활과 재림이 우리에게 주는 참된 위로를 충만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장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바울은 이제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재림의 시기에 관한 문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생각보다 지체된다고 여겨지자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는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는 언제 오실지 몰라서 너무 답답하니까 정확한 재림의 시기를 알아내 보자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제까지 안 오셨으니까 앞으로 안 오실 것이 틀림없다고 여기는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 모두 성도에게 재림을 준비하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먼저 2절에 보면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몇 날 몇 시에 내가 훔치러 가겠소.'라고 미리 훔칠 시간을 알려주는 도둑은 없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재림은 갑작스럽게 일어날 사건입니다. 그 시점에 관해서는 예수님마저도 나도 모르고 오직 내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날짜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미 선교회란 곳에서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을 믿은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다 접고 모여서 오직 그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28일 0시 방송국 차량이 다미선교회 본부를 찾아가 현장에서 생중계했지만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도 1914년, 1925년, 1943년, 1975년 네 차례나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다가 창피만 당하고 요즘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많은 사례를 보고도 또 다시 이런 말에 현혹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다음으로 바울은 3절에서 재림이 없을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의 재림은 마치 임신한 여자에게 임할 해산의 고통과 같다고 합니다. 임신한 후 때가 차면 진통이 반드시 임합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반드시 있을 것이며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없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도 없다. 평안하다. 안전하다'하던 자들에게 그날에 멸망이 갑작스럽게 이를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겠다고 말씀하신지 거의 이천년이 다 되어가지 않느냐? 오시려면 진작 오셨지 아직까지 안 오셨겠냐? 재림도 없고 최후의 심판도 없다." 그러나 이런 말에 우리가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였습니다. 주님 편에서 보면 이천년이 아니라 이제 겨우 이틀 지난 것 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관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시간표를 이모저모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실 줄을 믿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무엇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재림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사실상 재림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의 삶을 어떻게 되겠습니까? 삶에 긴장이 사라져서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이기 때문에 세상 쾌락과 안일함에 취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자거나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은 도둑이 들어온 것처럼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깨어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은 당황스럽기는커녕 매우 기쁘고 반가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주님께서 재림의 때와 시기를 정확히 알려주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주님 재림하실 때를 미리 알게 되면 내내 자다가 재림이 임박한 시점에 반짝 깨어나는 전략적 행동 패턴을 취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소위 말하는 잔머리를 굴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깨어 있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이 재림하실 수도 있기 때문에 계속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깨어 있기를 원하실까요? 이는 우리가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5). 다시 말하면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이지 어둠의 권세자인 사탄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구원의 완성에 이르러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모습을 가장 보기 싫어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도를 공격하여 구원을 잃어버리게 하려는 것이 마귀의 활동 목적입니다. 마귀가 이처럼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어떻게 깨어 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군 생활 할 때 진돗개 훈련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이웃 부대 병사 몇 사람이 무장 공비처럼 위장하여 침투해 들어오고 우리 부대는 그것을 막는 훈련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잠은 쏟아지고 배는 너무 고팠지만 눈을 부릅뜨고 깨어 전방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제가 맡은 구역으로 공비의 침투를 허용하게 되면 저는 곧바로 군기 교육대로 끌려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공비를 잡으면 다음날 곧바로 포상휴가를 받아 집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믿는 자의 삶은 마치 이런 경계 근무를 서는 군인의 삶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8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호심경이나 투구 모두 당시 군인이 적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갖추었던 방어 무기입니다. 사탄의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우리의 든든한 방어 무기는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덕 곧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주님이 언제 어떻게 오실지 아는 것보다는 이 믿음, 소망, 사랑의 덕을 점점 더 갖추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신 것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입니다(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우리와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10).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주님 오실 날까지 우리는 이 소중한 구원을 반드시 지켜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늘 깨어 기도하며 거룩한 삶을 살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바울은 이제까지 말한 재림에 관한 복음 진리를 가지고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 힘쓰라고 당부합니다. 이 당부는 데살로니가 교회 뿐 아니라 바로 우리들을 향한 당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시든 부끄럽지 않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깨어 정신을 차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잠을 자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한국 교회에 가장 고난과 슬픔이 많았던 시기가 일제 강점기와 한국동란 시기였습니다. 우리는 그 힘든 시기에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믿음을 지킨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과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린 삶을 살다 가신 손양원 목사님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주기철 목사님이 설교에서 가장 많이 다룬 주제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주님의 재림을 너무나 사모한 나머지 '주님 고대가'라는 노래를 직접 지으셨습니다. 그 중 1절과 6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 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가 고난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최근 한국 교회의 윤리적 수준이 심각할 정도로 저하되었다는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삶을 보면 빛의 아들인지 어둠의 아들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자꾸만 벌어지는 것일까요? 왜 우리 신앙 선배들이 가졌던 순수한 믿음과 열정을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입니까?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주요 원인이 재림 신앙이 현저히 약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재림 신앙이 약해진 교회는 점점 영적인 잠에 빠져 들고 세상이 주는 쾌락에 취해 정신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잠든 교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전도도 선교도 하지 않습니다. 짠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어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교회와 우리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깨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이 가지셨던 그 뜨거운 재림 신앙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이 땅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며 예수님이 앞서 가신 그 좁은 문, 좁은 길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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