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데살로니가전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이창무 2016. 7. 3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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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데살로니가전서 3강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2:17-3:13

요절 / 데살로니가전서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1988년 2월 '리더스 다이제스트'지는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을 이룬 인물로 밥이라는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젊어서 큰돈을 벌고 50대에 조기 은퇴하였습니다. 은퇴 후 밥은 플로리다로 이주해 자기 보트가 있는 해변에 나가서 날마다 예쁜 조개껍질을 주었습니다. 우리 모임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사라 베리 선교사님은 이 밥이란 사람과 나이가 거의 같습니다. 사라 베리 선교사님은 노구의 불편한 몸을 이끌고 6월 세계선교 보고대회에 오셨습니다. 이 분은 밥처럼 조기 은퇴를 하지도 않으셨고 자기 소유의 보트를 갖고 계시지도 못합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지에 소개된 적도 없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밥을 더 부러워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밥은 무엇을 주님 앞에 보여드릴 수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자기가 주운 조개껍질 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라 베리 선교사님에게는 그 동안 일평생에 걸쳐 마음을 써서 돌보고 키운 양들이 있습니다. 목자에게 양들은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가 양들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양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목자의 심정과 사랑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울처럼 또 바울이 닮고자 했던 예수님처럼 선한 목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회 개척 스토리가 나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세 안식일 즉 3주 동안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을 영접하고 거듭 난 이방인 신자들이 탄생하였습니다. 동시에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조직 폭력배를 고용하여 바울 일행을 위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도시의 권력자들을 등에 업고 바울이 당장 떠나지 않으면 대신 성도들을 괴롭히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바울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이 일을 두고 바울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갓 태어난 어린 양들을 이렇게 내버려 두고 떠나는 목자가 어디 있냐? 이런 무책임하고 무정한 바울 사도는 목자가 아니다. 그저 삯꾼일 뿐이다." 데살로니가 교회 홈페이지에는 바울에 대한 이런 악플들이 심심치 않게 올라왔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의 진심을 편지에 담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2장 17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여기서 ‘떠나다’라는 동사를 원어로 보면 '고아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날 때 마음이 마치 자녀들을 어쩔 수 없이 두고 떠나야 하는 부모의 심정과 같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모님들 중에는 아침에 어린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해야 하는 분이 계십니다. 저녁에 다시 데려오지만 그래도 아이와 떨어질 때 마음이 아프다고 하십니다. 바울도 이제 겨우 거듭 난 초신자인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두고 가야만 했을 때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자국 뗄 때마다 계속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바울은 베뢰아를 거쳐 아덴까지 오는 동안 두고 온 데살로니가의 양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그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떠난 것은 얼굴이지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다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사탄이 길을 막아섰습니다. 구체적으로 사탄이 어떻게 방해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데살로니가의 박해자들이 바울에 대해 출입 금지령을 내렸으리라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어찌되었든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수차례의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그때마다 바울의 애간장도 함께 타들어 가는 듯 했습니다. 이런 마음도 모르고 자기를 원망하고 있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하니 바울은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바울은 양들에 대한 애정을 19절, 20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좀 딱딱한 느낌이 들어서 공동번역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주님 앞에서 우리가 누릴 희망과 기쁨이 무엇이며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월계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어떤 학자가 이 구절을 가리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연애편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연애편지라기보다는 군에 가 있는 아들에게 보내는 부모님의 편지 같다는 느낌이 더 듭니다. 부모에게 자식이 어떤 존재입니까? 소망이고 기쁨이며 자랑의 면류관이 아니겠습니까? 페이스북이나 카카오 스토리를 보면 보통 자녀들은 자기 얼굴을 찍은 셀카 사진을 올립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기 사진을 올리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부모의 타임 라인에는 온통 자녀들의 사진들로 넘쳐납니다. 자녀가 좋은 성적을 받아 오면 부모님의 목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갑니다. 자녀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정작 본인보다 부모님의 얼굴이 더 밝아집니다. 목자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양들이 바로 이런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본래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남이었습니다. 둘 사이에는 유대인과 헬라인이라는 민족적 장벽이 있었습니다. 겨우 3주 동안 얼굴을 본 사이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어떻게 이처럼 양들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양들을 자기 자식처럼 귀하게 여길 수 있었을까요? 이는 바울이 양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스바냐서 3장 17절에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이 하나님의 마음은 잃은 드라크마를 찾도록 찾는 여인의 마음이요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큰 잔치를 벌인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이 바울을 변화시켜 목자의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바울은 본래 바늘로 찔러서 피가 나기는커녕 바늘이 부러질 정도로 딱딱하고 완고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을 지옥의 불쏘시개감으로 밖에는 여기지 않는 골수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은혜와 긍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울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나서 바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영혼이 거듭났을 때 마치 첫 아들이 태어난 것처럼 기뻐하였습니다. 성도 한 사람이 영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갈 때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양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먹는 모습을 보면 끼니를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사명에 매여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했지만 한 시라도 떠나온 양들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걱정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틈만 나면 편지를 쓰고 심방을 가고자 했습니다. 비록 가진 것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양들로 인해 든든하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목자의 마음입니다.


지난 주 메시지에서 이 요한 목자님께서 올해로 안암골이 개척된 지 40년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안암골 40년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바로 목자의 마음입니다. 제가 처음에 우리 모임에 와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목자님들의 사랑이었습니다. 어떻게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지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심을 하고 여러 차례 검증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혹독한 검증에도 흔들림이 없는 그 사랑에 저는 결국 마음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크리스마스 때 목자님이 사랑 고백을 담은 편지를 써서 주셨는데 너무 감동이 되어 읽는 내내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 진수일 목자님의 메시지를 들어 보니 수일 목자님의 변화 뒤에는 같은 수험생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배고프면 밥을 사주고 아프면 헌신적으로 간호해 준 이 믿음 목자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말씀을 전한 안 대일 목자님 뒤에는 뉴욕의 배 웨슬리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스토리는 너무나 많고 이야기 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안암골 가운데 있었던 양들을 향한 목자의 사랑 이야기를 담아 책으로 낸다면 어떤 책보다 더 감동적이고 어떤 드라마보다 더 뭉클한 이야기로 가득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 스토리는 여기서 끝이 나서는 안 됩니다. 바로 여기 우리들에 의해서 앞으로 계속 써나가야 할 스토리입니다. 저는 최근에 한 사모님을 보고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사모님은 여러 명의 힘든 양들을 돕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계속 기도 지원을 부탁하셨습니다. 한 신입생을 양으로 얻기 위해서 부동산을 다니시며 자취방을 알아봐 주기도 하셨습니다. 세 분의 자녀가 있지만 자녀들 이야기는 거의 안 하시고 늘 양들의 상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얼굴에 피곤이 가득한데 날마다 무릎을 꿇고 양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며 저는 내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분의 목자의 심정을 배워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요즘 제가 양들에게 너무 쿨해진 것 같습니다. '싫으면 말고 지가 알아서 잘 하겠지' 이런 식일 때가 참 많았습니다. 믿음이 좋아진 줄 알았더니 사실은 목자의 심정은 식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육신의 자녀를 귀하게 여기는 것 못지않게 영적인 자녀도 귀하게 여겨야 했는데 그렇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바울을 통해서 한 영혼을 향한 목자의 심정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양들을 아비의 심정으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사탄이 막아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바울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참다못한 바울은 자기 대신 디모데를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빌립보서 2장 20절에 보면 바울은 나와 뜻을 같이 하고 진실히 생각할 사람은 디모데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으로서 바울의 선교 사역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디모데를 보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얼핏 보면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고 변명을 전하려고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런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일차적인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파송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2,3)" 이를 볼 때 혹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바울이 노심초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떠나기 전에 그들이 앞으로 받을 환난에 대해 미리 말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환난을 당했을 때 놀라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미리 준비시켜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해 두어도 막상 환난을 당하면 누구나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남아 있는 성도들이 전부 다 갓 복음을 영접한 초신자들이었으니 어떻게 걱정이 안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들이 환난과 시험을 받아 흔들리다가 믿음을 잃어버린다면 바울이 한 모든 수고는 다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헛수고가 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양육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부모의 역할이 자녀의 탄생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사실 그 때부터가 시작입니다. 자녀가 잠시만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무슨 사고가 나지는 않았는지 노심초사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 거친 세상 속에서 자녀가 스스로 설 때까지 부모는 많은 수고를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남미에서는 이런 양육의 부담을 지기 싫어 자녀가 태어나면 도망치는 아버지들이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이 바울이 바로 그런 무책임한 아버지 같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무책임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항상 양들의 상황을 살피고, 때로는 굳게 하고 때로는 위로하면서, 어떤 환난이나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을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힘을 다해 섬기고자 했습니다. 자기가 직접 갈 수 없을 때에는 대신 동역자라도 보냈습니다. 새로운 교회가 개척될 때마다 기쁨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성도들을 양육해야 하는 무거운 부담을 새로 떠안는 셈이었습니다. 바울이 기꺼이 이런 부담을 안고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를 심방하고 돌아온 디모데가 어떤 소식을 전해주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은 희소식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믿음과 사랑이 풍성한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그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만큼이나 그들 또한 바울을 보고 싶어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었을 때 바울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7절에 보면 이 소식이 궁핍과 환난 중에 있는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 있을 때 쓴 서신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 여러모로 힘든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물질이 없어서 천막을 만들어 파는 일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갈리오 총독의 법정에 서기도 했습니다. 이런 힘든 상황 속에서 걱정하던 양들이 아주 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울은 너무 기뻐서 새로운 힘이 불끈 불끈 솟는 것 같았습니다. 8절에 보면 심지어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서 있다고 하니 이제는 내가 살겠다!'하는 표현까지 합니다. 바울은 양의 상황에 따라 죽기도 살기도 하는 영락없는 목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목자가 떠나고 초신자들만 남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이렇게 믿음 위에 굳게 서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사람 목자인 바울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셔서 데살로니가 양들을 키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바울의 걱정은 기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를 생각할 때 바울은 너무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양들을 향한 바울의 목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바울의 목자의 심정에 공감하고 그것을 배우려면 양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양을 먹이고 제자 양성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오늘 말씀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가슴으로는 느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하려면 일단 양을 얻어야 합니다. 열심히 전도해서 새 양을 얻고, 2세라도 붙들어 놓고 양을 삼아야 합니다. 양이 있어야 심정도 배우고 책임감도 배우고 보람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즘 한 사람의 양을 얻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직장 생활에 바쁜 학사 목자님들은 더욱 상황이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한 가지 특별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본문의 모든 주어가 '내'가 아니라 '우리'로 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유일한 예외가 2장 18절입니다. 여기에서만 '나 바울'이라고 되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말해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양을 혼자 섬긴 것이 아니라 팀으로 섬겼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바울의 선교팀에는 바울 뿐 아니라 실라도 있었고 디모데도 있었고 누가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심방갈 수 없을 때 디모데는 바울을 대신해 데살로니가 교회로 심방을 갔고 실라는 빌립보 교회로 갔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양들을 내 양으로만 보지 않고 우리 양, 우리 팀의 양으로 여겼습니다. 디모데를 비롯한 동역자들 역시 바울의 양으로만 여기지 않고 우리 양으로 여겼기 때문에 기꺼이 가서 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요회라는 팀이 있습니다. 요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주일 예배 후에 같이 밥을 먹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요회는 제자 양성의 기본 단위입니다. 물론 일대일 목자가 있지만 일대일 목자 혼자서 제자 양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회의 동역이 필요합니다. 네 양, 내 양 가릴 것이 아니라 요회에 속한 양들은 전부 다 내 양이고 우리의 양입니다. 일대일 목자가 바쁠 때 요회의 다른 목자가 대신 심방을 갈 수도 있습니다. 전도는 내가 하고 일대일은 다른 목자님에게 넘겨 드릴 수 있습니다. 양육에 꼭 필요한 권면하고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일은 모두가 다 참여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렇게 참여하다 보면 내 일대일 양이 없더라도 우리 양을 도우면서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모임의 요회들이 제자 양성의 기본 단위로서 합심 동역하여 양들을 섬기고 양육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 양, 네 양을 가리지 말고 우리 양으로 영접하고 동참하는 가운데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목자로서 데살로니가 양들을 위해 했던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바로 기도였습니다. 바울은 기도하되 주야로 심히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낮이든 밤이든 열정적으로 양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도의 열정이 어디서부터 생겨난 것일까요? 바울은 기도의 목적이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충하다’라는 말을 원어로 보면 '완성하게 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바울이 욕심이 많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욕심을 내되 돈에 욕심을 내거나 명예나 지위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양들을 믿음이 완성된 자로 양육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미 훌륭했습니다. 많이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히딩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울은 여전히 배가 고팠습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때 바울은 그들을 주님께 은 면류관이나 동 면류관으로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기왕 드릴 바에 최고의 금 면류관으로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쉬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구체적인 기도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11절부터 13절까지를 보면 바울의 기도 제목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께서 바울이 다시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기도 제목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피차간에 그리고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넘치게 하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피차간의 사랑이란 성도 상호 간의 사랑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란 한 걸음 더 나아가 불신자들, 심지어 박해자와 원수들을 향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기도 제목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하나님 앞에 거룩함에 흠이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기도 제목을 볼 때 앞에서 언급한 믿음의 부족한 것이 구체적으로 더 큰 사랑과 더 온전한 거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사랑과 거룩, 거룩과 사랑에 관해서는 '이제 그만, 이 정도면 충분해' 이런 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양들이 더욱 충만한 사랑과 더욱 흠이 없는 경건과 거룩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끊임없이 가르치고 권면했습니다. 어떻게 바울에게서 이런 동기가 계속 흘러나올 수 있었을까요? 이는 바울 자신이 먼저 거룩과 사랑에 있어서 온전하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먼저 양들의 본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여기서 나를 본 받으라는 말은 바울에게서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불타오르는 그 열정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90 퍼센트에서 100 퍼센트에 이르게 하려면 90 퍼센트까지 오는데 들인 만큼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완전에 이르게 하려는 것만큼 피곤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적당히 대충 대충 하려고 합니다. 제자 양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도 사랑이 있으면 대단하지 않는가? 이 정도 거룩하면 세상 사람들에 비해 거의 성자 수준이 아닌가?' 하면서 여기까지만 하자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다른 사람과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준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 분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흠이 없는 수준인가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 모두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우선 나 자신부터 더욱 넘치는 사랑과 흠 없는 경건에 이르도록 연습을 해야 마땅합니다. 뿐만 아니라 양들을 그런 사람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권면해야 합니다. 얼마 전 여름 수양회가 끝났습니다. 이번 수양회는 말씀의 은혜가 풍성한 수양회였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번 여름은 이것으로 받을 은혜 다 받았다. 여기서 마무리하고 남은 기간은 날도 더운데 좀 쉬자'라고 마음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거룩하고 더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 달려가야 할 길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이번에 남은 방학 기간 동안 사사기 전체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사사기는 인간의 부패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사들을 통한 믿음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학생들이 총 11 강의 사사기 공부를 부지런히 달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어디 학생들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8월 한 달 말씀과 기도에 깊이 잠겨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생수를 마시고 이 무더위를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더 성숙하고 성장하여 가을 학기를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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