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출애굽기

귀 뚫은 종

이창무 2015. 11. 24.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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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뚫은 종


말씀 : 출애굽기 21장 1절 ~ 6절

요절 : 출애굽기 21장 5절, 6절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오늘 말씀은 히브리 노예에 대한 율법 규정 중 일부분입니다. 노예에는 전쟁 노예와 히브리 노예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전쟁 노예는 전쟁 중에 사로잡힌 포로 출신으로 노예가 된 이방인들입니다. 반면 히브리 노예는 동족 중에서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히브리인이 노예가 된 이유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타인에게 손해를 끼쳤는데 이를 배상할 돈이 없는 경우, 몸으로 때우기 위해서 노예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노예가 육년 동안을 섬긴 후 제 칠년에는 자유를 주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도 본문과 같은 규정이 있는데 약간 다릅니다. "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신명기 15:13,14) 보낼 때 공수로 보내지 말고 후히 주어 보내라는 부분이 신명기에는 추가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자유한 종이 이후에 먹고 살 밑천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빈 손으로 나가게 되면 경제적 기반이 없어서 또 다시 다른 집 노예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6년을 섬기고 제 칠년에 자유를 주었을까요? 이는 7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년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규례는 7년을 일곱번 보낸 49년을 지낸 후 50년마다 돌아 오는 희년 규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희년에는 노예 해방 뿐 아니라 노예가 되기 전에 저당 잡혔던 농토까지 돌려 주는 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자비의 법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 제도는 경제적으로 파산난 사람을 일거리를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고, 보낼 때는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준비시켜 보내 주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이스라엘 버전의 빈민 구제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는 일시적인 노예 신분은 있었지만, 사실상 노예 제도는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을 가진 민족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게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였습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처자식까지 노예 신분은 세습되었습니다. 어떤 주인이 노예를 딱 육 년만 부려 먹고 퇴직금까지 두둑이 챙겨서 자유를 주겠습니까? 육 년을 일하면 기업체로 치면 과장 직급으로서 가장 일을 잘 하고 열심히 할 때입니다. 종을 풀어 주려고 할 때 주인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실제로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이 규례를 잘 지키지 않는 주인들이 있어서 하나님께 심한 책망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인들이 종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지 않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대신 자유를 주어 그 주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규례를 이처럼 중요시 여기실까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보통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는 특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서로에게 남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 아버지 아래 있는 형제요 자매들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종 삼는 일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규례에서 정말 특별한 것은 스스로 해방되기를 거부하는 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5절에 보면 첫째는 주인을 너무 사랑해서 둘째는 처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 계속 종이 되길 소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종살이 도중 결혼한 처자는 주인에게 소유권이 있어 함께 데리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선택은 전적으로 본인의 자유에 속했습니다. 처자를 사랑해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은 그럭저럭 쉽게 수긍이 갑니다. 그런데 주인을 사랑해서 자유를 뿌리치고 스스로 종이 되기를 원한다니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선택을 받은 그 주인은 어떤 주인일까요? 그 주인은 분명 인자하고 자비로운 주인일 것입니다. 그는 공의롭고 만사를 공평하게 다루는 주인일 것입니다. 그 주인은 노예를 노예를 여기지 않고 친 자식처럼 친 형제처럼 아끼는 주인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본래 자유하지만 스스로 종이 된 사례들이 여럿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은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아무 누구에게도 빚을 지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이 되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종이 되신 이유도 역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 성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성부의 뜻을 이루시고자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종이 이렇게 영원히 종이 되길 원하는 경우 재판장에게 가서 문에 귀를 대고 송곳으로 귀를 뚫도록 했습니다. 오늘날은 누가 귀를 뚫습니까? 주로 자매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귀를 뚫습니다. 또 피어싱이라는 이상야릇한 취미가 있어서 귀 뿐만 아니라 코, 배꼽, 심지어 혓바닥까지 뚫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귀를 뚫는다는 것은 치장이나 취미가 아니라 영원한 예속을 상징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군대에서 "말뚝 박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말뚝을 박는다는 것은 군대에 장기 복무 지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군에서 다른 건 강요하지만, 장기 복무 선택만큼은 본인의 자유에 맡깁니다. 다들 말뚝 박기를 극도로 싫어 합니다. 군에서 가장 심한 저주가 ‘너 말뚝 박아라’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은 그 중에 군대가 좋다고 장기 복무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기 복무를 지원하기 전과 후는 군인이란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분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원 전에는 의무 복무 군인이었지만, 지원 후에는 자원하여 복무하는 군인 즉 직업 군인이 됩니다. 귀를 뚫기 전이나 후나 종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귀를 뚫은 후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이 됩니다. 의무에 의한 종이 아니라 자원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 가운데 스스로 속박되기를 결정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원하는 종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주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래도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유와 퇴직금도 다 버리고 스스로 종이 됩니다. 사랑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사랑은 그 소중한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은 종이 되기를 기뻐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의무에 의한 종은 6년이라는 의무 복무 기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종은 종신토록 그 상전을 즐거이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두번째로 사도 바울이 생각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 장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김 남준 목사님이란 분도 항상 싸인을 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노예 김 남준’이라고 서명을 하십니다. 우리는 과거 죄의 빚을 진 자였습니다. 이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어 인생이 파산했습니다. 빚을 갚기는 커녕 날마다 그 채무가 점점 더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나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내 대신 댓가를 지불하시고 빚을 청산해 주셨습니다. 그 댓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어린 양의 보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피로 우리를 죄의 종 노릇하던데서 , 사단의 종 노릇 하던데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또한 우리는 율법과 양심의 의무 아래서 짓눌리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율법의 의무 아래서 신음하며 짓눌려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율법의 의를 우리를 대신해서 모두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의를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셔서 우리도 율법 앞에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율법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죄와 율법로부터 자유케 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늘 자신을 종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제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귀 뚫은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사랑하고 처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귀 뚫은 종이 된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청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때문에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자원하여 종이 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귀를 뚫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송곳으로 귀를 뚫듯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죄악된 성품 곧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 다음으로 종신토록, 영원히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헌신하는 종이 됩니다.

여러분 귀를 한 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코를 한 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분은 어디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까? 귀 뚫은 종도 있지만 코 뚫은 종도 있습니다. 코 뚫은 종은 코에 코뚜레가 끼여서 주인에게 질질 끌려가는 종입니다. 코 뚫은 종은 가기는 가되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리며 억지로 끌려 갑니다. 코 뚫은 종은 주인이 고삐를 당기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달란트 비유에 보면 이런 코 뚫은 종이 나옵니다. 달란트 비유는 첫째 종은 주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이 종은 말합니다. "주님은 나에게 너무 많은 부담과 의무를 지우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이 종을 악한 종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가 악한 종일까요? 이는 그가 주인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굳은 사람도 아니고 심지 않은데서 거두는 그런 가혹한 사람도 아닙니다. 이 주인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달란트를 묻어 두는 바람에 결국 주인을 악랄하고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 셈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인상을 박박 쓰면서 질질 끌려가는 신앙 생활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저 사람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가혹한 존재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질질 끌려가며 신앙 생활하는 본인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사실 과거 저의 삶을 돌아 보면 질질 끌려 다닌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목자님에게 질질 끌려서 일대일하러 왔습니다. 또 질질 끌려서 여름 수양회에 참석했습니다. 질질 끌려가서 역사를 섬긴 적도 많았습니다. 이리 저리 눈치보다 틈만 나면 잠적해 버리고, 하나라도 맡겨지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도망가기가 바빴습니다. 저는 육년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코 뚫은 종과 같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무도 저를 질질 끌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목요소감발표모임에 안 왔다고 "절대성을 가지자" 이렇게 외치면서 고대 운동장 열바퀴를 뛰고 오라는 훈련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러시아 김 에스더 선교사님이 오셨을 때 저에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니 아직도 기타 들고 찬양을 인도하세요? 나이가 몇인데..." 그런데 찬양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찬양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 즐겁고, 찬양 중에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때문에 기쁘게 찬송합니다. 이렇게 메시지를 준비해서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도하면서 자꾸만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고 자꾸만 더 하나님께 기대고 싶습니다. 이제 보니 코에 뚫려 있던 구멍이 어느새 귀 쪽으로 옮겨져 버린 것 같습니다. 도대체 저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던 것일까요? 원인은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저는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압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제 영혼에 빛을 비추어서 하나님은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이 좋다는 말 속에 온갖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들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공의로우시면서 능력이 크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귀를 뚫어서라도 영원히 그 곁에 함께 있고 싶은 분이십니다. 사람을 돕다 보면 과거 저와 같이 코 뚫은 종처럼 질질 끌려가는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너무 안타까워서 속으로 눈물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신데... 참 좋으신 하나님인데 ..." 그리고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우리 속에 새 영을 창조하시어 좋으신 하나님을 알게 도와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심령을 우리 모두 속에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코를 뚫어 질질 끌고 가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 가운데 사랑으로 스스로 속박되어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주를 섬기길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이미 우리 속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새 본성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받고 즐거이 주님을 따르는 귀 뚫은 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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