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베드로전서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이창무 2015. 4. 30. 11:45
반응형

2014년 8월 베드로전서 제5강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말씀 / 베드로전서 5:1-11

요절 / 베드로전서 5: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요즘 ‘명량’이라는 영화가 한국 영화 신기록을 써가고 있습니다. ‘명량’은 최단 시일 동안 최다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이 영화에 열광하는 것일까요? 저도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 바로는 영화 자체가 아주 뛰어난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주인공이 이순신이기 때문이라고들 말합니다. 영화를 보면 명량 앞바다에서 조선수군이 단 열세척의 배로 수백척의 왜군 함선과 맞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혼자서 맨 앞에 나가서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입니다. 그 모습을 본 부하들의 두려움이 용기로 바뀝니다. 그러자 모두 힘을 합쳐 적군을 궤멸시켜 버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순신 장군이 앞장서서 본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형편없이 적은 수로도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 역시 목자들에게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목자의 도리와 자세를 잘 배워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목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여기서 장로란 누구일까요? 물론 장로는 나이 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고 다 장로는 아닙니다. 여기의 장로는 특별히 교회의 리더들을 가리킵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의 리더들에게 당부할 권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권면을 하기에 앞서 자신을 두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로 나도 함께 장로 된 자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앞서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소개했습니다. 얼마든지 사도의 권위로서 장로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함께 장로 된 자로서 즉 동료이자 선배로서 권면하고자 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춤으로 겸손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며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을 곁에서 직접 보았던 목격자이자 증인이었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살고자 했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산 소망 가운데 현재의 고난을 감당했습니다. 이제 장로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도 이와 같았습니다. “교회의 지도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고난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 고난을 잘 감당하고 나면 곧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이 확실합니다. 제가 이 일의 증인입니다.”


그러면 사도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주는 권면이 무엇입니까?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베드로는 먼저 기본이 되는 장로의 사명이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장로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맨 뒷자리에 앉아서 오늘 안 온 사람이 누군가를 체크하는 것입니까? 행사가 있을 때 찬조금을 기부하는 것입니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장로의 사명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것입니다. 양을 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양을 돌보고 먹이는 것입니다. 결국 장로는 양치는 사람 곧 목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목자로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목자가 어떤 자세로 양을 쳐야 할지에 대해서 베드로는 세 가지 세트로 권면합니다. 각 세트는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마땅히 해야 할 것이 한 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해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억지로 양을 치는 것입니다. 양을 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양은 힘들고 부담스러운 십자가입니다. 목자는 아쉬운 소리 해가면서 피싱을 합니다. 소원 없는 양들을 쫓아 다녀야 합니다. 말씀을 먹이기 위해 연구와 고민을 많이 합니다. 열심히 중보 기도합니다. 시시때때로 밥도 사주고 심방을 가고 이것저것 챙겨주고 신경 써주어야 합니다. 양이 속을 긁어 놓아도 꾹 참아야 합니다. 이것이 보통 일입니까? 그런데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쯤 되면 이미 리더가 되어 있습니다. 다들 목자라고 불러줍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목자의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안 할 수는 없습니다. 하기는 하되 억지로 하기 쉽습니다. 기쁨이 없이 인상을 쓰면서 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억지로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일하기 싫어도 먹고 살려면 직장에 출근을 해야 합니다. 형제들에게 군대 생활은 억지로라도 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 치는 목자 생활까지 그렇게 해야겠습니까? 다른 일은 몰라도 목자 생활은 억지로 할 일이 아닙니다. 목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자원하는 마음이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하는 마음입니다. 누가 압력을 주었기 때문도 아니고, 체면을 세우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자원함으로 양을 칠 수 있습니까? 양 치는 십자가를 쉽고 가볍게 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생겨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베드로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을 기억합니다.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비겁한 배신자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도 사명을 저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나 잡으며 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갈릴리까지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주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자신의 양들을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부탁하실 때 다른 것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용기가 있느냐? 얼마나 지조가 있느냐? 성실하냐? 능력이 있느냐? 스펙은 되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가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만 묻으셨습니다. 레미제라블을 보면 장발장은 판틴이라는 여인을 도와주고자 했지만 끝내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장발장은 판틴이 남기고 간 어린 딸 코제트를 죽는 날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돌보아 줍니다.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신 주님, 내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을 우리는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양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양을 돌보는 수고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쏟으신 수고와 그 희생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목자의 열심은 예수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체험함에서 솟아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양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대신 죽으신 어린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불붙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불붙은 마음으로 맡겨주신 양들을 힘써 돌보고 먹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는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고 합니다. 이 권면은 우리에게 좀 생소합니다. 우리는 더러운 이익 즉 돈을 목적으로 양을 친다는 생각을 아예 꿈조차 꾸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면서 양을 칩니다. 돈을 벌려고 했으면 다른 일을 하지 양을 치지 않았습니다. 목자 생활한다고 밥이 나오지도 떡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돈을 목적으로 양을 치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양치는 일을 생업이나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기는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목자가 아니라 삯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질적 보상이 아니더라도 다른 목적을 가지고 양을 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목적으로 양을 칠 수 있습니다. 내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서 양을 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더러운 이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동기로 양을 쳐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기꺼이 해야 합니다. ‘기꺼이’라는 말은 영어로 ‘eagerly’입니다. eager 즉 열정을 가지고 양을 치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아무 물질적 보상이 없어도 열정 한 가지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다수 시민운동가는 무보수 혹은 최소한의 보수로 헌신하여 일합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도 예술가의 혼을 불사릅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사명이 있습니다. 죽어가는 한 사람을 살려내서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는 일, 이 나라와 민족을 성서 위에 세우는 일, 세상 끝까지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 등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과 사명입니다. 이 일이 시민운동이나 예술가의 창작 행위보다 더 가치 없는 일입니까? 우리의 열정을 쏟아 붓기에 모자람이나 부족함이 있습니까? 밥이 나오지도 떡이 나오지도 않는다 하여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할지라도 목자의 사명은 우리가 온 몸을 불사르기에 전혀 아깝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 모임은 이 열망을 모두가 공유하고 모두가 여기에 헌신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전통을 잘 지켜가면서 더욱 순수하게 더욱 큰 열정을 품고 목자의 사명을 감당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3절에 맡은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2절에 하나님의 양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 줍니까? 양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양은 내 것이 아닙니다. 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럼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소유인 양들을 위탁을 받아 섬기는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내가 주인 노릇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주인도 아니면서 주인 노릇 하려는 것이 주장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양을 치는 것(돌보고 먹이는 것)이 아니라 양을 치는 것(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들을 먹인다고 할 때는 양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 말을 잘 듣는 사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만들어야지 나를 따르는 내 부하로 만들면 안 됩니다. 나를 따르게 하려다 보면 양들을 교묘하게 조작하고 권위적으로 통제하려고 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반드시 큰 탈이 납니다. 목자는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본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목자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장래의 영광과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목자의 본을 따라서 양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예수님의 제자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말로만 하지 않으시고 친히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무도 섬기려는 사람이 없을 때 친히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을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이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말은 금방 잊어버려도 삶으로 보여준 본은 마음 깊숙한 곳에 각인이 됩니다. 사람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말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 멈추지 말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삶으로 보여주는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까지 목자의 삶과 도리에 대해 배웠습니다. 어떻습니까? 참 쉽지가 않습니다. 목자의 삶은 무거운 짐과 고난의 십자가의 연속입니다. 본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와 싸우는 험난한 과정입니다. 이렇게 고생한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이득이나 열매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 자비량 선교사님들의 삶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자비량’이라고 하면 멋있게 들리지만 따지고 보면 ‘아무 지원도 없다. 알아서 살아남아라.’하는 말입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이 땅에서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량으로라도 선교를 하겠다고 낯선 땅에 가서 물질 자립을 위해 하루하루 고군분투하고 계십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어엿하게 대학을 졸업했지만 선교지에선 길거리에 좌판을 벌여 놓고 볼펜을 팔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서 머리털이 빠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현지인의 언어를 습득합니다. 그렇게 배운 언어로 현지 양들과 성경 공부를 하고 매주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열악한 곳에서 힘든 사건 사고를 겪는 분들도 있습니다. 파라과이 이요한 선교사님은 강도에게 총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신 적이 있습니다. 온두라스 강다윗 선교사님은 머리에 총알을 맞기도 했습니다. 어렵게 선교지에 갔지만 현지에서 질병에 걸려 이미 세상을 떠난 분도 계십니다. 그렇게 고생한다고 해서 모두가 큰 역사를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몇 사람의 양을 제자 삼기 위해서 우리 선교사님들은 오늘도 눈물로 씨를 뿌리고 계십니다. 그에 비하면 저는 너무 안일하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자라는 타이틀이 부끄럽게도 정말 너무 편하게 목자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교사님의 수고가 다 소용이 없는 것입니까? 헛고생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우리의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썩지 아니할 영광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습니까? 발과 다리, 허리, 온 몸에 고장이 안 난 곳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면류관은 결국 시들어 버릴 면류관입니다. 죽도록 충성하신 선교사님들과 목자님들의 충성과 헌신은 하나도 땅에 떨어져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부족하지만 목자로 살고자 했던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주실 줄 믿습니다. 목자가 바라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이 외에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양들에게 존경받고 동역자들에게 인정 받고 칭찬 받는 것은 우리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다시 뵙게 되었을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듣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음으로 젊은이에 대한 권면입니다. 5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젊은이는 말 그대로 젊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리더를 따르는 팔로워를 말합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베드로가 딱 한 말씀만 하십니다. “장로들에게 순종하라.” 리더는 여러 가지를 다 잘 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팔로워는 한 가지만 잘하면 됩니다. 리더를 따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순종을 싫어합니다. 자기 뜻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세우신 지도자들을 통해 공동체에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과 지혜에 거스르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면서 반발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히 장로들의 말을 잘 따라야 합니다.


5절 하반절과 6절을 보십시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 부분은 장로와 젊은이 모두에게 주는 권면입니다. 장로는 젊은이에게, 젊은이는 장로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합니다. 겸손은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공통의 덕목입니다. 겸손이라는 말은 앞치마라는 말을 어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치마는 섬기는 사람이 두릅니다. 겸손하라는 말은 서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장로는 젊은이를 섬기고 젊은이는 장로를 섬깁니다. 이런 공동체는 모든 세대가 하나로 뭉쳐서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겸손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때 사람들에게도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허물 많은 죄인인가를 깨닫고 자기가 깨어진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겸손을 아는 사람만이 섬길 수 있습니다. 본이 될 수 있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겸손해서 망하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능하신 손으로 높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교만할 때 많은 염려를 하게 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려 하기 때문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까봐 두려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7절을 보십시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겸손입니다. 나의 장래도 나의 가족도 나의 노후도 건강도 모두 주님께 맡겨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목자님들이 계시지만 그분들이 우리의 인생 전체를 책임져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참된 목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 분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 삶을 돌보아 주십니다.


베드로는 이제까지 서로에게 겸손한 자세로 대할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좀 다른 분위기로 전환합니다.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먼저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고 깨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실 때 곁에서 쿨쿨 잠만 잤던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뼈아픈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간곡하게 이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깨어 있어야 합니까?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먹잇감을 찾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는 강한 개체는 공격하지 않습니다. 새끼나 병이 든 약한 개체만을 골라 공격합니다. 동물의 왕이라고 하지만 사자는 알고 보면 참 비겁합니다. 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쾌락에 취한 사람, 자기 영광에 취해 정신줄을 놓은 사람, 기도하지 않고 자고 있는 사람들을 노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믿음을 굳건히 하고 사탄을 대적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탄을 대적하면 사탄은 ‘이 놈 센데...’ 하면서 물러갑니다. 사탄의 공격에 주눅이 들어 움츠리고 뒤로 물러서면 약점을 잡혀 결국 먹이가 되고 됩니다. 아울러 우리가 고난의 때에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형제들이 함께 고난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온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미래의 성도들, 그리고 동시대의 전 세계에 있는 성도들과 거대한 그리스도의 군대로 함께 사탄과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죄악에 맞서 싸울 때 우리 곁에 전우들이 함께 하고 있음으로 인해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또한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곁에 있는 전우들이 사기도 함께 꺾이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사탄과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고 더욱 분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사도 베드로는 모든 권면을 마치고 송영으로 편지를 맺고자 합니다. 10절과 11절을 보십시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은혜의 하나님은 과거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은혜의 하나님은 미래에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는 어떠합니까? 현재는 우리가 잠깐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너질까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견고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이 모든 환란 가운데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은혜로 택하셔 부르시고 은혜로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게 하시며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은혜로 장래의 영광을 얻게 하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아멘.


(2014. 8. 31. 이창무)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