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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요약)
    기타/도서 2015.08.13 14:21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원제: Truth is Stranger Than It Used To Be : Biblical Faith In A Postmodern Age) 


    저자: 리차드 미들턴, 브라이언 왈시 (J. Richard Middleton & Brian J. Walsh)

    번역: 김기현, 신광은/ 출판사: 살림/2007년

    요약: 안암 UBF 김모세 목자


    * 이 책의 구성

    책의 목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를 파악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기독교세계관을 제시하고자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포스트모더니티’라는 문화변동의 관점에서 모더니티가 왜 쇠락했는지에 대해 더 정밀하게 분석하려고 했다. 또한 인간고통에 반응하시고 특히 출애굽 이야기를 통해 우리와 소통하시는 하나님의 내러티브적 특성과 그 내러티브에 뿌리박은 성서적 세계관을 재규명하고자 했다고 말하고 있다. 

    1부: 포스트모던이라는 현실인식에 집중

    2부: 이에 대한 문제 해결책으로 성서의 자원들을 제시


    이 책의 저자는 세계관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4가지 칠문을 던지는 형식을 취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현실의 본질을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사명은 무엇인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장애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지금의 어려움 등을 통해 온전해지는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제1부 포스트모던 조건


    1장- 우리시대의 위기

    1장에서 저자는 19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500주년 기념이야기를 시작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500년 전의 콜럼버스의 미국 대륙의 발견과 미국의 발전과 번영을 같은 선상에 놓고 이를 축하했지만 이에 대해 원주민들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영광스러운 발견이 아니라 잔인함, 거짓, 억압, 그리고 낙원에 대한 터무니없는 강탈이라고 논평했다. 과거에는 콜럼버스를 비판하는 소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시대를 강하게 비판하는 소리가 서양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서 한 시대의 근본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이 확신을 추종했던 이들은 더 이상 그 확신에 열정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콜럼버스에 대한 논쟁은 모더니티의 종말을 의미함과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리는 것이 되었다. 그러면 콜럼버스의 논쟁은 왜 모더니즘의 종말을 의미하는가? 


    첫째, 이제 서양 중심의 세계관시대는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 문화 중심부에 있던 콜럼버스 이야기는 아주 빠르게 힘을 잃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제는 이 이야기에 대해 침묵하고 있던 원주민 등의 세력들이 원주민의 입장에서 새롭게 이야기를 해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콜럼버스의 이야기에서 구현된 세계관은 다음과 갈은 것이다. 

    (1)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 신세계에 살고 있다. 잃어버렸던 에덴을 이제야 발견했다. 

    (2) 우리는 누구인가? - 정복자다. 야만인들이 살던 황무지를 경작한 정복자다.

    (3) 무엇이 잘못되었나? - 중세 유럽의 정체된 위계 사회가 우리의 진보를 위협했다면, 오늘날에는 신대륙의 야만성과 결합된 인디언의 원시성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4)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우리는 아메리카 땅과 원주민들을 정복해야 한다. 그래야 진보하며 언덕 위에 빛나는 도시를 건설하고 미국은 약속의 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원주민들의 관점에서 이에 대한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제는 다원화된 문화 속에서 서로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소그룹들, 소외되었던 사람들(ex. 동성연애자, 흑인, 매춘부 등)이 자기 목소리. 자기 권리를 주장하면서 그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주변부가 중심부를 향해 도전해 오고 있다. ‘권리를 주장하는 다양한 목소리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이라고 했는데 실제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1장에서는 근대의 진보정신의 시작을 말하면서 이러한 근대가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의 꿈과 야망이 담긴 바벨탑에 비유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근대라는 건물은 1층은 ‘과학’, 2층은 ‘기술’, 3층은 ‘경제성장’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근대는 이런 식으로 기획되었다.  


    이런 근대정신에 대해 존 듀이는 이렇게 말한다. 


    첫째, 근대는 초자연적인 것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대신에 자연, 현세, 그리고 세속 세계에 호감을 갖는다. (* 전근대시대- 신화나 계시에 기초한 신앙을 토대로 이루어진 문화)

    둘째, 교회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던 중세와 달리 ‘근대인은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진리를 얻는데 관찰, 경험, 사유의 방법을 따라가며, 개인의 정신 능력을 믿는다.’ (* 자율적 인간)

    셋째, 진보에 대한 신념이 근대의 특징이다. “인간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황금시대는 우리 뒤가 아니라 우리 앞에 있다.” “인간은 그가 정말 하려고만 한다면, 또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가는 데 필요한 용기, 지혜, 그리고 노력을 훈련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다.”

    넷째, “이 세계의 진보는 근면함과 자연에 대한 실험을 통해 연구하고, 자연을 통제하고, 사회가 활용할 수 있는 발명품을 만드는 노력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는 어디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과학 기술적 확신’에 사로잡혀 있다가 답이 된다.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으로는 ‘우리는 자율적인간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답으로는 ‘자율과 진보, 세계지배를 방해하는 것들이 문제이다’, 그리고 ‘해결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우리는 문제점을 스스로 고치고 치료한다’로 대답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바 인간은 인간 자신에 대해 스스로 구원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더니티의 역사적 자신감의 요체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는  더 이상 이런 자신감이 없다. 이런 자신만만한 모더니즘은 1차세계 대전과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20년도 채 되어 발발한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모더니즘의 낙관주의, 자긍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전후에 본격 등장하기 시작한 실존주의자들(사르트르, 카뮈, 야스퍼스)은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심각한 절망과 불안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베트남전, 60년대 반문화 학생운동은 미국의 자신감을 뿌리 채 흔들어 놓으며 모터니티의 완전한 죽음을 선고하게 했다. 저자는 이러한  모더니티의 위기는 근대가 태동하던 시점, 즉 콜럼버스가 인디언을 노예로 삼던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노예산업,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환경오염, 대량학살무기와 대량살상을 가져오는 전쟁, 발칸반도의 인종청소, 걸프전이후 회교세력의 도발 등을 포스트모더니티가 모더니티에 복수를 가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는 마치 바벨탑을 건설하며 목적을 이루었다는 기쁨에 들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사 온 지편에 흩어버리신 이야기와 같다. 그러나 이때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이 모든 문화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 시대의 문화를 정죄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인 모두는 모더니티에 연루되어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도 치유가 필요하다. 치유를 위해서 먼저 이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민감하고도 공감하는 마음으로 이 시대의 절규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2장 이제는 달라진 실재


    확신에서 의심으로 

    모더니티의 확신에 의심이 가해지면서 사람들은 모더니티가 비서구나 전근대 사회의 관습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생경한 결론을 내리고 되었다. 과거 우리가 고상한 도덕적 표준이라고 여겼던 것들의 가면이 벗겨지면서 이것들이 일종의 이데올로기요, 자기 정당화를 위한 주장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실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실재란 ‘사고의 다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근거로 다른 세계관을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 세계관을 배제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당신이 선택한 ‘구성물’과 ‘사고의 다발’을 사용해야 하는가?”. “왜 어떤 구성물은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어떤 것들을 주변적이 되어야할까?” 


    폭력과 해체요법- 자크 데리다와 함께 하는 해체주의자들은 무엇인가를 물화한다는 것(reify)은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해체주의자들은 이 물화 속에 담긴 지배에의 충동과 폭력에의 충동을 드러낸다. 그들은 ‘기만적이지만 절대적인 체계 내에 그것을 가두고 단번에 세계를 지배하려는’ 서구인들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해체주의자들은 모더니티의 패러다임을 인종주의로 본다. 타자들을 이질적으로 볼 때, 인종주의가 생긴다. 인종주의자들은 자신들과 동일한 것만을 정상적이고 규범적인 것으로 여긴다. 리오타르는 모더니티를 인류가 행할 수 있는 최악의 테러라고 보면서 이러한 폭력적인 모더니티의 기획을 단념시키는 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중요한 주제라고 한다. (리오타르-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입장, 소련의 프라하 침공으로 인해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혁명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자각을 갖게 됨)


    그러나 모더니티로부터의 해방은 두 가지 면에서 방향을 상실하게 한다. 

    첫째, 이제까지 인간을 보호하던 실재의 사회적 구성물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인간은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노미는 노모스의 상실이다. 

    둘째, 정의롭고 풍요하며 평화스러운 진보 세계의 환상을 순진하게 믿어왔던 사람들은 무의미의 심연에 빠지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 요법은 모더니티 속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모더니티는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모더니스트들은 해체요법에 의해 겪는 고통과는 별도로, “인간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인간은 세상을 바꾸어 왔다”는 과거에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적 우주’를 만들어가며 꿈을 꾼다. 후기 모더니티는 그동안의 정보력과 기술로 극실재(hyperreal)라는 현실을 만들어 모더니트의 종말을 대체하고자 한다. 월트디즈니, 스타트랙, 쥬라기 공원 같은 것이 그것인데, 그러나 이렇게 이미지를 강화하는 극사실적 모의 세계는 우리를 실재에서 더욱 멀어지게 한다. 이런 극사실적 체험은 심각한 방향 상실감을 초래하며 현실로의 귀환도 하나의 환멸임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말해 이런 극실재는 우리를 결코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세계도 아니고 또 이 극실재를 벗어나 현실 세계에 정착할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계속해서 포스터모더니티는 케이블 문화라며 말을 이어간다. 이는 질비하게 진열되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수많은 서커스들의 카니발이라는 것이다. 케이블 문화는 다원주의 문화의 산물로서 온갖 잡다한 종교와 세계관의 뷔페 요리로 상징된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다가오면서 최고의 수장이 통제하는 권위 중심의 문화가 사라졌다. 포스트 문화에서는 권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서커스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한 포스트모던의 다원주의는 인간이 계몽주의와 이성으로 쌓아올린 바벨탑을 해체시켰다. 이런 모더니티의 해체는 모더니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에게 있어서 하나의 기회다. 바벨탑의 붕괴는 획일적인 전체주의적 야망을 제한하고, 민족과 문화의 다양성을 창출해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문맥에서 바벨탑 기사를 살펴보면 바벨탑 건설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적 목표를 가로막는 오만한 프로메테우스적인 시도였다. 그래서 이 건설이 실패한 것은 인간의 사건 속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로 본다. 인간은 민족으로 해산되었다. 만일 바벨론 건축자들의 건제주의적 야망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새로운 역사로 진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티는 긍정적인 역사적 기회로 환영받아 마땅한다. 


    3장  탈중심적 자아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Homo Autonomous이다. 인간은 독립적이며, 자기 의존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통합적이다. 이런 인간관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루어졌다. 근대인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제한받지 않는다. 끊임없이 쟁취하려는 제국주의적 자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근대적 자아는 자기중심적 자아이다. 이들은 성서를 권위 있는 계시의 원천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세속적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인간관은 환경을 파괴하였고 다른 인간을 지배하였다. 자율적 자아는 폭력적 지배를 했으며 이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왔다. 인간은 묵시록적인 회의에 빠지게 된 것이다(1장에 나온 바처럼). 이 과정에서 자아는 해체과정 중에 있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적 자아는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는다. 포스트모던의 상황은 확정가능하고 단일한 근대적 자아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대안적 자아를 찾아나가야 하는데 그 대안적 자아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다. 일관성 없고 상관성이 결여된 자아가 무수히 나열되고 있다. 이제 인간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인간은 이제 자율적 근대의 주체라는 생각을 버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농담 잘하는 사람, 장난꾸러기, 어릿광대, 그리고 카니발의 바람둥이들이라는 저질문화를 양산해냈다. 이제 인간은 뚜렷한 자기 정체성 없이 자기 자신을 위장하고 패러디하거나 놀 준비를 한다. 


    그러면 인간은 자신을 재구성할 수 없는가? 있다면 어떻게 자신을 재구성할 것인가? 20세기 말에는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 출현하기만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고 무서울 정도로 성공했다. 경력 상담소, 사업 컨설턴트, 휘트니스 클럽, 성인 교육프로그램, 심리상담 치료서비스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포스트모던의 자아이해, 곧 구성과 재구성의 반복이 가능한 자아관을 잘 보여준다. 특히 TV는 부단히 자아를 재구성하려는 인간에게 이미지 가득한 세계를 제공해준다. 예를 들면 음악채널인 MTV는 다른 분위기, 다른 감성, 다른 지식으로 다가온다. 이는 스타일, 변경 가능한 정체성을 제공한다. 이는 결국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다중인격을 형성하게 한다. 거사라의 군대귀신 들린 사람의 이야기는 포스터모더니스트들의 영혼 상태를 설명해준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 우리가 구성한 다원주의적 세계 안에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 우리는 군대 귀신이다. 


    포스트모던 문화는 카니발 문화다. 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진지함을 카니발 입구에 두고 와야 한다. 포스트모던 문화는 쇼핑몰 문화다. 왜냐하면 소비자는 모든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소비자는 피곤하다. 이러한 쇼핑몰 문화 속에서 그들은 심리적으로 소진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가 골라야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니라, 규범적 선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해체는 우리를 규범없는 우주로 내팽개쳐버린다


    근대는 콜럼버스의 항해로 시작되었다. 그때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항해 장치도 없고 목적지도 없다. 우리는 혼자서 포스트모던 세계를 표류하고 있다. 항구에 닻을 내리지 못하고 바다를 떠다니는 허무주의의 세계다. 


    4장 이제는 달라진  그들의 이야기


    이 장에서는 세 번째, 네 번째 세계관적 질문, 즉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해결은 무엇인가’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답변을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윤리학의 보편적 이상으로서는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이 전형이다. 그는 중립적 인간 이성에서 추론해 윤리적 판단을 했다. 그는 이런 윤리학이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법칙에 기초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 윤리학은 개인의 상황, 정체성, 세계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한마디로 근대윤리는 개인에 대해 강압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탠리 하우어와스는 우리의 도덕적 확신은 역사적 특성 속에서 생긴 것으로 이 확신은 자의적이고 허구적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고 했다. 이는 우리의 도덕적 확신이라는 것이 실재적이거나 진리에 기초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적 상황이 도래하면서 근대인은 보편성과 객관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근대 윤리학 체계를 의심하게 되었다. 기독교 철학자 알렉스데어 매킨타이어는 근대 윤리학이 사로 잡혔던 중립성의 허상을 없애는 일에 애썼다. 그는 인간의 주관성이 윤리학에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주관성이란 공동체적이다. 그는 옳고 그름의 판단은 반드시 특정한 전통 안에서만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각각의 윤리적 행위는 사회적으로 구현된 내러티브 안에 있다며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어떤 이야기와 이야기들 안에 있는지 발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변할 수 있다면, 비로서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 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윤리학의 본성에 관한 매킨타어어의 내러티브적 제안은 근대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을 교정해준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세계관의 본질, 특별히 성서와 성서적 세계관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유익하다. 성서는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포괄적인 내러티브의 정황 안에 위치하고 있다. 성서 내러티브는 독자들로 하여금 칸트식 정언명령을 극복하면서 성서적 세계관 안에서 자신을 생각하고 발견하게 한다. 매키타어어의 말대로 인간은 성서 내러티브 안에서 자신과 대화하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해야만 하는가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회의


    포스트모드던의 정신에서 메타내러티브는 역사에 질서를 부과하여 우리를 복종케하는 단순한 인간적인 구성물이요 상징적 장치에 불과하다. 따라서 메타내러티브는 모더니티에 내재했던 ‘지배’ 내러티브가 된다. 포스트모던적 독법에 따르면 메타네러티브, 예컨대 실제에 대한 절대주의자의 주장은 언제나 지배 권력 구조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메타내러티브는 전체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메타내러티브는 물리적, 군사적 폭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행사한다. 예를 들어 20세기들어 나치는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하나의 메타네러트비를 구성했다. 십자군 전쟁이나, 코란이냐 칼이냐의 이슬람의 전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세계정복야망, 미국의 먼로주의 등 모든 것이 다 메타내러티브의 전체주의적, 폭력의 예를 보여준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거대내러티브의 죽음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드던은 철저한 다원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라고 종용한다. 니체는 어떤 것에 구조가 있고 플롯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에 질서를 부과한다는 점에서 내러티브보다는 아포리즘을 선호했다. 아포리즘은 긴밀한 연관성이 부족한, 때로는 무작위로 나열된, 간단한 구색을 맞춘 명언을 모은 것인데 이는 절대 어떤 결말에 이르지 않는다. 서로 관련 없는 아포리즘들은 매우 강력하게 우리를 가격한다. 우리는 체계적이고 내러티브적 논증이 없는 아포리즘을 선택했다. 아포리즘 때문에 많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이야기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체질상 메타내러티브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인간은 삶의 총체성의 의미를 부여하며 거시적인 사물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는 모종의 총괄적인 인식의 틀이 필요한 것 같다. 인간에게 일관성 있는 내러티브가 없다면 인간은 도적적으로 표류할 수밖에 없다. 또한 무작위적인 폭력과 야만성의 처분에 내맡겨질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청년들은 내러티브의 부재로 인해 정체성 없이 도덕성으로 표류하며 낙심과 절망을 폭력적으로 분출하고 있다. 포스터모던한 사람들은 점점 더 이야기 없는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구현된 내러티브가 무엇이 되었든 우리 자신을 그 내러티브에 맡겨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말해주므로 우리가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내러티브, 곧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말해주는 그런 내러티브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과연 인간의 심성 속에 있는 폭력을 치유해주며 인간을 이끌어갈만한 그러한 내래티브는 어떤 것일까? 


    5장 성서적 매타내러티브


    성서는 기독교인의 이야기 규범이요, 정경이자 신앙의 근간으로서 궁극적으로 전체화에 반대한다. 성서는 반이데올로기적 차원과 반전체주의적 요소들을 명확히 담고 있다. 성서의 반이데올로기적 차원은 첫째는 출애굽에서부터 십자가까지 성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고통에 대한 철저한 감수성이다. 둘째로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의지는 전포괄적이다. 그래서  성서 이야기를 편협하고 당파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정당하게 보지 않는다. 편협하고 당파적이라는 것은 전체주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내러티브를 보면서 인간의 고질적인 폭력의 문제와 이로 인한 고통, 그리고 이를 해결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읽을 수 있어야한다. 


    이스라엘의 세계관과 출애굽 사건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건의 기록이다. 하나님은 바로의 강압에서 고통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소망 없고 출구 없는 역사적 상황 속으로 들어오신다. 출애굽기의 처음에는 들판에서 성을 쌓으며 고된 일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나온다. 이들의 문제는 인간의 타협이나 잔재주로 해결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을 위해 내려오신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이들의 구원이 되신다. 그리고 실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 인해 출애굽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한다.  


    출애굽 이야기의 윤리적 추진력

    십계명은 새로 형성된 자유 공동체의 윤곽을 형성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가나안 땅에 진입하기 전까지의 기록인 모세오경은 신명기에서 과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능력,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회상하며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의 차원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나는 어떤 이야기 속에 속해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 그들의 윤리적 행동은 확실히 이야기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어진 십계명도 내러티브 안에서 생각해야한다. 십계명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러나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제도를 도입하면서 마치 바로에게 시달리듯 왕의 학정에 시달린다. 솔로몬이 애굽과 친교를 맺으면서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이교화되기 시작한다. 이어 전개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왕으로 시작한 우상숭배와  이에 따르는 백성들의 이야기로 점철된다. 이에 대해 선지자들은 경고를 거듭하지만 이들은 결국 우상숭배에 빠지고 이로 인해 바벨론 제국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이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다시 종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희망 없는 그들을 다시 은혜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다. 토라는 그들 신앙의 근거요 출발인데 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야기가 아니다. 토라는 땅을 잃고 포로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의미 있다. 토라 속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들을 출애굽시키셨듯이 이번에는 바벨론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런데 토라의 첫부분의 창세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확언해준다. 이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다. 창세기는 성서의 이야기를 당파적, 민족주의적 해석을 막아준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만의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토라 속에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시고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래서 토라 속의 하나님은 만민에게 희망과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열국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도 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하늘과 땅의 심판주요, 누구라도 소외되고 불의로 고통하며 호소할 때 이들 듣고 해결해주시는 재판관이시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면서 천지간의 모든 것을 아우르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한 선민의식으로 외부인들을 거부했다. 이스라엘은 편협해졌으며 이는 하나님의 구속경륜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가 이 땅에 오셔서 당시 로마의 압제와 이스라엘의 이런 이데올로기의 제단에서 희생제물이 되신다. 이 사건은 소외와 고통을 껴안는 성서의 중심을 전형적으로 구현하였다. 예수의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인간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는 해방의 이야기가 되며 만유 회복의 이야기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우주 안의 모든 피조물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러한 성서 이야기는 포스트모던의 위기 한복판에 있는 우리에게 뭔가를 말해주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성서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문제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고 출구 없는 상황이 문제라고 한다. ‘무엇이 해결책인가’ 라는 질문에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죄로 타락한 만유를 회복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정,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므로 인간을 죄와 고통에서, 모든 피조물들을 그 고통의 멍에에서 풀어주려는 하나님이 그 해결책이다. 


    6장 능력 있는 자아 


    6장의 목표는 인간의 목적과 정체성에 관해서 성서가 어떻게 실제적인 희망의 근거가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창조된 성서적 자아상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자율적 인간을 주장하였다. 그것이 모더니즘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폭력성과 잔인함은 자율적 인간의 한계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고대 근동의 신화는 인간을 신의 노예로 이해하였다. 그것이 그 사회 속에 선포되어 있었다. 인간은 바벨론 제국의 수호신, 말둑의 대적 중 수장의 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악마적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신들과 비교해볼 때 열등하고 비굴하다. 그리고 신의 아들로서의 왕은 이러한 신화에 바탕을 둔 인간 지배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인간을 통치했다. 그리고 이런 신화는 바벨론 사회 질서를 정당화하는 메타내러티브를 제공했다. 


    그러나 성서 속의 인간은 인간을 이런 노예화에서 해방시켜주고 인간이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임을 확신시켜준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부르심 받은 인간은 고대 근동과 오늘날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비인간화에 대항해서 급진적이고 해방적인 대안을 지속적으로 제시한다. 성서는 인간을 능력 있는 행위자로서의 비젼을 제시하며 지상의 참된 권위와 청지기 정신을 갖도록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과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다면적 프리즘이 되어야한다. 우리도 빛나는 하나님의 광채를 받아서 다양한 문화적 활동과 역사적 행동을 해야 한다. 교회는 바깥 세계와 용의 이빨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광채를 비추어주어야 한다. 


    7장 이제는 달라진 의미 


    분에 넘치는 놀라운 선물, 창조세계. 

    성서적 세계관의 특징은 정확히 타자의 고통에 대한 반응과 청취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우리가 사는 세계, 현실의 모든 존재를 창조세계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창조주와 창조 세계의 관계에 ‘언약’이라는 훌륭한 명칭을 제시한다. 그래서 유대인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말한바 있다. 이는 세계의 언약적 본성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성서적 세계관은 세계와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주와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한다. 창조세계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의 담지자인 인간과 맺으신 관계 안에서 창조주에게 묶여 있다. 뿐만 아니라 창조주 역시 창조세계에 같은 식으로 묶여 있다. 홍수심판 이후 하나님이 하신 최초의 언약은 무지개 언약이다. 활을 상징하는 무지개는 만일 하나님이 언약을 어긴다면 화살이 날아가 하나님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라고 한다. 


    창조의 선함 대 폭력의 존재론

    인간 세계의 테러는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는가? 그 유일한 길은 애초에 모든 것이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창조세계는 창조주의 한량없는 사랑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어떠한 필연성의 산물이거나 악과의 전투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 세계관내에 폭력이 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선한 창조 안에 불법적으로 끼어든 방해꾼일 따름이다. 따라서 성서는 폭력이 아닌 평화로 시작한다. 포스트모던이 꿈꾸는 요체는 바로 이런 세계다. 선한 창조의 기억과 전망만이 폭력을 영원히 종식시킬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언약의 존재로서의 인간은 언약적 말씀과 그 말씀을 청종하는 곳에서 창조세계의 집에 거할 수 있다. 누구든지 그 말씀에서 벗어나서 집을 세운다면 실향감(homeless)을 느낄 것이다.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귀향의 꿈을 주셨다. 인간에게는 약속의 땅으로서의 귀향본능이 있다. 출애굽 사건과 바벨론 포로들의 귀향이 이를 말해준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언약에 기초한다. 이것은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에로의 귀향이다. 예수는 갈릴리 지방에 가서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로 오셔서 쫓겨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어주셨다. 치유, 축귀, 식탁교제, 가르침은 깨어진 자들을 회복하고, 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했다. 부랑자들을 따뜻하고 맞아주며 집으로 가는 새로운 오솔길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포로생활을 넘어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라고 하셨다. 이 길은 사명인의 길이다. 이는 앞서 말한 청지기 정신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이 사명에 참여할 때, 피조물의 탄식 소리는 잦아들고 찬송소리는 커질 것이다. 


    8. 우리 시대의 희망 


    저자들은 성서가 하나의 도그마적 교리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이야기(내러티브)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성서의 이야기 속에 거해야한다고 한다. 성서 속에 새롭게 뿌리를 내려야 기독교인들은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성서를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의 정경적 근거로서 받아들이고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성서는 규범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런데 성서 본문의 정경적 능력은 성서의 사상이나 줄거리가 아닌 텍스트로서의 특성 그 자체에 있다. 


    그러나 성서의 본문 중에는 규범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있다. 소위 테러 텍스트라는 것이 있다. 이는 모가난 성서 본문이다. 예를 들면 여성에 대한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이야기가 그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기적인 하갈 추방기사, 이복 오빠 암논에게 강간당하는 다말의 이야기, 무명의 한첩에 대한 윤간과 살해, 사지절단의 기사,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지킨다고 자기 딸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입다의 기사는 사실 납득이 안가는 이야기들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타자를 억압하고 타자의 고통을 묵인하는 메타내러티브의 전체주의적 고통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럴 수도 있다거나 이에 대해 성경은 어떤 윤리적, 신상적 코멘트를 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를 메타내러티브 차원에서 하나님이 간과하신다는 식으로 해석,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서가 유발하는 강력한 윤리적 추진력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킨다. 


    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관한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속과 해방을 경험하지 못하는 주인공들을 만나고 폭력과 야만 속에 있는 그들을 확인해야할까?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 하에 있던 자기 백성들은 구원해주시지 않았는가? 


    이러한 테러 본문들은 전체주의적이고 승리주의적인 메타내러티브식 독법에 대해 성서 안에서 비판 기능을 한다. 이 목소리들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체험의 심장부 속에서 들려오는 성서 속에서의 중요한 고통과 억압을 기억나게 한다. 이에 따른 구출과 변혁의 이야기는 약자들의 권익에 대한 정의와 동정을 열정적으로 갈구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독자들이 플롯 갈등을 해결하도록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성서는 이론적 개념들의 자기 폐쇄적인 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는 성서 속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에 백성들을 참여시키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공동체이다. 성서는 이미 결론이 난 닫힌 책이 아니다. 라이트 역시 성서를 미완성 드라마 대본으로 보았다. 이러한 미완성 부분에 대해 교회와 우리는 즉흥적인 대응 연기를 할 수 있어야한다. 성서에는 하나님과의 신실하고 언약적인 관계의 맥락 속에서 생기는 고통, 의심, 회의의 솔직한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정직한 표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킨다. 


    하나님은 바벨탑에서의 인간 분렬을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다시 하나가 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인간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가 되게 하였다. 이때 다시 언어가 통일 되었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민족이 예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의 역사를 듣고 하나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구속하시기 위해 얼마나 애쓰시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낡은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그러면 누가 이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방인들도 이 이야기 속에 들어올 수 있는가?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적 이야기를 모르는 새신자들이다. 이 문제에 대해 교회가 충돌했다. 예루살렘 회의는 그 충돌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때 이들은 이 회의에서 즉흥연기를 했다. 그들은 성서의 전통에 신실하고자 했고 새로운 현실에 대해서도 민감하려고 했다. 여기서 그들은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려고 즉흥연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우상에게 제사한 음식물을 먹지 말라고 했고 아울러 몇가지 음식 규례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급진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전서 8장에서 우상에게 바친 음식 조차도 상대화했다. 먹을 수도 있지만 약한 자들을 위해 안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바울의 즉흥연기식 해석이다. 


    우리는 시대를 초월해 하나님의 백성과 연합해서 이런 문제들과 싸워야 한다. 또한 혼란의 와중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분별하고자 애써야 한다. 성서는 우리의 즉흥연기가 필요한  개방된 결말의 정경 드라마다. 성서 속 드라마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성서 이야기를 읽을 수 없다. 저자는 우리가 성서 이야기 안에 들어가 그 속에 거하기를 권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신실하고 살면서도 모험에 찬 제자들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만일 성서 이야기 안에 신실하게 거하지도 않고 즉흥연기도 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문화적 침체를 구해날 수 없다.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가 그 이야기를 기억하도록 하고, 우리가 가는 길에 빛을 비추시기 때문에 우리는 즉흥연기라는 모험을 할 수 있다. 실수하고 미끄러져 넘어져도 보혜사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신다. 그분이 바로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되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이는 능력과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령은 성서 드라마의 감독이시오 연기 지도자이시다. 우리는 성령에 의지하면서 이 시대에서 하나님의 구속 목적을 연기하면서 그 억압과 폭력을 막아야한다. 우리는 억압과 폭력을 막기 위해 부름받았다. 우리는 미완성 대본인 성서 속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대본과 조화를 이루고 플롯의 의도와도 일치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성서 이야기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충실히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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