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조직신학

조직신학 서론 요약

이창무 2015. 6. 18.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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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서론 요약

하나의 체계로서 교의신학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 내용의 요약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용어를 사용해 왔다. 멜란히톤은 어떤 주제에 대한 성경적인 진술의 근거라는 의미에서 ‘공통 위치’라는 말을 썼다. 그보다 앞선 세대에서는 피터 롬바르도의 ‘명제들’이란 저술을 통해 유사한 시도가 있었다. 후대 신학자들은 ‘테올로기아’ 즉 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교의학은 테올로기아 중에서 성경에서 올바르게 제시된 진리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교회의 교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근거를 갖는다. 개혁교의학은 성경 안에 하나님의 권위로 주어진 진리 외에 다른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교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의해 인정되고 합의된 교의이다. 교회는 교의를 보존하고 방어하며 고백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교회의 교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와 결코 동일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교회는 실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교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교의 전체에 대한 반대는 무의미하다. 다만 교의 중에서 특정 교의에 대해서는 거절하거나 수납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앙 지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교의신학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학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때로는 성경은 조직적인 신학이 아니라 이미지들과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반론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교의신학은 계시로부터 자료를 모으는 건설적인 학문이지 계시를 떠난 사색이 아니다. 신학자는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들을 생각하고 성경의 통일성을 제시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획득된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지식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교의신학은 오로지 하나의 토대인 성경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전통과 고백이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성경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없다. 교의신학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오직 성경으로부터 획득할 수 있으며 성경은 신학의 유일한 토대이다. 

교의신학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계시해 오셨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지식은 삶 전체를 영원의 전망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신자들의 세계관은 철학적 세계관이나 과학적 세계관과는 다르다. 교의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리스도교 신자 자신이다.

교의신학은 본래 모든 것의 충만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 안에서 자신을 어떻게 영화롭게 하시는지 우리에게 설명해 준다. 교의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학문이다. 교의신학은 지루하고 건조한 학문이 아니다. 교의신학은 신정론이며 하나님의 모든 미덕과 완전하심에 대한 송영이며 경배와 감사의 찬송이다.

계시

계시는 모든 종교에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종교는 초자연적이고 보이지 않는 외부적 힘과 관련을 맺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신을 알고자 한다면 신은 가려진 부분에서 나와야만 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알 수 있도록 허용하고 계시해야 한다. 또한 모든 종교는 구속의 종교들이다. 구원에 관한 인간의 원초적인 질문들은 오직 계시에 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알리신다는 고백함으로써 다른 종교와 공유하게 되는 요소를 중시한다. 

성경은 자연적 초자연 계시를 구분하지 않는다. 창조 계시는 성경만큼 초자연적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본질적으로 초자연적이다. 초자연 계시는 직접 계시와 동일하지 않다. 모든 계시는 간접적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수단, 신현,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신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간격이 너무도 커서 인간이 직접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 

일반 계시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확신한다. 일반 계시에 의해 주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불확실하고 일관성도 없고 오류투성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계시는 이교도들에게 이방종교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 따르면 이방교도들 사이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고 말씀의 조명과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다. 그러나 일반 계시는 이교도 세계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위해서도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많은 증거를 제시하며 성령을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근원으로 알려주고 있다. 여기에서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들과 만나는 확고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의 믿음은 결코 창조를 부정하거나 내세지향적인 것으로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은혜와 자연은 기독교인의 믿음 안에서 연합되고 일반 계시는 하나님 나라와 지상 왕국을 연결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가까이 계신 신에 대한 갈망, 인간에게 계시된 신의 뜻, 특별한 도움을 구하는 보편적인 믿음이란 세 가지 요소를 가진다. 성경적 계시는 이러한 인간의 필요성에 부합되는 여러 구별되는 형태의 계시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또한 하나님은 예언자들에게 갑자기 강력하게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하시고 그를 통해 예언을 전달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기적들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계시된다. 이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와 재창조의 중보자시다. 

특별 계시의 목표는 하나님 자신의 기쁨과 삼위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 계시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을 재창조하는 것이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과 세상을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는 것 그리고 모든 피조물 안에서 주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적 측면과 초자연적인 측면 사이의 날카로운 대조는 계시를 창조와 자연으로부터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키는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 특별 계시는 역사, 세상, 그리고 인간과의 유기적인 관계로부터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대립관계는 은혜와 자연 사이가 아니라 은혜와 죄 사이에 존재한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멸망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오셨다.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의 분리, 금욕주의와 수도원 주의는 개혁주의 세계관에 반하는 것들이다. 반대로 자연에 대한 초자연적인 계시를 부정하는 입장 또한 개혁주의 세계관에 반한다. 합리주의자와 이신론자들은 이성을 만족시키는 한에서만 계시를 허용하는데 이는 특별 계시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의 원리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편재하심과 영원하신 능력에 의지한다. 

성경의 기적들은 기독교 세계관의 독특하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는 자연적 질서에 제한되지 않으며 또한 그것으로부터 배제되지도 않는다. 기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부질 없다. 기적 없는 믿음은 절름발이 믿음에 불과하다.

계시와 경전 사이에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계시의 말씀은 새로운 백성 즉 거룩한 민족을 창조하고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이끌게 된다. 성경의 계시는 역사의 흐름에 개입하지만 동시에 영원한 것을 포함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피해야 할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는 성경만이 계시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다. 기록된 계시는 하나님의 전체 계시 행동의 부분집합일 뿐이다. 두 번째 오류는 성경과 계시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이다. 성경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역사를 부정하는 셈이 된다. 성경만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하나의 확실한 계시가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하게 된 말씀이다. 성령의 시대인 현재 다른 새로운 객관적인 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계시가 완성되었다 할지라도 그 계시의 효과가 중단된 것은 아니며 지금 삶의 전체적인 영역과 역사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 오늘날 계시는 인간에 조명을 비추는 교리일 뿐 아니라 동시에 마음을 새롭게 하는 생명이다. 성경은 기록된 그 시점에서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넣어졌을 뿐 아니라 지금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 넣고 계시다.

교의 신학의 토대들

신학이 학문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그 학문적인 토대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다른 종교들과 비교 연구는 교의학적인 접근 방법이 아니다. 신학의 대상은 종교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신학의 토대는 첫째로 하나님이라는 본질적인 토대, 둘째 성경이라는 외적인 토대, 셋째 성령이라는 내적 인식의 토대를 갖는다. 

과학적 인식의 틀에는 이성주의(혹은 합리주의) 또는 경험주의라는 두 가지 틀이 존재한다. 이성주의에서는 오직 실재하는 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나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만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경험주의에서는 오직 감각 지각 작용들만이 지식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 외에는 모두 과학이라는 용어를 부정하기 때문에 인문과학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세계는 우리의 마음과 외부에 실체 사이에 유기적인 연결과 상응이 가능한 방식으로 창조되어 있다. 창조된 세계는 인간 지식의 외적인 토대이다. 그러나 이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 의식으로부터 자신의 피조물들을 경유하여 우리 마음에 진리의 지식을 전달하시는 분이시다. 

종교의 본질은 과학, 도덕, 예술과 다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종교의 객관적인 측면으로 주님께 대한 경외를 종교의 주관적인 측면으로 제시한다. 신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펼친 계명들이 객관적으로 나타나 있다. 사람은 이 계명들에 대해 경외심과 믿음으로 순종이라는 반응을 보여야 한다. 이는 주관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종교의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 둘로 나뉘어 질 수 없다. 참된 경건은 객관적이며 주관적이며 외적이면서 내적이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문화적인 행위와 산물들의 중심이다. 믿음을 지식이나 도덕과 혼동하는 것만큼이나 종교적 심미적 감정과 혼동하는 것도 실수이다. 종교는 삶 즉 실제이고 예술은 이상 즉 현상이다. 예술은 실제를 변화시킬 수 없으며 우리를 위로하지 못한다. 오직 종교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마음 속에 가장 깊고 가장 민감한 감정들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점에서 참된 종교는 냉랭한 도덕주의나 죽은 지성주의와는 날카롭게 대립한다.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심리학적이거나 사회학적인 용어들에서 종교의 기원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들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발견되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진정으로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만약 종교가 인간의 이기적인 필요를 만족시켜 주는 수단이라면 필요를 만족시켜 줄 다른 대안들이 발생함에 따라 점점 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종교의 전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했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참된 종교가 필요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면 종교는 앞으로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참된 종교는 다른 종교로 대체될 수 없다. 종교는 유일하고 독특하며 인간성에서 지워질 수 없는 부분으로 인간의 전인격적인 영역에 모두 깊이 관계하고 있다.

성경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가 증거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 자신을 위해 계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계시된 것이다. 구약의 예언서들은 토라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갱신이며, 역사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 역사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모두 구약 성경을 권위 있는 성경으로 인정했다. 성경 말씀의 근원은 성부를 알리시고 그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증거하셨으며 그 증거를 인류에게 전달하도록 사도들에게 맡기셨다. 사도들은 성령의 강림 사건 이후 권위를 가진 진리의 증거자가 되었다. 그 중에 특별히 사도 바울이 택함을 받아 계시의 전달자로 쓰임 받게 하셨다. 이러한 사도들의 글을 교회의 초기에서부터 권위 있는 글로 인정을 받았다.

신약 성경이 성립된 것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자연스럽게 보존되던 권위 있는 문서들이 집대성되고 공식화하여 된 것이었다. 정경은 교회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다만 인정한 것 뿐이다. 맨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구약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을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왔다. 교회는 성경의 신적 기원과 권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교리적 진술 뿐 아니라 성경의 실제적인 사용에서도 잘 나타났다.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글이라는 확신은 교회의 보편적인 믿음이었다.

현대 로마카톨릭은 축자영감설이라는 엄격한 개념과 제한적 영감설 사이에서 중간의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개신교도에게는 엄격한 의미로서의 영감설을 붙드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점에서 카톨릭과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개신교도에게 이것이 무너지면 다른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고 성경 모든 부분으로 확장시켰다. 영감과 관련한 극단적인 결론을 통해 성경을 변호하려는 열심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반역과 계시에 대한 비판적인 역사를 고려해 볼 때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단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가치를 현대의 정황 가운데 보호하기 위해 성경이 갖는 영감의 측면을 종교적 윤리적 문제에만 국한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을 종교, 윤리적 영역과 역사적 지리적 영역으로 나누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둘은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과 사도들이 성경을 사용하는 방식에도 맞지 않으므로 배격되어야 한다. 학계의 상황과 달리 교회 내의 상황을 살펴 보면 아직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가르침과 실천을 위한 권위 있는 책으로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 있다. 계시의 권위는 교리의 필수불가결한 기초이며 성경과 고백은 무엇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인가를 결정하는 권위이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영감에 대해 명확하게 정립된 교리를 제공하지 않으며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음에 대한 증언을 제시하고 교리의 형성에 필요한 모든 구성 요소를 제공한다. 우리는 교회가 성경 본문이 자기 스스로 말하기 보다는 성경 본문의 영감과 권위에 대해 사전에 결정된 개념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 그리스도, 구원 등에 대한 선포에 의해 우리가 구속을 받는 만큼 성경이 말하는 바를 믿어야 한다. 성경의 교리는 성경 자체에 대한 성경 자체의 증언에 기반을 둘 수 밖에 없다. 성경적 영감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창조활동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시인, 예술가, 예언가의 영감은 유비적인 진실에 의해 성경이 언급하는 영감을 비추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 영감은 다른 영감과는 달리 일반적인 섭리 사역이 아닌 특별 계시를 통한 구원의 목적을 갖는 사역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성경적 영감을 가장 잘 정의하는 용어는 유기적 영감이다. 하나님 또는 성령이 실제로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정보 전달자이시며 제 1의 저자이시며 글을 쓰는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도구이자 2차 저자이며 서기이다. 교회가 성경의 책들이 거룩하고 정경적이라고 간주하는 이유는 성경의 책들이 오류가 없는 계시를 포함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 하에 쓰여진 것으로 하나님이 저자이며 그러한 상태로 교회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영감이 단지 성경 저자들 안에서 활발하게 솟아 오른 다음 글쓰기로 옮겨진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주장은 성경과 경건 문학 간의 차이점을 소멸시키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셨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동시에 기계적 영감은 2차 저자로서의 성경 저자들의 역할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되지 못한다. 저자의 은사, 개성, 역사적 맥락과의 연계성을 무시하면 안 된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영감을 받은 생각이나 단어와 그렇지 않은 생각이 단어를 구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성경에는 중심이 있고 주변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주변이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원을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영감에 대한 비판적인 반대는 여전히 강하다. 사실 이런 반박과 반대는 늘 있어 왔던 것으로 놀랄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에게 성경 앞에서 겸손해야 할 필요를 강조함이 마땅하다. 성경이 우리를 판단하게 해야지 우리가 성경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내려놓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이 말은 신자가 성경에 대한 모든 질문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자는 모든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투쟁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추상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이며 인간적인 것이다. 계시와 영감에 대한 유기적인 시각은 평범한 인간의 삶과 자연적인 삶이 하나님의 생각에 맞게 섬길 수 있는 모습으로 변화된다는 개념을 제공한다. 기독교는 인간적인 것에 맞서는 종교가 아니라 가장 인간답게 회복하고 갱생시키는 종교이다.

성경은 과학이나 세상에 대한 인간의 지식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성경은 과학이나 학문 영역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권위를 갖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성경은 신학적 목적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달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역사 기록은 우리에게 계시의 역사를 알리는 데 있다.

성경은 가장 높은 것과 거룩한 것들, 영원하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항상 인간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성경은 그러므로 인간을 위한 책이며 마지막 때까지 존재할 것이다. 성경은 늘 새롭게 신선하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신앙

외적 원리인 계시에 대해서 인간 내부의 원리가 응답해야 한다. 계시에 응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원리는 인간의 종교적 성향, 본성적 신 인식 능력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어떤 다른 능력보다도 본성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계시는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오고 그것은 우리에게 반응을 요구할 뿐 승인을 요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계시는 우리로 하여금 믿고 순종할 것을 촉구한다. 문제는 우리의 종교적 능력 또한 죄로 부패했고 구속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계시가 주관적으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다.

우리가 신앙과 그것의 다양한 근거들을 탐구하려면 각각의 타당성과 한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신앙이 지식, 감정, 윤리와 관련된 측면을 각각 역사-변증적 방법, 종교-경험적 방법, 윤리-심리학적 방법이라 부른다.

교회에서 첫번째 신학적 행동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한 변증적 필요성에 때문에 생겨났다. 변증가들은 복음에 대해서는 순교까지 각오한 확신이 있었으면서 동시에 이방 세계에도 많은 선한 것, 참되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동시에 변증가들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다른 위대한 교사들보다 우월하시며 구속과 영생에 과한 소망의 메시지는 오직 기독교 안에서만 유일했다. 그들은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게 큰 복이라 믿었는데 이는 그들의 확신이자 삶 그 자체였다.

중세 스콜라 신학은 신앙에서 출발했으나 후에는 신앙의 진리를 이성의 내용으로 삼으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자연과 초자연, 이성과 신앙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로마 카톨릭은 교회를 성경과 계시를 믿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삼았다. 종교개혁은 로마 교회의 질서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권위와 성령의 사역만을 의지했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자들은 계시의 진리에 대해 자연신학과 역사적 증거들의 교리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이성에 의존하여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지적인 근거 위에 신앙을 세우려고 하면 항상 실패하게 된다. 지적인 제사장에 의해 계시의 타당성에 복종하는 것은 빈약한 확신만을 제공할 뿐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위에 성령의 증거가 임할 때 분명한 확실성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19세기 유럽 지성계는 주관의 자율성을 내건 낭만주의를 산출했다. 관념론은 주관 안에 있는 것으로부터 객관성을 찾고자 했다. 이런 사조 속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은 절대 관념으로 치환된다. 헤겔과 슐라이어마허는 주관과 객관 , 사고와 존재의 조화를 강조했으나 생각과 존재가 서로 상응한다는 주제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런 흐름은 결국 새로운 형태의 영지주의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종교적 합리주의는 어떤 경험도 할 수 없고 어떤 영혼도 살릴 수 없기에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후 많은 신학자들이 기독교 진리의 확실성을 종교적 경험에서 찾고 방향을 틀었다. 신학자 프랑크는 기독교적 확신의 근거를 오직 중생의 경험만이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생의 경험 안에서 인간은 이제 자발적이고도 즉각적으로 신앙의 진리 전체를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경험과 인식론으로부터 내용을 추론해 내기 위해 존재와 앎,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확신을 마구 뒤섞어 버렸다. 신앙의 효과를 신앙의 내용 혹은 근거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기독교의 진리는 궁극적인 근거를 경험에 둘 수 없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역사적 진리는 개인의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윤리-심리학적 방법에서는 기독교란 감정이나 교리 또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겨냥한 종교적 윤리적 힘이다. 칸트에게 있어 이성은 이론적일 뿐 아니라 실천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기 내부에 도덕적 법, 정언 명령을 지니며 우리에게 의무를 부과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도덕적 의무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해야 하며 신앙도 필요한 것이 된다. 그러나 종교는 윤리를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다. 형이상학 없이는 윤리도 없고 양심을 통제하는 절대적 권능 없이는 의무도 있을 수 없다. 기독교 신앙과 상관 없이 먼저 자연신학을 수립하고 이것을 교의학에 선행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종교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고 윤리적 삶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점은 정당하다. 그러나 인간이 위로와 만족을 추구하는 모든 종교가 다 참된 것은 아니다. 가치가 있지만 실재가 아닐 수 있다. 또한 인간이 참된 종교의 필요를 느끼고 있다는 가정은 과장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인간은 복음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계시 밖에 인간은 자신의 필요조차 깨닫지 못한다. 한가지 더 이런 윤리-심리학적 방법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이러한 접근 방법이 신앙과 지식 사이에 심각한 이원론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의 역사적 내용은 종교적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객관성을 가진다.

기독교 신학은 항상 자신의 위치를 믿는 주체 안에 신앙 안에 그리고 믿는 공동체 안에 두었다. 하나님은 단지 성경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교회를 세우고 보존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는 오직 믿음 안에서만 알 수 있다. 신앙은 계시에 대한 종교와 신학에 대한 내적 인식의 원리이다. 구원하는 신앙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또한 신앙이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앙적인 관계의 문제이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복종 안에 있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뢰와 복음 안에서 주어진 약속들에 대한 개인적 전유를 포함한다. 

로마 카톨릭은 신앙을 무엇보다 먼저 지적인 동의로 이해했다. 로마교회가 이렇게 신앙을 예비적인 것으로 본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을 성령의 특별한 은혜로 새롭게 중생한 인격의 행동으로 보았다. 종교개혁은 역사적 신앙과 구원하는 신앙 사이를 원리적으로 구분했다. 구원하는 신앙은 성경에 따른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과 연합하는 것이다. 또한 구원하는 신앙은 확실하고 확고하며 온전하고 확정된 자기 확신을 수반한다. 

우리가 구원하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성령의 내적 증거 덕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로 우리의 의지를 굽혀 우리로 하여금 지성적으로 믿게 하신다. 왜 믿는가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성령의 사역을 통한 사도적 증언인 복음의 선포는 교회를 만들었다. 이 말은 교회가 복음을 참되다고 증언한 것이 아니라 참된 복음이 교회를 산출했다는 뜻이다. 개혁교사들은 그래서 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자기를 스스로 증명했다고 말했다. 신학의 주관적 출발점은 진리에 대한 모든 인식은 만물을 만드신 말씀에 대한 성령의 증거이다. 우리가 성경을 진리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진리인 성경을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진리인 성경을 우리를 진리의 증인이자 선포자로 삼은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회심시키시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내적인 확신을 주신다. 신앙 자체가 성령의 사역이며 우리가 믿는다는 그 사실이 곧 우리 안에 성령의 내주하심과 교통하심의 증거이다. 이 성령의 증거는 외관상 아주 다양한 모습의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로 무효화되지 않는다. 성경과 성령은 스스로를 증거하고 입증하며 심지어 반대자들을 굴복시키신다.

성령의 증거로 개인적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만 교회에게는 신학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회에 신학에 대한 적대감은 오래된 전통으로 단순하고 실천적인 기독교에 대한 선호가 존재해 왔다. 신학에 대한 적대감이 생긴 이유는 신학이 자주 겸손을 잃고 궤변으로 전락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을 무시하면 기독교는 점점 감정과 윤리로 축소되어 버릴 것이다. 신학의 정당성과 타당성은 기독교 신앙 자체의 본질에 기인한다. 신적 계시는 인간과 그 삶의 모든 관계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철학에서부터 여러 가지 개념과 방법론을 가져다 사용해 왔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신학은 신앙과 구별되지만 또한 신학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그 대상에게 다가갈 수 있다. 신학은 신앙의 내용을 반영한다. 신앙은 신학의 세속화를 방지하고 신학은 신앙의 분리주의를 방지한다. 그래서 교회와 신학교는 서로 긴밀하게 연대해야 한다. 

신학은 지성의 희생이 아니라 지성을 온전케 함이다. 신앙은 그리스도인에게 연구함과 생각함을 면제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고 자극한다. 신학은 기본적으로 통일성을 향해 나아간다. 성경의 여러 본문들이 담고 있는 내용들이 담고 있는 전체 진리가 교리로 요약되어 재현될 때 신학은 영예를 얻게 된다. 신학 작업은 또한 겸손을 요구한다. 기독교 신학은 언제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와 함께 한다. 신앙은 경탄으로 옮아가고 지식은 경배로 마치며 그의 고백은 찬송과 감사의 노래가 된다.

기독교적 확신의 원리

바빙크는 신앙의 확신을 아주 중요한 문제로 여겼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강조점과도 같은 것이다. 현대는 신앙의 확신에 대한 회의가 만연한 시대이다. 그러나 바빙크는 구원의 확신이 가능하다는 자신의 신념을 고수했다. 이 확신은 믿음에 부가된 어떤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이다. 신자들은 의심할 수 있지만 믿음은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바빙크는 모든 지식은 믿음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단지 종교적 지식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종교적 지식 뿐 아니라 과학적 지식도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고 그는 보았다. 과학적 탐구의 영역에 있어서는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의심하거나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공리가 존재한다. 그러한 공리가 없다면 과학은 뿌리부터 허물어 질 수 밖에 없다.

다음으로 바빙크는 이성과 증거의 제한된 가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연신학적인 증거나 역사적인 증거들이 무가치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이 절대로 신앙적 확신의 기초가 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믿음이 자신의 생명마저 헌신의 대상을 위해 내어 놓는 자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러한 논증이나 증거들이 진리에 대한 견고한 저항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빙크는 오직 하나님만이 확신을 주신다고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 증거하시며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신다.

첫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셨다. 우리는 계시에 둘러 싸여 있는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과 권능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믿음에 있다. 일단 믿음이 있으면 무엇을 왜 믿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게 된다. 이러한 믿음에 근거한 이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실재에 대한 보다 참된 인식에 나아가게 해 준다. 왜냐하면 실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우리 마음 속을 이어주는 다리를 바빙크는 로고스로 설명하였다. 세상이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었고 우리의 마음 속에도 바로 그 로고스가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확신. 성경의 진리성에 대한 증거는 매우 풍부하다. 그러나 그러한 증거들이 영적으로는 불충분하다. 믿음은 단순히 증거를 귀납적으로 취합해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확신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확신은 항상 더 훌륭한 조사와 연구에 의해 뒤집혀 버릴 수 있다. 종교적 확신은 과학적 확신을 훨씬 앞지른다. 바빙크는 첫째로 성경 계시의 특별성 때문에 증거들이 종교적 확신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성경 계시는 인간의 역사적 경험에 나온 것도 아니고 문학 작품도 아니며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계시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바빙크는 학문적인 연구와 과학적 탐구는 외적인 사실들만 다룰 뿐 핵심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나온 증거들이 확신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보았다. 이 말은 더 나아가서 경험이 종교적 확신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바빙크가 경험의 중요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역사의 경험적 진리들은 이성적인 진리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경험을 낳는 것이 진리이지 경험이 진리를 낳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경험이란 것은 기독교 교리가 인간 영혼에 미친 영향일 뿐이다. 

신자의 영혼을 성경에 묶어 두는 것은 성령의 증거뿐이다.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내적 확신을 줄 수 있는 분은 성령뿐이다. 성령께서 성경에 대해 증거하시는 내적 증거는 신비하다. 어떻게 이러한 확신이 생기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믿음은 복음 그 자체에 의해서 생긴다. 말씀의 전파, 케리그마 자체가 확신하게 하는 능력을 전한다. 우리 믿음의 근거는 성경이다. 

우리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성경 자신의 능력에 의해 확신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 확신은 또한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설명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셋째, 구원의 확신. 바빙크에게 기독교인의 확신은 진리의 확신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구원의 확신까지 필요하다. 의심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다. 의심은 속히 나와야 할 대상이며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바빙크에 의하면 믿음은 그 자체로 확신이다. 믿는 자는 의심할 수 있지만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믿음은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 그리고 그 믿음의 열매는 희락과 화평이다. 확신이 없는 곳에서는 진정한 기쁨, 평화, 인내 또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있을 수 없다. 어떤 진지한 전도 활동도 있을 수 없다. 바울과 루터를 거쳐 본 회퍼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확신으로 일관되어져 왔던 것이다.

신앙고백, 도그마, 그리고 교회의 삶

도그마에 대한 이해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뉘어져 왔다. 하나는 로마 카톨릭의 입장으로 도그마를 매우 엄격하게 법적인 명제적인 진술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개신교의 입장으로 신앙 표현에 있어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배제하려는 경향이다. 그 결과 카톨릭에서는 도그마에서 자발적인 고백성을 박탈하였고 개신교회에서는 도그마를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족쇄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러나 오늘 현장의 교회는 도그마의 영향력 아래에서 존립하고 있다. 교회의 정체성은 신앙 고백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신앙 고백이 곧 도그마를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그마가 신학과 교회와 삶에 어떤 위상과 역할을 하고 있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앙 고백서 이전 단계의 신앙고백과 성경

원시적인 형태의 신앙고백은 세례나 예배 혹은 박해나 이단들에게 대항하는 과정 속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영지주의 이단에 맞서 예수의 인성을 고백한다든지 박해 시기에 예수는 주님이시라는 고백을 한다든지 하는 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백은 크게 시인함과 믿음이라는 두 차원을 갖는다 . 시인함으로 표현되는 기독교 신앙의 고백은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는 순전히 이론적인 언급만을 하는 것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헌신과 위탁이 포함된다. 또한 이것은 책임을 내포한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진정한 신앙 고백은 성령론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 계시는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사역을 통해 신앙이 발생한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원 사역과 깊숙이 관련을 맺는다. 이와 관련된 전형적인 예가 사도 신경이라고 할 수 있다. 

슐링크에 따르면 신약성경에서 기독교를 정의할 때 다섯 가지 기본 요소가 등장하는데 기도, 송영, 증거, 교리와 신앙 고백이 그것이다. 이후 전개된 신앙고백서들에게서 대개 이 다섯 가지 요소가 발견된다. 이 요소들은 각각 2인칭과 3인칭을 대상으로 하는 원형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시인함과 믿음을 가진 신앙 고백은 법적인 성격과 공동체를 통합하는 성경을 함께 가진다. 신앙 고백을 준거점으로 해서 이단을 제거하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유지하는 건가 된다.

교의의 이해와 관련된 교리사적 논점

도그마는 견해와 결정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 도그마는 특정 그룹의 이론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후에는 다른 용어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도그마는 결정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면서 언제 어디서나 항상 믿어온 것이라는 의미로 도입되었다. 그 후 종교 개혁기에 도그마는 공적이고 합법적인 교회에 의해 교훈된 신앙의 진리라는 의미로 파악되기 시작하였고 법조문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도그마를 견해로만 보면 너무 지적으로 흐를 경향이 있고 결정으로만 보면 너무 법적으로 흐를 경향이 있다. 견해와 결정을 균형 있게 강조하는 길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즉 기쁨과 자발성에 나온 반응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해 주는 고백의 측면을 모두 고려한 도그마의 재정의가 필요하다.

신앙고백과 관련된 종교개혁신학의 강조점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이 자신의 방식으로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음을 재발견했으며 도시에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해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의 경험에 따르면 은총의 메시지가 성경에 명료하게 계시되었는데 이를 외적인 명료성이 하고, 성령께서 복음의 진리를 신자로 하여금 믿게 만든다는 사실을 내적인 명료성이라고 한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형성된 교회의 도그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반응을 내포하는 형태로 진술될 수 밖에 없다. 교의적인 진술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고백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성경의 외적이고 내적인 명료성이라는 속성이 신앙 고백이 담지해야 할 고백성의 성경적인 의미를 재발견하도록 이끌었다. 이런 가정을 통해 초대교회가 신앙고백을 정의했던 중요한 측면들이 생생히 재현되고 회복되었다. 신앙고백은 상이한 문화적 상황 속에서 성경의 내외적인 명료성이 제기하는 궁극적인 신앙의 관심사에 대한 교회의 헌신과 책임이 동반된 인격적인 반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앙고백서 혹은 도그마와 교회의 삶과의 관계

진리와 약속과 성취라는 내용적 속성을 가진 성경의 명료성의 내외적인 발현의 결과물이 바로 교회라는 공동체이다. 성경의 내외적인 명료성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헌신과 고백적 책임을 동반하는 신앙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자연스럽게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교회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과 행위로 표현하게 된다. 교회가 표현하는 신앙적인 명제는 성경의 명료성에서 발견한 세 차원에 상응하는 지식, 신뢰, 순종의 세 차원을 반영한다.

이 세 차원을 신앙 고백서는 올바른 신학, 올바른 열정, 올바른 실천으로 구성하게 되는데 하이델베르크 신앙고육서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과도 각각 대응되며, 이를 현대적 언어로 옮긴다면 지성과 영성과 도덕성이 반영된 균형 잡힌 기독교의 고백이 된다. 루이스 벌코프는 올바른 개혁 교회의 표지로 말씀의 참된 선포, 성례의 올바른 시행, 권징의 신실한 시행을 내세웠는데 이 또한 신앙 고백의 세 차원과 깊숙이 관련을 맺고 있다. 

신앙고백적 진술은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다. 신앙 고백은 항상 시간과 장소의 제약과 연루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신앙 고백은 다시 작성되어 고백되어질 필요가 있다. 이때 물론 성경의 명료성에 근거한 고백적이고 송영적인 속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 작업은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에 대한 찬양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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